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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틂 창작문고 11)(양장본 HardCover) (윤해서 중편소설)의 표지 이미지

윤해서 지음
문학실험실 펴냄

여러 타인의 삶 속 한 인물의 이야기를 엮으면 서사가 된다. 그 인물의 인생이 탄생한다. 어쩌면 편협한 사고의 결과물로서 못난 성품의 사람일 수도 있겠고. 매력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고. 특별하거나 지난할 정도로 무색무취의 인간일 수도 있겠다. 윤해서의 그는 적당한 인간이다. 오히려 적당해서 평범하지 않은. 그냥 그런. 그러나 그냥으로 설명하기엔 약간은 어려운 사람. 뭐 그럴 수도. 우연과 필연을 제멋대로 넘나들고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혹은 그러한 인상을 주는—사람. 우리는 서로의 삶의 대변자이다. 서술자이다. 나는 너가 없으면 완전하지 못하다. 상호 보완의 관계.

“네가 욕망하는 걸 내가 욕망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분노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물론 너는 나를 알 필요도 없고. 지치면 눈을 감아. 악을 쓰고, 울지 말고. 혼자 잠들 줄 몰라서 우는 애처럼 굴지 말라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문장. 나는 ‘그’를 간직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며 내가 마치 이방인이 아닌 책 속 등장인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나와 실제로 관계를 맺은 사람도 아닌데 어째서 이토록 수치심이 드는지.

“신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처럼. 부재의 방식으로 편재하는. 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간은 꼭 신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구나. 문득 혼잣말을 하다가. 나도 엄마처럼 혼잣말을 하는구나. 혼잣말도 혼자 못하게. 엄마가 또. 서봄은 당구대를 가만히 내려보다 혼잣말을 했다. 각자 살자며.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살자며. 당구대에 눈물이 떨어졌다.”
이 문장이 적힌 페이지를 읽을 때—1부에서와 2부에서 같은 문장을 보고 같은 충격을 받았다, 동일한 크기로—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신과 같은 방식으로, 내 곁에 실재하지 않으나 항상 깃들어 있는. 눈물이 났다. 어디에나 있어서. 있어줘서. 각자 살지 않아서. 우리가 우리를 읽어내고, 적어내리고, 기대어서.

책을 목차부터 보는 습관이 있다. 열 중 여덟은 가지고 있을 법한 흔하디 흔한 습관이다. 아무튼 오늘도 책을 펼쳐 목차를 보았고, 이 중편 소설은 2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1부 그, 2부 그. 그와 그. 독특한 이름 구성이다. 읽어보니 더 독특했다. 1부와 2부는 평행 세계처럼 인물들의 성별 반전, 그러나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어찌 보면 2부는 1부의 인물만 전환해서 나타낸 것 같다가도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하고. 왠지 모르게 부럽기도 하고. 당신은 수많은 이들에게 읽혔고, 읽힌다. “그는 켜졌다,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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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부조리나 상황, 감정 등을 개인적 경험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다정한 방식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직시하게 도와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인종 차별에 대한 것, 현대 사회의 만성적인 외로움, 재정난과 여유의 상실을 조화롭게 풀어낸 이야기. 단편인 게 아쉬웠다. 남은 페이지 수가 줄어들수록 이 이야기의 끝이 나지 않길 바랐다. 라비우와 링과. 입술과 혀, 혹은 입술과 단어. 혀 끝까지는 미끄러지듯 단어가 풍만하게도 넘실대는데. 왜 입술 밖으로 발화되는 순간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사랑이 싹트기도 하는 것인지. 왜 생각과 (발화 시점, 변질되는 뜻) 같지 않은지. 고질적으로 앓아온 외로움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김서해만이 도출해낼 수 있는 답을 읽었다.

“나는 가끔 내가 실망으로만 이루어진 사람 같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15p)” 화자가 나와 참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그와 같이 궁핍하지 않으나. 내 수많은 후회와 고민, 인연의 누락, 관계로부터의 상처들만이 나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 같으므로. 약간은 무례할 수 있는 동질감. 그리고 (기간제였던) 브라질 친구 이네스. 이들이 일구어내는 관계가 내겐 너무 소중해보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며 내게 소중한 관계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던 날들이 생각났고—물론 현재진행형이다—그와 더불어 문제의 해결에 필요할 약간의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나는 관계에 의존하는 법을 버릴지도 모른다. 그 관계에서 얻어낸 것들은, 관계의 끈이 내게서 떨어져버리더라도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에. 내 불안과 함께 내 몸을 이룰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내게 남겨질 부속물이므로.

