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는 현 인류(사피엔스)의 단순한 양적 확장으로는 해당 종의 행복의 확대가 증명될 수 없으며, 오히려 자연 상태로서 존재함이 더 행복했을 것이라 믿는다. 농업혁명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가 오히려 노동으로의 종속과 계급 발생으로 인한 차별 등을 낳게 되어 인류가 불행해 졌음을 말한다.
2. 그러나 자연상태에서의 자유와 다양성이 모든 인류에게 행복한 것이었을까? 저자의 입장은 SBS 동물동장에서의 자연의 약자 상태로 발견된 여러 야생동물들을 어떻게든 자연으로 돌려보내려는 모습이 맞다는 입장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개별 상황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보다는 동물원 또는 최초 발견한 보호자(인간)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느낄 수 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자연상태에서 수렵채취를 선호하는 육체적으로 강인한 인간 개체가 있을 수 있지만, 다소 자유가 침해되더라도 최소한의 복지와 의식주가 사회적 상호지원에 따라 보장되는 현 시스템이 더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수도 있는 육체적으로 약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3. 물론, 현재의 보편적, 양적 행복의 이면에는 다소 비인간적(?)으로 희생되는 가축들, 저소득층으로 희생되는 계층이 있다는 점은 분명이 인지하고 이를 보다 개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알 고 있는 역사상) 유일하게 타 종을 지배하고 있는 인류의 권리에 대한 의무라 믿는다.
PS. 저자는 여성 축구선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성이 신체적 능력으로 부족하지 않음에도 알수없는 이유로 사회적 역할을 억압받아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같은 남성 축구선수와 비교를 해야지 일반 성인 남성과 비교를 함으로써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졌다. (얼마 전 여성 테니스 세계랭킹 1위 사발렌카와 남성 671위와의 경기결과를 바라보며 든 생각)
마쓰시타 고노스케, 오사카의 장사꾼에서 경영의 신으로 - 송희영
마쓰시타의 일생을 통해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해묵은 과제를 함께 얘기해보는 책이다. 저자는 재벌 기업의 후계자 세습 갈등, 과격성을 감추지 못하는 노사 갈등, 최고경영인의 일방 지시로 전략이 변덕을 부리는 경영 현장을 보며 마쓰시타가 이 시대 한국의 경영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화두를 우리 기업인과 월급쟁이들에게 던지고 싶었다고 한다.
마쓰시타는 일본 최고 부자였다. 연간 소득세를 가장 많이 내는 1등 부자 명단에 7번 올랐고, 1955년 이후 사망하기 직전까지 34년 동안 소득세 납부 랭킹 10위 이내에 머물렀다. 일본에서 가장 오랜 세월 부자로서 명성을 유지했다.
그는 단지 세금을 많이 납부한 부자가 아니었다. 살아 있을 때 ‘경영의 신(神)’으로 추앙을 받았다. “호황도 좋지만, 불황은 더 좋은 기회다.”라고 말하며 경기 사이클에 상관없이 흑자 경영에 성공했다.
“신이 일본 경제계에 내려보낸 사신(使臣)이다.”
그를 요술 지팡이를 휘두르는 초인간적 존재로 신격화하는 교수들까지 있었다.
아사히신문이 서기 2000년 밀레니엄 특집을 내며 일본 국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했을 때 지난 1000년 동안 일본 기업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1위에 꼽혔다. 8559명의 응답자 2672명(31%)이 마쓰시타를 꼽았다. 2위는 혼다자동차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였다. 혼다를 지목한 일본인은 마쓰시타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1031명이었다.
그는 성공한 경영인이자 수십 권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스타 저술가였다. 삶의 지혜를 널리 전파한 철학자이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국민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던 경세가警世家였다. 100여 개 신상품을 개발한 발명가이면서 노사 화합, 이익의 사회 환원 등 많은 측면에서 기업인의 모범이었다.
사망 후 3조 5000억 원 이상의 유산이 나왔으나 대부분 파나소닉 관련 보유 주식이었다. 집 이외 목 좋은 곳의 다른 부동산이나 해외 계좌, 특이한 금융 상품 같은 것은 없었다. 기부와 사회공헌 활동에 많은 개인 돈을 헌납한 결과였다.
