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란 고민에 심취하였다. 지금도. 존경하고 애정하는 신형철 작가님의 추천에 십년전 책을 중고서점에서 데려왔다.
책을 읽고 나서 나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얻은 것은 아니다. 다만 분인주의라는 시점이 제법 흥미로웠으며 받아들임에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나도 그러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었던 참이었어서. 나를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님과 친구, 연인과의 대화. 감동받은 책과 영화들. 여행에서 만난 풍경. 타자에게서 받은 것들이 나를 이룬다. 나는 너희들의 총합체야. 내가 사랑하는 너는 어떨까. 너또한 네가 만난 타자들로서 너를 이룬다. 그런 명칭없는 생각에 분인이라는 단어를 지정하고 설명한 책이 이 책이었다.
여전히 그것만이 나라고 말하기엔 석연치 않지만 그것이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의 세계가 붕괴한다. AI로 대표되는 기술 변혁 여파가 국제정세부터 경제, 정치를 실시간으로 바꿔낸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내부모순과 외부도전에 맞닥뜨려 더는 과거의 역할을 감당치 못한다. 변화를 반강제로 껴안은 우리 삶이라고 안온할 수 없다.
그나마의 주도권은 아직 미국에 있다. 제 나름 시대와 세계를 성실히 공부한 저자가 미국의 플레이어들, 틸, 머스크, 카프, 밴스에 빙의해 흐름을 더듬는다. 미래의 밑그림을 그리고, 제가 바라는 세계로 세상을 인도하려는 이들의 구상을 넘겨짚는다. 진의에 닿으려는 발버둥이 영 어설프긴 하지만 열의와 자신감 만큼은 분명하니 읽는 재미가 있다.
읽기를 독촉한 친구가 말하기를 우리에게도 주어진 틀을 넘어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이 긴요하다고, 한중일을 아우를 수 있는 세계관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온통 시시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에도 나눌 만한 이야기는 있을 것이다.
미술 교사 니키는 선천적으로 ‘소아성애증’을 지니고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또래 아이에게만 끌리고, 상대가 성장하면 애정이 사라지는 자신의 성향을 자각한 그는 결코 가해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욕망을 철저히 억누른 채 살아간다. 규범이 엄격한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해 스스로를 통제하고, ‘가지조’라는 필명으로 성인만화를 그리며 억눌린 욕망을 픽션 속에 봉인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성향을 지닌 이들이 현실에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를 매일 기도하며 위태로운 균형 속에서 살아간다.
한편 고등학생 고이치는 발달장애로 인해 또래와 다른 사고와 행동을 보이며 따돌림을 당한다. ‘보통’이 되기 위해 애쓰지만 번번이 실패하던 그는 우연히 니키의 비밀을 알게 되고, 이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 궁지에 몰린 니키는 결국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백하고, 평생 욕망을 억누르며 ‘보통’으로 살기 위해 버텨온 시간을 털어놓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숨기고 싶었던 부분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 이 소설의 소재를 접했을 때 솔직히 망설였다. ‘소아성애’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강한 거부감과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니키는 욕망을 실행하려는 인물이 아니라, 그것을 평생 끌어안고 통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 설정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분명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영역과 맞닿아 있는데, 동시에 그는 누구보다 자신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고이치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저 평범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자꾸만 밀려난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닮아 있다.
이 책은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불편했고, 자주 멈췄고, 몇 번은 덮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간에 멈추면서도 계속 읽게 됐다. 이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의미 있었냐고 묻는다면,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어린아이에게 나쁜 짓을 하는 괴물인 나는 벽장 속에 갇혀있어.
내가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사는 한, 놈은 절대 안 나와.”
허락되지 않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 미술 교사, 니키
“친구가 없는 건 괜찮았는데, 이상하다는 말은 싫었어요.
그 이유를 몰라 정말 불안했죠.”
남들과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싶은 고등학생, 고이치
📚 "우리는 지금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아기 걸음마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진일보임에는 틀림없어."
"그렇게 말하기는 쉽죠. 기독교를 믿는 어떤 판사들, 어떤 변호사들도 이교도적인 배심원을 꺾을 순 없어요. 제가 자라는대로-" 오빠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습니다.
"그게 바로 네가 네 아빠의 뒤를 이어 해야 할 일이야."
(397쪽)
📚 아빠의 말이 정말 옳았습니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래들리 아저씨네 현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5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