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규 선배는 좀 차가워요.”
“방송만 끝나면 휙 가버리시더라고요.”
하지만 주방장이 요리를 내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다 먹어버리면, 손님들은 무슨 맛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방송도 요리와 같다. 주방장이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재료가 신선해야 하고, 특히 첫 맛이 중요하다. 대기실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미리 얘기해버리면, 정작 카메라 앞에서 내어갈 수 있는 건 한 김 식은 반찬들뿐이다.
몇 차례 오해와 해명을 거치고 나니 사람들도 나를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내 침묵은 내가 무례해서도 아니고 다른 출연진을 무시해서도 아니다.
공연 전에 악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용 그림에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 넣기 전에 잠시 붓을 멈추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지 마라.
윤식과 형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70퍼센트만큼만 하고 30퍼센트는 내일을 위해 남겨두라고. 다들 오늘만 사는 것처럼 매순간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지만, 한 번에 아이디어를 100퍼센트 쏟아붓지 말고 30퍼센트는 아껴뒀다가 다름에 써야 한다. 매번 가진 것을 전부 소진해버리면 오래 가기 어렵다. 그래도, 남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소리를 탱자탱자 게으름뱅이가 되라는 것으로 착각하면 큰일난다.
지금 무언가에 100퍼센트를 쏟고 있는가? 잠시 멈춰보라. 70퍼센트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나머지 3-퍼센트를 비축해둬야 번아웃을 피할 수 있다. 잘 모르는 것은 만약을 위해 아껴두는 것, 그것이 사회인의 지혜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출발하는 선택은 없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마치 공기처럼 보이지 않게 우리를 어떠한 방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극장이었다. 어디를 가든 매일 지나치던 극장들, 영화 속 주인공들,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무한한 세계들.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연극영화과로, 영화로 이끌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극장 삼거리에서 자라났다. 누군가에게는 도서관이, 누군가에게는 바닷가가, 누군가에게는 기차역이 있었을 테다.
어머니가 극장 의자에서 잠든 소년을 찾으러 왔을 때,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예고편이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잠에만 푹 빠져있었다. 여러분의 극장 삼거리는 어디인가? 매일 지나치는 길과 늘 보이는 풍경, 자주 들어 익숙한 소리... 그것들이 당신을 이끄는 곳은 어디인가?
계속되는 낙방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동기들이 옆구리를 찔러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그맨 콘테스트에 나가봤다. 재미로 경험 삼아 해보자 싶었는데, 1981년 MBC 제1회 라디오 개그 콘테스트에서 MBC 공채 개그맨 1기로 덜컥 합격을 해버렸다. 물이 흐르다 막히면 새로운 길을 뚫듯이, 배우의 꿈이 막힌 자리에서 마법처럼 코미디언의 길이 열렸다. 신기한 일이다. 방법은 언제나 있었다.
처음에는 방송국 구석구석을 누비며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담배 심부름부터 커피 타기, 도시락 배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다가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당시 코미디는 세트장에서 짜여진 대본으로 연기하는 콩트 코미디 위주였는데, 나는 실내보다 야외가 더 좋았다. 정해진 대사보다 즉흥적인 실제 상황이 더 재미있었다. 그때의 야외 촬영 경험이 <건강보감>과 <몰래카메라>, <양심냉장고>, <이경규가 간다>를 가능하게 했다. 신인 때부터 길거리에서 시민들과 가깝게 마주하고 부딪쳤기에 야외에서 시작된 버라이어티 실험들을 소화할 수 있었다.
코미디언으로 살아온 45년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RMeo 연극 오디션에 떨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설령 요행으로 연극 무대에 올랐더라도 코미디언만큼 나의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떤 실패도 영원한 실패는 아니다. 여러 실패의 문을 닫아봐야 내가 기다려온 문을 만났을 때 그 안을 과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다.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즐기는 사람은 그저 즐길 뿐이다. 진짜 강한 사람은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다. 70퍼센트만 보여주면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다. 100퍼센트로 초반부터 퍼부어서 금방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보다 꾸준히 오래가는 것이 더 현명하다.
전쟁터를 생각해보라.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구십 대의 6.25 참전용사만이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장군이든 병사든 살아남아야 한다.
조용필 선배를 보라. 일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앨범을 내고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다. 20집이 넘도록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무대를 갖고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술자리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그날 밤의 진실을 기억한다.
진정한 승리는 속도가 아니라 지속하는 힘에서 나온다. 코앞의 이익에 목숨을 걸지 말자. 살아남은 사람, 마지막까지 남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승자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
<2022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오랫동안 지켜본 바로는, 대부분의 선배님들이 이 상을 받고 방송계를 떠났다. 그러니까 이건 ‘이제 떠나라’는 메시지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날 내가 아니다.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 박수 칠 때 왜 떠납니까? 한 사람이라도 박수를 안 칠 때까지, 그때까지 활동하겠습니다.”
회사에는 ‘명예퇴직’이 있다. 하지만 퇴직에 무슨 명예가 있나? 그냥 ‘퇴직’일 뿐이다. ‘명예’라는 말을 붙여서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는 건가?
프로그램 마지막 회를 녹화할 때면 PD나 작가들이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말한다. “유종의 미가 어디 있어? 그냥 유종이지. 끝나는데 뭐가 아름다워? 이미 끝난 건데, 쫓겨나는 건데, 미는 없어.”
왜 끝을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할까? 해피엔딩, 명예퇴직, 유종의 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수식어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면 끝이 오기 전에 끝이라서가 아닌, 진짜 아름다움을 만들어보자.
당신도 나도 언젠가는 끝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를 굳이 아름답게 포장할 필요는 없다. 끝나면 그저 끝인 것.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국립공원 등의 숲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아름답다'와 '슬프다'같다.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장엄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숲과 산과 나무는 형용조차 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나무의 허리를 긁어놓은 날카로운 자국들은 빼앗겼던 나라의 자국같아서 슬퍼진다. 또 어떤 산은 그 시절 헐벗게 되어,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숲을 살린 과학자 현신규』는 바로 그 숲을 지킨 이의 이야기다. 마음이음의 '지식잇는아이'시리즈는 내용도 구성도 다 좋지만, 특히 우리가 흔히 접하지 못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담아내는 것이 가장 좋다. 마음이음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를 이름. 현신규. 더욱이 이 책은 '현정오'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산림과학부 교수님께서 감수하셨는데,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 현신규 과학자의 아들이라 더욱 뜻깊다.
