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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빈부 리포트 (절대 빈곤층과 상위 1%, 두 국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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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외 3명

한울(한울아카데미)

서울경제 골프먼슬리 Golf Monthly 20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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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신문

서울경제신문(잡지)

재계 파워그룹 58 1 (누가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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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산업부

나남출판

케이팝의 역사, 100번의 웨이브 (케이팝 100대 명곡 리뷰(1992~2020))

케이팝의 역사, 100번의 웨이브 (케이팝 100대 명곡 리뷰(1992~2020))

최지선

안온북스

해방후 한국전쟁기간 서울신문 (전4책) 1950.10.4 ~ 1953.12.31

해방후 한국전쟁기간 서울신문 (전4책) 1950.10.4 ~ 1953.12.31

알라딘

성지학사

재계 파워그룹 58 2 - 누가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가

재계 파워그룹 58 2 - 누가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가

서울신문 산업부

나남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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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goldstarsky
<마이니치신문> '간병 가족' 기획보도를 그대로 따라한 <서울신문> 탐사보도. 접촉이 어려운 때문인지, 책 가운데 생생한 이야기가 충분히 담겨 있진 못하다. 그럼에도 담은 사례가 전하는 경향성만큼은 선명하고 뚜렷하다. 개인과 가정의 붕괴 가운데 사회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단 것, 고립되고 피로가 누적된 이들이 마침내 극단적 선택에 이른단 것이 하나하나 그렇다. 경향과 그 원인이 나왔으나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단 건 참담한 일이다. 한국의 오늘이 꼭 그러하다.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우리 사회가 보듬어야 할 간병 가족들의 이야기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우리 사회가 보듬어야 할 간병 가족들의 이야기

유영규 외 4명
루아크
6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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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빈

@honeybee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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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언어, 권력 등 다양한 현대 사회문제를 독특하고 진지한 관점을 담아 디지털시대의 도래와 함께 언어와 기호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현상을 보여준다. 권력과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담겨있다. 《약자의 결단》은 미디어에서도 주목받아 2023년 12월 4주 서울신문 주요 일간지 도서로 선정되었다. 디지털세대의 선언문으로도 볼 수 있으며, 환경공학자이자 과학예술작가인 강하단(본명 조재원) 작가가 집필하여 더욱 신뢰가는 책이다. 각자도생이 만든 각자언어의 중요성과 그것에서 나오는 권력 구조를 탐구한다. 돈, 법, 세계의 이치가 언어로 결정되고, 디지털세대가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야 하는지를 논한다. 강하단 저자는 정해진 규칙과 시험에서의 등수만이 성공의 기준이 아니라며, 약자들이 새로운 가치 체계를 만들어 권력과 기존의 가치를 뒤흔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과학 뒤에 숨은 권력과 디지털세대의 도전, 기호와 가치 체계를 형성하는 방법 등으로 나뉘어 있다. 블록체인과 디지털화폐를 예로 들며, 화폐의 개념을 뒤흔들고, 권력체계를 제기하며, 새로운 기호와 가치 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가 일어날지를 보여준다. 즉 《약자의 결단》은 '약자' 이야기이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사람, 선택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을 '약자'로 정의하며, 이들이 어떻게 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하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단순한 권력 전복이 아닌 언어와 기호의 변화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필요성이 있다. 다양한 시사점을 통해 언어와 기호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현 사회를 살펴보면서, 독특한 시각과 새로운 가치 체계에 대한 제안은 미래사회를 생각하게 된다. 개별적인 선택이 아닌 언어와 기호를 통한 대중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미래의 가능성과 변화를 고민하게 만든다. 글은 독특하고 진지하다. 이로써 현대 사회의 구조와 권력에 독립적이고 혁신적인 접근으로 주목받을 것이다. https://m.blog.naver.com/honeybeebin/223354422086 ※ 플라이북앱을 통해 궁리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약자의 결단 (우리는 왜 모범국민 되기를 거부해야 하는가?)

약자의 결단 (우리는 왜 모범국민 되기를 거부해야 하는가?)

