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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윤이형 소설 의 표지 이미지

붕대 감기

윤이형 지음
작가정신 펴냄

110. 형은아, 네가 잘못 알고 있거든. 그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야. 왜 존재하는 사람들의 역사를 지우고 그들이 한 일을 지워? 선배들은 그렇게 말하며 책을 펴서 읽어주고 오래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틀어 보여줬다.

저기 봐. 네가 그렇게 미워하는 선생님들이 뭘 하고 있는지.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쳐서 경찰을 막고 있어. 혐오발언하는 사람들한테 얻어맞고 있다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 그분들도 젊은 시절에 다 했거든? 아니 우리 이상으로 했거든?

✔️너는 이 세상이 지금 이 모양으로 하늘에 서 뚝 떨어져 내린 거라고 생각하니? 우리 전에는 이런 싸움을 한 사람들이 없었을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다 기록되어 있어.

그런 말을 들으면 형은은 되묻곤 했다. 그럼 우리의 역사는 왜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아서 이렇게 흩날리기만 하죠? 왜 우리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서 항상 우리뿐인데요? 아무도 우리에게 힘을 주지 않으니까 우린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경쟁할 것도 고통밖에 없잖아요.

🌱시간이 지나야 해. 서로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일에는 시간이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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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서로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부분이 발견될 때면 논쟁을 하는 데도, 화해하는 데도 다소 시간이 걸렸다. 채이의 친구들과 형은의 친구들은 같은 자리에 함께할 수 없는 관계였다.

여성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관점이 다르고 진영이 달랐다. 몇 번인가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 서로 소개하고 세미나 비슷한 것을 열어보려다 실패한 뒤로 채이와 형은은 오랜 적대를 쌓아온 두 국가의 수장들처럼 피로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말하곤 했다. 이건 우리 힘으로 안 되나 봐.

🌱어쩌면 안 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형은은 말했다. 서로 가려는 방향이 전혀 다른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닌데, 억지로 함께 가자면서 차이를 뭉개버리는 게 옳아? 우리는 자기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당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하자는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자꾸 머리를 눌러 짜부라뜨리려는 손이 있는데 어떻게 그 손을 잡아?

하지만 ✔️만나서 얘기하지 않으면 영원히 평행선이잖아, 채이는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말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걸까? 의제 하나에 쌍둥이처럼 집회가 두 개씩, 그것도 동시에 열리는 게 너는 바람직해 보여? 나는 부조리 해 보이는데. ✔️언제까지나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만 만나고 살면 어떻게 발전을 하지? 우리는 서로의 대립항이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잖아. 우리가 가진 공통점은 왜 중요하지 않아?

147. 형은의 다름이 채이를 화나게 하고 미움을 솟구치게 했다. 체온이, 함께한 시간이, 열이 내렸는지 보려고 서로의 이마를 짚어보던 밤의 기억이 있어서 그들은 가까스로 영원히 헤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들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어렵고 어색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보고, 이름을 말하고, 자기소개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것들을 나눠 갖기 시작할 수 있을까, 채이는 생각했다.

그들은 학점 걱정을 해야 했다. 생활비 걱정을 해야 했고,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어야 했고, 언제 다시 걸려올지 모르는 천의 협박 전화에 대비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내야 했다. 공부를 해야 했다. 그들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세상에는 더 많았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종종 이

붕대 감기

윤이형 지음
작가정신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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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평범한 곳에서 남들은 찾아내지 못하는 반짝이는 사유를 길어 올리는 능력이 진경에게는 있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언어를 배열하고, 사람들에게서 숨은 장점을 끄집어내고, 어떤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사람이라도 웃게 만드는 재능 또한 있었다.

저 아이는 아무래도 작가가 될 것 같네. 소설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시 쪽이 더 어울려. 세연은 부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어버리면 나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할 거야, 생각하기도 했다.

세연은 진경을 동경하면서 남몰래 미워했다. 너는 정말이지 살만 빼면, 좀 꾸미고 다니기만 하면 인기가 많을 텐데. 남자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진경이 떠올랐다. 남자들에게 세연은 편하게 야구와 축구와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생긴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 똑똑하고 재미있어서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지만 '여자'는 아니었다. ✔️그 관계들은 동등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세연은 곰곰이 생각했다.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진경 같은 여자들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 던게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연 같은 여자 역시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들이 세연을 같은 인간으로 존중했다면 자신들의 섹스 경험을, 여자들에게 했던 악행을, 그렇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같은 여자로 세연이 느낄 모멸감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붕대 감기

윤이형 지음
작가정신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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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형은은 한참을 더 울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형은의 어깨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친구라는 그 명랑한 인상의 아이는, 저랑 형은이가 항상 나쁜 일로만 만났거든요, 하고 말했다. 기쁜 일이나 축하할 일로 만날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기쁜 일이 생겼네요.

기쁜 일이 왜 없니, 명옥이 말했다. 너희는 기쁜 일 투성이여야 되는데. 🌱우리 인생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너희 인생을 잘 살아.

붕대 감기

윤이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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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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