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보면서 싱클레어 처럼 누구나 '두 세계'의 경계에서 흔들리며 살아간다는데 공감이 되었다.
🧐 부모와 사회가 규정한 '밝은 세계'의 안락함에 머물고 싶으면서도, 내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본능과 자아라는 '어두운 세계'의 유혹을 동시에 느낀다.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성장소설'이지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 성장은 유년의 평화로운 정원을 떠나,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고 끝내 '나'라는 유일무이한 세계를 완성해 나가는 한 인간의 처절한 투쟁이다.
☝️ 싱클레어의 여정이 내게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타인이 만들어 놓은 알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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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의『데미안』(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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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분법의 붕괴와 카인의 표식
🔹️ 싱클레어의 유년기는 부모님이 만든 도덕과 규범의 세계, 즉 '밝은 세계'였다.
🔹️ 하지만 크로머라는 어둠의 세계를 접하고 거짓말과 도둑질을 경험하며, 싱클레어는 이 완벽해 보이던 세계에 "첫 번째 칼자국"을 긋게 된다.
🔹️ 이때 등장한 데미안은 성경 속 '카인'을 악인이 아닌 '비범한 정신과 담력을 지닌 자'로 재해석하며 싱클레어의 낡은 선악 이분법을 송두리째 뒤흔다.
🔹️ '카인의 표식'은 죄의 낙인이 아니라, 세상의 규범(아벨의 세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자들의 훈장이었다.
🔹️ 이 깨달음은 싱클레어에게 안락한 예속에서 벗어나 독립적 자아로 나아가게 하는 고통스럽지만 필연적인 첫걸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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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을 깨는 투쟁과 아브락사스
🔹️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혁명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라는 명문장은 기존의 질서와 결별해야만 새로운 자아가 탄생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 싱클레어는 '선'만 존재하는 반쪽짜리 신이 아니라, 선과 악, 빛과 어둠,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괄하는 신 '아브락사스'를 지향하게 된다.
🔹️ 이는 외부의 도덕적 잣대를 버리고 내면의 모든 욕망과 그림자까지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통합의 과정이다.
🔹️ 방탕아의 삶조차 신비주의자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듯,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 나에게 꼭 필요한 운명과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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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원한 꿈은 없다, 흐르는 운명에 몸을 맡기다
🔹️ 여정의 끝에서 만난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더 깊은 차원의 깨달음을 준다.
🔹️ 그녀는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다"고 말하며, 어떤 하나의 목표나 성취에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 껍데기뿐인 집단이 두려움 때문에 뭉쳐 다니는 것과 달리, 깨어난 자들은 고독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간다.
🔹️ 개인의 운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꿈으로 교체되는 유동적인 것이며, 이 내면의 탐구는 결국 세계의 거대한 흐름과 만나게 된다.
🔹️ 싱클레어는 이제 외부의 지도자나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곧 운명임을 깨닫고 그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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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무리: 우리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운명
🔹️ 이 책은 우리에게 "너 자신으로 살라"는 단 하나의 의무를 제시한다.
🔹️ 남들이 정해놓은 성공 공식이나 획일적인 행복을 쫓는 것은 '패거리 짓기'에 불과하다.
🔹️ 비록 그 길이 고독하고, 때로는 알을 깨는 듯한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을 걷는 것만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이유다.
🔹️ 지금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껍질 속에 숨어 있을 것인지, 아니면 자신만의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갯짓을 할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 이 책은 안주하려는 우리 영혼을 내려치는 도끼이자,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가장 아름다운 별이다.
📚 '헤르만 헤세'의『데미안』'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와 '야곱의 싸움' 파트를 읽고....
🤔 우리는 매일 스마트폰을 통해 타인의 화려한 일상을 목격한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성공하는 법', '사랑받는 법'을 학습하며, 사회가 정해놓은 정답에 내 삶을 맞추려 애쓴다.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기준에 맞추려 노력할수록 내면의 공허함은 커져만 갈 뿐이다.
😳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은 '현실'이라는 핑계로 뒤로 미루기 일쑤다.
☝️『데미안』의 이 대목에서 진짜 삶은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걸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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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투쟁의 의미 : 파괴 없이는 탄생도 없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모 연애인의 과거 흡연사진이 문제되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는 당시 모습조차 자신이라고 당당하게 밝혀 화제가 되었다. 사회적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입체적으로 볼 줄 아는 시야로부터 알을 깨고 나오려는 거룩한 투쟁이 시작된다.
