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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민음사 펴냄

독서모임 덕에 좀 그럴싸한 책을 읽었다. 고전이 진입장벽이 있다고 한다면, 이 책은 그나마 아주 짧은 분량으로 그 벽을 좀 낮춰준다.(다만, 인물들 이름이 어려워 적어가며 읽긴 했음…)
그리고 고전이라기엔 소름끼치게 지금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 놀랍다. 결혼생활을 묘사한 부분은 심지어 굉장히 웃김. 시대는 바뀌어도 아내 잔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나보다.

그럼 이제 책의 주제인 ‘죽음’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인간은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사람은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온통 머릿속에 코끼리생각으로 가득 차는 것처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죽음이 나와 무관한 이야기같다. 그럼에도 내가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면, 아마 피하지 못한채 죽음만 똑바로 응시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죽음이 주는 겪어야만 하는 고통이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난 내가 원하는 죽음의 모습을 세가지로 정리했다. 하나, 역시 건강하게 살다 죽는 것이다. 제발 아프지 않게 죽고싶다. 아프더라도 짧게 아프고 죽는것이 내가 생각한 더 바랄 것 없는 이상적인 형태의 죽음이다. 둘, 나의 죽음을 남들이 기회라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셋, 죽음을 앞두고 삶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 죽음을 앞두고 삶을 돌아봤을때 후회만 남는다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것인지 이반 일리치를 보며 느꼈다. 육체적 고통에 정신적인 고통까지 주고싶지는 않다. 현생을 잘 살고싶다.

당신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죽음이 어떤것인지 단정짓기는 어렵겠지만 한번쯤은 죽음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일독을 권한다.

✏️
P.8
집무실에 모인 이 신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모두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판사들 당사자나 지인들의 인사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였다.

P.9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P.17
‘꼬박 사흘에 걸친 끔찍한 고통과 죽음. 그건 지금, 어느 순간이든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생각에 그는 일순간 섬뜩해졌다.

P.39
항상 그렇듯이 아무리 살기 좋은 집이어도 딱 방 한 칸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또 수입이 늘어나도 딱 얼마가, 그러니까 500루블 정도가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

P.42
업무상의 기쁨은 자존심의 기쁨이었고, 사회생활의 기쁨은 허영심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의 진정한 기쁨은 빈트 놀이의 기쁨이었다.

P.51
입속에서는 점점 이상한 맛이 느껴졌고, 뭔가 역겨운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식욕이 떨어졌으며 기력도 몹시 쇠약해졌다. 자신도 자신을 속일 수조차 없었다. 뭔가 끔찍하고 낯선 것, 이반 일리치의 인생에서 지금껏 겪은 적 없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뭔가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이 이 사실을 알 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의지도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전처럼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반 일리치는 그 점이 제일 괴로웠다.

P.54
이반 일리치는 자기 탓에 분위기가 이렇게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이반 일리치는 자기 삶에 독이 스며들었고, 그것이 남들의 삶으로까지 퍼지고 있음을, 이 독이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그의 존재 전체로 침투하고 있음을 의식했다.

P.69
한번은 용변기에서 일어난 뒤 바지를 추켜올리다가 그만 기운이 빠져서 푹신한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벌거벗은 채 핏줄만 툭툭 불거진 힘없는 넓적다리를 바라보며 공포를 느꼈다.

P.73
“우리는 모두 죽게 될 텐데요, 수고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그의 말에는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일이니 별로 수고롭거나 버겁지 않고, 또 자신이 이런 처지일 때 누군가가 같은 수고를 베풀어 주길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거짓 말고도, 혹은 그 때문에 더더욱 이반 일리치를 괴롭힌 것은 아무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불쌍히 여겨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기나긴 고통을 맛본 뒤에 이반 일리치는 때때로 이렇게 고백하기가 창피스럽지만, 누구든 자기를 아픈 아이처럼 그저 불쌍히 여겨 주길 무엇보다 바랐다.

P.75
아침인지 저녁인지, 금요일인지, 일요일인지 아무 상관 없었다, 전부 그대로이니까. 단 한 순간도 잠잠해지지 않는 찌르는 듯 괴로운 통증 역시 그대로였다.

P.89
결혼이란…… 그토록 무심코 한 결혼은 환멸과 아내의 입냄새, 관능과 가식뿐이었다!

P.97
자기가 삶을 잘못 살아왔다는,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그런 가정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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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따뜻한 사람은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다감하나, 다정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좋은 책을 가까이하면 보드라운 말씨를 한 내가 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조금 더 따뜻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책을 읽는다. 타고 나지 않았기에 학습이라도 해서 더 나은 내가 되고싶은, 나의 작은 열망이다.

