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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장편소설 의 표지 이미지

케빈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알에이치코리아(RHK) 펴냄

소설은 에바가 남편인 프랭클린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꾸려졌다. 모든 서술은 에바에 의해 이뤄지며 소설 속 케빈의 모습은 철저히 에바에 의해 선별되고 기억된 것이다. 작가가 편지글만으로 긴 서사를 풀어가야 하는 어려움에도 이 같은 형식을 채택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건 에바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을 가능성을 소설 전반에 흩뿌리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작가는 서술방식만으로 마침내 살인범이 된 케빈이 태생부터 문제였다는 에바의 시각을 비틀어서 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오직 서술방식만이 아니다. 에바는 미국의 다른 여성들에 비해 확연히 늦은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케빈을 갖는다. 그마저도 아이를 간절히 원해서가 아니라 사고처럼 닥쳐온 임신 때문이었다. 에바는 수시로 그 자신의 성격적 결함이며 케빈을 반기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녀가 묘사한 케빈의 문제행각들에 가려지긴 해도 이를 모아 따로 읽어보면 그녀에게도 상당한 문제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에바가 다른 인종이나 못나고 뚱뚱한 외모,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 등을 가진 이에게 혐오의 시선을 드러내는 대목 또한 적지 않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이 감정적으로 무디고 이기적이며 차갑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그녀에게서 케빈이 가진 부정적 모습들을 거듭 발견하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둘은 놀랄 만큼 닮아있다.

말하자면 소설은 문제로 가득한 케빈의 모습을 묘사하는 한편, 은근하고 지속적으로 에바의 비틀린 양육에 대해서도 생각하도록 한다. 적잖은 독자가 오로지 화자인 에바의 시선에서 이를 모성에 대한 사회적 강요의 이야기로 읽어내고는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느 한 쪽을 범인으로 단정하는 태도의 위험성을 일깨우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케빈이 정말 괴물로 태어나 필연적인 범행에 이른 것인지를 그 자신이 아닌 누구도 완전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케빈에 대하여>는 곱씹을수록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케빈이 이유 없이 많은 이들을 살해한 범죄자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소설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에 의해서까지 적잖은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이 케빈에 대하여 더 잘 알아야만 한다고 여긴다.
2024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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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는 건 /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유명한 시구를 나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순간에 떠올린다. 캄보디아에서 온 31살 여성 누온 속행이 비닐하우스에서 얼어죽었을 때, 대구 이슬람사원 건축현장에 돼지머리가 놓였을 때, 고양시 저유소 화재사건 때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 노동자가 긴급체포돼 123회나 “거짓말하지 말라”고 다그침을 당했을 때, 올해 1분기에만 20명 가까운 외국인 노동자가 숨졌단 통계를 찾아냈을 때. 나는 나와, 내 이웃과, 내 나라가 다른 누구의 일생을 존중하며 맞이하고 있는가를 의심한다.

소설은 반세기 전 독일의 한국 노동자들과 오늘 한국의 이주노동자를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도록 이끈다. 그 시절 한국 노동자에게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 한국땅의 이주노동자에게도 귀한 마음들이 깃들어 있음을 알도록 한다.

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문학동네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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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마저도 자유로울 수 없는 지난 체제의 부조리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봉건사회의 완성형은, 소수의 사디스트와 다수의 마조히스트로 구성된 것'이라는 통찰은 이를 냉철히 되짚어 반성한 적 없는 모든 사회에서 폭력과 존엄의 훼손이란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를 알도록 한다.

잔혹하고 처절한 묘사로 악명 높은 작품이다. 잔혹을 수단 삼아 인간의 극한에 다가선다. 잔혹함을, 또 폭력을 그대로 그를 비판하기 위한 창작의 장치로 활용하는 선택이 천재적이다. 폭력이 짙어질수록 폭력에 대한 비판 또한 강렬해지는 이 영리한 설정은 그를 부담스럽게 여겨온 이마저 일거에 감탄케 한다.

이로부터 일본에도 제 역사를 처절하게 반성하는 작가가 있었단 걸 알았다. 이로부터 봉건질서를 지나온 우리 또한 자유롭지 못한 잘못이 있다는 걸 깨우쳤다. 봉건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압제는 마땅히 그를 지나온 모두로부터 통렬히 비판되고 반성돼야 하는 것이다.

시구루이 1

야마구치 타카유키 외 1명 지음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펴냄

3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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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미영 작가의 데뷔작으로 원나라 침입에 맞선 고려의 무장이 실은 현재로부터의 시간여행을 한 고등학생이라는 상상으로부터 흥미롭게 빚어낸 작품이다. 요즘 또 유행하는 전형적 회귀물이지만 당대에선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원나라 침입 시기를 다뤄 눈길을 끈다.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을 적극 버무린 픽션의 결합. 그 결과물이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는 판타지적 사극으로 귀결됐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려의 박서 장군이 살리타가 이끌던 원나라 군대를 귀주에서 격파하고, 재차 처들어온 살리타를 승장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사살한 건 의미 있는 전공임에도 널리 알려지진 못한 사실이었다. 노미영 작가는 역사책 한 귀퉁이에 찌그러져 있던 사건으로부터 매력적인 드라마를 뽑아냈고 이것으로 이 만화가 생명력을 얻었다.

매력적이고 아기자기한 이야기와 흥미로운 구성, 자기색깔이 분명한 필치까지 압도적이진 않지만 모든 면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좋았다.

살례탑 1

노미영 지음
대원씨아이(만화) 펴냄

3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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