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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현대사회의 병폐가 긍정의 과잉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타인으로부터의 강제가 아닌, 스스로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통하여 끝나지 않는 고통을 받고 마는 것이 긍정의 과잉이 보이는 병폐란 것이다. 책에 따르면 지난시대는 국가며 사회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던 규율시대였고, 생산성의 한계와 직면하여서 오늘날엔 성과시대로 옮겨온 상태다. 복종하기만 하는 이보다는 스스로가 자유롭다 믿는 이의 생산성이 좋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자기주도적 삶을 살고 진정한 자신이 되라는 신화를 통하여서 사회는 개인에게 교묘한 방식으로 성과를 압박한다. 성과시대의 개인은 규율시대의 복종주체가 아닌 성과주체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저 자신을 채찍질해 끝없는 성취를 향하여 저를 몰아세운다. 이로부터 저자는 할 수 있음으로부터 고통 받는 개인을 이 시대의 인간적 전형으로 추출해낸다.

단점이 없는 저술인 건 아니다. 철학과 생명과학이라는 이질적 체계를 상호작용하는 무엇으로 대하며 도입하는 첫 장은 마케팅적으로는 효과를 발휘했을지라도 타 분야에 대한 저자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항생제의 발명으로 박테리아며 바이러스의 시대가 끝났다는 주장이 무색하게도 10년 뒤 전 세계를 코로나19가 휩쓸었다. 과학의 발달에도 인류가 정복한 바이러스는 천연두 단 한 가지에 불과하다. 미시의 세계는 인간의 오만을 거듭 몰아치고 있다. 저자가 글을 쓸 당시에도 가축관련 전염병의 창궐이며 인수공통전염병의 위협, 균에 시달리는 식물의 멸종이 극심한 시기였다. 저자가 이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면역학으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서로 다른 두 학문이 데칼코마니 수준의 상호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을 테다.

뿐만 아니다. 저자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제 논리로 주장을 충실히 보충하는 대신 여러 학자의 이름과 문장을 가져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이중 대다수가 철학계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이며, 그들의 주장 중에선 책에서 인용된 것과 달리 볼 수 있는 부분도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니체라면 활동과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라며 사색과 멈춤의 상징처럼 제시되는 니체에게서 모험과 역동성과 진취성과 엄격함과 혹독함에 대한 숭상 같은 요소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이름의 인용으로 독자를 윽박지르는 서술 대신에 보다 친근하고 차분한 전개를 이루었다면 이 책이 더 많은 이에게 호응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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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보정치는 폭망했다. 한때 비례대표 투표율 10%를 넘나든 진보정당, 또 교섭단체까지 바라봤던 정의당의 오늘은 국회의원 0명, 대선 득표율 0%대다. 노동, 생태, 복지, 소수자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페미니즘 의제만 붙들고 있단 시각도 팽배하다.

저자는 비례위성정당 난립, 재정적 파탄, 청년여성의원에 쏟아진 비난, 코로나19로 조직이 멈춘 영향, 당대표의 성추행, 물질적 기반 해체로 인한 악순환 등을 하나씩 풀어간다. 이어 진보정당이 영향력을 키우기 어려운 한국의 구조적 문제를 짚는다.

실망이다. 무엇보다 정의당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목이 얼마 없단 게 그렇다. 페미니즘이 다른 의제를 압도한 사실에 대해서도 문제 없단 입장을 견지한다.

납득할 수 없다. 세상이 정의당을 망치기 전에, 그 스스로 망쳤다고 여겨서다. 반성과 분석을 원했으나 변명과 항변 뿐. 정의당, 또 그 지지자와 먼 거리만을 확인한다.

조현익의 액션

조현익 지음
편않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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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은 불행한 아이의 방어기제다. 두터운 외피를 갑주처럼 두르는 일이다. 판단할 수 없는 걸 판단하고 감내할 수 없는 걸 감내하려 힘을 다해 쌓은 벽이다. 오늘의 생존과 내일의 생장을 바꾸는 것이다. 성벽 바깥, 찬란한 미래를.

<새의 선물>은 성장담이 아니다. 차라리 그 반대다. 생엔 의미가 있고 사랑은 아름답다 말하는 이와 소설 속 진희는 대척점에 있다. 기대하지 않음으로 실망하지도 않는 것이 열둘, 또 서른여덟 진희의 생존법이다. 열둘 진희가 외가를 제 집으로 여길 때쯤 아버지는 찾아온다. 서른 여덟 진희는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는다. 구태여 처음과 끝에 불유쾌한 연애를 둔 것도 마찬가지. 성벽 바깥, 그러니까 생이란 늘 악의적이니.

나는 반대한다. 기대 않고 실망도 않기보다 기대하고 실망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그 또한 확신할 수 없는 건 나 역시 생에는 이면이 있다고 믿고 있는 탓이다. 진희처럼.

새의 선물

은희경 지음
문학동네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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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감독 이은혜와 마주 앉은 일이 있다. 그는 영화제가 끝나면 곧 출국할 예정이라 했는데, 한국에선 결혼을 할 수가 없는 때문이라 했다. 동성 간 결혼을 한국은 막고, 미국은 허용한단 이야기. 그러고보면 몇년 전 그런 뉴스를 접한 것도 같았다.

2015년 미국 연방 대법원 결정으로 50개 주 모두에서 합법화된 동성결혼 이야기를 나는 저기 케냐 북부 자연보호구역에서 기린 개체수가 급감한다는 사실처럼 여겼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테니까. 그러나 가까운 이들마저, 존중하고 존경하는 이들까지도 동성애에 혐오를 감추지 않으니 나는 이것이 더는 내 문제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혐오가 인간을 잠식하는 비결이 무지와 무관심, 쫄보근성에 있단 걸 알기에 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레즈비언도 산부인과도 관심 없는 내게 이 또한 사람과 병원의 이야기란 걸 알게 해줬다. 여기까지.

레즈비언의 산부인과

이은해 지음
이프북스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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