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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수십년 세월을 무색케 하는 순간이 있다. 종합병원 내과 교수로 오십을 바라보는 영빈에게도 불쑥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현금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하고는 만나본 적 없던 그 계집애가 진료실 문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빈은 너무 놀라 네가 나를 기다렸다니 하고 말했다. 현금이는 내가 너를 왜 기다리냐며 깔깔 웃어댔다. 심 교수로 통하던 그에게 야 영빈아 하는 것이 꼭 그대로 현금이었다.

현금은 이혼녀였다. 적잖은 재산을 받아 나온 현금은 혼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었다. 영빈은 제 자리를 찾아가듯 현금의 곁으로 간다. 수십년 만의 재회가 얼마나 뜨겁고 열렬했던지 그들의 만남을 따르는 내내 나는 나보다도 영빈과 현금이, 그리고 이를 적어내려간 박완서가 훨씬 더 젊다고 느껴졌다.

일흔이 되어 이 장면을 쓴 박완서는 대체 얼마나 정력적이고 열정적인 작가인지 나는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소설은 위선과 허영, 천박함에 대한 풍자로 이어진다. 재벌가 며느리가 겪는 고난이나 아내를 속이며 애인과 밀회를 즐기는 성공한 의사의 태도, 또 그 주변 사람들의 내밀한 사정따위가 하나하나 드러나며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까발려진다.

그 가운데는 우리네 삶 가운데서 크고 작게 겪어봄직한 이야기가 없지 않고, 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면 어디서나 입방아찧어지고 조리돌림 당할 만한 것이어서 박완서의 솜씨가 아니었더라도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만한 것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에 대하여 <아주 오래된 농담>이란 제목이 붙은 데도 아주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수많은 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주된 주제를 꼽자면 역시 허위의식에 대한 게 아닐까 싶다. 환자에게 병을 숨기는 것이나 아내에게 제 마음을 숨기는 것, 가정의 불안을 외면하는 것, 몰래 딸을 지우고 아들을 낳으려 하는 것, 죽음 앞에 돈을 두고 전전긍긍하는 것 등은 모두 허울만 좇다 본질을 놓치고 심지어 적극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쾌락이며 이익만 좇으면서도 겉으로는 품위 있는 척 하는 인간들의 보잘 것 없음을 낱낱이 까발리는 이 소설의 솜씨는 과연 오늘의 현실을 향하여서도 오래된 농담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우리는 돌아볼 밖에 없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진실한가를, 우리는 정말로 얼마만큼 인간다운지를.
2024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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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는 건 /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유명한 시구를 나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순간에 떠올린다. 캄보디아에서 온 31살 여성 누온 속행이 비닐하우스에서 얼어죽었을 때, 대구 이슬람사원 건축현장에 돼지머리가 놓였을 때, 고양시 저유소 화재사건 때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 노동자가 긴급체포돼 123회나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그침을 당했을 때, 올해 1분기에만 20명 가까운 외국인 노동자가 숨졌단 통계를 찾아냈을 때. 나는 나와, 내 이웃과, 내 나라가 다른 누구의 일생을 존중하며 맞이하고 있는가를 의심한다.

소설은 반세기 전 독일의 한국 노동자들과 오늘 한국의 이주노동자를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도록 이끈다. 그 시절 한국 노동자에게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 한국땅의 이주노동자에게도 귀한 마음들이 깃들어 있음을 알도록 한다.

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문학동네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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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마저도 자유로울 수 없는 지난 체제의 부조리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봉건사회의 완성형은, 소수의 사디스트와 다수의 마조히스트로 구성된 것'이라는 통찰은 이를 냉철히 되짚어 반성한 적 없는 모든 사회에서 폭력과 존엄의 훼손이란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를 알도록 한다.

잔혹하고 처절한 묘사로 악명 높은 작품이다. 잔혹을 수단 삼아 인간의 극한에 다가선다. 잔혹함을, 또 폭력을 그대로 그를 비판하기 위한 창작의 장치로 활용하는 선택이 천재적이다. 폭력이 짙어질수록 폭력에 대한 비판 또한 강렬해지는 이 영리한 설정은 그를 부담스럽게 여겨온 이마저 일거에 감탄케 한다.

이로부터 일본에도 제 역사를 처절하게 반성하는 작가가 있었단 걸 알았다. 이로부터 봉건질서를 지나온 우리 또한 자유롭지 못한 잘못이 있다는 걸 깨우쳤다. 봉건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압제는 마땅히 그를 지나온 모두로부터 통렬히 비판되고 반성돼야 하는 것이다.

시구루이 1

야마구치 타카유키 외 1명 지음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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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미영 작가의 데뷔작으로 원나라 침입에 맞선 고려의 무장이 실은 현재로부터의 시간여행을 한 고등학생이라는 상상으로부터 흥미롭게 빚어낸 작품이다. 요즘 또 유행하는 전형적 회귀물이지만 당대에선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원나라 침입 시기를 다뤄 눈길을 끈다.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을 적극 버무린 픽션의 결합. 그 결과물이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는 판타지적 사극으로 귀결됐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려의 박서 장군이 살리타가 이끌던 원나라 군대를 귀주에서 격파하고, 재차 처들어온 살리타를 승장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사살한 건 의미 있는 전공임에도 널리 알려지진 못한 사실이었다. 노미영 작가는 역사책 한 귀퉁이에 찌그러져 있던 사건으로부터 매력적인 드라마를 뽑아냈고 이것으로 이 만화가 생명력을 얻었다.

매력적이고 아기자기한 이야기와 흥미로운 구성, 자기색깔이 분명한 필치까지 압도적이진 않지만 모든 면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좋았다.

살례탑 1

노미영 지음
대원씨아이(만화) 펴냄

3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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