라비우와 링과

김서해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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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서의 움푹한을 읽어본 적 있는 터라 여러 인물들의 단편적인 글들이 유기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애초에 짐작하고 읽었다. 모르고 읽었더라면 조금은 헤맸을지라도 더 즐겁게 읽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알고 읽었기에 시야에 잡히는 것이 더 많아서 즐거웠을 수도 있다. 이미애, 이미소. 정애길, 모로. 그리고 다시 미소와 현웅. 모로와 선주. 선주와 미소. 각자의 슬픔. 너는 타인에게 네 진실된 목소리를 들려주어 본 적이 있니. 자꾸만 그런 환청이 들리는 기분으로 읽었다. 대화 없는 사랑은 사그라드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미소와 현웅은 그렇지 않았고. 서로의 목소리를 갈구하며 사랑을 이어왔다. 나는 그것이 서로의 진실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애길과 모로, 애길과 미애, 미소. 그들은 음악으로 목소리를 대신한다. 선율에 영혼을 얹고, 서로에게 파동을 남기는 방식으로 사랑을 나눈다. 모로와 선주 또한 음성의 파동 얘기를 나누며 사이가 깊어지고, 선주와 미소는 수신인이 잘못된 목소리와 부름을 통해 유대감을 얻는다. 윤해서가 적어내는 관계란 잡아내기 어려우면서도 어딘가 실존하리라 확신하게 하는 믿음을 준다. 나는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의 목소리도 놓치고 싶지 않단 생각을 한다.

“무서워요. 내가 모른 척하고 있는 걸까 봐.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모르고 있는 걸까 봐. 나한테 이 목소리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데 내가 그걸 계속 못 알아차리고 있는 거면 어떡하죠?”
“네 목소리는 루카스의 것도 내 것도 아니야. 독일의 것도 한국의 것도 아니란다. 그건 오직 네 것이야, 아가.”
“사는 게 결국 미로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미로를 지으면서 미로에 갇히는 일, 갇히기 위해 미로를 짓는 일.”

암송

윤해서 지음
arte(아르테)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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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슬픔이 있다 따스해서 슬프고 더 나아가 행복한 기분이라 허무한 경우가 있다 상실과 죽음으로부터의 나직한 공포에 난데없이 우울해지는 때가 있다
그 난데없음에 대한 고백 일지

입술을 스쳐간 눈물들

“좋았어요 울고 싶은 날들이 많았거든요 손끝은 모두 천사가 됐을 거예요”

내가 울며 보내준 모든 말단들은 천사가 됐을까

약점이 곧 정체성이 되고 수많은 구석들이 개체를 이룬다

잔잔한 줄로만 알았던 시들과 그 이미지를 깨부수는 혼란함, 괴로움, 옅은 숨에 가려진 불구덩이…

그의 시는 “바람에 영원히 불어날 것 같고 세상의 빈틈을 채울(당신과 나는 한 뼘, 내 눈과 내 깊은 곳은 1파섹)” 것 같다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내가 읽음으로써 나의 세계로 그렇게 빈틈없이 구석구석…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이상함은 동질감과 연민 애틋함 친밀감 익숙함으로 전환된다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의 공통 분모를 찾는 일이 기껍다 그의 무사유가 유사한 사유가 되고 내 사유를 불러일으키므로 나는 그를 본다 그는 내게 ‘들킴’을 당하고 나 또한 그에게 들키므로 그는 나를 볼 수 있다
이 시집은 우리의 서사 같다
보다 긴밀해질 수 있다 그와 나는

“너는 다음과 같이 써라. 망해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일어서라. 손목에 언동을 덧칠해라. 기도가 될 수 없는 기도를 해라. 빈볼이 네 안면을 강타할 때까지. 너는 너와 함께 죽을 시를 쓴다. 너는 마지막 문장의 다음 문장을 쓰며 네 생의 첫 잠에 빠지기로 한다. 이 발견은 누군가의 몫으로, 다른 누군가의 슬픔에 맡긴다.(부록)”

입술을 스치는 천사들

이날 지음
아침달 펴냄

4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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