강하단|궁리
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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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sejinyiwc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권 - 강준만 ​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고,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포하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90년대가 ‘역사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종말이 왔다고 주장한 것은 심각한 대사건을 포함한 여러 역사적 사실의 발생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였다. 오늘날 사실상 모든 선진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이고 있으며, 따라서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 사회의 폭넓은 진화라는 맑스주의적·헤겔주의적 의미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선언은 성급한 것임이 드러났지만, ‘역사의 종말’은 90년대를 지배한 정서였음에 틀림없다. ​ 1990년 한국에선 민주화 투사 김영삼이 1990년 1월 22일 그가 평생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세력과 손을 잡고 살을 섞음으로써 역사의 자연스러운 발전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결단에 의해 ‘이념의 시대’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90년대는 ‘문화의 시대’라고 했다. 그러나 그 문화는 전통적인 의미의 문화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장논리의 지배를 받는 소비문화였다. 90년대는 ‘소비의 시대’였다. 절제 없는 소비였다. 허세가 난무했다. 그건 지도층까지 지배한 시대정신이었다. 이른바 ‘IMF 환란’은 그 틈을 파고들었고, 한국 사회는 한동안 통곡하고 신음했다. ​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자연합 1990년 1월 22일 전국은 눈으로 뒤덮였다. 바로 그날 대통령이자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 3인의 청와대 회동과 더불어 3당합당 공동발표문이 나왔다. 이들은 “4당으로 갈라진 현재의 구조로는 나라 안팎의 도전을 효율적으로 헤쳐 나라의 앞날을 개척할 수 없다”며 “자유와 민주의 이념을 함께 나누며 정책노선을 같이 하는 정치세력이 뭉쳐 정책중심의 정당정치를 실천”해 “당파적 이해로 분열, 대결하는 정치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 놀라운 선언이었다. 김종필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투사 김영삼이 그간 불구대천의 원수쯤으로 여겨왔던 노태우와 당을 합쳐 동지가 되겠다니! 평소 “왔다 갔다 하거나 야당하다가 여당으로 간 사람 중에 국민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해 온 김영삼이 아니었던가. ​ 김영삼의 마음을 3당합당 쪽으로 몰아간 결정적 계기가 동해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 이후 김영삼을 겨냥하고 쳐들어오는 검찰의 칼이었다. 당시 매수의 장본인은 서석재였지만, 매수자금은 김영삼의 은행구좌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영삼으로선 치명타를 입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당시 김영삼의 비서실장이었던 서청원이 증언하듯이, “3당통합은 사실 동해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 이용식은 김영삼에 대해 “어디를 가든 정치적으로 두 번째를 싫어한다. 3당통합을 결행하게 된 원인 중에는 제2야당 처지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고 했다. ​ 수많은 ‘진보적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진보적 지식인’들까지 김영삼의 뒤를 따라 3당합당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는 한국인의 ‘지도자 추종주의’와 ‘줄서기 문화’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이념의 경계선은 모호해졌고 이념의 실체조차 우연적·상황적인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을 확산시켰다. ​ 3당합당으로 인해 이념은 약화되었지만 투쟁은 건재했다. 3당합당 발표일 전국을 뒤덮었던 눈은 통합을 상징했는지 몰라도 눈이 녹으면서 각기 다른 셈법이 노출되면서 격렬한 투쟁이 드러나게 되었다. ​ 보안사 민간인 사찰과 ‘범죄와의 전쟁’ 윤석양의 양심선언 1990년 10월 4일, 열흘 전(9월 23일) 탈영한 육군 이병 윤석양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탈영시 갖고 나온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기록을 공개했다. 정치인 등 주요 인사 1,600여 명에 대한 불법사찰 실태가 폭로되자 정국은 엄청난 회오리에 휩싸였고, 그 결과 국방장관과 보안사령관이 해임되고 보안사는 기무사로 개편됐다. ​ 10월 7일 오전 8시 30분 보안사의 집중적인 사찰을 받아 온 야당과 재야단체회원 등 70여 명은 서울 중구 을지로 2가 향린교회에서 대책회의를 갖고 성명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이 불법사찰에 관련돼 있는지 여부가 명백히 밝혀져야 하며 관련이 있다면 즉시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사찰에 직접 관련된 보안사령관을 해임하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며 즉시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이와 함께 민간인까지 사찰하는 방대한 보안사를 즉각 해체하고 군 관련 정보는 각 군 방첩대에서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오후 6시 평민·민주·민중당 등 각 정당 대표와 국민연합·통추회의·13개 지역 업종별노련·각 종교단체 대표 등 21명은 향린교회에 모여 확대비상시국회의를 결성하고 보안사의 불법사찰에 공동 대응해 나가기로 결의했다. 