🔹️ 여기서 '알'은 우리를 보호해주던 안락한 껍질이자, 동시에 부모, 학교, 사회가 주입한 도덕과 규범의 세계다.
🔹️ 이 세계를 깨뜨리는 건 고통스럽다. 익숙한 안정을 포기해야 하고 홀로 추위와 고독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껍질을 깨지 않고서는 결코 날개를 펼칠 수 없다. 선과 악으로 나뉜 이분법적인 낡은 세계를 철저히 부수고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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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면의 힘 : 운명은 우연이 아니다
🔹️ 우리는 종종 삶의 중요한 사건들을 '운이 좋았다'거나 '재수가 없었다'는 말로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운명이 사실은 내면의 욕구가 외부로 투사된 결과라고 말한다. 피스토리우스가 연주하는 오르간 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낡은 교회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 이는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부여한다.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결국 내 내면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사물들"이라는 구절은, 내면이 빈곤하면 외부 세계도 빈곤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 반대로, 내면의 불꽃을 응시하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우리는 외부의 소음 속에서도 나에게 꼭 필요한 운명의 길잡이를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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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일한 직분: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
🏷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외에는 아무런 의무도 없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 우리는 시인이 되기 위해, 혹은 부자가 되거나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이 책에선 우리의 유일한 소명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 말한다.
🔹️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때로는 사회적 통념과 부딪혀 '광인'이나 '범죄자' 취급을 받을지라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고유한 궤적을 그려내는 것.
🔹️ 그것이야말로 자연이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내보낸 유일한 이유다. '나'로서 살지 못한다면, 그 어떤 사회적 성공도 결국은 '반쪽짜리 삶'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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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무리
🔹️ 싱클레어의 고뇌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야곱의 싸움'이다.
🔹️ 우리는 끊임없이 안정된 '알' 속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감내하고 나만의 하늘로 날아오를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 우리는 지금 나의 운명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알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가.
🔹️ 내 안의 목소리가 이끄는 곳, 그곳이 비록 어둡고 낯선 길일지라도 한 발짝 내디딜 용기가 있기를 바란다.
한 해를 시작하며 읽은 헤르만헤세의 두번째 작품 싯다르타.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던 그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
시간과 배경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그의 성장.
그리고
깨달음.
명상하는 마음으로 마치 내가 뱃사공 바주데바가 된 듯이
가만히, 그렇지만 진심으로
이 명작을
읽어내려갔다.
<데미안>만큼의 울림이었던 <싯다르타>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음에, 그의 가르침을 느낄 수 있음에
잔잔한 감사를 느꼈던 1월이었다.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베아트리체'
🤔 이 두 장을 읽고 책에서
🔹️ "방탕아의 삶이 신비주의자를 위한 준비"라는 데미안의 통찰과
🔹️ 싱클레어가 '외부의 신(부모)'에서 '내면의 신(자아)'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핵심내용이다.
🧐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 "두 세계의 붕괴와 자아의 재건"으로,
🔹️ 철학적으로는 "이분법적 세계관(선/악)의 해체와 내면적 통합의 과정"으로 표현하고 싶다.
😌 다시 이 두 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고 답을 생각해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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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1: 싱클레어는 술집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신을 파괴한다. 보통의 도덕적 관점(기독교적 이원론)에서 이것은 명백한 '악'이자 '실패'다. 하지만 데미안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시를 들며, "방탕아의 삶은 신비주의자를 위한 최고의 준비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싱클레어의 방황을 단순한 일탈로 봐야 할까? 아니면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의례'로 봐야 할까?
🔹️ 이분법의 초월: 기존의 세계(부모님의 밝은 세계)에서는 '방황'이 금지된 것이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이 방황을 통해 선과 악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타락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조차 나 자신'임을 자각하게 된다.