향산 현신규 선생님은 나무가 좋아 호까지 '나무와 더불어 살겠다'고 지었으나, 처음부터 그것이 꿈은 아니었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할 수 없이 농림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나무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주어진 자리에서 한결같이 살아가는 나무들을 깨닫고 난 후에야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또 시련을 겪는다. 빼앗긴 나라에서는 나무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고, 나무 연구조차 그들의 목적대로 흘러가야했다. 하지만 헐벗은 산을 위해 소나무를 끊임없이 연구하였고, 마침내 리기다 소나무와 테다 소나무의 교배종을 발전시켜 '리기테다소나무'를 만들기에 이른다. 또 우리나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한국 포플러' 역시 현신규 과학자의 연구결과로, 이 역시 헐벗은 한반도를 채우기 위한 그의 노력이였다. 그 외에도 그는, 그 이름을 따 '현사시'라고 불리는 은수원사시나무 등으로 우리의 헐벗었던 한반도에 푸른 옷을 입혀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유엔의 말대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라는 타이틀은 불가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숲을 살린 과학자 현신규』를 읽고 난 후 바라보는 산은 어제의 산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모든 것들은 과거 누군가의 노력과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해가 뜨고, 햇님이 비치는 이 풍경자체가 감사하다고 느껴진다.
최근 큰 산불로 여러 지역이 피해를 입었다.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분들이 많기에, 저 푸른 산이 더 쉬이 지나쳐지지 않는다. 어느 방향을 둘러봐도 푸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감사함을 잊지말아야겠다고, 저 푸른 산들을 잘 지켜야한다고 다짐했다. 지금, 더 절실히 읽히는 『우리 숲을 살린 과학자 현신규』. 이 책을 더 많은 이들이 읽고, 우리의 작은 실수가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시드볼트 : 전세계에 딱 두곳, 노르웨이와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씨앗금고인 시드볼트. 우리나라 시드볼트의 정식명칭은 ”종자장기보관소”로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다. 주변에는 백두대간수목원과 호랑이숲 등이 함께 있어 아이와도 함께 가보기 좋다. 우리집도 종종 가는데 봄과 가을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은유_시에 도착한 사람들
[아름다움이 없으면 삶은 쓸쓸해진다_최승자]
번역가와 소수성
8쪽_ 시 독해와 번역은 정답이 없다. 이러한 혼돈과 불확실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번역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그들은 하나의 진리만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공기와 언어에 짓눌리지 않았다.
순수와 노동
11쪽_시는 낮은 곳을 살피는 언어이고, 르포는 가리어진 존재를 드러내고 인간의 고통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내겐 뿌리가 같은 일이다.
7명의 시 번역가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한 은유 작가의 사유와 그들과 나눈 대화가 들어 있는 인터뷰 수록집으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삶에서 의미와 끌림이 있는 일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들여다 보였다. 아름답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서 더 확연히 기억될 인터뷰 에세이.
호영_즐거운 오해_서점 리스본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는, 규칙을 깨도 돼!_메리 올리버]
즐거운 오해라는 소제목이 등장하면서 무슨 오해일까 궁금했다. 번역가 호영은 웹툰과 시를 동시에 번역하는 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여성이 아닌 상태로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트랜지션을 위하 약물 치료 중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즐거운 오해라는 키워드가 처음에 등장한 것일까.
자신의 소수자성에 대해서 드러내면서 인터뷰가 흘러간다. 그리고 호영이 번역가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나온다. 문화적 두께라는 소제목의 장에서 어려워서 재미있고 해볼만한 게 재미있다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이. 그래서 번역하고 싶은 글을 만났을 때, 피가 돌고 약간 상기되는 기분을 느낀다니.
번역의 일을 클래식 음악을 연주자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주하듯이 번역 역시 그런 분야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자신의 해석을 가지고 해 내는 일에 대한 자긍심이 전해졌다. 그리고 읽다 보니 고개가 끄덕거리게 된다. 쇼팽의 같은 곡을 피아니스트가 다른 버전의 음반을 모아둔 내 cd장이 보인다. 같은 맥락이라는 걸 이 대목에서 환기가 된다. 이른바 고전을 읽을 때도 읽는 내가 더 잘 집중되는 번역판본을 찾아 읽는 것과 같은 일임을.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 그것이 그를 번역하게 한다(46쪽)는 말처럼 문학은 다른 이가 되어 보고 싶은 욕망의 발현인가 보다. 글 쓰는 이들의 많은 말들 중 공통적으로 말하는 저 말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에 대한 해석은 여러 버전과 의미가 있을 테지만,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되고 싶은 욕망은 쓰지 못한다면 읽게 되는 욕망으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아 찾기 서사는 늘 나를 빠져들게 하고 나를 자유롭게 한다. 흔히 ‘진정한 나 자신을 찾는다’라고 말할 때 정신이나 직업 같은 것을 상상하는데 어떤 사람에겐 그게 몸일 수도 있는 것이다.
34쪽
호영은 올라운더다. 가장 독자가 많은 장르와 최소한의 독자를 가진 장르의 작품을 번역할 수 있는 실력과 감각을 가진 드문 존재다. 웹툰 번역을 하고 시 번역을 하는, 시 번역도 하고 웹툰 번역도 하는......
36쪽
“시는 이해에서 자유로워서 좋은 장르 같아요. 다 이해 못해도 나중에 또 와서 읽으면 뭐가 보이겠지. 약간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편이에요. 그냥 어떤 느낌을 가져가면 되는 것 같아요.”