윤석양의 양심선언은 노태우 정권에 치명타를 안겼다. 그대로 앉아서 당할 것인가? 노 정권 수뇌부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보라매공원에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규탄하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린 1990년 10월 13일 대통령 노태우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 선전포고는 TV로 생중계되었고 거의 모든 일간지들의 1면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노태우가 직접 ‘전쟁’이라는 표현까지 쓴 이 선전포고는 정략적인 상징조작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것이었다. ‘전쟁’이라는 표현만 안 썼다 뿐이지 노태우 정부가 범죄와 폭력에 대한 실질적인 선전포고를 한 건 이미 오래전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5개월 전인 5월 7일 노태우는 특별담화를 통해 법질서 확립에 대한 비상한 결의를 표명했으며, 3일 후 치안관계 장관들은 유례 없는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범죄와 폭력을 발본색원할 것을 재다짐했었다. ​ ‘범죄와의 전쟁’은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에 대한 분노의 확산을 막기 위한 상징조작으로서의 ‘홍보전쟁’이었다. 그 홍보전쟁은 처음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당시 살인 사건이 평균 이틀에 3건, 강간 사건이 하루에 12건씩 발생하고 있었으니, 범죄에 염증을 느낀 국민 입장에선 거창하게 벌인 ‘범죄와의 전쟁’에 호의적 평가를 내릴 법한 일이었다.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의 공동 여론조사 결과는 응답자의 77%가 ‘범죄와의 전쟁’ 선포를 ‘잘한 일’로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국민들도 오직 홍보뿐인 ‘범죄와의 전쟁’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건 각종 ‘관제운동’의 전개와 홍보물 설치뿐만 아니라 무장 군인의 시내 순찰과 실적 위주의 인권유린이 가세된 공포분위기 조성용 ‘홍보’로 나타났다. ​ ‘범죄와의 전쟁’은 보안사 민간인 사찰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피해 가기 위해 급조된 것으로 국민에게 정의와 안정과 질서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동시에 국민을 통제하는 효과를 거두고자 기획된 상징조작술의 성격이 강했다. ​ 1991년 수서사건: 정치부패와 언론부패 ‘노태우 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 1991년 1월 22일 국회 상공위 뇌물외유 사건이 터졌다. 검찰은 이재근 상공위원장(평민당) 및 민자, 평민당의 간사인 박진구, 이돈만 의원이 한국자동차공업협회와 한국무역협회로부터 미화 7만 7,000달러(한화 5,500만 원)의 경비를 지원받아 미국, 캐나다 등을 여행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수사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뒤이어 2월 3일에는 ‘노태우 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라는 수서사건이 시작됐다. 『세계일보』의 특종 보도로 드러난 수서택지 분양특혜 사건은 정(政)-경(經)-관(官)이 유착한 대형 스캔들이었다. 이는 서울시가 한보그룹 소유의 서울 강남구 수서택지 개발예정지구내 3만 5,500평을 26개 연합 직장주택조합에 특별공급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시에 대한 압력이 가해졌다는 것이었다. ​ 수서사건의 진상은 4년 후 노태우 비자금 사건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검찰은 노태우가 90년 청와대 안가에서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로부터 수서택지 분양 청탁과 함께 4차례에 걸쳐 150억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91년 당시 노태우는 대통령이었으니, 그걸 밝혀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2월 11일에는 뇌물외유 사건에 연루된 의원 3명이, 2월 16일에는 수서사건 관련 의원 5명과 청와대 비서관 장병조가 2억 6,000만 원에서 3,000만 원씩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잇따라 구속됐다. 