🔹️ 사유의 틈새: 데미안의 말처럼, 내면의 누군가(무의식적 자아)는 싱클레어의 의식보다 더 현명하게 그의 인생을 이끌고 있다.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는 과정은 껍질을 깨기 위한 진통이자, 기존의 낡은 도덕관을 허물어뜨리는 '사유의 틈새'를 만드는 작업이다. 즉, 타락 없이는 구원도, 통합도 없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 소결론: '타락'은 성장을 한 과정이자,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자신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각을 위해 필요한 성장통 같은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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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2: 싱클레어는 공원에서 본 소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이고 숭배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그녀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를 통해 싱클레어는 다시 '밝은 세계'를 구축하지만, 이것은 부모님이 주었던 과거의 밝은 세계와는 다르다.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를 통해 만든 '환한 세계'와 과거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 정신세계의 이동 (신→방황→사랑) : 과거(부모)의 수동적으로 주어진 규율, 의존적인 평화로부터 현재(베아트리체)의 "부서진 삶의 한 시기의 폐허들로부터 자신을 위해 지은 세계", 즉, 자신이 능동적으로 창조한 세계로 이동한다.
🔹️ 승화 : 싱클레어의 메모처럼 그는 성적 충동(방황)을 억누르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숭배와 기도'라는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승화)했다. 베아트리체는 실존 인물이라기보다, 싱클레어가 지향하는 '자신의 지향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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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3: 싱클레어가 그린 초상화는 처음에는 베아트리체를 닮았지만, 점차 데미안을 닮아가고, 나중에는 싱클레어 자신과도 닮은 묘한 모습이 된다. 그리고 텍스트의 마지막에 이르러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마저 시야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왜 싱클레어를 구원한 베아트리체는 사라져야만 했으며, 그 자리에 다시 데미안(혹은 운명)이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 자기 자신은 알 수 없는 침잠한 모습: 그림 속 얼굴이 데미안이자 곧 싱클레어 자신이라는 점은, 이제 그가 외부의 이상형(소녀)을 좇는 단계를 지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마주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 융합적 세계로의 진입: 베아트리체는 '밝은 세계'의 재건이었지만, 여전히 '밝음'에 치우쳐 있다. 하지만 데미안은 밝음과 어둠, 선과 악이 공존하는 '통합된 자아'이자 '운명' 그 자체다.
🔹️ 다시 데미안과의 연결고리: 이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친구'로서가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이자 자신이 도달해야 할 표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사춘기의 방황을 끝내고 진정한 자아 실현(개성화)의 길로 들어섰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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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합적으로,
🔹️ 싱클레어는 이 대목에서 바로 과거의 기독교적 이원론을 나타내는 두 세계를 극복하고,
🔹️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는 현대적 개인의 탄생 과정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
방황하던 청소년 시기, 나의 인생책이 되어준 친구.
문장 하나하나를 씹어삼키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한 권을 통째로 필사할 정도로,
'나'스럽다고 느꼈던.
사족: 개인적으로 데미안을 읽고 헤르만 헤세가 너무 좋아져,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저서 <밤의 사색>을 구매하게 됐다.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의 사색과 고찰, 그리고 약간의 우울과 고뇌가 들어있을 줄 알고 두근거리며 책을 열었으나....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생각들, 오리엔탈리즘의 지나치고 불쾌할 정도의 강조...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와 샤머니즘의 알 수 없는 콜라보로 구사된 영적인 단어들....의 콜라보로 실망했던 경험이 있다. <데미안>이 가장 유명한 책인 이유가 있던 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데미안을 인생책으로 꼽을 수밖에.
아마 헤르만 헤세라는 사람이 그의 생각과 인생사의 흉터들을 가장 정갈하게 정돈하고, 정제해 출판할 수 있는 책의 제일 높은 이상향이 데미안을 향해있지 않나 싶다.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두 세계'와 '카인' 파트를 읽고....
1️⃣ 유년의 낙원에 그어진 첫 번째 칼자국과 예속의 고통
✨️ 싱클레어의 삶은 질서와 양심이 지배하는 부모님의 '밝은 세계'와 그 경계에 맞닿아 있는 '어두운 세계'로 나뉜다.
✨️ 크로머라는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이며 시작된 도둑질과 거짓말은 그를 가족들로부터 고립시켰고, 그는 평화로운 집안에서도 "소심하게 고통받으며 유령처럼" 살게 된다.
✨️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는 싱클레어의 모든 유년기 놀이를 중단시키는 공포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는 이 예속의 과정에서 "신성한 아버지의 세계에 그어진 첫 번째 칼자국"을 목격한다.
✨️ 이것은 안락했던 유년의 종말인 동시에 "탄생을 위한 죽음"의 쓴맛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인상적인 메모와 통찰]
🔖 성장의 필연적 관문: 싱클레어는 자신의 비참한 상황이 "성장의 한 과정(세계를 깨뜨리는)"이자 숙명임을 직시하며, 모든 것이 이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다.
