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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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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마음산책 펴냄

저지대를 읽어서 단편집을 찾아 읽었다. 저자의 출생적 특징이 작품의 기본 토대가 되는듯 하다. 인도계 미국인의 정체성이 곳곳에서 이어진다. 저지대가 그래서 우리의 까레스키나 재일한국인들의 모습과 겹쳐지는데 이 단편집의 주인공들도 그러하다. 첫단편집이라는데 장편소설보다는 집중도가 내겐 조금 떨어진다. 전반적인 주제의 동일성과 페미니즘적 세계관이 느껴졌다. 소통의 문제에 대한 표제작 '축복받은 집' '섹시' 가 인상적이었다. 이 단편들을 써 내는 문학적 감각도 깊이 있다. 그래도 장편이 더 흐름이 좋긴 하다.
👍 고민이 있을 때 추천!
2020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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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분량이 짧은 소설임에도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가다듬게 하는 소설이다.
소설의 구조인 설명하기와 보여주기 중 보여주기로 쓰인 이 소설은 그래서 읽으면서 자꾸 질문을 던지게끔 했다. 해설되지 않고, 상황과 분위기, 인물들의 감정을 그저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해석하게 한다. 때론 읽는 이의 해석과 시선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질 만한 부분도 있고, 무엇을 내포한 것인지 찾아보아야 하는 곳도 있다.
설명하기의 문장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탓일까. 분량이 짧은데도, 서사의 밀도가 길고 큰 덩어리의 느낌이었다.

맡겨진 소녀의 화자는 이름 없는 어린 여자아이로, 이 소설에서 소녀가 갖는 의미를 주시하게 한다. 일견 이야기는 빨간 머리 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듯 흘러가지만, 돌봄이라는 키워드와 부모 이외의 다른 이들의 애정이 존재하는 유년 시절이 성장 후에 어떤 내면의 힘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른이 된 후 돌아볼 유년 시절의 따뜻한 대상이나 경험, 기억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을 주지 않을까.

부모에 의해 먼 친척뻘인 킨셀라 부부에게 여름방학 무렵에 맡겨져 학기가 시작될 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무척 단순하다. 1980년대 아일랜드라는 공간이 흘러가듯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나고, 소녀의 아빠가 도박으로 농사꾼으로서는 중요한 소를 넘기게 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몰리고 엄마는 다섯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임신한 탓에 돌봄과 식비를 덜기 위해서 한시적이지만 소녀를 맡기는 것이다.
아빠라는 인물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남성으로 묘사된다. 도박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킨셀라 부부에 대한 무례함, 아이에 대한 무관심이 소설에서 드러난다.
엄마는 아이에 대한 애정과 킨셀라 부부에 대한 고마움을 알지만, 현실을 변화시킬 만큼의 주체적 인물은 아니다.
킨셀라 부부는 소녀를 데려와 대안가족으로서 애정과 경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소녀가 침대 매트리스에 실수를 한 것을, 자신들의 잘못인 양하면서 소녀를 배려하는 행동은 뭉클하기도 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의 모습을 새삼 보게 했다.
소녀를 재웠던 방이, 실은 부부의 죽은 아들의 방이었다는 걸 방을 설명하는 문장 속에 암시되어 있는 걸 아들에 대한 문장에서 알게 되었다. 문장 중간중간에 복선이 있었던 셈인데, 흐르듯이 읽다가 눈치채고 다시 그 문장을 찾아 읽는 추리 소설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2장 벽지에 색색의 기차가 달리고 있다. 기찻길은 없지만 군데군데 작은 남자애가 멀찍이 떨어져 서서 손을 흔들고 있다. 행복해 보이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 벽지에 그려진 남자애의 모습들이 하나같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1장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소녀가 맡겨지면서 느낀 심리 상태를 표현한 이 문장에서, 어린아이지만 이른바 눈치와 분위기를 파악하게 되는 순간을 만난다. 불안하면서도 불안하지 않은 척, 의연한 척해야 하는 이중의 상태.

