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부터 정말 읽고 싶었던 책,
꽤 유명한 책이지만 한국 소설책은 잘 안 읽게 돼서
뒤늦게 읽으려 책장을 펼쳤다
보통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에게 책이란 무엇이었을까,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들려주었고 관찰할 수 없는 자의 인생을 보게 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들, 겪어 보지 못한 사건들이 비밀스럽게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동감하지 않을까 ?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것과 같다. 책은 그 안의 문장들을 읽기만하면 내가 갈 수 없는 세계에 데려다준다. 수많은 책들 뒤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내가 읽었던 책들의 작가들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책 한 권을 다 읽게 되면 그 작가와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내향적인 나에게, 사람에게 에너지를 많이 사용할 수 없는 나에게도 책은 이러한 존재다 :-)
읽다가 울었던 문장 ..
“그 겨울. 첫눈이 내리기 얼마 전 나는 엄마의 얼굴에서 낯선 것을 발견했다. 처음엔 짧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줄 알았다. 그걸 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건 머리칼이 아니라 주름이었다. 언제 생겼는지도 몰랐는데 꽤 깊이, 그리고 길게 파여 있었다. 처음으로 엄마가 늙은 걸 알았다.
ㅡ 엄마도 주름이 있네.
내 말에 엄마는 방긋 미소를 지었고, 그러자 주름이 길게 뻗어갔다. 나는 점차 늙어 가는 엄마를 상상해 보았지만 잘 그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ㅡ 이제 엄마에게 남은 건 늙는 일밖에 없단다.“
그 말이 생각난다. 부모님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
“두 사람은 내 세계의 전부였다.”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구나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종종 우리에게 그건 정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꼭 말이 아니라 상황으로 분위기로 말을 대신해준다.
맞다.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 ! 모두 다르니까, 너도 나도 누군가에게는 정답일 수도 있으니까 🙂
“감정이란 참 얄궂은 거거든.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세상에 겨우 나온 윤재에게 세상이 윤재에게 알려준 것은 감정이라는 좋은 핑계.
그 날, 모두 외면했던 날, 아무도 나서지 않았던 날, 점점 사람들의 머릿 속에서 흐릿해져가는 그 날. 그 날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들이지 않을까
“삶은 여러 맛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작가님이 <아몬드> 책을 적어내려간 이유,
모든 아이들은 가능성이 열려있으며 축복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 중 누군가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고 누군가는 군림하고 명령하면서도 속이 비틀린 사람이 된다. 드물지만, 주어진 조건을 딛고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괴물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 특히 아직도 가능성이 닫혀 있지 않음 아이들에게 내미는 손길이 많아지면 좋겠다.
거창한 바람이지만 그래도 바라 본다.
아이들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사랑을 주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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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내가 경험할 많은 곳들에서 많은 사람들, 많은 아이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 아이들에게 감정을 건강하게 사용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 나를 통해서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더 성장하고 가능성을 인정받는 아이들을 만나길 기대하며 !
#아몬드 #손원평 #위시리스트
👍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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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 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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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복음이 세상 속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고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교인들의 머리와 입에만 머물고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무언가 바뀌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말씀과 세상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머리에 채우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속에서’ 말씀을 경험하여 그 말씀이 우리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일이 진정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 구석구석, 우리 주변 사람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 내거나 조작해 낼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의 변화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회개는 삶의 변화로 이어진다.
진정한 회개는 변화를 낳는다.
그런데 왜? 왜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난 반면, 수십억은 아닐지라도 세상 수백만 명의 시잔과 아미르, 나빈은 꼭 필요한 것 조차 거의 주어지지 않는 환경에서 태어났을까?
이런 일을 보고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예전처럼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나를 더욱 흔들어 놓은 다음번 만남에서 더욱 증폭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분의 사랑을 믿기를 얼마나 자라시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랑에 관해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랑을 믿을 수 있겠는가.
정수 필터가 아무리 도움이 된다 해도 누구 하나 천국에 보내 줄 수는 없습니다. 의약품이나 위생 시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이 마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영생으로 가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사람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일까? 내가 정말로 그 가족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했다면 왜 당장 산 아래로 달려가 딸을 찾도록 돕지 않았을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일까?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내 이웃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까?’