나는 이처럼 타고난 내 모습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여러 방면에서 이상적인 모습의 나로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나를 있는 나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완벽주의 성향의 타고난 기질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완벽주의라고 하기엔 사실 완벽하지 않다. 거기서 오는 괴리감이 나를 더 움츠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갖지 못한 걸 가지고 싶어할 때, 사람은 찌질하고 초라해진다. 그런 찌질이는 나만 알던 나의 모습이었는데...

작가가 나를 사찰했다!! 정말 내가 한 생각인데, 어쩜 이렇게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작가의 글을 읽으며 아, 모두가 똑같나보구나. 모두가 다 이렇게 불안하구나. 불안하지만 그냥 버텨내는 인생이구나 싶었다. 안도감이 들고 그 자체로 위안이 됐다. 나와 같은 불안한 인생을 사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
P.26 # 안락과 불쾌
속수무책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안락하고 불쾌하다. 쉬어도 된다는 자아와 무책임하게 누워만 있으면 안된다는 자아가 답도 없이 싸운다. 산책이라도 나가자는 생각을 두어 시간 한다. 의미 없는 영상들이 지겨워지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킨다. 오래된 동네를 걷는다. 상쾌하고 불안하다.

P.32 # 평양냉면과 속단
나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 사람에는 나도 포함된다. 나도 나를 모른다. 불면을 고백한 날, 숙면을 했고 흰색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날, 어울리는 흰옷을 찾아버렸다. 그럴때마다 다짐한다. 속단하지 말자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말자고. 세상도, 나 자신도. 인간은 평생 낙인을 찍으며 사는 존재다. 단편적인 모습 몇 개로 압축하는 존재. 그러나 무언가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짧게 듣고, 좁게 본다. 지레짐작하지 말자. 신중하지 않은 결론은 세계를 너무 좁게 만든다. 확장하는 나로 살고 싶다. 성급하지 않은 나, 속단하지 않는 나로.

P.43 #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더 두려운 거야
좋아하는 일을 마주하면 두려운 마음이 비집고 올라올 때가 있다. 잘하고 싶으니까. 좋아하는 걸 못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 그걸 좋아하는 만큼 두려움도 큰 거야.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더 두려운 거라는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순간 도망치지 않기를 바라서.

P.94 # 강인한 마음
강인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늘 흔들린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산다. 늘 직간접적으로 평가 당한다. 칭찬받고 싶지만 매번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다. 괜찮다고 그런 평가도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자신을 다독여 봐도 잊히지 않는 뾰족함이 있지. 참을 수 없는 나의 부족함. 부족함을 활자로 보고 느끼고 마음이 떨려서 다 포기하고 싶고. 노력조차 버거울 때가 있다. 부족함을 인정하기가 어려운 순간들. 이 부족함을 평생 채워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함이 왈칵 밀려드는 순간들도. 내가 늘고 있는 건 실제 실력보다도 늦게 우는 법과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는 법인 것 같다. 잘하는 걸 더 잘해 보이도록 행동하는 법고 부족함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법. 다 잘하고 싶지만 견딜 수 없이 부족한 것들이 넘쳐나지. 그런데도 그만둘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냥 떨리는 마음을 끌어안아. 강인하지 않아도 버티는 힘을 기르고 있다.

P.104
어른의 속성은 무엇일까. 아이의 마음은 또 무엇이고. 자라나는 마음과 성숙한 마음, 시드는 마음은 어느 경계선에 있을까. 하나의 경계선은 책임감이겠지. 책임감을 깨닫지 못한 마음, 책임지는 마음, 책임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 자라나는 마음은 몹시 짧았다. 시드는 마음은 너무 이르게 찾아왔고.

P.122
아무것도 아닌 것에 무너진 날에는 아무것도 나를 일으킬 수 없다. 나를 쓰러트린 대상에 형태가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P.137
사랑하는 것들은 상처를 준다. 이게 참 잔인하게 들릴수는 있지. 그렇지마는 약간의 상처조차도 주고받지 않은 사이는 결코 깊은 사이가 될 수 없다. 잔인한 진실이다.

P.143
슬픔을 와락 느끼는 순간과 그것을 쓰는 순간과 읽히는 순간은 모두 다른데, 도저히 언제 괜찮고 언제 괜찮지 않은지 무 자르듯 할 수 없었다.

P.168 # 인생의 단맛
고생 끝에 맛보는 단맛이 더 달긴 해. 솔직히 운동하고 먹는 음식이 더 맛있고 일하고 먹는 술이 더 시원하고 시험 끝나고 노는 날이 더 즐겁다. 견뎌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많다. 인생에서는. 그런 쓴맛들이 아예 없었으면 하다가도, 그러다가도 그런 게 없으면 어떻게 인생인가 싶기도 하고. 그런게 없으면 단맛이 달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기도 해. 그러니까 견뎌내고 한번 가보자고.