수서사건을 특종 보도한 이용식은 상공위사건과 수서사건이 정치권 세대교체를 둘러싸고 벌어진 ‘김영삼·김대중 대(對) 노재봉’의 권력투쟁과도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았다. 90년 12월 27일 대대적인 개각에서 강영훈에 이어 국무총리에 오른 노재봉은 여권의 차기 대선 주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용식은 “모든 비리의 근본 원인과 책임이 정치권에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 “수서 관련 보도가 고개를 들 무렵인 90년 12월 이미 서울시청 출입기자들이 작게는 기십만 원에서 크게는 기백만 원씩의 한보 촌지를 받았으며, 그 이후 일부 신문방송사의 사회부장, 편집국장 급에게 1,000∼2,000만 원 이상의 촌지가 뿌려졌다는 게 정설이다.” ​ 사실 당시 언론계에는 한보그룹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이 언론계 간부들에게 전달됐다는 소문이 나돌아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5억 수수설, 80명 연루설 등이 유포되고 구체적으로 개인의 이름과 액수까지 검찰 주변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한보그룹 홍보 담당 상무 이정웅은 검찰 조사에서 언론계 일부 간부 이름까지 거명하고 “언론인들에게 섭섭하지 않게 해 주었는데 수서 관련 보도를 보니 너무 섭섭하다”는 얘기까지 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검찰은 곧 “언론인 관련 부분은 검찰의 수사 대상이 아니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정부 측도 “언론계의 자체 정화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거듭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왜 그랬을까? 그 이후 언론의 수서 비리 관련 보도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또 수서 비리를 최초로 그리고 가장 성실하게 보도했던 『세계일보』 편집국장 이두석과 부사장 손병우가 인사 보복을 당하고 『세계일보』를 소유한 통일그룹이 세무조사를 받는 보복을 당해도 다른 언론이 이를 외면했다는 점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 이와 관련, 이용식은 “이로써 정치권력과 저돌적으로 맞부딪쳤던 한 신생 언론의 시도는 50여 일 만에 완전항복으로 막을 내렸다”고 했다. 당시 권력과 언론 사이엔 묵계의 거래가 있었던 게 아닐까? 권력이 언론계 비리를 눈감아주는 대신 언론도 수서 비리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 거래를 한 게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 언권선거 1992년 5월 15일 정주영, 5월 19일 김영삼, 5월 26일 김대중이 각각 국민당, 민자당,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돼 대선은 본격적인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6월 1일 민주당 대표 김대중은 민자당 대표 김영삼이 제의한 대통령선거운동 중지 및 여야대표 회담과 관련, “소모적인 선거운동을 자제하기 위해 당분간 옥외집회 등 정치, 경제안정을 해치는 행동은 자제하자”면서 “그 대신 산적한 국정현안에 대해 3당 후보가 TV공개토론을 갖고 국민에게 각 당의 입장을 밝히자”고 제의했다. ​ 이에 민자당 대변인 박희태는 “대통령 후보 3인이 TV토론을 하게 되면 대선 분위기가 조기에 과열될 우려가 높다”면서 “이렇게 되면 정치권 전체가 공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김대중에게 “자신의 장점을 너무 내세우지 말라”고 충고했다. 결국 TV토론의 당위성에 대한 판단은 언론이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별 시시콜콜한 문제도 사설로 다루던 언론이 이 문제에 대해선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켰다. 『한겨레신문』만이 6월 3일자에서 ‘텔레비전 토론을 왜 거부하는가-정치왜곡 막기 위해서도 토론은 필요하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TV토론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뿐이었다. 반면 『조선일보』 6월 5일자 관련 기사는 “대선일이 200일 정도나 남아 있고, 그때까지 선거유세를 통한 지나친 국력낭비를 피하자는 여론이 우세”하다고 주장했다. ​ 대선후보 선출 직후 재벌해체론으로 논란을 빚었던 정주영은 『시사저널』 6월 18일자 ‘패널 토론회’에선 국가보안법 관련 질문을 받고 철폐를 찬성한다고 말하는 와중에 공산당 허용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92년 7월 14일 정주영은 민주당과의 야당 대표회담에서 민주당 대표 김대중에게 ‘이봐’라고 했대서 신문 가십란에 올랐다. 오랜 입버릇이 튀어 나왔을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1992년 7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표현된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현대, 대우, 삼성, 럭키금성 등 기존의 4대 통신장비 제조업체는 제외하기로 했기 때문에 5위인 선경이 가장 유리했다. 그런데 선경은 노태우와 사돈관계였다. 그래서 특혜 의혹이 떠돌았다. ​ 7월 23일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이젠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된 김영삼은 노태우에게 이동통신을 둘러싼 의혹이 차기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분명하니 사업자 선정을 대선 이후로 연기하자고 건의하고 나섰다. 그러나 김영삼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8월 20일 제2이동통신 사업의 최종 사업자로 선경그룹이 낙착됐다. 체신부장관은 “대학총장의 자식이라고 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학생을 떨어뜨릴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반문했지만, 반발은 컸다. 야당은 물론 여당의 대통령 후보까지 연기를 요청했던 사업자 선정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날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은 일간지들에 ‘6공 정권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다’는 정치광고를 게재해 공세를 퍼부었다. ​ 발표 직후 노태우와 김영삼은 정면 충돌했다. 