🔖 고통 속의 기이한 자부심: 아픔을 주지만 동시에 자신을 자랑으로 채우는 기이한 움직임을 통해, 그는 자신이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꿰뚫어 보는 존재가 되었다는 통찰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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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인의 표식과 진정한 자립을 향한 두려운 한 걸음
✨️ 막스 데미안은 성경 속 카인의 표식을 저주가 아닌 "시선에 담긴 비범한 정신과 담력"을 가진 자들의 훈장으로 재해석하며 싱클레어의 영혼이라는 우물에 커다란 "돌 하나"를 던진다.
✨️ 데미안의 이야기는 싱클레어가 인식, 회의, 비판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되었지만,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싱클레어는 오히려 데미안이 요구할 더 높은 수준의 책임과 자립을 두려워하게 된다.
✨️ 결국 그는 다시 부모님의 '밝은 세계'로 도피하여 아벨의 모습을 연기하며 안주하지만, 이는 진정한 구원이 아닌 또 다른 예속으로의 퇴행일 뿐이었다.
[인상적인 메모와 통찰]
🔖 변화에 대한 두려움: 데미안이라는 유혹자 앞에서 싱클레어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먼저 겪은 세계에 안착"하려 하며, 스스로를 다시 과거의 질서 속에 속박하는 선택을 내린다.
🔖 외부자의 시선: 데미안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 "법의 틀이 아닌 외부자의 시선에서 본질을 볼 줄 아는 것"이 인간이 자아로 나아가는 고통스러운 길임을 암시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알은 자기 자신을 키워주지만 동시에 가두고 있습니다.
이 알은 곧 사회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는 저희에게 선과 악을 정의해주고 이에 따라 정의된 악을 억압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된 악을 모두 억압하다 보면 새는 절대로 알을 깨고 태어날 수 없습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으로 태어난다는 것, SELF를 찾는 개성화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사회이고 세상인 알을 깨뜨려서 개성화에 성공한 새는 날아오릅니다.
그리고 그 새는 신에게 날아갑니다. 그 신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악마를 숭배하지도 않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그리고 칼 융은 저희가 선과 악을 의심하고 모두 스스로의 모습임을 인정하며 그 속에서 SELF를 찾아가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 SELF는 어쩌면 데미안처럼 악마적인 모습을 이중적으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모습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알을 깨지 못하는 새에게는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싱클레어의 이름이 쏟아지는 것은 아무래도 수많은 싱클레어의 그림자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데미안은 소설 내에서 초반에만 나오고 나중에는 쭉 나오지 않던 프란츠 크로머를 언급합니다.아무리 SELF를 찾고 스스로의 모습을 구축하더라도 크로머라는, 폭력적인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자취를 감췄더라도 언젠가 싱클레어의 머리속에는 크로머가 등장하겠지요.
그럼에도 싱클레어는, 데미안은 걱정이 없습니다. 데미안이라는 SELF는 언제나 싱클레어 안에 살고 있고 자신 스스로를 찾아낸 새는 언제나 선과 악을 초월하는 아브락사스 앞에서 태어날 것이니까요.
전문보기 : https://m.blog.naver.com/jellyfish_club/224143556678
글씨가 많이 지저분하지만.. ㅠㅠ 데미안을 읽다가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고독할때는 카오스에 온몸을 맡겨야하는걸까요? 니체가 말한바로는 우리는 인간적이고 너무 인간적이어서 혼돈을 잠시도 버티지 못한다는데 혐오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일까요? 그렇지만 단 하나는 확실합니다. 혐오의 즐거움은 도둑질같은 다른 비도덕적인 행동보다 훨씬 구역질나옵니다.
올해 읽어본 최고의 책.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도 읽어보았지만 싯다르타를 처음 읽어봤을때의 그 전율은 아직도 잊지못한다. 나는 이책을 세권이나 샀다.
이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직접적인 삶의 체험만이 개인으로 하여금 교훈과 자유 그리고 궁극적으로 해탈까지 다다르게 한다는 것을.
주인공인 싯다르타는 신성한 브라만으로써 정해진 길을 벗어나 구도자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해탈을 추구한다. 그러던 와중 성자 고타마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한다. 그러면서 속세로 환속하여 모든 탐욕과 욕정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운 삶을 지내다가 모든 고통을 지나고 해탈에 이르른다.
