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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황인숙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저 실컷 놀아서 목이 쉰 것 같은
개구쟁이 뱃사공 로드 스튜어트가
로드 데이빗 스튜어트가
하, 쉰 살이 넘었다니!
위안이 되는군.
뭔지 몰라도
자기도 모르면서
너는 모른다고 외치는
Hall and Oates도
그쯤 됐을 거야, 아마.

이 년 후면 이 몸도
그토록 능멸했던 연세가 되시는구나.
(쌤통이라고?)
아, 새 신을 신든 헌 신을 신든
팔짝 뛰고 싶구나.

여기, 변변히 젊어본 적 없는 자,
고이 늙지 못하다.

- ‘거울들’, 황인숙


나는 어둠 속에서
춤출 수도 있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노래할 수도, 무엇을 먹을 수도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걸을 수도 있고 양치질을 할 수도 있고
세수도, 얼굴 마사지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나는
거울을 볼 수 없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두렵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엇을 보게 되는 것.

어둠 속에서.
가령 어둠보다 더 캄캄한 얼굴을.

- ‘어둠 속에서’, 황인숙


언제가 진짜 죽음이 내게로 올 때
그는 내게서 조금도 신선함을 맛보지 못하리라.
빌어먹을
가짜 죽음들!
퍽이나도 집적거려놓았군.
그는 나를
맛없게 삼키리라

그러나 언젠가
진짜
삶이 내게로 올 때,
진짜 삶이
내게로 온다면,
진짜, 삶이, 내게로 온다면!
모든 가짜
죽음, 가짜 삶의 짓무른 흔적들
말갛게 씻기리라.

- ‘언젠가 진짜’, 황인숙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 ‘비’, 황인숙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 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황인숙


아아아, 니! 아니다!
이건 삶이 아니야.

아, 날것이여.
날것, 날것, 날것들이여.
나를 두들겨, 깨뜨려,
내 안의 날것을, 아직 그런 것이 있다면,
깨워다오.
이 허위인 삶을
쪼고, 쪼고, 물어뜯어다오.

그런데, 어디 있는가, 날것들이여.
내 뭉실한 삶이
거친 이를 가진 입이 되어
쩍 벌어진다.
질겅질겅 씹고 싶은 날것들이여.
꿀꺽 삼키고 싶은 날것들이여.
꿀꺽꿀꺽 삼켜 구토하고
배 앓고 싶은 날것들이여.

열이 활활 나는 삶의 손바닥으로
나를 후려쳐다오, 날것들!

- ‘열이 활활 나는 삶의 손바닥으로’, 황인숙


이 햇빛 속에 이제
그녀는 없다.
햇빛보다 훨씬 강한 것이
그녀를 데려갔다.

이제 더 이상 더 그녀를 저버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너무 저버려서
그녀는 모든 곳에 있고
어디에도 없다.

저를 용서하세요.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당신을 이해할 생각도 없었던 것들,
무례하고 매정한 것들을.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녀는 무엇을 좋아했을까?
그녀에게 쥐어드려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 나도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없었다.
마음조차도. 그녀에겐 마음이 있었는데,

그녀가 빈손을 맥없이 뻗어
죽음은 그녀의 손을 꼭 쥘 수 있었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은 텅 빈 손으로
당신은 그 손을 꼬옥 쥐었다.

안녕히, 안녕히, 안녕히,
가세요.

- ‘안녕히,’, 황인숙


1

만약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쓰리고 아플 때면)
내 영혼은 분명
금이 가 있을 것이다.

격통 속에서만 나는 내 영혼을 느낀다.
금이 간 영혼을.

2

내가 태어난 하늘엔 태양이 없는데
나는 하염없이 햇빛 속에 뒹굴기를 원한다.
태양의 인간이 아니면서
그 맛을 알고, 탐하다;
이것이 망조다.

3

하느님, 우리를 힘들게 마옵소서.
정 힘들게 해야 되겠거든
그 힘듦을 감당할
힘을 주옵소서.

- ‘기도’, 황인숙


그래,
어떤 이는 자기의 병을 짊어지고
자기의 가난을 짊어지고, 악행을 짊어지고
자기의 비굴을 짊어지고 꿋꿋이
그렇게,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
자기만의 것을
짊어지고, 쌍지팡이 짚고, 거느리고.

- ‘독자적인 삶’, 황인숙


북풍이 빈약한 벽을
휘휘 감아준다
먼지와 차가운 습기의 휘장이
유리창을 가린다
개들이 보초처럼 짖는다

어둠이
푹신하게
깔린다

알아?
네가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게
덜 외롭다.

- ‘일요일의 노래’, 황인숙
2019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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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1 Corinthians 13


말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만 있을 뿐 재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느꼈다.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p. 285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지음
열린책들 펴냄

읽고있어요
2023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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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이렇게 은밀한 일을 벌이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갑자기 죽어 버리면 그런 비밀이 전부 까발려져 마치 살아있던 것 자체가 커다란 음모였던 양 보이게 되는 걸까. - ‘음모’ - p. 171

인내상자

미야베 미유키 지음
북스피어 펴냄

2023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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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은 단지 말들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 베스트셀러, 히트작, 영원불멸의 클래식 따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아이디어, 논평, 꿈, 일상, 작은 이야기, 소소한 논쟁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슬프게 스치고 사라졌으면 했다. - p. 71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약속과 의무라는 규약 너머의 행동이 필요하다. 이것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폭력과 파괴, 선택과 충돌이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극복할 수 있을까. - p. 115

…스크롤!

정지돈 (지은이) 지음
민음사 펴냄

2023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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