아빠가 아이를 맡기고 떠나는 상황에 대한 문장에서도 무례와 무심, 삶에 지친 이의 무연함, 뻔뻔함 같은 모습이 보인다. 독서모임에서 이 아빠에 대한 지탄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시대, 그 시대적 감수성으로 볼 때 우리 세대의 아빠들 역시 비슷하거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경제적, 사회적 계층에서 비롯되는 격차가 삶을 꾸리는 태도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이 소환되기도 했다.

아빠는 왜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떠났을까?
“세상에, 아빠가 네 짐도 안 내려주고 가 버렸구나!”

1장은 아빠가 소녀를 킨셀라 부부에게 맡기고 떠나는 이야기로 끝난다.

2장에서는 킨셀라 부부와 함께 지내기 시작하는 소녀의 일상이 시작된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이 장면은 목욕 후 집과 이곳에서의 다른 경험에 대한, 좀 더 아늑하고 세심한 돌봄을 받는 상황에 대한 인식 후의 마음을 표현한 문장이다.
아늑한 목욕의 느낌을 처음 느낀 소녀의 마음을 이런 문장으로 전하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그런 유의 경험을 했던 기억을 떠오르게 하면서 감정 상태를 동시에 생각해 보게 한다.

이제 태양이 기울어서 일렁이는 물결에 우리가 어떻게 비치는지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진다.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장에서 가장 의미 있게 읽힌 문장이다. 낯선 집에서의 일상에 소녀가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에 동화되어 버린다.

3장의 첫 문장은 소녀의 심리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서사가 진행되면서 이중의 묘사라는 걸 알았다. 실제로 소녀가 밤 실수를 한 것과 심리상태가 오버랩 된 것이다. 이런 문장인 까닭에 음미해야 맛을 인식하는 것과 같이, 읽게 된다.
3장에서 뉴스에 나왔는데 단식 투쟁이라는 문장으로 당대의 사회를 짐작게 하는 배경 설명이 읽힌다.

4장은 편안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의 만족감과 동시에 불안감을 함께 느끼는 소녀의 마음이 드러난다.
킨셀라 부부가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과 카드놀이를 하면서 보내는 저녁 풍경, 학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방문한 이들을 환대를 하고 함께 저녁을 보내는 것은 소녀가 자신의 집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5장은 이 소설의 구조 중 절정 단계라고 생각된다.
미사에 가기 위해 킨셀라 아주머니와 함께 옷을 사러 가게 된다. 옷을 사러 가기 위해서 나누는 대화와 문장들을 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전해진다.

거리로 나오자 강렬한 햇빛이 다시 느껴진다. 눈이 멀 것 같다.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 햇빛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구름이 껴서 제대로 좀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아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빤히 보면서 누구냐고 묻는다. 그중 한 사람은 유아차에 갓난아기를 태우고 있다. 킨셀라 아주머니가 몸을 숙이고 다정하게 속삭이지만 아기는 침을 흘리더니 울기 시작한다.
“낯을 가려서요.” 애 엄마가 말한다.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는 눈이 송곳 같은 여자도 만난다. 그녀는 내가 누구 아이냐고, 어느 집 아이냐고 묻는다. 대답을 듣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 그래도 말동무가 되잖아요.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는 거예요.”

소녀가 집으로 돌아온 뒤 마을 사람의 죽음으로 매장의 도움을 요청받은 킨셀라 부부는 소녀를 데리고 초상집엘 간다. 그곳에서 소녀를 잠시 맡아주겠다던 마을의 한 사람인 이웃 여자는 소녀와 단둘이 되었을 때, 무례한 질문들을 거침없이 한다. 이 질문에서 소녀의 방이 킨셀라 부부 아들의 방이었다는 거, 부부가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의 삶을 사는 걸 보여준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개마저도 선뜻 죽이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이웃 여자의 말을 통해서는 부부의 성정을 알 수 있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소녀와 킨셀라 아저씨의 바닷가 밤 산책에서 나눈 대화 역시 소녀를 배려하는 어른다움이 전해진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말처럼 들렸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6장에서는 이제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약간 후루룩거리며 먹는다는 문장에서는 소녀가 느끼는 친밀함의 무게감이 전해진다.
엄마로부터 온 편지에, 남동생의 출산과 개학으로 주말에 소녀를 데려다 달라는 내용을 듣게 된다.
소녀는 울음을 참으며 스웨터 도안을 선택하고,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소녀에게 정성을 다하는 킨셀라 부부의 마음이 보인다.