37쪽
입말과 글말의 언어유희를 탐닉하는 호영에게는 “언어의 깊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쌍둥이 장르다. 무게중심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그의 삶에서 시와 웹툰은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없다는 점에서 공속적인 관계 같았다. 밤과 낮처럼, 순간과 영원처럼, 나와 너처럼.
43쪽∼44쪽
“너무 갈망하는 건데 실제로 해봤더니 아니네 그러면 또 다른 것도 해보면 되고. 그런데 그게 되게 별일이 되니까,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에게는 그 정체성밖에 없는 것처럼 되는 거예요. 저도 제가 호르몬 치료를 하면 생각도 엄청 바뀌고 몸도 많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중략)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닌가 보다, 그런 깨달음도 있고. 또 제가 좋아하는 루인 선생님이 한 강연에서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여성으로 성별이 지정되어서 소녀가 되고 젊은 여자가 되고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이런 서사가 너무 이상하다’라고 했어요. 단계별로 다 다를 수 있는데 이 서사만 있는 게 이상하다.”
안톤 허_하지만 저는 해요_위트앤 시니컬에서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_이성복]
그나마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던 번역가이다.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번역했고 그 작품으로 부커상 번역 후보에 올랐던 이로써 알고 있었다.
인터뷰의 글을 보면 그는 유쾌함이 스며든 사람 같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 대한 명확한 위치성과 확신도 느껴진다.
번역가 모임을 만들고 필드를 더 확장하면서도 ‘문학 권력’이 되려 하지 않고 각각의 모임들을 만들어서 다양한 장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는 모습도 권력에 도취되지 않는 멋지고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은유 작가가 안톤 허의 성 정체성에 대한 태도를 전하면서 안톤처럼 내가 나임을 드러내면서 자기답게 살 수 있는 관계의 안전망이 구축되기도 한다는 문장이 다가온다. 우리 사회가 소수성에 대한 흐름의 바뀌고 있고 발화자들의 목소리도 많아지고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는 걸.
가장 그다은 말로 꼽은 “그 책을 보자마자 너무나도 번역을 하고 싶었어요.”라는 말에, 아주 신나하면서 번역에 대해서 말하는 모습을 본 은유 작가와 안톤 허의 인터뷰 장면이 그럼처럼 연상된다. 번역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들여다본 그림에서 경이로움이나 아름다움을 느낄 때의 그 기운처럼 전해진다.
64쪽
“문학 번역을 그만두었을 때, 번역만 안 했지 책은 계속 봤죠. 그럼요, 죽을 때까지 저는 문학 소년은 아니고 문학 중년, 문학 노인, 문학인입니다.”
77쪽
“시를 많이 봐야죠, 한자가 중요한 것 같고요, 책을 많이 읽고요, 모든 걸 완벽하게 읽고 써야 된다는 강박을 안 가지려고 해요.”
81쪽
“저는 제 무의식의 비서예요. 무의식이 번역을 하죠. 창작도 그렇더라고요. 제가 실행해 본 결과 똑같아요. 둘 다 무의식에서 오는 창조 행위죠.”
소제_초과선언_종이잡지클럽에서
[나는 가능 속에 살아요_에밀리 디킨슨]
번역가 소제의 인터뷰는 정답이 아니라 자신만의 것, 견해를 가지고 사유하고, 번역하고자 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소제라는 개인의 정체성과 젊은 세대들의 문이 트인 사고, 사유의 폭들이 보인다. 아이들이 자라면 저런 의식의 한 자락도 가지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 본다. 소수자성에 대한 생각들을 듣다 보면, 문학은 언제나 소수자, 마이너한 감정들이 더 크게 작동하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 소수자성을 표현하고 발화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인 글쓰기는 인문과 문학의 장르로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작가 버지니아 울프조차도 자신의 글에 대한 의심과 불안의 폭을 가졌다는 작가의 의식은 누구나 재능과 열망의 갈피 속에서 헤매는구나 하는, 그럼에도 그런 분투 속에서 끝내는 썼기 때문에 지금의 독자들이 작가의 글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더불어 든다.
98쪽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인종차별, 여성 차별, 성소수자 차별, 장애인 차별이 다 섞여 있으니까 스스로도 못 믿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소수자일 수 있나? 내가 지어내는 거 아닌가? 그럭저럭 살고 싶은 게 너무 큰 특권으로 느껴졌어요.”
109쪽
‘초과’는 원본을 손상하지 않는 한 다른 관점을 허용해요. 시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게 시의 목적이잖아요? 각 언어의 다층적 의미를 허용해요. 그렇지만 제 기준을 없앨 수는 없고, 같은 감정이라도 다르게 표현을 하죠. 이 번역은 ‘이런 단어 선택에서 과감하다’고 한다면 그 이유나 증거를 대줘요. 이 단어 선택을 다른 사람들의 단어 선택과 비교하고, 누가 제일 잘했다는 느낌을 없애려고 해요.
118쪽
소제가 생각하는 좋은 번역은 작가의 스타일을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번역을 통해 자신을 과도하게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창작을 따로 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번역한 작가들 목록이나 쌓이니까 고민이 생겼다.
승미_동화가 잘 되는 편_고요서사에서
[우리는 잃고, 잃는 속에서 얻습니다_엘렌 식수]
이 책에 소개된 인터뷰이 중 유일하게 기혼자이며 육아를 하는 소개가 기억에 남는다.
번역가 승미의 궤적을 들어보면, 당찬 듯하면서도 타인의 말에 잘 동화된다 자신의 말처럼 순응적으로 흘러온 듯하다. 3.11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변화된 것 같다는 글이 보인다.
참사 이후 사람들은 생각이 변한다.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든 없든 참사는 사회적 영향과 가치가 있다. 번역가 승미는 당시 현장에서 몸소 겪었던 체험자로서의 경험이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가치관의 변곡점인 것 같다.
139쪽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의 무력함’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낸다.
