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그냥 좀 제발 놔두시오!"
📚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생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만으로 살며 지내다가 결국 아무일도 해내지 못하고 그는 죽어 버렸다. 그는 사는 동안 오로지 자신이 되돌아가게 될 죽음에 대해서만 줄곧 생각하고 자연의 회귀 질서에 철저하게 복종한 사람이다. 지독히도 순결하고, 극단적으로 완고하게 전생에서부터 저승까지 이어지는 인생길을 끝까지 <걸어서> 가버린 그가, 살았지만 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가 나에게 던져 준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라>였다. 살아 있는 순간순간마다 정신과 육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답게 깨어서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의식의 깊숙한 자락에서 꿈틀댔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 그러나 내가 보는 좀머 씨는 옮긴이와는 다르다.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고 그저 생존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자연의 회귀 질서에 복종했다는 표현은 그에게 너무 너그러울지도 모르겠다 그저 더이상 도피할 곳이 없어서 마지못해 택한 곳이 호수였을 뿐. 호수에 들어가는 모습 역시 그가 해 온 대로 '걸어서'였다. 마지막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이야기가 내게 던진 말은 '의미 있게 살아라'다. 그냥 일해서 월급받아 먹고 사는 일 말고, 가치 있게 살고 싶다. 힘들더라도, 보상이 작더라도, 인정을 좀 못 받더라도 의미 있게 살고 싶다.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열린책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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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고증이 엄청난 소설. 묘사도 상세해서 영두와 같이 창경궁, 창덕궁, 원서동 곳곳을 함께 거니는 기분이다.
문화재를 발굴하듯 주인공 영두와 낙원하숙 할머니의 과거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건물을 지어 올리듯이 과거 파편들이 모여 인물의 일대기를 구축해 가는 방식이 이야기를 매우 촘촘하게 만들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책에 빠져들어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망 이후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이들을 '조센 카에리'라 부르며 멸시했었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나라 옛날 '환향녀'들이 떠오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해 조선인 가정부의 도움을 받는 아기엄마 이야기도 가슴에 남았다.
일제의 잔재인 대온실을 철거하지 않고 수리해서 남겨두듯, 과거 나와 악연이었던 이를 완전히 파내어 버리지 않고 조심스레 다가가듯, 나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한번씩 직면하여 개선해 나가듯, 그래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기분 좋게 머물다 돌아갈 수 있게끔 해 볼까, 하고 마음먹게 하는 책이다. 그러나 땅을 파고 과거를 마주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법.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수리 전엔 마음을 단단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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