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 산문, 일기 등을 묶은 책이다.
요샌 이렇게 펴낸 책을 '디 에센셜'이라는 말을 달아 출판한다. (요즘 트렌드인가)
시는 어려워서 천천히 읽어가기로 하고 산문부터 읽었다. 그중 <시작 노트>라는 코너에서 흥미로운 글을 만났다.
순수한 시각으로 시를 쓰려고 일부러 시를 쓴다는 의식을 버리려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다는 거다. 똥꾸멍이 빠질 정도로 말이다.
김수영의 시 중에서 특히 <폭포>를 좋아한다. 그런 거침없는 시를 쓰는 그의 방식 역시 거침없을 줄 알았는데 그정도로 힘들게 쓰고 있었다니.
대가도 이럴진대
그의 발끝이라도 닮고 싶은 나,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나.
순수한 눈으로 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중략)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달나라의 장난> 중에서
시에도 입문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 입문서를 기다려온 독자들에게 좋은 선택이 되어줄 책이다. 현직 신문기자이자 등단시인인 허연이 세계의 유명 시인의 작품 한 편씩을 골라 엮은 <시의 미소>는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시세계로 들어서도록 이끌어준다.
책은 민음사가 1972년부터 이어온 ‘세계시인선’ 개정판을 새로 내며 그 일환으로 준비한 작업으로 세계시인선에 포함된 시인 가운데 스무 명의 시가 한 편씩 포함됐다. 허연 시인이 세계시인선 수록 작가의 작품 가운데 스무 편을 추렸으니 일종의 민음사 세계시인선 올스타 작품집 정도로 생각해도 되겠다.
포함된 작가는 그리스․로마시대 시인인 사포와 호라티우스부터 헤르만 헤세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T.S 엘리엇 같은 세계적 문호, 에즈라 파운드와 아르튀르 랭보, 샤를 보들레르 등의 천재적 이름들이 망라된다. 동양 시인으로는 김소월과 김수영, 윤동주, 일본 하이쿠의 대표자 마쓰오 바쇼가 이름을 올렸다. 시단에서의 빛나는 명성보다 일반 독자에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름, 그러니까 스테판 말라르메, 딜런 토머스의 시도 소개돼 독자를 찬란한 시세계로 이끈다.
<시의 미소>는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읽으며 성장한 허연 시인이 자신을 시의 세계로 이끌어준 거장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1966년생인 시인은 세계적 시인들의 시 한편과 함께 자신과 시의 인연, 실린 시로부터 떠올린 생각을 담담하게 적어냈다. 거장의 시와 허연 시인의 글이 짝을 이뤄 하나의 이야기를 빚는 형태로, 독자가 시와 작가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하게끔 돕는다.
허연 시인은 널리 알려진 시와 시인의 이미지를 넘어 알려져 마땅한 새로운 단면을 꺼내어 소개하는 노력도 멈추지 않는다. 하이네와 헤밍웨이의 시를 소개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케테 콜비츠의 판화에 이어 붙인 하이네의 시는 평소 익숙한 그의 다른 작품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허연 시인은 하이네가 쓴 시 ‘슐레지엔의 직조공’을 소개하며 그가 1800년대 초 독일정부에 치열하게 저항한 시인이었음을 공언한다. <세계의 명시> 류의 책에 흔히 등장해 윗 세대의 연애편지에도 종종 인용되곤 했던 하이네가 단순한 서정시인이 아니라 탁월한 사회파 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상당수 독자에게 새로운 지식일 게 분명하다.
영원히 빛날 소설에 비해 턱없이 주목받지 못한 헤밍웨이의 시를 소개한 부분도 마찬가지. 허연 시인은 헤밍웨이가 직접 참전한 스페인 내전에 관해 쓴 시 ‘돌격대’를 통해 간결하고 강건한 문체와 고결한 것과 평범한 것을 넘나드는 작가의 시각을 흥미롭게 펼쳐낸다.
시집으로는 꽤 비싼 12000원의 가격에 고작 스무 편의 시가 실렸다고 불평하는 독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안에 실린 시, 담긴 문장 가운데 어느 하나 정도는 읽는 이의 문학적 경계에 자리한 육중한 철문을 비집고서 새로운 바람 한 줄기를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먼 바다 쉴 새 없이 오가는 큰 배 갑판 위에 선 내게도 그러했으니 말이다.