7장에서 소녀가 킨셀라 아주머니에게 차 끓일 물을 우물에서 긷다가 빠지게 된다.

8장은 소녀가 우물에서의 사건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정이 미루어지다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데려다주는 차 속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소녀의 아빠가 도박으로 소를 잃게 되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된 상황을 킨셀라 부부가 알게 된다.
소녀의 기침으로 소녀의 아빠가 킨셀라 부부에게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며 안하무인격으로 질책한다. 무안해진 킨셀라 부부와 미안한 소녀의 엄마는 배웅을 서두른다.
이 장에서는 소녀를 대하는 두 어른들의 태도나 말들을 통해서 누가 더 소녀에게 좋은 보호자로서 기억이 될까 생각해 보게 된다.
독서 모임에서는 소녀가 엄마에게 우물 사건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속상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각각의 입장에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우물 사건은 소녀의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할 일이라고 느낀다. 엄마 입장에서 서운할 수 있지만, 소녀에게 있어서 우물 사건으로 킨셀라 부부와의 관계와 태도의 변화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저씨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그 앞에 도착하자 대문이 활짝 열리고 아저씨의 품에 부딪친다. 아저씨가 팔로 나를 안아 든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나를 꼭 끌어안는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이 느껴지고 숨이 헐떡거리더니 심장과 호흡이 제각각 다르게 차분해진다. 어느 순간, 시간이 한참 지난 것만 같은데, 나무 사이로 느닷없는 돌풍이 불어 우리에게 크고 뚱뚱한 빗방울 떨어뜨린다. 눈을 감으니 아저씨가 느껴진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중적인 의미로 읽힌다. 소녀에게 진짜 아빠는 누구였을지는 이 문장에서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다산책방 펴냄

읽었어요
4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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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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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건의 두 번째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첫 작품 이후 10년 만의 발표된 소설이라고 한다.
한국에 번역된 책은 2권이고 총 4권의 책을 출간하였다고 한다. 과작임에도 출간하는 작품마다 적은 분량에도 밀도가 높다는 평을 받는다.

이 작품은 ‘펄롱’이라는 남자의 내면세계가 자신의 출생과 성장, 결혼, 아이들의 출생과 보육에 이른 중년에,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세탁소의 소녀들과의 만남과 목격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그렸다. 펄롱이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지만, 이 소설의 중심은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어났던 여성에 대한 학대와 사회적 묵인에 대한 고발과 일침이다. ‘덧붙이는 말’편에 아일랜드 사회에서 일었던 실제 막달레나 세탁소의 실화를 소개하면서 등장인물이 실제 인물이 아님을 전제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그래서 여성들의 학대와 사회의 은폐와 인권 유린에 대한 고발을 문학이 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의 영화 ‘도가니’ 역시 공지영의 소설로 발표되고, 영화화되면서 사회적 파장과 재조명, 수사가 진행되었던 것처럼.

