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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칼 폴라니 지음
책세상 펴냄

시장을 맹신하는, 그리하여 유토피아 아닌 유토피아적 신자유주의 체제가 유일한 길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꼭 읽어보아야 할 의미있는 책이다. 전세계의 시장을 통합하려는 흐름을 비판해온 사회주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이 책은 시장경제의 모순이 사회 전면에 드러나고 있는 요즘 경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하게 해주는 의미있는 작품이다.

자기 조정 시장이 도입되면 그에 맞서는 자기 보호 운동이 즉각 나타나 서로 대립하기 때문에 시장에 대한 맹신은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며 시장주의가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한계를 무시한 경제체제 구성은 세계 경제를 혼란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칼 폴라니의 예측은 참으로 옳았다.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 오류의 원인은 칼 폴라니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토지와 노동, 곧 자연과 인간을 경제체제의 일부로 이해하고 이러한 체제가 내포한 필연적인 왜곡을 감추고 있는 시장주의의 모순을 통찰하고 이로 인한 문제점을 지적한 그의 비판 역시 적절했다. 하물며 제약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묵시론적인 비판이야. 칼 마르크스를 제외하고 역사상 어느 누가 자본주의에 대해 이보다 더 통렬하고 적절한 비판을 했었는가.

다소 지나친 해석이 없지 않아 있는 듯 보이지만, 대부분의 생각에 깊이 동의할 수 있었고 미처 생각치 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다질 수 있는 의미있는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현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칼 폴라니의 이 책은 더욱 시의적절한 독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대로 "진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니라 만유인력에도 불구하고 새가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는 것"이라 믿는다.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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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부분

자유주의 경제는 기계에 대한 인간의 첫 번째 대응으로서 그 이전의 여러 조건들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쇄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전에는 저마다 고립되어 있던 여러 시장들이 관계를 맺어 자기 조정 체계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경제와 함께 새로운 사회가 등장했다. 여기에서는 다음의 과정이 결정적이었다. 노동과 토지가 상품으로 변하는 것이다. 즉, 노동과 토지가 마치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들인 양 취급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실제 상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토지의 경우처럼) 결코 생산되는 것이 아니며, 또 생산된다 하더라도 (노동의 경우처럼)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효과적인 허구가 고안된 적도 없었다. 노동과 토지를 자유롭게 매매하게 됨에 따라, 그것들에도 시장 매커니즘이 적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노동이라는 상품에 대해서는 수요와 공급이 존재한다. 토지에 대한 수요와 공급도 존재한다. 따라서 노동력 사용의 대가인 시장 가격(임금)도, 토지 사용의 대가인 시장 가격(지대)도 존재하게 된다. 노동과 토지가 각각의 시장에서 공급되는 방식은 이제 그것들의 도움으로 생산되는 여타 고유한 의미의 상품들과 다를 바가 없다. 노동은 인간에게 붙여진 다른 이름일 뿐이며, 토지 역시 자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변화의 넓이와 파장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품 허구commodity fiction는 인간과 자연의 운명을, 자체적인 법칙에 따라 통제하고 궤도를 따라 스스로 작동하는 자동 장치의 작동에 넘겨준 것이다.(26-27p)