이 시대 ‘살아 있는 경영의 신’으로 통하는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을 비롯한 많은 경영인들이 그를 닮고 싶어 했다. 저학력, 허약 체질, 가난 등 인생의 3대 악재 가운데 하나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은 3가지 악재를 모두 딛고 일어선 그로부터 위로와 용기를 받으려 했다. 그는 농업시대의 루저Loser가 제조업시대의 영웅으로 변신한 상징적 인물이었다.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그는 쌀 투기에 실패한 아버지를 따라 갓 네 살에 친척 등에 업혀 고향을 떠났다. 부모는 짐수레 두 대에 가재도구를 싣고 3남 5녀와 함께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을 뒤로해야 했다. 쫓기듯 찾아간 정착지는 와카야마 도심의 전셋집이었다. 아버지는 쌀 선물거래에 투자했으나 5년 만에 대대로 물려받은 가문의 전 재산을 잃었다.
마쓰시타는 자기 가문을 ‘소지주’ 계층이라고 했지만 성姓을 쓰고 칼을 차고 다닐 자격을 가진 농촌의 부자였다. 일본 서민들은 메이지유신(1868년) 무렵까지 성을 갖지 못했고 아무나 칼을 찰 수 없었다. 마쓰시타 집안은 와사무라에서 떵떵거리던 지방 유지였다.
일꾼을 7명이나 두었던 아버지는 농사에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 농사에 만족하지 않고 사업 영역을 넓혀 양잠에 투자하더니 쌀 투기에 뛰어들었다. 쌀은 가격 변동이 심했고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 힘들었다. 개미 투자자에 불과한 아버지는 오사카 큰손 투자자와 힘겹게 대결해야 했다. 투기판에서 아마추어 투자자는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
마쓰시타 아버지는 지방의원 선거에서 두 번 연속 당선됐고 현지 주민 행정을 맡은 책임자 자리까지 올랐던 분이었다. 부잣집 막내로 아무 걱정 없이 안락한 인생을 보낼 것 같던 고노스케는 아버지의 투기로 인해 수렁으로 추락했다.
아버지는 짐수레 2대에 가재도구를 싣고 그중 1대는 직접 끌었다. 아내와 아들딸은 수레를 밀었다. 이사하던 도중 이웃 동네에서는 죽과 야채 절임을 얻어먹었다. 지방 귀족이 한 끼를 얻어먹어야 하는 처지로 돌변했다. 패가망신도 그런 패가망신이 없었다.
일본 초등학교는 당시 4년제였다. 졸업을 넉 달쯤 앞두고 그는 오사카 화로점의 점원으로 취직해 집을 떠났다. 고작 아홉 살 코흘리개였다. 엄마와 같은 이불에서 잠을 자며 어리광을 떼지 못했다. 첫 직장인 화로점은 난방용 화로를 판매하는 점포다. 매일 주인집 아이를 돌보며 화로를 닦고, 청소와 잔심부름을 맡았다. 숙식을 해결하는 대신 푼돈을 받았다.
그 시절 오사카에는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밑바닥에서 사업의 기초 훈련을 받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잔심부름(丁稚, 뎃치) 10년, 수습사원(手代, 테다이) 10년을 거쳐야 장사에 나설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마쓰시타의 아버지는 곤궁한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먼저 오사카에 나갔다. 곧이어 “점원 자리가 하나 나왔으니 막내 고노스케를 보내라.”는 편지가 도착했다. 마쓰시타는 아버지 결정에 따라야 했다. 가녀린 등에 옷 한 벌 달랑 담은 봇짐을 메고 기노가와 기차역에서 어머니와 헤어져야 했다.
훗날 그는 이날의 이별을 “눈물범벅이었다.”고 회고했다. 큰물에서 장사를 배워 출세하겠다는 당찬 각오가 있었다는 말은 일체 없었다. 그저 어머니와 헤어지는 막내둥이의 슬픔이 그를 지배했던 것 같다. 거기서 그는 농업에서 참패한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공업에 몸을 던졌다. 산업혁명의 태풍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며 최고의 탑을 쌓았다.