좋은 작품은 진술이 아닌 암시라는 존 맥가헌이라는 소설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번역가에게 조언을 주는 키건의 이 말속에서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의 정의를 들었다.
「맡겨진 소녀」를 읽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소설 역시 이중적인 암시와 문장으로 후루룩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작가의 의도처럼 한 번 이상은 읽어야 들어오는 문단과 문장의 흐름이 있었고, 처음 읽을 때 느껴지지 않던 의미와 은유들이 보이곤 했다. 그런 까닭에 무언가 사건이 일어날 듯한 긴장감과 더불어 펄롱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자신의 출생과 성장 속에서는 인식하지 못했던 감정이나 진실과 사실을 세탁소의 소녀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모습과 생활을 목격함으로써 다시 깨닫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펄롱이 마흔에 이르러서 느끼는 안온한 듯한 일상에서 느끼는 의구심은 이른바 중년에 드는 삶의 의문이 아니었을까. 잘 사는 듯하지만, 무언가 삶의 다른 의미도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음에 드는 감정들.
펄롱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그런 감정들에 대한 전이가 일어난다. 어려운 시절, 굶지 않고 아내와 다섯 딸을 데리고 춥지 않게 지역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출생과 성장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던져지는 서사를 읽다 보면 그가 느끼는 삶에 대한 어떤 공허감에 대한 이해가 된다. 아일린과 밤중에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는 아일린의 입장과 생각이 아마도 보통의 엄마들의 모습이 아닐까. 내 아이를 건사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려지지 않고 나의 가족들이 힘들지 않은 것이 우선인 삶. 그런 아일린의 모습은 나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독서모임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엄마로서는 충분히 그러할 수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펄롱은 뭔지 모를 마음의 불편함을 평생을 알지 못했던 생부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순간 알게 느끼게 된다고 생각된다. 어머니의 이른 죽음과 미시즈의 돌봄, 네드의 표나지 않지만 항상 곁에서 함께 있었던 삶의 순간들을 재인식하게 되는 순간에 이르러, 세탁소의 소녀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일 수 있는 그 소녀들과 자신의 어머니를 돌봐주었던 미시즈 윌슨 덕에 지금의 자신과 자신의 가정이 존재할 수 있음을.
개인적으로 네드의 태도가 알쏭달쏭했다.
평생을 곁에서 자신의 아들을 지켜보면서도 한 번도 생부라는 걸 밝히지 않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지점에서는 펄롱에게 정말 그것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다만 소설에서 네드가 펄롱의 생부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을 거라는 위안을 주는 대화에서 아버지로서 더 좋은 환경을 주고 싶어 했던 마음은 충분히 느껴졌다.

6장에서 크리스마스 미사를 보면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에 대해 펄롱이 스스로 인식하게 되는 되면서 앞으로 그의 행보에 어떤 변화가 생길 거라는 암시가 느껴졌다.

7장 120, 121쪽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7장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단락은 펄롱이 자신의 두려움과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집으로 향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의 대한 두려움은 분명 있지만, 그것이 두려움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덮어버리는 결말은 이른바 열린 결말이다. 현실에서 펄롱은 안온함과는 결별하고 아일린과의 관계가 삐걱거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존재,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모른척하지 않고 나아가나는 펄롱의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가르치지 않고 그저 보여주기만 할 뿐인데,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고, 소설만이 갖는 상상력의 힘을, 만일 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해 주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다산책방 펴냄

읽었어요
4일 전
1
이주연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주연

@yijuyeonxm0c

출간 이후 작가들에게 입소문이 나서, 작가들이 추천하는 책으로 알게 된 책이다.
등단하지 않았고, 첫 책임에도 불구하고 글과 문장의 밀도에 많은 칭송의 말들이 들린다. 읽으면서 시선과 감성의 격이 시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탄사가 나오는 감성이 녹아든 문장과 표현들, 사색을 옮겨놓은 말들의 장들이 불쑥 들어온다.
낭독하기 좋고, 에피소드와 연관된 인용 시들의 단문들이 감성 문장들로 빛을 발한다.
작가의 도서관 북토크 영상을 보면서 하워드의 다중지능이론 중 감성지능이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습작을 하지 않았다고, 느낀 경험에 대한 감정을 글로 썼다는 말에서는 타고난 문학성이라고 해야 하나 선망의 시선이 갔다.
담백한듯하지만 또 담대한 글들은 아직은 높은(늙은) 연배가 아님에도 그 감성과 사유의 깊이에서는 나이라는 게 큰 의미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이 책의 작가의 글에서 마주친다.