“‘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상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못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예술이나 사상에 ‘권력’이 있다고. ‘힘이 있다’고 여긴 게 된다”고. 그런데 문학만이 아니리 과학도 지식도 애초에 모든 것이 무력하다. 책을 쓴다고 쓰나미로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문학은 무력하지만 그렇다고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파울첼린이 그랬던 것처럼) 가혹한 하루하루 속에서 무언가를 것은 가능하다며, 그는 이렇게 못 박는다. “무력하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_은유 작가가 번역가 승미의 상황에 대해서 일본 작가의 문장을 가져와 해석하는 이 문장이 3인의 사유와 서사가 혼합되어 문학이 현실에서 갖는 의미, 문학이 주는 또는 힘이 되는 지표를 보여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서사들의 연결, 문장들은 읽어야 찾아낼 수 있는 보물 찾기 같은 것이다.
147쪽
그에게는 ‘나는 번역가’라는 자의식이 없다. 그냥 ‘자연의 나’로 산다. 좋은 작품을 읽고 남들과 공유하는 일은 하는 나. 번역을 하느라 깊게 읽는 시간이 주어지고 좋아하는 이를 하며 돈을 벌 수 있으니 흡족한 나. 번역의 행복을 말하는 승미에게 그거 말고 번역의 기쁨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단번에 말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_번역가로서의 자의식이 없다지만, 다른 언어로 내가 읽는 문장의 맛과 힘, 아름다움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의 밀도는 힘든 만큼의 쾌감이 큰 분야가 아닐까.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 다른 자아가 될 수 있는 경험에 대한 기쁨으로 전해진다. 타인과 나의 분리와 독립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발현될 수 있는 분야라는 게 매력이 아닐까!
152쪽
질병은 개인 탓이 아닌데도 수치심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고, 에이드리언 리치의 말대로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한 완고한 통념을 사뿐히 지르밟고 승미는 말했다.
나는 그가 ADHD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용기에 놀랐고, 질병과 함께 차질 없이 일하며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누구를 참조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와 노력에 감탄했다.
_선의의 관계에서 나누었던 사적 친밀함의 말이나 일들이, 관계가 틀어질 때 약점이나 비판의 지점으로 이용되어 상처가 되는 경험들로, 이른바 자신의 내밀한 약점이나 사실들에 대해서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사회다. 그런데 그런 통념에서 벗어나 누구를 참조해야 하는 아는 지혜와 노력이라는 태도를 읽어내는 은유 작가와 그런 지점에 이른 번역가 승미의 말들이 되새겨진다.
160쪽
승미의 역사는 타인의 역사다.
그렇게 그가 포착한 타인의 반짝이는 순간들은 별자리가 되어 그의 삶을 인도했다. 하나씩 하나씩 늦더라도 작은 열망을 현실로 피워냈다. 아름다운 퀼트 조각보처럼.
_번역가 승미편에서 은유 작가의 마지막 문장들이 곱씹어 읽힌다. 인터뷰의 문장들이, 타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들이 스며들어 온다.
알차나_반짝반짝 한국어_어쩌다 산책에서
[나는 사랑하므로 나 자신이 된다._김혜순]
한국어를 사랑해서 10년 넘게 혼자 공부하고 2019년부터 한국문학을 번역하는 알차나는 이과에서 문과로, 인도계 미국인이면서 한국어를, 과학에서 문학으로 여러 개의 정체성을 바꾼 어 온 이다.
알차나의 말과 은유 작가의 해석은 알차나가 세속적으로 안정과 성공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자신의 끌림과 깨달음으로 한국문학을 번역하는 모습을 그려준다. 보통의 개인이 이런 세속의 가치들을 놓고 갈 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생각을 해본다. 알차나가 6개 국어를 할 줄 알면서도 유독 한국어에 끌린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가 말하는 전생설 때문이었을까!
여러 나라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의 멋짐이라고 해야 하나, 원하는 뉘앙스의 단어를 선택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알차나의 말에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노력해서 될 수 있는 부분인가 싶기도 하고, 생각들이 다채롭게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어서 표현하고 싶은 언어로 말을 발화할 수 있는 능력과 감응력이 더없이 빛을 낸다.
169쪽
“다른 길을 걸어가야 된다는 걸 깨닫고, 다른 길을 걸어도 살 수 있다는 걸 믿었어요. 저는 처음으로 저를 믿었어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저를 믿었어요.”
173쪽
결과가 아닌 과정 중심의 공부. 시험이나 경쟁의 수단이 아니라 앎 자체를 느긋하게 즐기는 공부. 알차나가 한국어를 익힌 방식은 목적도 방법도 따로 없다는 게 핵심이었다. 큰 목표가 없으니 큰 좌절도 없고 좌절이 없으니까 포기도 없는 것이다.
178쪽
“세상이 작아지는 느낌이에요. 많은 언어를 알면 여러 문화나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알 수 있죠. 한 나라의 사람보다 세계의 의사소통하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데, 무엇보다 제가 저를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는데, 많은 언어를 알면 내가 원하는 뉘앙스의 단어를 선택할 수 있어요.
많은 언어를 할 줄 알면 뭔가 자유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저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
186쪽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을 이해해 주고 싶어요.‘
191쪽
원래 ‘나’가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이 글을 쓰고, 변방과 경계야말로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다.
새벽_엄마 이상 스피릿_진부책방에서
[결국 이야기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_가즈오 이시구로]
205∼206쪽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번역을 배워라. 번역을 하면 시의 구성을 배울 수가 있다.”
새벽은 속으로 쾌재를 불렸다. ‘난 한국어가 된다!’ 그리고 그에겐 엄마가 있었다. 문학을 사랑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209쪽
새벽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로 구축하기 위한 여정을 이어갔다. 서울에서 미주리주 버틀러로,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으로, 매사추세츠 보스턴으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
_목동 키즈에서 미국으로 엄마와 이민 후 성장한 새벽이 시에 매료되고, 매료될 바탕이 있었던 엄마에 관한 이야기들이 흘러간다.
221쪽
언어를 장난감으로 생각하기. 언어를 가지고 소리로도 놀아보고 의미로도 놀아보고. 글쓰기는 어느 시점에서 문장구조를 훈련받잖아요. 이렇게 해야 좋은 문장이다. 나의 생각과 주장을 펼치는 법을 논술로 배우는데, 그 전에 말과 소리를 가지고 낄낄거리는 놀이를 유지하면 번역에 도움이 돼요.