선원들은 자주 심심풀이로
거대한 바다새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아득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를
태평스럽게 뒤따르던 길동무를.
갑판 위에 내려놓은
창공의 왕자(王子)는 서툴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크고 하얀 날개를 배의 노처럼
가련하게 질질 끌고 다닌다.
날개 달린 이 여행객의 어색하고 무기력함이여
한때 멋있던 그는 얼마나 우습고 추해 보이는지
어떤 이는 담뱃대로 그의 부리를 성가시게 하고
다른 이는 절뚝거리며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불구자 흉내를 내는구나!
시인도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들을 비웃는
이 구름 속의 왕자(王子)와 비슷하여라.
야유 속에 지상에 유배당하니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힘겹게 하는구나.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훌륭한 산문을 어쭙잖은 운문으로 바꾸지 말 것
될 수 있는 한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받을 것.
그리고 그들에게 진 빚을 시인하거나 예의를 갖출 것
아무런 장식을 쓰지 말거나 아니면 아주 훌륭한 장식을 쓸 것
에즈라 파운드, ‘시의 언어’ 중에서
내가 여기를 좋아하는 거 같지? 아니야. 난 여기가 싫어. 하지만 난 여기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 너 가난해지기 싫잖아. 창호야. 넌 내 밑에서 일하면서 잘 먹고 잘 벌었어. 그래서 이런저런 이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지. 당연한 일이야. 애국심은 그저 이념이야.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념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잊게 돼. 그리고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들은 그 이념에 지나치게 심취한 삶들을 이용하지. (p.362)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야기이기에 '파친코'를 모르는 이가 오히려 드물 것 같다. 책과 드라마 둘 다 흥행했다 보니 소개나 리뷰 등에서도 자주 등장했으나, 되도록 선입견이 이 책을 소화하고 싶어 타인의 리뷰를 일부러 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감정적으로 다소 치우치고, 내가 가지고 있던 얕은 지식에 기반했을지도 모를 글을 남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왜 제목이 파친코일까 궁금했다. 책을 읽고 난 지금은 본인에 뜻과 관계없이 '타인의 조작'에 의해 흐르는 조선인들의 애환이나 삶을 빗대어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익을 위해 핀을 조작하여 '사기도박'의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게임으로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 시절 우리 민족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고 막연히 말이다.
이 책의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만 다룬다면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한 여성과 그 가족의 일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당시 우리 민족 대부분의 모습과 생각, 독립운동에 대한 마음과 종교 등의 사상이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고, 암묵적인 사회나 가정의 분위기가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까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 책을 읽으며, 진짜 먹고살 것이 없어 하루하루를 근근이 사는 이들에게는 일본도 미국도 똑같았겠구나,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에게는 많았던 재산도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안개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책은 시대의 암울함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분명 주저앉아 울만큼 참담한 상황이지만 혐오 어린 시선을, 전반에 깔린 차별을, 역사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다. 지독한 가난도 견디고, 세상에 혼자가 된듯한 상황에서도 견딘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인생 전체를 누군가에게 조 정당하고 침해받아도 견딘다. 언제인가 근현대사 책에서 '한국인은 약하고도 강한 존재'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는데, 파친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김수영 시인이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며,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라는 풀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는 기분이랄까.
그들이 김치를 담아 파는 장면을 읽으면서는 '마늘 냄새'라는 한국인에 대한 비하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것 같아 가슴이 시렸고, 그들의 인생과 상반되는 사탕을 만들어 팔 때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수 방식의 사랑에서, 요셉의 강단과 아집에서, 양진이나 경희의 희생에서, 선자의 가슴 시림에서, 노아의 안쓰러움에서 우리네 아버지의, 어머니의, 할머니의, 친구의, 형제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 묻어나는 그 시절의 잔상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그 시절을 직접 겪은 이들이 점점 줄어들지만, 그들의 생활과 사상 등은 이어져 온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슴 아프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강인함을 지닌 우리 민족 특유의 정서와, '집'이 주는 엄청난 위안과 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서려는 단단함을 다시 깨닫게 한다. 누군가 삶을 흔들고 터전을 폭격해도, 최선을 다해 '잭폿'을 터트리고자 살아온 이 땅의 모든 '선자'들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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