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휩쓸 때마다 벼들은 초록빛 몸을 옆으로 누이며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벼들은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았다. 허리가 반으로 휘어지는 고초를 당하면서도 서로서로 의지해 가며 다시 허리를 세우고는 했다.
#.들녘은 온통 황금빛으로 넘치고 있었다. 여름의 그 짙은 초록빛은 다 어디로 바래고 끝간데 없는 들녘은 정말 금을 녹여 붓기라도 한것처럼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황금빛에는 진짜 금빛이 품고 있는 찬란하면서도 고아하며 거만스럽고 도도해보이는 그 이상야릇한 광택은 없었다. 광택이 없는 들녘의 황금빛은 수수하고 친근했으며 푸짐하고 넉넉했다.
하늘은 사람의 목숨줄을 이어가는 알곡의 소중함을 일깨우려고 그런 황금빛 포장을 한 것일까, 아니면 하늘은 진짜 금이라고는 만질 기회가 없는 가난한 농부들의 마음을 헤아려 그런 황금빛을 흠뻑 내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여름의 폭염 속에서 농부들이 수없이 떨군 피땀을 벼들이 빨아들여 피땀에 숨겨진 붉은색이 초록색과 섞이게 되면서 초록색은 서서히 황금색으로 변하게 된 것이었을까.
#.세월은 험해도 사람은 이렇게 가지치며
살아내는 것이라 싶었다
#.사람이란 지푸라기 하나에도 마음을 담으면
그것을 부처님이나 신령님보다 더 믿고 살게 되어있었다.
#.절기에 앞서 홀로 부지런한 것이 사람이었다.
#.4월 한낮의 들녘은 아지랑이로 가득 차 있었다. 햇발이 진해질수록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은 더 현란하게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지랑이의 실줄기들은 멀고 먼 들녘끝까지 겹쳐지고 또 겹쳐지며 아른거리는 몸짓으로 끝없이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겹겹의 아른거림 속에서 멀리있는 사람들도 아른거리고 푸른 들녘도 아른 거리고 맑은 하늘도 아른 거렸다. 천지에 가득한 그 아른거림은 꿈결인 양 황홀하면서도 서러운 하소인 양 슬픔이 깃들여 있기도 했다. 그 슬픔은 서러움 깊은 사람들의 탄식 같기도 했고 한 많은 사연 품은 넋들의 승천 같기도 했다. 그건 기실 굶주려 배고픈 사람들의 한숨이고 한탄이기도 했다. 아지랑이가 그리도 숨막히게 흐드러지면 보릿고개의 배고픔도 병이 되도록 사무쳤다. 이미 죽으로도 끼니를 때울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부황이 들고 어질병을 앓았다. 그 배고픈 병이 든 눈으로 아지랑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은 어질병을 도지게 했다.
그 사람들은 속 메스꺼운 어지럼증에 휘둘리며 하늘을 향해 한숨짓고 한탄을 토했다. 배곯고 사는 기구한 팔자를 쓰라려 하고 아파하는 그 한숨과 한탄은 풀릴 길 없는 채 아지랑이에 실려 멀고 먼 하늘로 스러져 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