마쓰시타는 센바 시대에서 기업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거지와 바람직한 처신을 배웠고, 기업의 사회적 사명을 알았다. 시장 밑바닥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것이 정보화시대에도 명성을 유지하는 비결이 됐다. 센바는 오사카의 중심이자 일본 경제의 축소판이다. 은행과 증권회사 지점이 즐비하고 번듯한 빌딩이 몰려 있다. 센바는 운하 덕분에 역사적으로 교통 요지였다. 야채, 생선, 쌀, 과일부터 수입 한방약까지 공급해온 덕에 ‘일본의 부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이후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공장 본사가 많아지자 ‘일본의 공장’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사업의 기본은 센바대학에서 다 배웠다.”고 했다. 때로는 센바학교라거나 센바도장이라는 말을 썼다. 센바학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센바 밑바닥에서 말단 점원으로 일하며 사업의 기본 이치를 배웠다는 뜻이다.
센바 상인들은 수백 년 내려온 도제 교육 방식을 고집했다. 이론을 거부하고 현장에서 사장 또는 선배가 직접 사원 또는 후배를 가르치는 즉석 교육법이다. 말하자면 현장 실습을 통한 일대일 교육(OJT)이다.
선배들은 꾸짖고 매질까지 했다. 위계질서가 엄격해 신출내기의 식사나 잠자리는 출입문 근처 구석이었다. 초짜들은 이른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이 됐다. 겨우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점원이 가게에 들어오면 처음 가르치는 일은 허드렛일이다. 신발 정리부터 시작해 걸레질, 빗질, 청소와 담배 구입 같은 심부름이다. 상품 진열을 반듯하게 해야 했고, 더운 여름에는 가게 앞 도로에 수시로 물을 뿌렸다. 대부분 단순노동이었다.
경제 강의보다는 예의범절이 훨씬 중요한 과목이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너도나도 “어서 오십시오!”를 외치며 반가워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다. 손님이 보지 않아도 허리를 깊이 숙이라고 했다. 고객 집에 심부름을 가서도 신발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으면 정리해놓고 와야 했다. 점원들은 고객을 공경하는 존댓말과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를 입에 박히도록 익혔다.
마쓰시타는 억만장자가 된 뒤에도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가로채지 않았다. 다 들은 뒤 묻고 싶은 것을 묻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법, 공손하게 말하는 법, 상품을 소중하게 들고 가는 법을 센바 점원 생활에서 배웠다.
은퇴 후 어느 날이었다. 한번은 고급 음식점에서 스테이크를 먹다가 돌연 셰프를 호출했다. 함께 식사하던 사람들은 요리가 잘못된 것을 지적하려는가 보다고 추측했다. 셰프가 오자 마쓰시타는 사과부터 했다.
“미안하네. 내가 나이가 들어 이 맛있는 스테이크를 다 먹지 못했네.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고 보니 식사량이 줄어들어 어쩔 수 없이 남겼으니 오해하지 마시게.”
음식을 남겨도 따지거나 나무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마쓰시타는 셰프를 불러 다독였다. 이런 언행은 센바 시절 몸에 익힌 습관이다. 센바 상인들은 점원의 기초 예절 교육이 다 끝나서야 손님을 직접 응대하고 매상을 장부에 기재하는 교육에 돌입한다. 이 때문에 센바의 큰 상점에서 점원, 수습사원을 거쳐 어엿한 정사원(番頭, 반토)으로 승진하기까지는 짧게는 13년, 길게는 20년이 걸렸다는 연구가 있다. 주인의 허락을 받아 독립하려면 거기서 다시 10년 안팎 신뢰를 받으며 묵묵히 헌신해야 했다. 센바 상인은 말단 점원에게만 기초 교육을 강요하지 않았다. 후계자가 될 만한 아들에게는 3세 무렵부터 7세까지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가난한 하급 사무라이의 부인을 유모로 채용, 엄격한 예절을 배우도록 하는 상인이 많았다.
