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 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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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 등장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있어 최초의 얼룩이었다. 남자들은 얼룩이라는 깊은 상처에 대해 마주하거나 외면해보려 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얼룩을 지우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일이었고, 그럴수록 오히려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만 통렬히 깨달았다. 분명 그들은 그 후에도 다른 여자들로 인해 마음에 얼룩이 생길지도 모르나, 최초의 얼룩이 아닌 얼룩은 옅은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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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겪어보지 않은 최악의 결말에 이르지 않게 만들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수를 선택한 적, 누구나 한 번쯤 있지 않던가? 설사 소중한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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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속속들이 아는 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저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자신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타인을 어림짐작해보는 게 고작일 것이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여자에게는, 인간에게는 그런 게 있지 않은가? 논리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그냥 그런 게. 우리 몸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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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고 파악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과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애매함과 제멋대로인 감정이 뒤섞이는 탓에 현실은 끊임없는 추측과 억측의 결과물들 아닐까.
인간의 보편성 위에 그 사람만의 특수성이 가미되기에 우린 상대를 소유와 통제대신 존중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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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 소설집에 등장한 남자도 여자도 실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그레고르 잠자 제외).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하면서 관점에 따라선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저지르거나 그런 소용돌이 한 가운데 놓인 당사자가 됐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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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왜라는 물음에 대한 명확한 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당사자들 역시 그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 따위 할 수 없을 테니깐.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는 그런 수많은 소용돌이를 볼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인간은 역시 복잡할 뿐만 아니라 불완전하고 미숙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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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른 이성과 관계를 가지는 일. 바람.
모든 이야기의 공통된 화제였다. 물론 바람 또는 불륜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었으나, 이야기를 촉발시킨 계기임에는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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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런 주제에 대해 심심치 않게 듣게 되기 마련인데, 그럴 때면 화자의 추측이 정말 사실인지는 별개로 두더라도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연인의 부정한 행동을 알게 된 상대방이 떠안게 될 상처는 물론 그 불륜의 당사자들조차도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다. 도대체 무엇에 결핍을 느끼고 무엇을 갈망했기에 그런 나쁜 선택을 하고 만 걸까. 조금인지 많은지 그 양은 잴 수 없어도 분명 상대에게 깊은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문학동네 펴냄
1
<1>
설령 그것이 가혹한 현실이더라도, 때로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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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든 이야기가 행복하게 끝나는 건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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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보다 끔찍한 현실
몬스터보다 무서운 인간
아직 어린아이가 받아들여야 하기엔 너무도 잔혹한 매일. 그럼에도, 이 책은 어린아이라는 이유만으로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지 말라고 나무라는 듯 싶었다. 그게 실제로 우리 현실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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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코너 오말리. 열세 살.
스스로 식사를 차려 먹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한다.
못할 건 없지만 이 모든 걸 해내기엔 조금 이른 나이. 그러나 그는 이런 생활이 익숙해졌다. 아니, 익숙해졌다고 말하고 적응해야만 했다. 엄마가 아프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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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는 사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암과 사투하는 엄마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다는 걸. 스스로 해야 하는 생활이 길어질수록 엄마의 죽음도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그런 현실을 앞두고, 소년은 그저 모든 게 괜찮고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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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착한 아이야. 네가 그렇게 착하지 않아도 되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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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는 원래부터 착한 아이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착한 아이,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있다면 오직 엄마를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이미 큰 아픔을 겪고 있는 엄마에게 자신마저 또다른 아픔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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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한편으론 매일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며 어깨를 떨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애가 애일 수 없는 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는 어린아이도 어른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갇히게 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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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동정과 무책임한 위로가 때로는 상대에게 모욕이 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먼저 뻗을 줄 아는 배려는 분명 중요한 일이나,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 상대의 마음의 벽을 무리하게 침범하고 간섭하는 걸 ‘돕고싶다’는 말로 포장하는 건 자기기만일 뿐이다. 진정 상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면 조용히 곁을 지키며, 값싼 동정이 아니라 믿음부터 줄 수 있지 않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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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몬스터가 강조했듯, 불행을 이유로 주변을 평생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선의도 악의도 구분해보려 하지 않고 손을 뻗는 모든 행동을 회의적으로 대하고 거절하게 된다면 언젠가 완전한 고립,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속되는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열세 살 아이에겐 잔혹한 처사가 아닌가 싶지만, 분명 현실에 남겨진 사람이 살아가는 데 나이는 아무런 변명도 이유도 되어주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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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필요한 만큼 화를 내도 돼. 아무도 너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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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엄마의 마지막 소원은 코너가 마음의 병으로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엄마가 늘 조용히 바라본 주목나무가, 몬스터가 되어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려 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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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쁘게 말하면 동심파괴 소설. 좋게 말하면 항상 착한 사람도 항상 나쁜 사람도 없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우리 인간 본질에 대한 고찰이 실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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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는 관점에 따라,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상식에 따라, 사실은 달리 해석되었고 인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측면만을 부각하여 보려 했다. 인간의 추한 이기심, 불완전함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훌륭한 작품이었다.