김영삼은 언론을 통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노태우는 크게 분노했다. 노태우의 입에서 “갈라서자”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노태우의 측근인 이원조와 동서 금진호는 이미 김영삼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터라 노태우를 설득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래서 선경이 사업권을 자진반납하는 쪽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다. ​ 김영삼 대통령 당선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대선은 김영삼의 승리로 끝났다. 김영삼은 총 유효표의 41.4%(997만 7,646표)를 얻어 2위인 김대중 민주당 후보(804만 1,690표)를 8.0%(193만 5,956표) 차이로 앞질렀다. 3위는 정주영 국민당 후보로 388만 167표(16.1%)를 얻었다. 신정당 후보 박찬종은 151만 6,047표를 얻었다. 『한겨레신문』 1993년 1월 7일자 사설은 “총득표에서 두 사람의 차이는 193만 5,956표였다. 김영삼 씨가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에서 얻은 표는 474만 7,184표, 김대중 씨가 광주·전남과 전북에서 얻은 표는 281만 4,226표였다. 그 차이는 193만 2,958표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김영삼 씨 표에서 영남을, 김대중 씨 표에서 호남을 빼고 두 사람의 차이를 계산하면 놀랍게도 2,998표가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대통령선거의 결과를 결정한 것이 영남과 호남의 인구 차이라는 주장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선거의 승패가 지역의 인구 수로만 결정된다면 아이를 많이 낳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있겠느냐’는 극단적인 탄식이 이성의 소리라는 뜻은 아니다.” ​ 1993년 1993년 대통령에 취임하기가 무섭게 김영삼은 ‘윗물맑기 운동’을 외치면서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밀어붙였다. 대단한 뚝심이었다. 그는 취임 3일째인 2월 27일 자신의 재산을 먼저 공개했는데, 총 17억 7,800만 원이었다. 경제부총리 이경식이 뒤를 이었고, 3월 5일 민자당 당무회의에서는 재산공개를 결정했다. 김영삼은 고위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가리켜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고 했으며,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집단에게는 멸망의 길밖에 없다”고 했다. 고위 공직자들은 강한 불만을 토로했지만, 국민은 환호했다. 허용범은 “드디어 민자당 의원들이 3월 21일 재산을 공개하자 한마디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했다. ​ “평소 정치인들의 속사정에는 비교적 밝은 정치부 기자들도 놀란 일이 수두룩했다. 미성년 손자가 주택을 소유하고, 빌딩을 11개, 주택을 11채 보유한 의원이 있는가 하면, 시가 수백억짜리 땅을 50억에 신고한 이도 있었다. 명백히 ‘파렴치한 투기꾼’이라는 말 외엔 그에게 붙일 말이 없는 의원들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 재산공개는 김 대통령이 주도한 사정(司正)의 첫 시동이었고, 그 결과는 흔히 ‘무혈혁명’으로 비유된다.” 부패의 정도가 심한 사람들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3월 하순경 김영삼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70∼80%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보수파는 ‘인민재판’이라고 펄펄 뛰었지만,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김영삼을 막을 길은 없었다. ​ 세간에는 “김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김대중 후보를 찍었던 사람들은 환영하고 정작 김영삼 후보를 찍었던 사람들은 크게 후회하고 있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리고 만년 여당지 『서울신문』은 『한겨레신문』보다 더 개혁적인 논조로 신바람을 냈다. 정말 『서울신문』의 전성기였다. 늘 ‘어용’으로 지탄받던 KBS도 신이 났다.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공개 파문으로 한동안 TV 저녁 뉴스는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요즘 TV뉴스를 보는 맛으로 산다”고 말하는 서민들도 적지 않았다. ​ 하나회 척결 1993년 3월 8일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의 전격 경질이 이루어졌다. 5공 인맥으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은 “군인들 사이에서는 ‘대단하군, 역시 대단해’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한마디로 충격을 넘어 경악이었다. 5·16쿠데타 이후 32년 만에 되찾은 문민정부의 위력이 이날만큼 실감나게 느껴진 적도 별로 없다”고 했다. 그런 ‘경악’을 간파한 김영삼은 다음날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모두 깜짝 놀랬제”, “저쪽 사람들(하나회 군인들을 지칭) 깜짝 놀랬을 거야”라고 말했다. 한 수석비서관은 “각하, 저희들도 그렇지만 국민 모두 얼떨떨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모든 참석자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 이어, 4월엔 대령 백승도가 육사 20∼36기 하나회원 125명의 명단을 만들어 살포한 뒤 하나회와 육사 내부에 결성돼 있는 예비 하나회인 알자회가 철퇴를 맞아 대대적인 군부 내 물갈이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석 달 만에 옷 벗은 장군만 18명이었고 ‘떨어진’ 별만 40개에 달했다. 