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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리영희 지음
한길사 펴냄

서재를 가진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책이 뭐가 있을까 고민한 날이 있다. 그 고민을 지인들과 나누며 내가 알지 못했던 좋은 책의 목록을 얻게 되었다. 오늘 소개할 책 <대화>는 그렇게 얻은 목록에서 자주 만나본 책이다. 애서가들에겐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세월의 더께는 걸작 위에도 쌓이는 일이 잦기에 이곳에 적어 많은 이들과 나누고자 한다.

지금은 항해사로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배를 타기 직전까지 난 3년 간 기자 생활을 했다. 그동안 리영희라는 이름을 여러 곳에서 적지 않게 들었다. 때로는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의 저자로, 때로는 술자리에서 등장하는 오래된 일화에서, 또 때로는 선배나 후배가 존경하는 사람으로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난 그가 누구인지,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본 일이 없었다.

한국의 외항상선 항해사들은 양 해대로 불리는 한국해양대학교와 목포해양대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내가 배에서 만나는 선배 사관들도 자연히 이 두 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에겐 기자 출신으로 단기교육과정을 마치고 승선한 내가 신기하게 보이는 게 당연한 일, 함께 당직을 서는 사관이 바뀔 때마다 과거 기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만난 선배사관 중 한 명이 불쑥 리영희라는 이름을 꺼냈다. 한국해양대학교가 배출한 유명한 기자로 리영희라는 사람이 있는데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리영희는 알았으나 그가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던 터라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겐 이 두꺼운 책을 읽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해양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어째서 기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가 몹시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기자로 일하다 배를 타기로 마음 먹은 나와는 반대되는 길이니 더욱 흥미가 갔다.

익히 알려진 바, 리영희 선생은 존경받는 지식인이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태어나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을 가로지르며 진실에의 추구를 신념으로 삼았다. 그 대가로 네 번의 해직, 다섯 차례의 구속을 당했다.

역경이 깊을수록 삶과 세상에 대한 통찰도 깊어져 글과 말로써 많은 독자를 일깨웠다. 2010년 12월 5일, 여든 하나의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고 5.18 민주묘지에 안장됐다.

<대화>는 리영희 선생의 일생을 주제로 한 대담집이다. 자서전 성격이 짙지만 뇌출혈로 직접 글을 쓰기 어려운 사정에 따라 지인인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묻고 리영희가 답하는 형식으로 꾸려졌다. 대담집의 성격상 대화체로 구성돼 읽기에 수월하고, 혼자서는 적기 어려웠을 폭넓은 주제를 비판적으로 다뤄내 보기 드문 가치 있는 책이 되었다.

스스로를 '60퍼센트는 저널리스트, 40퍼센트는 아카데미션'이라 일컫는 리영희는 한국사회에 드문, 존경할 만한 1세대 언론인이다. 탁월한 언어능력을 바탕으로 국제문제 전문 기자로 활약하며 서구사회엔 한국의 현실을, 한국사회엔 제3세계에 퍼져나가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의 흐름을 알렸다.

국내외 취재원들에게 실력 있는 기자로 알려졌지만 기자 생활 내내 생활고를 겪었을 만큼 양심적으로 살았다. 기자 생활 내내 그가 추구한 유일한 가치는 진실이었고, 그 진실이 그를 다른 가치들로 이끌었다. 이를테면 민주와 자주 같은 것 말이다.

책은 소년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리영희가 맞닥뜨린 어려움을 상세하게 내어보인다. 고향을 떠나 홀로 남한으로 내려와 공부하던 시절부터, 가난으로 한국해양대학교에 입학한 사정, 한국전쟁에 통역장교로 참전해 7년 동안 복무한 이야기, 언론을 업으로 삼고 참된 기자가 되어가는 과정, 학자로서 시대의 지성과 양심을 깨우는 글을 써내려가기까지의 장면들이 지면 위에 차분히 펼쳐진다. 리영희란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을 따라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맨 얼굴이 전면에 드러난다.

언론인으로서의 리영희도 대단하지만 학자이자 저술가로의 활약상은 그 이상이다. 리영희는 당대 한국에선 거의 유일하게 세계정세의 흐름 가운데 놓인 한국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읽어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탁월한 언어능력과 수십 년 간 다져진 국제부 기자로서의 전문성, 무엇보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연마하는 그 자신의 노력이 만든 결과였다.