몬스터 콜스
시본 도우드 외 1명 지음
웅진주니어 펴냄
0
1.
지난 나의 어린 시절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젊은 시절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반드시 끝날 운명은 오늘일까 내일일까, 아니면 10년 후일까?
2.
우리가 돈도 없고 그럴 듯한 직업도 없던 그때 그 시절, 스치듯 만난 연인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왜일까.
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나’를 좋아해줘서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무엇하나 내세울 게 없던 시절, 그런 나에게서도 좋은 점을 찾아주고 믿어주고 사랑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0억 인구 중에서 나를 선택하고 나를 긍정해주었다. 그래서일까? 되돌아보면 그때의 그 긍정이 있었기에, 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수많은 문턱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럴 듯한 직장에서 돈도 벌고, 매너며 교양을 조금씩 갖추게 되자 앳된 대학생시절보다 어른이 되었음을 느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이를 먹으면서 순수하게 상대의 좋은 점을 찾기보다 겉으로 드러난 배경과 따라붙는 수식어에 연연하게 되고만 것 같다. 귀찮아서일까? 아니면 그저 단순히 속물이 되고만 걸까.
나를 조건 없이 순수하게 바라봐준 상대가 그립고, 어리석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떤 수식에도 집착하지 않은 내 모습이 그립다.
3.
많은 연인들이 그렇듯, 나 역시 상대와의 첫 만남은 스치듯 우연치 않게 시작됐다. 아무런 의도도 목적도 없던 그런 순간에 말이다. 만일 내가 그녀와 관계된 사람을 몰랐다면, 만일 내가 그때 조금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우리의 관계는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어렵게 시작된 인연이었기에, 더욱 애착이 가고 소중하지 않았나 싶다.
나이가 들수록 스치듯 시작되는 인연은 좀처럼 없게 되었다. 반복적인 일상도 일상이지만 이젠 새로운 상대에게 호기심보다 경계가 앞서기 때문이다. 우연을 믿지 않게 됐다.
4.
얼마나 오래 만났고 얼마나 사랑했는지 여부를 떠나 아름다운 시절의 일부를 온전히 공유한 상대를 완전히 잊는 건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린 나이를 먹고 환경이 바뀌는 등 일상에 치이면서도 이따금 지난날에 사랑한 상대를 떠올려보곤 한다. 요즘은 뭐하고 지내는지, 원하는 목표엔 조금 더 가까워졌을지 등.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SNS를 비롯한 다양한 경로로 상대 안부를 확인하며 궁금증을 해소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것이 옳은 행위인지는 모르겠으나, 인생의 일부를 소중하게 만들어준 가장 소중했던 존재의 안위를 알고 싶어 하는 그 심정을 알 것 같긴 하다.
5.
물론 개인적으로는 헤어진 연인의 SNS를 염탐(?)하는 걸 썩 내켜하지 않는다. 싱숭생숭하면서도 미묘하게 불편한 감정이 있어서 같은데, 그 이유는 역시 ‘상대가 이젠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 아닐까 생각한다. 한때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았고 좋아했던 그 상대가 완전히 남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난 아직 상대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할 수 있을 만큼 어른스럽진 못한가보다.
6.
지난날 나 자신보다 더 소중했던 그 사람.
그 사람은 내게 있어 구원자였고, 소중한 젊은 시절의 일부였고, 어리석은 내 자신의 거울이었다.
나도, 그녀도 나이를 먹으면서 천천히 진짜 어른이 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따금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상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떤가. 비록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고 따스하게 안아준 사실엔 변함이 없지 않은가. 부디 자신의 길에서 앞으로도 멋진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7.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라는 제목이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쭉 고민했다.
혹시 이런 의미는 아니었을까? 지난 어리석은 시절을 함께한 친구, 연인, 동료와는 세월이 지나 나이를 먹고 주름이 늘어도 서로에게 있어 여전히 어른이 아닌 풋내기일 뿐이라는 내용 아니었을까.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했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만난 친구들은 여전히 내게 있어 사춘기 소년들이었고, 대학생이 되어 만난 친구들은 삶에 대한 고민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새내기였다.
나의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긴 시간을 간직해주는 모든 가까운 사람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들이 있어 난 때때로 어른이라는 무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깐.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모에가라 지음
밝은세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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