P.223 # 오히려 좋아 💕
오히려 좋아. 유행처럼 번진 이 말이 무척이나 좋다. 비 와? 오히려 좋아. 시원하고 좋지, 뭐. 비행기 결항? 오히려 좋아. 호캉스, 진행시켜! 오히려 좋은 점을 찾다 보면 정말로 좋아지는 것 같다. 불행은 없었던 일이 되고 행복만 가득하게 된다. 그런 친구가 있다. 내내 오히려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친구. 옆에 잇다 보면 말이 옮는다. 예측 불가했던 사건이 튀어나오면 그는 외친다. 야, 오히려 좋아. 나도 말한다, 그래 오히려 좋지. 말은 옮는다. 좋은 사람, 좋은 책을 가까이하면 보드라운 말씨를 한 내가 된다. 좋은 것을 가까이에 두고 싶다. 나는 잘 흡수하는 사람인 걸 알기에. 환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환한 사람을 가까이에 두면 된다.

무명의 감정들

쑥 지음
딥앤와이드(Deep&WIde)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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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혀누님의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게시물 이미지
날이 밝은 낮 시간에 읽으면 문상훈의 감성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것만 같아 잠들기 전 새벽 시간에만 책을 폈다.
낮에 모아 밤에 펼쳐냈다는 그의 글은 철저하고 지독한 자기검열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느낄법한 평범한 감정들을 여러 번 썼다 지운 단어들로 엮은 글을 읽으며,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나 쓰지 못하는 책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장에 닥치는 대로 적었는데, 완독 후 강렬하게 느낀 감정들을 3가지로 정리해보겠다.
첫 번째는 학창시절의 향수이다. 학창시절 새벽까지 라디오를 들었던 때가 생각이 났는데, 그 시절이 소중한 이유는 그때를 자양분으로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문상훈의 글을 읽으며 15년 전의 내가 떠올라 애틋한 감정이 들었다.
두 번째는 실망. 회사에서 나는 작은 실수라도 할까 봐 조바심을 내며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혹여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잠들기 전까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찾고, 더 나아가 찌질하게 곱씹으며 자신을 질책하는데, 문상훈은 스스로 실망할 때 더 나은 내가 되는 기회라고 따뜻하게 말해줬다.
마지막은 짝사랑이다. 고백하지 못하고 끝난 짝사랑이 용기내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후회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사랑의 가장 본질은 어쩌면 짝사랑이 아니었을까. 짝사랑의 완성은 고백이 아니라 내 안에서 하얗게 소실될 때라고 말해주어 다시 보니 나의 짝사랑은 완성형이었나보다.

✏️
P.32
밤에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다짐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것처럼 적겠다. 오늘의 기분과 생각 중에 가장 후진 것들을 모아 이곳에 남길 것이다. 이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내 감정의 림프선 쓰레기통이다.

P.43
<내 모든 결핍들에게> 나는 내 나쁜 모습들이 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좋은 모습도 너 덕분이었어. 내가 아무리 너를 미워해봤자 밀어낼 수 없는 작은 방에 같이 지내는 기분이야. 그래서 이제 받아들여 보려고. 이제는 안 미워하겠다고 할 수는 없지만 노력해볼게. 적어도 너를 인정할게.

P.45
밤을 즐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일을 축내서 오늘의 아쉬움을 희석하는 사람들. 밤에 하는 생각들은 대체로 농도가 짙다.

P.46
일어날 땐 움푹 깊어지는 동해바다처럼 번뜩 눈이 떠지고 잠드는 시간에는 서서히 잠겨 드는 서해바다처럼 오래오래 차근차근 잠들면 좋을 텐데 나는 자꾸 반대로 하게 된다. 아침은 뭉그적거리며 두세 시간이 지나도 잠에서 허우적대고, 밤에는 발을 헛디뎌 첨벙하고 폭 빠져 마취한 것처럼 잠이 든다.

P.54
6년 남짓한 교복 시절을 자양분으로 평생을 먹고산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더 알아가고 싶은 호기심과 잘하고 싶은 욕심은 십 대 때 듣던 라디오와 친구들의 웃는 얼굴에서 찾았다.

P.56
어릴 때는 아직 간지러워서 못 쓰고, 그 또래가 되면 괜히 싱거워서 안 쓰고, 시간이 지나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못 쓰는 단어. 청춘.