후계자가 될 아들에게는 고용된 점원들과 똑같은 위치에 두고 걸레질, 빗질과 신발 정리를 시켰고, 손님과 대화하는 법을 가르쳤다. 후계자에게는 15~16세까지 장사치로서 밑바닥 고통을 직접 체험하도록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마쓰시타가 훌륭했던 점은 치명적인 약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저학력, 병약, 가난을 거꾸로 자신을 성장시키는 기초 자산으로 역이용했다. 불행의 씨앗을 행복의 나무를 키우는 자양분으로 썼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밑천이 없었기에 고객과 신뢰 구축에 더 열성을 보였고, 무슨 일이든 치열하게 도전했다.
‘장사는 한마디로 진검 승부야. 상대방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거야.’
그는 철저한 승부의식으로 경쟁자와 싸웠다. 또 학력이 형편없었기에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묻고 배우는 자세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마쓰시타는 “모든 사람이 나보다 훌륭해 보였다.”고 했다. 고비 때마다 자신을 낮추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결정한 덕분에 리스크를 크게 낮출 수 있었다.
“성공의 90%는 다른 분들이 도와준 덕분이었어요.”
훗날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사업가 인생을 평가했다.
마쓰시타는 19세부터 폐첨카타르(肺尖,Katarrh)라는 폐병 초기 증상을 앓았다. 가래에 수시로 피가 섞여 나왔다. 당시 폐병은 요즘의 암처럼 치사율이 무척 높았다. 그의 여러 형제가 폐병으로 사망했다. 불면증도 그를 괴롭혔다. 창업 후부터 하루 3시간 반 정도밖에 자지 못했고 50세 이후엔 수면제를 먹어도 겨우 4시간을 잤다.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회사에 출근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자신은 건강 유지에 힘쓰며 부하들에게 권한을 위임한 뒤 책임 경영을 하도록 했다. 듀폰 같은 미국 대기업들이 사업부제를 도입하던 것과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사업부제를 처음 실행했다. 그랬더니 간부 사원들 사기가 오히려 올라가 사업이 더 번창했다.
마쓰시타의 첫 직장은 화로점이었다. 가스, 석탄 같은 새로운 에너지자원이 보급되면서 화로점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석 달 만에 화로점은 문을 닫았다.
다음 취직자리가 자전거 판매점이었다. 자전거상회는 그 시절 첨단 상품을 파는 신형 비즈니스였다. 그는 일생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인물을 꼽아달라는 언론사의 요청에 서슴지 않고 고다이五代자전거상회 주인을 꼽았다.
“고다이가게에서 6년간(실제는 5년 4개월) 배운 것은 인생의 기본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장사를 추진하는 방법까지 모두 헤아릴 수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 가게에서 어르신과 사모님께 실로 따뜻하면서도 엄격한 지도를 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상인의 길이란 무엇인가를 체득했다. 그 덕이 크다.”
자전거점 점원 자리는 아버지가 챙겨준 두 번째 일터였다. 고다이상점은 점원 네댓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시절 자전거의 위상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오사카 시내에 자동차는 거의 없었다. 수입 자전거 1대 값이 150만 엔(1500만 원 상당)에 달했다. 집 한 채 값을 지불해야 살 수 있는 부잣집 전용 운송 수단이 자전거였다. 고다이상점은 영국제와 미국제 자전거를 판매하고 있었다. 고다이자전거상회는 요즘 업종으로 비유하면 벤츠 같은 고급 수입 자동차 대리점에 해당한다.
막내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선택은 진취적이었다. 농사나 음식점에 아들을 보내지 않았다. 산업혁명의 거센 열기를 느낀 듯 사양 업종을 피했다. 첨단 상품을 다루는 곳에 아들을 보내 새로운 땅에서 도전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아버지 덕분에 마쓰시타는 청소, 심부름을 하면서도 하루 종일 첨단 상품을 매만지며 다가오는 미래에 일찍 눈을 떴다.
마쓰시타는 고다이자전거점에서 경영의 핵심 비법을 터득했다. 그에게는 어떤 MBA스쿨보다 많은 것을 가르친 현장의 교실이 고다이상회였다. 고다이 MBA스쿨에 특별한 교재가 있을 턱이 없었다. 매일 아침 5~6시부터 밤 9~10시까지 청소, 정리 정돈, 심부름, 고객 응대 같은 현장 실습이 있을 뿐이었다.