그가 쓴 책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는 7,80년대 반 독재투쟁의 선봉에 선 대학생들에 널리 읽히며 리영희에게 '사상의 은사'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안겼다. 이로 인해 독재정권의 눈엣 가시가 되어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리영희는 이 책에서 이 같은 성과에 커다란 자부심을 드러낸다.

책에 따르면 생전 리영희는 자신의 말이 상식이 되는 때가 올 것이라 자신했다.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 내내 미국의 팽창야욕과 전쟁범죄행위를 비판하고 전쟁 후엔 참전한 한국이 베트남에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영희가 세상을 떠나고 8년이 지난 올 3월, 베트남에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쩐 다이 꽝 베트남 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 베트남의 가슴 아픈 역사에 한국이 부정적 역할을 한 것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리영희의 말은 이렇게 상식이 되어 간다.

일제치하 36년, 그 이후 들어선 길고 긴 독재정권 가운데, 일신의 안위를 넘어 뜻을 지킨 절개 있는 이를 우리는 얼마 알지 못한다. 그 중에서도 온갖 역경을 뚫고 기록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은 그 수가 더욱 적다.

그런 의미에서 리영희의 삶은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중한 자산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남들과 다른 궤적을 그린 그의 삶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의 삶으로부터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영감을 얻기 위해서다. 난 이 책이 충분히 그에 대한 답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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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소비만큼 윤리적 소비에 무신경했단 걸 실감하게 된다. 인간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소위 6차 대멸종에도, 저개발국가가 물에 잠기고 생태계가 더는 지속가능해지지 않아지는 상황 가운데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하지 않은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한다.

필요한 변화가 산업 현장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는 건 기후위기의 비극이라 해도 좋겠다. 당장 엄청난 전력을 소비하는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반도체 공장을 닫을 수 없듯이, 제지업체나 출판업체, 또 수많은 축산업자들의 이익을 박탈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수많은 요식업 종사자 가운데 동물성 단백질 과잉소비와 제 존립이 연결된 이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 모두를 알면서도 변화해야만 하는 건 지구가, 또 문명이 이대로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일 테다. 바로 이것이 이 시대 시민들이 이 책이 적고 있는 지식을 상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고 말이다.

기후미식

이의철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7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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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시선에서 방송국을 대하며 느낀 점을 풀어간다. 방송사 안의 이야기를 좀처럼 들을 기회 없는 일반 독자에게 신선한 대목이 얼마쯤 있고, 또 어느 것은 각자의 일터에서 느낄 법한 고민처럼 공감이 가기도 한다.

저자 오학준은 12년 간 SBS 교양국에서 근무해온 이다. 그는 이 책을 '실패담'이라 명명한다. '딱히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을 만들지도 못했고, 화제가 될 만한 취재를 해낸 적도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고 보면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PD들의 이야기가 다른 세상 일인 것만 같다.

오학준의 글은 성공하지 못한 평범한 PD의 것이다. '여러 프로그램을 메뚜기 뜀뛰듯 돌아다녔'고 '내가 저널리스트인가? 오래 갈팡질팡했'으며, 여전히 '뾰족한 답은 없'는 방송국 아웃사이더,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더 잘 보이는 무엇도 있는 법이다. 이 책엔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

오학준의 주변

오학준 지음
편않 펴냄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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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거나, 또 그를 다룬 다른 작품을 접한 적 있는 이에겐 새로운 내용이 많은 책이 아니다. 책이 담고 있는 많은 부분을 이미 다른 작품, 이를테면 극영화와 다큐, 소설들이 수차례에 걸쳐 더 직접적이며 본격적으로 다룬 바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요한 특징인 다양한 입장에 놓인 이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작업 또한 새롭다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지극히 일반적인 설정이며 작업이기 때문이다.

공들여 다시 읽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강의 작품에 깊이 공명했다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새로이 보이는 건, 또 <소년이 온다>를 건너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비극이며 국가적 폭력이 남긴 파장에 대하여 외곽부터 섬세하게 다가서는 민감한 감수성이 한국 문단에 필요했단 점일 테다. 그 이상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창비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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