누가복음 10장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 예수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갔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책임지는 지도자들이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을 모르는 척한다. 과연 누가 죽어 가는 이 사람을 도울 것인가?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눅 10:34).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표현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폄하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사마리아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피해자의 상처를 닦은 뒤 가까운 여관에 데려다준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모든 숙박비와 치료비까지 대신내 준다. 이야기의 끝에서 예수님은 질문을 완전히 비트신다. 이제 질문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사랑을 행한 사람은 누구인가?”다.
예수님은 종교 엘리트 집단 출신의 이 남자에게 율법이 말하는 사랑이 단순한 종교적 지식과 종교적 의무 이상이라는 점을 깨우쳐 주기 위해 충격 요법을 사용하신다. 그냥 어려운 사람들을 편견 없이 도우라는 교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교훈이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그냥 그 율법교사와 같은 유대인이 온갖 편견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멈춰 사마리아 사람을 돕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에 부응하지 못하는 종교 엘리트들의 현실부터 지적하신 뒤에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켜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한 율법교사의 깊은 미움과 편견을 들추어내신다. 이 율법교사에게는 바로 새 마름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한 진짜 사랑은 종교적 학습만 해서는 만들어 낼 수 없다.
하나님은 제 안에 이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불어넣으셨어요. 이 사람들에게 제 삶으로 그 분의 사랑을 보여 드리려는 열정을 제 안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 있는 것입니다.
내 모든 종교적 배움이나 종교적 책임감을 초월한 새로운 종류의 사랑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는 종류의 사랑으로, 내 인생이나 가족, 미래를 위해 세웠던 계획을 송두리째 바꾸게 만드는 종류의 사랑으로, 편안한 자리에서 나와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 속으로 온몸을 던지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처음에 의도하셨던 형태의 교회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고수하는 동시에 불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희생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모임이 이들에게는 너무도 필요하다. 이런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냥 믿음의 형제자매들, 그들 앞에 놓은 하나님의 말씀, 그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만 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도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내게도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저 하나님을 찾고 서로를 사랑하고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주변 세상에 하나님 사랑의 좋은 소식을 전하기로 결단한 공동체에 속한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것이 하나님이 원래 설계하신 교회의 본질이 아닐까?
이 마을이 육체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한 줄 알기에 주민들의 육체적 치료를 위해 밤낮으로 고군분투한다. 동시에 그녀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단순한 약이나 치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영혼을 치료해 주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벤과 나는 서로 완전히 다른 교육, 경험, 재능, 열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둘 다 하나님이 그분의 사랑을 전하고 세상의 절박한 필요를 위해 쓰라고 허락하신 독특한 재능을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발휘한다. “각자의 ‘독특한’ 도움.” 하나님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할 길을 여시려고 현재와 같은 글로벌화를 계획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독특한 교육과 경험, 재능, 열정을 주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제대로 된 교회가 되면,
우리의 방식이나 이념, 트렌드, 전통에 따른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교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대가를 충분히 계산한 뒤 하나님이 원래 뜻하신 그런 교회가 되면, 그러면 세상이 바뀐다.
다른 누군가 하겠지 하면서 자기 삶을 살기에 바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내가 목사로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은 절박한 세상 속에서 사역에 대해 ‘말만’ 하는 것이다. 나는 사역을 ‘하고’ 싶다.
당신의 직장, 학교, 사는 동네, 사는 집, 재능, 기술, 능력, 자원은 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주변 세상에 복음의 소망을 전할 독특한 기회들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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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하나님은 우리 한명 한명을 찾아오셔서 사랑한다고 말하셨고, 계속해서 말하신다.
내 깨어진 모습을 끌어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의 깨어진 모습에 동화될 수 있다.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아니라 동화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사역이란 지배가 아니라 나눔이고, 신학이 아니라 이해이며, 교정이 아니라 돌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안간힘을 다하고, 아첨으로 점수를 따려 서로 다투고, 자신을 고쳐 보려 몸부림치며,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진리를 찾는 불신자들에게 별 매력을 못 줄 정도로 기쁨 없는 복음의 삶을 살아간다.
‘애정을 받아들이는 지혜의 삶을 살아라.’