“따뜻하면서도 엄격한 지도를 받았다.”는 술회는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다. 주인 부부는 일상생활에서는 가족처럼 온화했던 반면 판매, 제품 관리 등 일과 관련해서는 매우 엄격했다. 자전거상회 근무를 전후로 마쓰시타의 아버지와 두 형, 누이들이 연달아 사망했다. 그는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어쩔 수 없이 소년 가장이 됐다. 가게 주인 부부를 부모처럼 의지하고 살아야 했다.
고다이 주인은 사업에서는 엄격한 원칙을 지켰다. 마쓰시타는 주인으로부터 세 번 뺨을 맞았다. 잘못이 있으면 즉결 처벌을 받았다. 그때마다 생각을 고쳐먹고 행동을 바르게 잡아야 했다. 주인은 “단골 고객 집을 향해서는 함부로 발을 뻗고 자서는 안 된다.”고 매번 잔소리를 했다. 고객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살라는 뜻이었다. 주인이 단골 고객 명단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몰랐다.
“돈을 남기려는 장사꾼은 하급이야. 가게를 남기려는 장사꾼은 중급이지. 단골 고객을 남기려는 장사꾼이야말로 진짜 상급이야.”
파나소닉의 고객 우선 경영은 고다이상점에서 출발했다. 마쓰시타는 대리점 사장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강조했다.
“상품을 사든 사지 않든, 점포에 들렀다가 나가는 고객을 향해 저절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알아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야 진짜 상인이다.”
센바대학의 고다이 MBA코스는 마쓰시타의 머리와 몸에 기업인으로서 기본 자질을 가르쳐주었다. 기업가 정신, 기업인의 사회적 사명을 불어넣었다. 소년 시절 말랑말랑한 뼛속에 꼼꼼히 새겨진 기업가 정신은 평생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화로점, 자전거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했던 마쓰시타는 잠시 시멘트회사에서 일용직 잡역부로 일하다 오사카전등 수습사원으로 입사했다. 네 번째 직장의 인턴사원이었다. 비록 인턴 자리였으나 15세에 번듯한 대기업에 취직한 것이다.
마쓰시타에게 오사카전등의 월급쟁이 생활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곳에서 부자들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직접 들여다보며 큰 꿈을 키웠다. 더불어 월급쟁이의 한계를 절감하고 창업을 결심한 직장이다. 7년간의 직장 생활을 통해 대기업 경영을 어떻게 지휘하고 부하 직원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체득했다.
마쓰시타가 전직한 계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때마침 오사카에는 전차 노선이 개설되고 전기라는 새로운 에너지가 보급되고 있었다. 호롱불, 촛불 대신 전등을 켜는 주택이 6년 만에 7배 속도로 늘고 있었다.
“전차 노선이 늘어나면 자전거는 팔리지 않을 것이다. 장래를 낙관할 수 없다. 반면 전기사업의 장래를 생각하니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다.”
마쓰시타는 전차, 전등의 보급을 보며 전기의 시대가 왔다고 직감했다. 막 선보인 전기는 자칫 부상자를 낳는 위험한 신문물이었으나 오사카전등만은 매력 있는 취직자리였다. 월급이 자전거점 점원 시절보다 10배나 많았다. 전등을 가설하는 단순 기술자도 요즘의 반도체나 휴대폰 엔지니어처럼 인기 있는 신랑감이었다.
그가 오사카전등에서 처음 맡은 일은 주택에서 고급 기술자의 전선 가설 작업을 옆에서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기계를 만지기를 좋아했던 그는 인턴으로서 에너지 분야의 신기술을 익히는 데 열중했다.