224쪽
“혹시 나는 미국 사람인가 한국 사람인가 하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언제나 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고민했는데 이젠 그냥 내가 두 아이덴티티 사이에서 계속 불안과 사랑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러한들 어떠하고 저러한들 어떠하라 식으로요. 양극적인 것들이 가끔 가다 느껴질 때 그것을 같이 감싸 안는 편이에요. 오히려 요즘은 양극을 가졌다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_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의 정체성은 어떨까 궁금했다. 번역가 정새벽은 그런 이중언어를 구사하면서 시를 쓰고, 번역하고,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두 언어의 시를 읽고 번역하고, 두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무척이나 경이로운 일로 느껴진다. 스스로가 양극을 가졌다는 건 축복이라고 말하는 그의 글을 보면 시는 그에게 삶의 기둥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227쪽
“작가로 살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계속 읽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감수성을 유지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싶고, 그렇게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_새벽의 인터뷰 글 마지막 문장이다.
번역가의 말이었을까 아니면 번역가의 어머니의 말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품고 문학을 사랑한다는 전제를 가지게끔 해 준 어머니의 영향으로 번역가는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시를 쓰고, 번역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 동력은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박술_아름다움 교섭하기__부비프에서
[사실 철학은 시로만 쓰여야 한다_비트겐슈타인]
246쪽
“외국어로 소통하면 배려하는 공간이 넓어요. 특히 동아시아 언어는 조사 같은 게 민감해서 속마음이 다 드러나잖아요. 그게 없으니까 좋죠. 친구 사귈 때 제3언어로 하는 게 제일 편안해요. 중립국에서 만나는 것 같아요. 평화지대. 그리고 그 언어가 옛날 말이면 더 좋아요. 예를 들어서 동아시아 친구들을 만나면 한자나 고전 문장에 대해서도 말할 수도 있잖아요. 되게 편안해요. 우리가 거기서 하나가 되는 것 같아요. 내 말이 아닌 공통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 관계에서 편안하죠.”
256쪽
“내가 어떤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아무것도 모르겠고 너무 신비롭고 비밀스러워서 매일매일 외워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잖아요. 아름다운 그 느낌이 그대로 있으면 좋겠어요.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알 수 없으면 알 수 없는 대로, 표현 불가능한 거는 표현 불가능하게 번역해야 하는데 보통 풀어버리거든요. 내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걸 최소화하기. 그게 번역에서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_마지막 번역가로 실린 박술은 깊이와 생각이 폭이 다채롭고 이곳저곳 튀어 오르는 공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생적으로 문화배경이 좋다고, 이른바 유서 깊은 학문을 하는 집안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독일에서 공부하는 걸 받아들이는 성장사로 이어진다. 독일에서의 공부도, 언어에 대한 다층적인 세계관은 그가 번역하는 책들의 목록들을 보아도 범상치 않다는 느낌. 그냥 시도 어려운데, 철학을 번역한다니. 핑퐁핑퐁 튀어 오르면서도 자기의 세계와 깊이를 확실하게 만들어 가는 번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번역하고 있는 혹은 번역했다는 책들의 목록만 보아도 아찔하다.
요즘 핫한 책이라고 해야 하나. 제목에서 호기심을 한껏 던져준다.
그래 요즘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지.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집중력이 떨어지는 이유들이 과학적인 이유가, 사회적인 이유가 있으려나?
호기심은 '집중력'이라는 키워드에 책을 읽게 만들었다.
우선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프롤로그에서 열어가면서 대자(우리로 치면 친구 혹은 지인의 아들, 딸 쉽게 조카라고 통칭하는 아이들과의 관계)와의 일화를 말하면서 집중력의 상실의 원인이 무엇인지 포문을 연다.
그리고 자신의 집중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펼치는 이야기들은 지금의 우리가, 현대인들의 일상속 경험과 공통적이라서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집중력을 훼손하는 14가지 강력한 힘이 있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과 의견을 제시하는 여정이라면서 시작한다. 14장의 긴 여정은 저널리스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전문가와의 인터뷰, 학자들의 연구와 그들과의 인터뷰를 통한 자신의 생각의 변화나 의문들을 되새기면서 치우침과 논쟁을 불러올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밝히면서도 자신의 견해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생각해 볼 거리가 많았던 책이었다. 대부분은 저자의 글에 수긍이 되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논쟁적일 수 있다는 표시에서 정확한 의견을 갖기에는 어려웠지만 꽤 흐름을 세밀하게 집어서 유기적으로 읽어나갈 수 있었다. 집중력에 대한 개론서이자 완전판 같다는 표현이 맞을런지!
1장 너무 빠른 속도, 너무 잦은 멀티태스킹; 집중력은 한정된 자원이다
42쪽
너무 오랫동안 내 시선을 트위터 피드처럼 아주 빠르고 일시적인 것에 고정하고 살았다.
속도가 빠른 것에 시선을 고정하면 근심에 빠지고 흥분하게 되며, 움직이고 손을 흔들고 고함치지 않으면 쉽게 휩쓸려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45쪽
모든 것이 느긋해졌다. 평소에는 거의 한 시간마다 뉴스를 확인하며 불안을 일으키는 불확실한 정보를 끊임없이 접하고 그것들을 그러모아 일종의 의미를 만들어내려 노력했다.
52-53쪽
우리가 집단적으로 "주의력 자원의 더욱 빠른 소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류층은" 주의력이 처한 위함을 "매우 잘 인식해" 자신의 한계내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고 나머지 사회 구성원은 "조종에 저항할 자원이 적어서 컴퓨터 속 세상에 살며 점점 더 남에게 조정되는" 사회가 올 것이라 우려한다.