이는 전 국민을 놀라게 했다. 그간 절대 성역으로 간주된 온 군부가 문민정부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된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 김영삼은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고 한동안 최고 94%라는 경이적인 지지율을 국민으로부터 얻어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었다. 누구나 자신의 정적(政敵)을 치거나 권력 강화에 도움이 될 일을 하는 데엔 개혁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도 했던 일이었고, 이 이후로도 벌어질 일이었다. 그 일이 끝나고 나면 ‘개혁’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곤 했다. 김영삼의 경우엔 그가 워낙 ‘승리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인지라, 자신의 승리에 도움이 되는 한 개혁적일 수 있었지만, 승리를 위해선 극우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김영삼의 큰 치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에 대해서도 훗날 “군부독재의 잔존세력과 민정당 출신 정치인들을 몰아내는 방편으로 공직자 재산등록제를 밀어붙인 것”이라는 평가마저 나오게 되었다. ​ 김영삼이 경제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도 문제였다. 그가 경제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그저 경제참모들에게 잘해 달라고 격려하거나 경제수석 박재윤에게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 각오하라”는 호통을 치는 게 전부였다. 정주영에 대한 보복심으로 정주영과 현대그룹을 구분하지 못한 채 현대그룹에 대해 향후 2년간 금융 제재를 가한 것도 문제였다. 그 덕분에 현대는 훗날 IMF 사태에 타격을 덜 받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 이건희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는 1993년 3월 22일에 열린 ‘제2창업 5주년 기념식’에서 “먼 훗날 삼성의 역사에서 여러분과 내가 함께 이 시대를 빛낸 주인공으로 기록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는 기념사의 마지막 대목에서 감정이 북받쳐 목이 메인 모습을 보였다. 이미 그때에 무언가 큰 결심을 했던 것 같다. 이건희는 93년 3월 3월부터 로스앤젤레스-프랑크푸르트-오사카-도쿄-런던으로 이어지는 4개월에 걸친 대장정에서 1,800여 명의 임직원을 해외로 불러 놓고 500여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해냈다. 삼성의 ‘신경영’ 혁명을 위해서라고 했다. ​ 신문과 방송은 앞 다투어 이건희의 발언 내용을 크게 보도했고 사람들은 이건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는 이른바 ‘이건희 신드롬’을 낳았다. ‘이건희 신드롬’은 단지 삼성그룹과 이건희가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막강한 위상 때문에 생겨난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그게 전제되긴 했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게 그 발언의 방식과 내용의 파격성이었다. 이건희는 전혀 재벌총수답지 않은 말을 많이 했다. 그는 삼성인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했지만 그의 말은 모든 봉급 생활자들, 아니 이 나라 모든 국민들의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이었다. 절실했다. 이건희가 93년 6월 1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그룹 유럽 주재원 간담회를 가지면서 한 일련의 발언은 언론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불려졌다. 초일류 기업이 되기 위해선 우선 의식혁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과격한 발언을 하였으니 언론이 그렇게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삼성의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 일반인들에게까지 가시적으로 나타난 건 근무 시간 변경이었다. 7월 7일 삼성전자 회장 강진구 주재로 열린 사장단 회의는 이건희의 지시에 따라 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이라는 파격적인 근무 시간을 결정했다. 이른바 7·4제였다. 처음엔 모든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다. 심지어는 사장들까지도 말이다. 한 직원은 이건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팩스를 보냈다고 한다. “그룹의 조기 출퇴근 방침에 따라 하오 4시에 퇴근하고 있는데 4시가 되자마자 퇴근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사장이 파악하도록 하고 있다.” 이건희는 곧바로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사장들을 매섭게 질책했다. 이 외에도 93년에 우르과이라운드와 해외 농수산물 개방으로 전국이 난리가 났던 이야기와 100만명이 넘는 관객이 극장을 찾아 대박이 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 90년대 초반의 정치적 역사적 사건들을 돌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 꼭 읽어보기 바란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3년 전
user