애정이란 누군가 나를 진실로 온전히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그 안전함 속에서 깨어난다. 사람들로 가득 찬 방 안에 그 특별한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내면에 안도의 한숨이 터지면서 안전한 느낌이 강하게 밀려든다. 따뜻하고 자상한 애정의 임재를 느낄 때 두려움이 사라진다. 빈정거림, 유명 인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자기과시, 자기 의, 남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부담 등 거짓 자아의 방어기제가 허물어진다. 좀 더 마음이 열리고 진실해지며 약한 모습을 감추지 않고 훈훈한 마음을 품게 된다. 애정이 자라는 것이다.
“게이 공동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한 복음주의자가 내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 비유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밀과 잡초를 함께 자라게 두라고 명하셨습니다. 바울도 그 정신을 이어받아 고린도전서에 ‘판단을 그치고 주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썼습니다. 아바의 아들딸들은 판단과 가장 거리가 먼 자들입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사이좋게 지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하신 마태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에는 같은 구절이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해진다는 것의 성경적 의미는 곧 예수님의 긍휼의 사역을 본받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더욱이 저는 하나님을 그분의 심판석에서 몰아내고 남을 판단할 지식도 권한도 없는 제가 거기 앉아 남에게 선고를 내릴 뜻은 없습니다. 이 자리에 앉은 우리 중 누구도 한번이라도 남의 동기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의 이면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한 뒤 바울이 한 말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2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0세가 저무는 이 시점에 나와 다른 집단에 대한 편협성, 도덕적 절대론, 양보를 모르는 독단주의를 보는 것은 섬뜩한 일입니다. 저마다 종교적 고지를 점하여 고집할 때 그런 태도가 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받는 자가 된다는 것은 위로부터 계시된 진리를 시시각각 내 평범한 생각과 말과 행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긍휼에는 절대 무차별의 특성이 있다. 그 특성을 강조하신 것이 예수님의 거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 주제다.
무차별적 긍휼이란 무엇인가? “장미꽃을 보라. 장미가 ‘나는 착한 사람들한테만 향기를 발하고 나쁜 사람들한테는 향기를 거둬야지’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또 등불이 자기 불빛 아래 걸으려는 악인한테 빛을 거두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렇게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등불이 아니다. 또 나무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높은 자든 낮은 자든 모든 사람에게,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심지어 자기를 자르려는 자에게까지 대책 없이 무차별로 그늘을 내주는 모습을 보라. 무차별성, 그것이야말로 긍휼의 으뜸가는 특성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신다.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우리가 노력해서나 그 노력이 부질없음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분이 사랑하기로 정하셨기에 사랑하신다. 어쩌면 그것을 아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자녀다. 우리가 자녀인 것은 그분이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도 상대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실 여부를 떠나 바로 자녀의 노력이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전부터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조숙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자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다. 체스터튼의 말처럼 그분은 이미 우리 뒤에 서 계신다. 크든 작든 중요하든 사소하든 멀든 가깝든, 모든 일에는 제자리와 제 의미와 제 가치가 있다. 그분과의 연합을 통해서라면(어거스틴의 말처럼, 그분은 나보다도 나와 더 친하신 분이다) 낭비도 없고 빠진 부분도 없다. 영원한 의미가 담기지 않은 순간이란 없다. 열매 없는 행동도 없고, 결실 없는 사랑도 없고, 응답 없는 기도도 없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 보화는 금이 아니니
질그릇에 담긴 엄청난 부
우리 보화는 오직 하나니
질그릇 속의 주 그리스도
그러나 돌연 난데없이 예수님이 나타나 내 삶은 새로워졌다. 내 위안밖에 챙길 줄 모르던 볼품없는 신세이던 내가 사람들과 일을 챙길 줄 아는 어엿한 인간,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분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되었다. 나는 방향감각과 목표의식을 찾았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이유를 찾았다. 예수님은 내 랍비, 내 스승이었다. 무한한 인내로 그분은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 주셨고 망가진 시절로 지쳐 있던 내게 새 힘을 주셨다. 나를 어둠에서 이끌어 빛으로 들인, 위대하신 랍비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분은 현실을 피하는 피난처가 아니라 현실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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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꿀잼
2024년 1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