;집중력이라는 자원은 한정될 수 밖에 없고, 인간의 뇌는 대량의 정보를 다 수용할 수 없음에도 오늘날에는 실시간이란 이름으로 정보가 끊이지 않고 제공된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많은 정보의 빠른 제공과 수용을 디지털 시대의 장점으로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뇌가 수용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 되어 있고, 끊임없이 인터넷을 통한 접속의 상태에서 얻는 정보가 사유 혹은 깊이라는 의미를 파고들 수 있게 하는가?
즉각적이고 대량의 정보는 이른바 빠른 속도는 깊은 이해와 생각의 대척점에 있다. 빠르게 깊이 있는 생각이나 판단이 가능한 일인가?
61쪽
스크린 타임 기능이 하루 핸드폰 사용 시간이 네 시간이라고 알려준다면, 사실 우리는 집중력을 상실함으로써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잃고 있다는 뜻이다.
;멀티태스킹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에 일침을 가하는 전문가의 견해를 들으면서 반발하던 저자가 결국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설명하자 수긍하는 부분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착각을 본다. 멀티태스킹이라 알려진 행동은 실은 '전환'에 대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뇌는 한번에 한 가지에만 집중할 때 제대로 과제를 수행해낼 수 있다.
2장 몰입의 손상; 스키너의 비둘기와 미하이의 화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
88쪽
몰입 상태가 되려면 단일한 목표를 택해야 하고, 그 목표가 반드시 자신에게 유의미해야 하고, 능력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해서 몰입에 빠져들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데, 몰입은 특별한 정신 상태이기 때문이다. 몰입한 사람은 자신이 오로지 현재에 머무는 기분을 느낀다. 자의식이 사라지는 상태를 경험한다. 자아가 소멸해 목표와 내가 하나 되는 느낌과 비슷하다. 내가 기어오르는 암벽이 곧 내가 되는 것이다.
93쪽
그때, 주의력을 되찾으려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방해물들을 제거하는 방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면 그저 텅 비게 될 뿐이다. 우리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몰입의 원천으로 그 자리를 대체해야 한다.
95쪽
조악한 보상 때문에 춤추는 데 주의력을 낭비하는 스키너의 비둘기가 되고 싶은지,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찾아냈기에 집중할 수 있는 미하이의 화가가 되고 싶은지.
;미하일의 몰입과 대립되는 관점으로 스키너의 비둘기의 보상 이론을 제시하는데, 스키너의 이론이 지금 우리가 소셜미디어에서 목매는 좋아요, 하트의 보상 이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스키너가 제시한 비둘기 보상 이론이 소셜미디어에서 사용자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미하일의 몰입 이론과 대비해서 볼 때 어느 쪽이 더 인간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관점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저자의 말처럼 보상에 목매는 비둘기가 될지 스스로의 몰입속에 있는 화가가 될지.
3장 잠들지 못하는 사회; 수면의 질이 떨어지면 세상은 모든 면에서 더 흐릿해진다
108쪽
이 신체적 비상 상황에서는 뇌는 눈앞의 단기적 집중력만 줄이는 것이 아니다. 장기적 형태의 집중력을 위한 자원 또한 줄인다. 잠을 잘 때 우리의 정신은 그날 경험한 일에서 연결고리와 패턴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119쪽
집중력 개선을 위해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시도들을 알게 되면서, 현재 우리가 명백한 역설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해야 하는 많은 일이 따분할 만큼 뻔하다. 속도를 늦추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고, 잠을 더 자면 된다. 모두가 이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데도 실제로는 정반대로 하고 있다.
우리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과 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행동 사이의 괴리 속에 산다.
; 수면에 대한 이 장에서는 다들 알고 있는데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 힘을 알고자 한다는 말로 마무리한다.
4장 소설의 수난 시대; 긴 텍스트를 읽는 능력이 떨어지면 벌어지는 일
126-127쪽
독서는 우리이게 특정 방식의 읽기를 훈련시키는데, 바로 오랜 시간 한 가지에 집중하는 선형적 방식의 읽기다. 아네는 화면을 통한 읽기가 이와는 다른 방식, 즉 정신없이 넘기면서 초점을 옮기는 방식의 읽기를 훈련시키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네의 연구는 사람들이 화면으로 글을 읽을 때 "대충 훑어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네의 말을 들으며 독서의 붕괴가 어떤 면에서는 집중력 감퇴의 증상이자 원인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변화는 나선의 형태를 띤다. 우리는 책에서 화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책에서 나오는 더 깊은 형태의 읽기 능력을 잃기 시작했고, 결국 더욱더 안 읽게 되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사례를 들면서 이런 소셜미디어가 깊은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지 되묻는다. 숙고와 깊은 통찰은 이런 소셜 미디어의 성격에는 맞지 않는다. 소셜미디어의 일상화는 숙고와 깊은 통찰, 서로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것들과의 결별로 이어지게 된다. 소설읽기의 맥락도 같다. 긴 글의 긴 생각으로 들어서기도 힘들 뿐 더러 하지 않으려는 문화가 되어버렸다.
135-137쪽
실험 결과는 명확했다. 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어냈다. 막대한 영향이었다. 이것은 그저 교육을 잘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비소설 독서는 공감 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서는 "바깥을 향한 관심과 내면을 향한 관심을 결합하는 방법"이다. 특히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한다.
레이먼드는 소설 읽기가 공감 능력을 강화한다는 점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소설 읽기에 끌린다는 점이 둘 다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설명하는 효과가 종이책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를 모방한 복잡한 서사를 몰입하는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연구는 긴 텔레비전 시리즈 또한 종이책만큼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또 다른 그의 연구는 동화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아이들이 공감능력이 더 좋지만, 길이가 짧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 아이들을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
토막 난 파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는무언가에 오랜 시간 집중할 때만큼 공감이 나타나지 않는다.
;문학의, 소설의 효용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소설 독서가 공감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는 부분은 조금 동의하기 어렵다. 비소설이라도 소설 이상의 서사와 감동이 있는 글들이 있지 않은가? 여하튼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한다는 공감의 상상력은 집중력의 밀도와 연결된다는 말로 해석했다.