샤대프린스

@apoetofmyheart
'소설 보다' 시리즈를 재작년 봄부터 읽어오고 있는데, 세 편 다 고루 내 마음에 들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기분이 좋네. 단, 기억에 남는 문장은 딱히 없었다. 그러나 세 편 모두 어떤 흐릿한 이미지로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듯하다. * 김지연의 「포기」. 그의 소설집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거기 실린 단편 몇 편은 이미 읽었다. 대부분 좋았지. 김지연의 문장은 내가 느끼기에··· 영글지 않았다. 아직 성글다. 그래도 좋았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고. 뭐랄까, 그의 단편은 정말이지 '지금-여기'의 목소리로 써낸 것만 같다. 인물과, 그들이 처하는 상황과, 그들이 내뱉는 대사가 뭐라 형용할 수는 없지만 정말 나 같고! 너 같고! 우리 같다! 이 기이한 동시대적 감각··· 그게 그의 작품에 있어서 나는 김지연을 계속 읽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그의 작품은 재작년과 작년 '소설 보다'에서 읽은 적이 있다. 「여자가 지하철 할 때」와 「이중 작가 초롱」. 그 두 편은 내게 좀 많이 충격이었다. 음··· 이 작가 뭐지? 무슨 이런 요상한데 재미난 글을 쓰지? 이제 그의 스토리텔링에 적응이 되어 그런지 이번 작품 역시 빠져들어 읽었다. 제목만 봤을 때는 무슨 무협지인 줄 알았는데 읽고 나니 음··· 이게 모험이긴 한데··· 이게 모험인가? 의 상황에 봉착했고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도 이 작품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재밌었다. 이미상의 첫 소설집을 정말 기다린다. 함윤이의 「강가/Ganga」. 김수온이 살짝 생각나려다가 그보다는 훨씬 동적인 소설인 듯하다. 1월에 친구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에서 2022년 신춘문예 당선작 7편을 읽었었는데, 그때 이 작가의 「되돌아오는 곰」(서울신문)도 읽었다. 솔직히 말할게. 그건 별로였다. 생각도 안 나. 그러나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는··· 같은 사람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달랐고 너무 좋았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서사? 뭐랄까, 살짝 박솔뫼의 『을』(자음과모음, 2010) 같기도 하고? '강가'라는 단어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좋았다. 겹겹의 레이어로 켜켜이 두툼해진 Ganga.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해본다. * 2020년과 2021년의 여름의 '소설 보다'를 떠올려 봅니다. 강화길의 「가원」과 서이제의 「0%를 향하여」와 임솔아의 「희고 둥근 부분」과, 서이제의 「#바보상자스타」와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와 한정현의 「쿄쿄와 쿄지」. 세상에나··· 라인업 무슨 일.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밖에 안 계시네요. 그 위로 2022년 여름의 소설(들)이 쌓입니다. 내년 여름의 소설들을 기대하며 감상을 마칠게요.
소설 보다

소설 보다

김지연, 이미상, 함윤이 (지은이)
문학과지성사
3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