전등 수요가 급증하면서 회사 조직이 팽창했다. 인턴 3개월 만에 직접 전선을 깔고 전등을 달아주는 준사원급 엔지니어가 됐다. 작업하는 날만 임금을 받는 일용 근로자 신분이었으나 안정된 직장에서 수입이 보장됐다. 덕분에 하숙 생활을 끝내고 쓰루하시鶴橋 전셋집에서 신혼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자전거상회에 이어 오사카전등은 마쓰시타에게 또 한 번의 경영학 교실이 되어주었다. 자전거상회가 기초 과정을 제공했다면 오사카전등은 심층 교육과정이었다. 센바는 신흥 부자들이 쉴 새 없이 솟아나는 샘물이었다. 현장의 전기기술자로서 무엇보다 신흥 부자들이 탄생하는 현장을 자기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부자의 꿈, 대기업의 꿈을 키우는 기회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도약은 오사카전등에서 일어났다. 샐러리맨으로서 성장의 한계를 절감하고 창업을 결심한 것이다. 마쓰시타는 전등을 달아주며 전기 제품에 대한 시장의 수요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았다. 예를 들어 값싸고 튼튼한 소켓을 기대하는 고객 욕구가 강력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여러 종류의 소켓을 기대한다는 점도 피부로 느꼈다. 그는 독자적으로 부품을 모아 새로운 소켓을 만들어보았다. 첫 발명품이 훌륭하다고 판단해 특허를 출원했다.
어느 날 직속상관에게 발명품을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고선 회사 공인 제품으로 선택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사 공인 제품이 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제품을 들여다본 상관의 반응은 매정했다.
“이건 글렀네. 더 말할 필요가 없어. 이 정도 수준의 시제품을 갖고는 윗사람에게 보고할 수 없네.”
마쓰시타는 머리를 한 방 ‘꽝’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영 글러먹었나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틀림없이 글러먹었네. 더 연구하게.”
상사는 확언했다.
그 순간 눈가가 젖어드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고 마쓰시타는 훗날 실토했다.
‘회사는 나 같은 인간의 의견은 아예 들어주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좋다. 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직접 한번 팔아보겠다.’
1917년 마쓰시타는 백제마을에서 22세 나이에 겁 없이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회사 간판은 없었다. 부인과 처남, 직장 동료 2명과 함께 5명이 소켓 제조에 뛰어들었다. 의욕은 넘쳤으나 보잘것없는 영세 가내수공업이었다. 믿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월급쟁이 시절 개발한 소켓 하나였다. 우쭐한 기분에 실용신안 특허를 등록해놓은 상태였다.
실로 무모한 창업이었다. 밑천은 퇴직금을 포함한 자기 자금 95엔, 빌린 돈 100엔을 합해 고작 200엔이었다. 요즘 원화 가치로는 2800만 원 안팎이었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가처럼 독보적인 첨단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학벌이 쟁쟁해 자금, 기술, 판매 측면에서 약점을 보완해줄 인맥이 확보된 상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가 특허로 등록했던 소켓은 결점투성이였다. 오사카전등에서 단번에 퇴짜 맞은 결격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작품을 만들었으나 소켓은 몇십 개밖에 팔리지 않았다. 결함이 많아 팔릴 리 없었다. 창업 자금은 순식간에 바닥났다. 창업 동지인 직장 동료 2명은 곧바로 떠났다. 마쓰시타는 동네 목욕탕에 갈 푼돈조차 없었다. 아내의 기모노와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급전을 빌려 써야 했다. 자금, 기술, 인맥, 판매 루트 등 어느 것 하나 준비하지 못한 빈손 출발이었다. 방한복 한 벌 없이 맨몸으로 히말라야 등정에 나선 꼴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센바 자전거점과 오사카전등에서 13년 동안 온몸으로 체득한 상인 정신이 있었다.
‘결코 중도에 포기해선 안 된다.’
‘성공할 때까지 밀고 가면 길은 반드시 열린다.’
하루에 몇 번이고 다짐했다.
낙망하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선풍기 부품을 급하게 만들어달라는 발주가 들어왔다. 대기업 하청회사에서 재하청을 받은 일감이었다. 소켓을 만드는 기술을 활용해 선풍기 부품을 제조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정성을 들여 납기 안에 납품했더니 발주처가 대만족이었다. 첫 납품이 끝나자마자 추가 주문이 이어졌다. 부부와 처남 등 3명이 밤을 새우며 납기를 맞춘 것이 적중했다. 몇 달 만에 예상치 못한 큰돈이 들어왔다. 사업가로서 처음 성취감을 맛보았다.
