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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오에 겐자부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역사가 진보한다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자세는 몇 가지로 나뉠 것이다. 진보하는 세상의 최전선에서 역사를 이끄는 자, 둔하게만 움직이는 세상의 중심에서 빛을 누리는 자, 나아가려는 역사의 목줄을 붙들고 어떻게든 주저앉히는 자 말이다. 진보가 인류의 나아갈 길이라면 무지한 대중을 끌어 어떻게든 한 발 더 나아가자 독려하는 이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이 가운데 유독 아깝게 느껴지는 인물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널리 알려진 그는 시대의 지성이라 불러 마땅한 삶을 살았다. 제국주의를 정면에서 맞닥뜨렸던 나쓰메 소세키의 시대가 가고, 2차대전 뒤 패전국으로서의 일본을 조명하고 미래를 도모한 일련의 작가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인물이다. 서구에서도 널리 알려진 작가들, 이를테면 가와바타 야쓰나리, 미시마 유키오, 엔도 슈사쿠,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과 차별화되는 냉정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여러 작품을 남겼다.
<만엔 원년의 풋볼>은 500페이지를 훌쩍 넘는 꽤 긴 분량의 장편 소설이다. 어려서 남이 던진 돌에 눈을 맞아 한쪽 눈을 잃은 미쓰사부로는 주변에서 '쥐새끼같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추하고 유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심지어 그는 저를 그렇게 부르는 이들에게 공감하며 살아가는데, 소설 전반에서 그 나약함이며 패배감이 꾸준히 묻어나온다. 충격적인 모습으로 친구가 자살한 뒤 그의 주변엔 묘한 절망까지 맴돈다.
반면 동생 다카시는 1960년 미국과의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다 미국 방문을 위해 명목상이나마 전향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 귀국 후 형 부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마을 안팎의 부랑자들을 규합하여 조직을 만들고 마치 100년 전에 있었던 봉기의 주모자와 같은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소설은 제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려는 미쓰사부로의 관점에서 쓰여 그 심리와 역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 난해하고 지루하게 읽힐 수 있다. 그럼에도 100년 전의 역사와 오늘을 결부시켜 탐구하는 작가 오에의 자세는 동 시대는 물론 일본 현대문학 전체를 아울러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오늘의 입맛에 맞게 과거를 왜곡하고 저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남을 재단하는 이를 쉬이 만날 수 있는 2024년 가운데 이 소설은 여전히 유효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제 못남을 기꺼이 드러내고, 제 종과 제가 속한 집단의 죄악들을 돌아보며, 그 구렁텅이에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모색하는 소설의 용기는 일본은 물론 한국문학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자세라 할 것이다.
소위 신안보조약이라 불리는 일미안보조약은 그 뒤로 이어진 반세기 일본의 번영에 뿌리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로부터 거세당한 국가의 주체성이 있음을, 또 그에 앞서 자행된 제 조국의 병든 가해행위가 있었음을 돌아보는 작업은 보통의 용기와 반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과연 한국 문학 가운데선 이와 같은 작업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돌아본다. 비슷한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성격을 지닌 한미안보조약에 대하여, 또 외세의 침탈과 저항 아래 깔려 있던 꺼내놓기 부끄러운 기억들에 대하여 한국의 문학과 역사는 어떤 자세를 취해왔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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