5장 딴생각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말해주는 것; 우리 정신을 배회하게 뒀을 때 생기는 이점
147쪽
먼저, 우리는 딴생각 중에 천천히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그는 딴 생각을 많이 할수록 더욱 체계적인 목표를 세우고 더 창의적이며, 끈기 있는 장기적 결정을 더 잘 내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신이 표류하면서 천천히 무의식적으로 삶을 이해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더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149-150쪽
실제로 딴생각은 다른 형태이자 반드시 필요한 형태의 집중이다. 네이선은 우리가 하나의 스포트라이트로 주의를 좁혀 한가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데 "일정량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스포트라이트를 꺼도 "우리는 여전히 그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저 다른 사고방식에 "에너지를 더 많이 할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력이 꼭 낮아지는 것은 아니며" 다른 중요한 형태의 사고로 "자리를 옮기는 것일 뿐"이다.
그때까지 읽었던 우리가 여러 작업 사이를 빠르게 오가고 있다는 내용의 과학 연구들을 돌이켜보다가, 현재의 문화에서 사람들이 늘 집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딴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53쪽
스트레스가 적고 안전한 상황에서 딴생각은 선물이자 기쁨, 창조적 힘이 될 것이다. 스트레스가 많고 위험한 상황에서 딴 생각은 고통이 될 것이다.
;딴생각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진행중이며 논쟁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면서 직장 상사가 종일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모습만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일화를 제시하면서, 온종일 매달려 책상에 있다고 일의 밀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경험에 대해서 되묻는다.
종일 실행과제에 매달린다고 해서 성과가 더 잘 나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다. 때때로 잠깐의 휴식, 딴짓이 위대한 발견이나 생각의 전환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기에. 그리고 뇌가 휴식없이 계속 집중할 수 없다는 상식을 확인하는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6장 우리를 추적하고 조종하는 테크 기업들; 집중력 파괴는 그들의 사업 모델이다
171쪽
그는 설득적 기술 연구소에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방법을 배웠지만, '나도 다른 기술 설계자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걸끼?'라는 난처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 설계자들이 어떻게 자신을 조종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 상황에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174-175쪽
참여도는 사용자의 시선이 상품에 머문 시간으로 정의되었다. 참여도가 높으면 좋은것, 참여도가 낮으면 나쁜 것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사람들이 핸드폰을 더 오래 들여다볼수록 들이 보는 광고도 많아지고, 그만큼 구글이 버는 돈도 늘어난다.
185-186쪽
오늘날 모든 소셜미디어와 수많은 웹사이트가 무한 스크롤의 한 형태를 사용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화면을 내리며 전자기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아자 본인도 끝없이 스크로을 내리다 나중에야 자신이 본 내용이 쓸데없는 정보임을 깨닫곤 했고, 자신이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것인지 고민했다.
그가 발명한 기능의 결과로, 총 20만 명이 넘는 인간의 삶이 매일 화면을 스크롤 하는 데 쓰이고 있다. 이 시간들은 무한 스크롤이 없었다면 다른 활동에 쓰였을 것이다.
189쪽
언젠가 제임스 윌엄스는 일류 기술 설계자 수백 명 앞에서 강연을 하며 "현재 자신이 설계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싶은 분이 얼마나 계십니까?"라는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강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이 장은 읽으면서 테크기업의 양면성과 탐욕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자신의 자녀에게는 소셜미디어를 하지 못하게 하는 실리콘 밸리의 설계자들의 모습, 마음 챙김을 할 수 없게 하는 설계자인 그들이 명상이나 요가에 몰두한다는 사실이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다. 자본주의와 탐욕이 동일선상으로 이어졌다.
7장 산만함에 불을 지피다; 집중하지 못하는 사회는 어떻게 위험에 빠졌나
197쪽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웹사이트들을 만들고 유지하는 사업 모델이다. 이 시스템을 칭하는 전문 용어는 '감시 자본주의다'
199쪽
"그들의 사업 모델은 스크린타임이지, 우리의 일생이 아니에요."
200쪽
우리의 집중력을 좀먹는 현재의 기술 작동 방식은 과거나 지금이나 선택의 결과다. 이 방식은 실리콘밸리의 선택이며, 실리콘밸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는 사회 전반의 선택이다.
201-202쪽
어떤 기술이, 어떤 목적에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 설계되는가?
소셜미디어는 우리가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게 만들정보를 보여준다. 그게 다다. 우리가 화면을 더 많이 들여다볼수록 그들이 버는 돈도 늘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09쪽
오늘날 소셜미디어에서는 거짓 주장이 진실보다 훨씬 빨리 퍼져나가는데, 알고리즘이 분를 유발하는 내용을 더 빠르고 멀리 퍼뜨리기 때문이다
;테크기업들은 결국 더 오랜 시간 동안 사용자를 붙들기 위한 시스템을 설계하는데, 이 시스템에서 덜 머물수 있게 설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 전반의 선택은 그렇지 않은 현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테크 기업에 길들여지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 그 생각의 실천은 소셜미디어의 접속량을 줄여야 겠다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에 이른다.
8장 작고 얄팍한 해결책; '문제는 네 안에 있어'라는 말이 틀린 이유
이 장에서는 다이어트를 제시하면서 살을 빼는 것이 아니라 찌지 않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비만율과 다이어트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설계자들이 사용자들의 집중을 제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계자들 스스로 이루어지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정부 정책의 결과로 비만율이 어떻게 줄어드었는지의 예시가 개인의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접근해야 변화가 올 수 있다는 주장이 꽤 설득력 있게 읽혔다.
저자는 단순히 개인의 의지 박약이 아니며, 개인의 문제로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성 있는 낙관주의란 장애물을 솔직히 인정하고 모두 협력해 장애물을 해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9장 근본적인 해결책을 처음으로 목격하다; 저커버그는 왜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무시했을까
이 장에서는 테크 기업과 사용자인 우리가 경주중이라고 하면서 사용자인 우리 모두는 시스템의 설계를 바꿀 수 있다는 이들과 합류해 싸움에 나설것인지 아니면 테크 기업의 침략적 기술에 그냥 당할 것인지 묻는다.