이렇게 시작한 사업은 정착하여 대기업이 되었다. 책의 3분의 2이상은 기업사로써의 그의 이야기를 다룬다. 마쓰시타는 누군가 파나소닉은 무슨 회사냐고 물으면 이런 식으로 대답하라고 했다. “우리 회사는 물건을 만들기 전에 사람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노조를 동반자로 인식한 깨어있는 경영자였던 그가 주창한 다양한 경영 이론들을 볼 수 있다. 책은 그의 경영 어록 10개로 마무리된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경영 어록 10
1. 기업은 사회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기업 공기론)
2. 성공은 운 덕분이고 실패는 나의 잘못이다. (겸손 경영론)
3. 기업의 사명은 필요한 상품을 수돗물처럼 싼 가격에 공급하는 것이다. (수돗물 철학)
4. 회사를 무너뜨리는 것은 노조가 아니라 권력자다. (대립과 조화론)
5. 기업 경영은 사람이 전부다. (인재 중시 경영론)
6. 세상의 평판은 내 위치를 알게 하는 나침반이다. (중론 경영론)
7. 기업을 둘러싼 모든 이해 당사자는 친척과 같다. (공존공영 철학)
8. 똑똑한 사람은 회사를 일으키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후계자 검증론)
9. 경영은 비가 오면 우산을 쓰듯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다. (우산 경영론)
10. 조직은 어느 정도의 여유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좋다. (댐 경영론)
성공한 기업 파나소닉을 세운 창업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업적, 인간적인 지혜를 들을 수 있다. 꼭 읽어보길 권한다.
(2.0) 매번 일본 실용서를 읽을 때마다 설명이 요약본처럼 부족함을 느꼈는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이 책 역시도 제목에 비해서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특히나 TV 자막 관련 내용이 많은데, 일본어에서 한글로 번역하는 가운데, 제대로 전달되기도 어렵고, 우리 방송수준이 일본보다 좋다보니 수준의 차이도 커 보인다.
#흔들기-받기 : 받기 부분에는 문장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말을 배치한다. 받기 앞에 배치하는 흔들기는 받기를 설명하는 말과 흔드는말을 한 세트로 묶는 부분이다.
#상대가 '그러니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야?'라는 의문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의문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생각하는 행위'는 상당한 에너지가 요구된다. 이러한 에너지가 소비되는 시점에서 이미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익이 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이익이 있는지, 전반적인 내용을 명학히 드러내서 기대감을 높인 다음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비즈니스에서든 일상 생활에서든 교섭이나 제안, 설명 등을 할 때 반드시 성공하는 기술이다.
#효과적인 방법은 프레젠테이션이나 협상을 시작할 때, 글 첫머리에 지금부터 이야기할 화제와 관련된 흔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때의 포인트는 '흔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상대의 공감을 얻기 위한 질문이므로 상대에게 "맞아요", "그렇지요"라는 대답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시작 부분에서 2~3회 정도 공감을 얻었다면 이제 본론으로 넘어간다.
#항상 이 이야기는 몇 단계로 나눠서 정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자. 이 간단한 방법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상대방의 머리에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며, 그 결과 커뮤니케이션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단, 단계 수가 너무 많은 것은 좋지 않다. 최대 5개 정도로 정리하자.
#정보에 '주제'와 '관점'(요점을 쉽게 보여주는 방식)이 없으면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야기를 듣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관점'을 부여할 때의 포인트는 상대가 구체적인 장면을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효과나 효능을 상대가 '머리를 쓰지 않고도' 상상할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한다.
#랭킹 순위를 매기면 재미가 배가된다.
#어떤 한 가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칭찬하면 객관성이 만들어진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객관적인 견해'를 원한다.
#짧은 잣대를 먼저 제시해서 상대의 기준을 낮추면 평범한 물건을 더 좋아 보이도록 만들 수 있다. 특히 내 경우처럼 '같은 범주'의 '최대한 비슷한 조건'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