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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니와 주이 (J. D. 샐린저 장편소설)의 표지 이미지

프래니와 주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문학동네 펴냄

처음엔 단편적으로, 그러다가 아예 똑바로, 그는 창문 아래 다섯 층 밑 길 건너에서, 한 장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가도, 연출자도, 제작자도 끼어들지 않고 펼쳐지고 있는 연기였다. 꽤 큰 단풍나무 한 그루가-이 거리에서 운이 좋은 쪽에 있는 네댓 그루 중 하나였다-여자사립 고등학교 앞에 서 있었는데, 그 순간 일고여덟 살 정도의 여자아이 하나가 그 나무 뒤에 숨고 있었다. 아이는 짙은 파란색 리퍼 재킷에 빵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는 반 고흐의 <아를의 방>에 있던 침대 위 담요와 아주 흡사한 빨간색이었다. 아이의 빵모자는 사실 주이의 위치에서는 물감을 한 번 톡 칠해놓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로부터 4~5미터 떨어진 곳에 아이의 개가, 줄이 달린 초록색 개목걸이를 한 어린 닥스훈트 한 마리가 아이를 찾기 위해 킁킁 원을 그리며 정신없이 맴돌고 있었고, 개줄이 그 뒤에서 질질 끌리고 있었다. 헤어짐의 괴로움은 개에게 거의 견딜 수 없는 것이었기에 마침내 주인 아이의 냄새를 맡게 되었을 때에는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다시 만난 기쁨은 둘 모두에게 아주 큰 것이었다. 닥스훈트는 작게 짖으며, 희열로 춤을 추듯 앞으로 몸을 움찔거렸고, 아이는 마침내 무언가 개에게 큰 소리로 외치며 나무를 두르고 있는 철사 울타리를 서둘러 넘어가 개를 안아올렸다. 아이는 그들만의 은어로 몇 마디 개를 칭찬한 후 개를 내려놓고 줄을 잡았으며, 둘은 즐겁게 서쪽으로 피프스 애비뉴와 센트럴파크를 향해 걸어가며 주이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주이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내밀어 둘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라도 있는 것처럼, 창유리 사이 가로대에 반사적으로 손을 올렸다. 그런데 그 손엔 시가가 쥐여 있었고 주저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다. 그는 시가를 한 모금 빨았다. "젠장." 그가 말했다. "세상엔 좋은 것들도 있어, 진짜 좋은 것들 말이야. 우리 모두 바보 멍청이들이라 딴 길로 새버리지만. 늘, 늘, 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리의 형편없고 별 볼 일 없는 에고로 끌어당기면서." -192, 193p

어쩌면 우리는 오래 전 샐린저가 경고한 세상을 이미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호밀밭을 지키는 단 한 명의 파수꾼도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의 온갖 순수한 것들이 절벽으로 밀려 떨어지는, 그런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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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는 건 /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유명한 시구를 나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순간에 떠올린다. 캄보디아에서 온 31살 여성 누온 속행이 비닐하우스에서 얼어죽었을 때, 대구 이슬람사원 건축현장에 돼지머리가 놓였을 때, 고양시 저유소 화재사건 때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 노동자가 긴급체포돼 123회나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그침을 당했을 때, 올해 1분기에만 20명 가까운 외국인 노동자가 숨졌단 통계를 찾아냈을 때. 나는 나와, 내 이웃과, 내 나라가 다른 누구의 일생을 존중하며 맞이하고 있는가를 의심한다.

소설은 반세기 전 독일의 한국 노동자들과 오늘 한국의 이주노동자를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도록 이끈다. 그 시절 한국 노동자에게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 한국땅의 이주노동자에게도 귀한 마음들이 깃들어 있음을 알도록 한다.

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문학동네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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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마저도 자유로울 수 없는 지난 체제의 부조리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봉건사회의 완성형은, 소수의 사디스트와 다수의 마조히스트로 구성된 것'이라는 통찰은 이를 냉철히 되짚어 반성한 적 없는 모든 사회에서 폭력과 존엄의 훼손이란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를 알도록 한다.

잔혹하고 처절한 묘사로 악명 높은 작품이다. 잔혹을 수단 삼아 인간의 극한에 다가선다. 잔혹함을, 또 폭력을 그대로 그를 비판하기 위한 창작의 장치로 활용하는 선택이 천재적이다. 폭력이 짙어질수록 폭력에 대한 비판 또한 강렬해지는 이 영리한 설정은 그를 부담스럽게 여겨온 이마저 일거에 감탄케 한다.

이로부터 일본에도 제 역사를 처절하게 반성하는 작가가 있었단 걸 알았다. 이로부터 봉건질서를 지나온 우리 또한 자유롭지 못한 잘못이 있다는 걸 깨우쳤다. 봉건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압제는 마땅히 그를 지나온 모두로부터 통렬히 비판되고 반성돼야 하는 것이다.

시구루이 1

야마구치 타카유키 외 1명 지음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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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미영 작가의 데뷔작으로 원나라 침입에 맞선 고려의 무장이 실은 현재로부터의 시간여행을 한 고등학생이라는 상상으로부터 흥미롭게 빚어낸 작품이다. 요즘 또 유행하는 전형적 회귀물이지만 당대에선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원나라 침입 시기를 다뤄 눈길을 끈다.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을 적극 버무린 픽션의 결합. 그 결과물이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는 판타지적 사극으로 귀결됐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려의 박서 장군이 살리타가 이끌던 원나라 군대를 귀주에서 격파하고, 재차 처들어온 살리타를 승장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사살한 건 의미 있는 전공임에도 널리 알려지진 못한 사실이었다. 노미영 작가는 역사책 한 귀퉁이에 찌그러져 있던 사건으로부터 매력적인 드라마를 뽑아냈고 이것으로 이 만화가 생명력을 얻었다.

매력적이고 아기자기한 이야기와 흥미로운 구성, 자기색깔이 분명한 필치까지 압도적이진 않지만 모든 면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좋았다.

살례탑 1

노미영 지음
대원씨아이(만화)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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