10장 스트레스와 만성적인 각성 상태; 방해 요소에 저항하는 능력이 현격하게 낮아진 이유
스트레스로 인한 과각성 상태와 빠지게 된다면 당연히 집중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예로 든 가는 곳마다 곰이 있어 마주치게 된다면 과각성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집중이 일어날 수 있는가?
네이딘의 연구 결과에 미루어 보면 집중력은 안전한 환경이어야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 반드시 안전하다고 느껴야 집중력은 발현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이가 adhd로 진단되어 치료를 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가정상황과 질병과의 상관관계를 먼저 파악하지 못한 까닭에 치료는 한계적이었다는 것이다. 추후 아이가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며 그로 인한 adhd로 발현되어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11장 우리 사호의 논리에 정면으로 도전한 장소들; 주4일 근무로 바꾸면 집중력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일에 대한 시간을 줄이자 집중력이 더 좋아졌다면 주4일 실험했던 회사와 대표의 이야기를 실었다.
주7일에 점진적으로 하루씩 휴일을 정착해 나갔던 서양의 주말 100년사를 제시하면서 현재 5일에 이른 과정을 말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회사 대표들과 직원들의 입장은 대립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주4일 위해서 업무에 더 몰두해서 일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한게 아닌가.
또한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말하면서 휴식과 집중력의 상관관계를 말한다.
12장 값싸고 형편없는 식단; 허리둘레, 심장, 그리고 집중력을 파괴하는 음식들
음식에 관한 이 장에서의 이야기들은 충분히 가늠하고 짐작했던 일들이다. 자연의 음식인 아닌 화학적 첨가물이 가득한 현대인의 식단, 음식의 섭취가 건강한 뇌의 상태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은 역시나였다. 단순히 자연식의 섭취뿐만 아니라 가성비 높은 음식들의 변화가 현대인들의 건강을 헤치기에 이 역시 집중력을 방해하는 요소라는 주장 역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또한 개인이 가공식품을 포기하려 하지만 테크기업의 설계처럼 개인의 의지만으로 바꾸기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음 세대의 입맛을 왜곡하는 이 시스템 역시 작동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공감하는 바가 컸다. 아이들의 식사를 챙길때마다 가공식품과 첨가물의 음식에 길들여져 야채와 이른바 한식의 식사를 먹으려 들지 않을때마다 걱정스러웠는데 이 장에서 그 점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화학물질을 시장에 내놓을때 지금처럼 안전성을 출시 이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성을 먼저 입증 한 이후 통과한 물질만이 소비자에게 도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서 지금의 시장 논리가 얼마나 자본에 의해서 끌려가는지 새삼 보인다. 오염물질이 우리의 뇌를 파괴하게 두었는는지 아니면 힘을 합쳐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했는지 우리의 다음 인류들은 알게 될 것이라는 말 역시 sf의 디스토피아적 설정이 상상력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닌 현실의 모습에서 가져온 설정이라는 확인에서 지금의 우리가 어떤 행보를 하게 될지 의문이다.
13장 잘못된 ADHD진단;유전자 탓을 하는 동안 우리 아이에게 실제로 벌어지는 일
ADHD 대한 이야기편에서 이 질병의 원인을 유전으로 보고 약물처방을 하는 치료를, 동물의 ADHD를 진단 후 약물처방 보다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닌 인위적 상태에 처한 동물의 환경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고 치료에 임하는 니컬러스를 통해서 관점의 다른 해석으로 병의 치료가 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
자라면서 ADHD 진단을 받았던 아이들의 발생 요인을 주변 환경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결정적인 요인은 환경이 얼마나 혼란한가 였다고 한다. 특히 부모의 스트레스가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부모가 스트레스가 적을 경우 아이에게 관심과 안정감을 더 줄 수 있고, 사회적 지지가 높을수록 안정적인 아이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ADHD 진단후 처방 받는 각성제가 장기적으로 아이들의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설명에서, 약물에 대한 두려움과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올라왔다. 각성제의 오랜 복용은 수면의 질에 영향을 미치고 그 역시 집중력에도 영향을 미치다는 꼬리에 꼬리를 묻는 설명들이 약물에 대한 신중한 태도가 필요함을 느낀다.
유전 질환 때문이라는 통계가 쌍둥이 연구를 통한 근거라는 점에서는 너무 단순하고 비과학적인게 아닌가 싶었다.쌍둥이 사이의 차이를 같은 환경에서 성장하기에 오직 유전자만이 차이라는 것이 너무 단순한 근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반박의 근거를 제시하는 연구에서는 쌍둥이 연구가 유전자와 환경의 잠재적 영향을 구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쌍둥이 연구의 통계 수치의 잘못된 호도와 이해를 집어낸다.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4장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감금된 아이들; 아이들은 놀고, 배회하고, 질문하고, 유능해진다
이 장에서는 과거의 우리가 성장했던 환경이 더 아이들이 성장하기에 알맞은 환경이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본성대로 자연스럽게 어울리면 성장하던 문화가, 오늘날 실내 공간에서 어른의 개입과 주시를 바탕으로 머물며 성장하는 문화로 바뀌어져 건강함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견해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사례의 아이처럼 그런 환경과 사회의 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에필로그
제임스는 집중력의 세 가지 형태를 스포트라이트, 별빛, 햇빛이라고 정리했다.
스포트라이트가 분산되거나 방해받으면 우리는 이런 단기적 행동을 수행하지 못한다.
별빛은 장기적인 목표를 말한다. 긿을 잃은것 같을 때 별을 올려다보면 자신이 향하던 방향을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햇빛은 자신의 장기적 목표가 무언인지 파악하게 해주는 집중형태라고 한다.
이 중에서 햇빛의 상실이 가장 심각한 형태의 산만함이며, 자신이 누군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정신적인 공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형 상태 경제'로 가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경제성장을포기하고 다른 종류의 목표를 선택하게 된다는 것인데 가령, 자녀와 시간을 보내거나 자연에 머물거나, 충분한 수면 같은 것들로 재정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우리가 함께 집중하지 않으면 이 산불에 홀로 직면하게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