이 체제의 논리는 스스로 목을 졸라댄다. 더 효율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무자비한 충동. 보조금과 관세를 요구하며 정부에 퍼붓는 압력. '눈물 없는 자본주의'는 끝났다. 이 단계의 유효성은 지나갔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식인주의를 뜻한다. 인간의 노동은 이제 골치 아픈 조건들이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생활이라는 속성이 제거된 상품이 되었다. 인간으로 희생을 치러야 이윤이 계속 늘어난다. 더 많은 사이비 인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이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변장 따위는 찢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벗어던지고 있다. 학생들은 '자유에 침을 뱉고', 투표는 코미디가 된다. 소리 높여 이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해도 곧 위험 인물로 몰려 투옥된다. 인간들이 사이비 인간이 되듯, 공동체도 사이비 공동체가 된다. 항상 사이비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지해온 조직들은 이를 환영하고 합리화한다. 보편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동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려 들면 공산주의 또는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낙인찍힌다. 인체에 대한 욕구 가운데 호흡 중추보다 위에 있는 부분의 욕구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못한다. 두뇌 피질은 여기에 순응하지 못하고 미쳐간다. 원래 멀쩔하던 모든 이들이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전 세계가 정신병원 같은 분위기가. 하지만 더 심각한 신경증 환자들이 나서서 덜 미친 대중을 이끈다. 자기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유쾌한 안도감이 온 나라에 퍼진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사실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작 미친 것은 세상이다. 지구 곳곳에서 사악한 괴물들을 무찌르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한다. 보탄Wotan숭배가 국가적 종교가 된다.(94-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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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인 감상을 절로 일으키는 그림체 위로 들어찬 글은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세계, 그 순환을 비춘다. 그러나 순환과 재생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는 닿음,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지식으로는 닿지 못한 연결성을 내보인다.

이야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이세 히데코의 책은 그림책이 그저 십분이면 후딱 넘기게 되는 애들 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만든다. 짧게 보아도 오래도록 생각나는 장면, 그런 순간을 선사한다. 삶에 쉼표를 찍고 물음표를 남긴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와 물음표, 그것이 그림책의 역할이 아닐까. 사색이 귀해진 시대, 여백을 채우는 온갖 콘텐츠들 사이로 그림책을 찾는 이들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알겠다. 이따금 그림책을 펼칠 기회를 가져봐도 좋겠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김소연 지음
천개의바람 펴냄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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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버린 희우와 이유를 모른 채 남겨졌던 주인공의 멈춰진 삶이 수십 년 만에 만나 움직이게 되는 이야기다. 다가선 죽음 앞에서 용기를 낸 그들이 제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을 힘껏 껴안고 나아간다. 길, 이편에서 저편으로 나아가는 좁은 문이 그들 사이에서 명멸한다.

<길, 저쪽>은 예술로써 전해지는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사진으로, 희우는 글로써, 또 희우의 뒤에 만난 건축가는 건축으로써 이야기한다. 각자의 작품이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작품으로써 저의 고난과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전한다. 예술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어 서로를 만나고 이해하게 한다. 마침내 그로써 각자의 예술 또한 이편에서 저편으로 넘어서는 순간을 맞이한다.

1986년 태어난 나의 평안한 삶 가운데, 1986년 수레바퀴 아래 깔려 부러지고 이지러진 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음을 실감한다. 역사의 발전과 희생의 가치를 믿는 이들의 수고로움을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모두가 정찬의 소설 <길, 저쪽>이 이뤄낸 아름다움이다.

길, 저쪽

정찬 지음
창비 펴냄

2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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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차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 땅의 여성들에겐 이름이 없었다. 대갓집 마나님은 누구누구 부인이라고, 여염집 아낙은 어디어디 댁이라고들 불렸다. 죽어서도 마찬가지. 비석이며 기록에도 오로지 성씨만이 남기 일쑤였다. 5만 원 권 속 신사임당조차 사임당이란 호가 문집에 남아 알려진 것일 뿐. 이름은 완전히 소실돼 찾아볼 길 없다.

황정은의 소설은 가족의 연대기를, 특히 보이지 않는 짐을 잔뜩 업고 사는 옛 여성의 이야기를 개별적으로 짚어낸다. 당연하지 않은 짐을 당연하게 져왔던 그네들의 사정이 삶 가운데 비슷한 감정을 겪었을 이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 자극이 위로며 응원을 의도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못된 남성과 피해자 여성의 구도가 지겨운 건 사실이다. 올해만도 다섯편, 그렇고 그런 이야기의 반복이 아닌가. 그럼에도 누구에겐 의미가 있겠거니. 입을 다물고서 의미나 더듬는다.

연년세세

황정은 (지은이) 지음
창비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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