P.57
능숙하고 잘하면 왠지 청춘에서 멀어진 것 같아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능청스러운 모습이 아저씨 같아 나는 계속 부끄럽고 싶다. 어릴 때는 미숙함과 아쉬움을 감추려고만 했는데, 이제는 늘 부족하고, 미숙하고, 또 아쉽고 싶다.

P.58
커가면서 알게 된다는 세상 물정과 현실, 한계를 되도록 모르고 싶다.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과 되는 것을 분간하지 못해서 바보같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말이 겸손의 너스레가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믿어서 실패할 때의 데미지가 작았으면 좋겠다. 성공이 어색하고 실패가 익숙하면 좋겠다. 시도해온 일들보다 도전해볼 다음 기회가 훨씬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살다가 내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때가 왔을 때 그 이유를 싱겁게 나이나 세월에서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는 것을 인생의 패배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도전할 힘도 용기도 없는 것을 굴복으로는 더더욱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P.64
실망은 그 사람에 대한 업 앤 다운 게임에 불과하다. 나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업 다운으로 영점을 향해 가는 것뿐인데, 나는 상대가 외치는 다운이 무서워 내 숫자를 바꿔갔다. 나를 너무 좋게만 보는 것은 나쁘게만 보는 것만큼 안 좋다는 것을 몰랐다.

P.66 💕
누군가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을 때 내가 먼저 해야하는 것은 기대에 못 미친 나도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잘 나온 사진만 내 얼굴이 아니듯이 기대에 부응한 나만 내가 아니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실수했을 때의 나를 부정하면 앞으로 실망할 일만 있다. 상대방을 실망시켰을 때 더 자신을 객관적으로 내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해야만 그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할 수 있다.

P.92 💕
내가 기억하는 내 평생 동안 행복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추앙하다 보니 행복에 대해서 어렴풋한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 행복한지를 되도록 떠올려보지 않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내가 지금 집중을 하고 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 집중이 끝난 순간인 것처럼, 행복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맹목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 것이 좋겠다. 타인의 행복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의 행복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다.

P.114
이를테면 자기혐오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싫어하는 것도 나여서, 내가 봐도 별로인 내가 감히 누군가를 싫어할 자격이 있나 생각합니다.

P.115
언젠가 맑고 바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명조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P.123
겪은 만큼만 보고 본 만큼만 느끼고 느낀 만큼만 정직하게 담아야 하는데 자꾸 힘이 들어간다. 그 괴리를 줄이려면 말을 천천히 하고 글을 조심히 적거나 말고 글만큼 내 마음의 무게를 자주 재봐야 한다. 때마다 다짐하지만 또 때마다 반성한다.

P.127
사랑 중 제일은 짝사랑이 아닐까 한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면 사랑 중 제일은 단연 짝사랑이라고 믿는다. 손을 잡지 않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소유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짝사랑을 해본 사람을 사랑한다.

P.128 💕
사랑의 완성이 무엇일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도 짝사랑의 완성은 고백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라면 너무 상투적이고 백년해로라면 너무 싱겁다. 짝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이란 마음을 전달하는 때가 아니라 내 안에서 하얗게 소실될 때가 아닐까 한다. 대가를 바라고 호의를 베푸는 것을 함부로 사랑이라고 하지 않듯이 대답을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짝사랑의 완성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마음을 주는 법을 알아야 받을 수 있다.

P.130
너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더 잘 살기로 다짐할 때 우리는 마주 보는 것보다 더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문상훈 지음
위너스북 펴냄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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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은 무엇이고 과연 비정상인건 무엇인가.
장애없이 온전한 몸을 가지고 살아가면 정상인거고,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인가. 사람들은 내가 처하지 않은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의 처우나 문제에 관심 가지는 사람도 약자일 뿐이다. 나조차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 읽는동안 약간의 죄책감을 가졌다.

작가는 이 소설을 인간, 장애인, 동물,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따뜻한 시각에서 써내려간다. 내가 로봇이었다면? 이라는 상상을 종종하게 됐는데 결론은 인간이 누리는 모든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이어졌다. 인간이 다채로운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고 이를 표현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 책을 읽는동안 아주 사소한 것에도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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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3
보경은 언젠가,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소방관에게 말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 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P.159
복희는 묻고서 멍청한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진화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의 결과물일 뿐이다. 심지어 상아의 탈락은 오로지 인간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것이 좋은 진화일 리가.

P.209
투데이는 달리고 나면 지친다. 콜리는 에너지를 얻는 수단이 외부에 있지만 모든 생명은 에너지 동력원이 몸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면 생명은 쉬어야 한다. 에너지를 회복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잠을 자는 것이나 식사를 하는 것이다.

P.220
보경이 은혜에게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이 사소한 불편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은혜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너의 정상성은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너를 규정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이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지은이) 지음
허블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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