행복을 믿으세요?편의 마음의 격이라는 어휘가 참 시인다운 언어의 향을 주는구나 싶다.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는 긍정에 대한 한 보 더 깊은 헤아림이 느껴졌다. 나는 저런 긍정의 사유를 해 본 적이 있었던가. 담백한데 또 담대한 문장과 사람의 격이 전해지다고 할까.

과일이 둥근 것은 편에서는 외지인들끼리 혼자만 느낀 정서적 친밀감의 느낌을 엿본 느낌인데, 그 시선과 생각들이 따듯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일반적으로 타지에서 이성이고, 연배가 더 많다면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이나 경계심의 추가 더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작가의 시선은 익명성의 거리감에서 오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구석의 목소리라는 문장이 시인의 문장으로 들어온다.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편은 늙음과 젊음에 대한 대비된 에피소드인듯하지만, ‘노인에게는 멈추는 힘이, 나에게는 나아가는 힘이 필요하다.’ 라는 문장에서는 아직은 중반쯤을 살아가고 있는 이의 다짐과 응시가 전해진다. 다소 슬픈 정서가 느껴지지만, 노년과 중년 사이에 삶의 가치관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곰곰이 되새겨 보게 하는 문장이다. 나는 작가가 말한 그 중년의 삶을 살고 있는데 작가의 말처럼 일흔, 여든의 나이를 통과한 노인의 삶에 대한 경외감 앞에서는 잊고 있던 삶의 지속성과 종결성을 가늠해 보게 된다.

영원 속의 하루 편은 영화 <영원과 하루>를 보고 느낀 감상들인데, 영화의 밀도와 작가의 사유의 밀도가 묵직하다. ‘사람은 매일 오늘을 잃고, 영원은 얻지 못한다.’ ‘내가 혼자라고 해도, 나의 시간에 동반하는 당신의 시간이 있다. 우리는 같은 영원 속에 산다.’ 이 두 문장이 영화와 작가의 사유를 한데 엮어서 풀어내어 나와 당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환기가 들어온다.

잘 걷고 잘 넘어져요 편은 독서 모임에서 많은 공감을 받은 에피소드였다. 걷다가 다쳐서 병원엘 다니게 되고 치료를 하는 동안의 불안감과 의사와의 처방은 일반적인 의사들의 시선으로 대하는 일화였다. 그런데 다른 곳, 한의원에서는 한의사의 처방과 대화가 같은 상황에서의 다른 시선과 환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위로가 느껴지고, 제대로 걷기와 일상생활에 안착하기까지의 2여 년의 시간에 대한 소회를 길지 않은 문장 속에서도 어떤 마음이었을지 전해지는 까닭에, 각자의 경험에 기댄 공감과 의료인들과의 만남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구나 하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국경을 넘는 일 편은 마임배우 마르소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작가의 사유가 어떻게 번져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어떻게 해도 끝과 죽음을 먼저 고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늘 속에 몸을 둔 채로 볕을 보는 사람, 내 몫의 볕이 있음을 아는 사람, 볕을 벗어나서도 온기를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르소의 삶의 비극과 그 비극 속에서도 연약한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선함을 끝까지 실행하는 참된 인간의 정점을 본다. 그리고 이런 문장으로 발화된 작가의 문장은 계속 읊조리게 한다.

마지막 편인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부치지 않은 편지)는 성소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의미에 대한 사유가 실렸다.
하지만 후회를 간직하고도 나아가야 한다는 걸 지금은 근근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잃고 나서도, 실패하고 나서도, 다시 꿈을 꾸어야 살 수 있다는 걸요. 성소란 운명처럼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운명을 지키려는 인간의 능동적인 의지이기도 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요.
종교적 입장의 이야기이지만, 특정 종교를 넘어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또다시 꿈을, 다른 꿈을 꾸는 모습과 의지를 표현한 문장이 깊게 들어온다.

젊은 여자 소로우의 에세이라고 나름 정의해 본다. 시를 인용하고, 경험을 통해서 빗어낸 사유의 문장들이 소곤소곤 말하지만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는 에세이다.

시와 산책

한정원 지음
시간의흐름 펴냄

읽었어요
3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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