도를 도라고 부르는 순간 도가 아니게 되듯이. 진정한 해탈은 도를 추구하는 그 과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다. 피안에 도달한 자는 배를 떠나 보내야한다. 언어와 법문은 진리를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깨달은 자에게 돌하나 매순간 하나가 진리인 것을. 구태여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아니 표현해지지도 않으며 그대로 전달되지도 않을 것이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
이처럼 저자는 자아 발견을 위한길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음을 시사하고 몸소 삶의 체험을 강조하며 철학이나 종교 그 밖의 모든 신념에 맹목적으로 의지하고자 하는 고정관념을 비판하는 듯 하다.
읽은 내내 전율하며 읽었던 책이다. 특히, 속세에서 번뇌를 느끼면서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진정한 해탈로 나아가는 싯다르타를 보며 필멸하는 삶에서의 한 개개인의 직접적인 체험의 절대적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나 역시, 어떤 곳에 매몰되지 않고 매순간 전진하고 성장하며 종국에는 해탈에 이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소 불교철학과 인생, 번뇌 그리고 자유에 대해 관심을 갖는 모든 이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고전문학이다.
- 유년기부터 성년기까지의 빛과 어둠의 세계를 오가며 끊임없이 고뇌하는 이의 이야기.
- 이 과정에서 싱클레어는 누군가의 “데미안”이 되기도 한다.
- 예수와 두 도둑, 카인과 아벨 등 인물 간 선악 구도가 명확 해보이는 성경 속 일화를 대중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불평하는 도둑, 카인의 편을 드는 데미안의 관점이 인상적.
- 피스토리우스가 말하는 목사의 역할은 현시대 동서양 모든 목회자가 새겨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두 세계를 오가고, 알을 깨며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건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알을 다시 만들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도.
유명한 고전의 원작을 읽어보고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있는 사람인지라 시도해봤습니다. 뒤에 나오는 해설까지 봐야해요..꼭 당대사회랑 배경지식이 없어서 그냥 넘어간 부분이 많은데 고전은 이래서 재밌는거죠 마지막 해설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거든요
그리고 『데미안』, 서브스턴스(영화), 『지킬 엔 박사』 함께 보면 더 재밌어요 각각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뭐가 다르고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 비교하기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다 봤는데 이해력도 부족하고 정리를 안했어서 그냥 생각에만 그치긴 했어요
해설에 나온 『어둠의 속』 도 한 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아무튼! 재밌게 읽었다!
‘데미안’이 인생책이라고 종종 이야기하던 아내가 이 책을 구매했다.
처음엔 열심히 읽는 것 같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에 던져둔 채 펼칠 생각을 하지 않아 내가 먼저 읽게 되었다.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
그가 나약한 인간으로써 겪게 되는 깨달음의 과정을 이렇듯 생생하고 흥미롭게 글로 표현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문득 레고블록이나 점토 같은 물질들이 떠올랐다.
점토나 블럭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온갖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 지듯,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또한 원자의 조합으로 구축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졌다 해체되고, 만들어졌다 해체되는 끝없는 순환 속에 지금의 난 인간으로 만들어져 여기에 글을 쓰고 있지만, 언젠간 해체되어 하루살이나 조약돌로 조합될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도 영원한 시간 속에서 찰나를 살아갈 뿐이라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이해가 된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초목이든 벌레든, 하다 못해 생명이 없는 돌맹이까지 세상 만물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겹쳐보이듯,
그리고 한스와 하일너는 동일인물로 느껴짐,
결국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또 다른 욕망으로 보임.
달콤한 사과주스같은 엠마와의 사랑의 감정도 잠시 실연에 빠지고,
노동이라는 것을 통해 자유로움에 다가서고자 했으나 끝내 그걸
극복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말은 스스로 한 결정이라 생각된다.
자전적인 글로 비추어 보았을땐
헤르만 헤세의 투쟁보다는 반성에 가깝지 않을까.
수레바퀴라는 다분히 불교적인 사상을 통해
삶의 고민을 소설로서 생각하게 만드는 책.
종종 나에게 대체 에너지가 어디서 나서, 그렇게 매일 책을 읽고 운동을 할 수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것들을 하기 위해 다른 에너지를 덜 쓴다. 내가 정한 루틴들을 지키기위해, 하지않아도 될 감정소모나 에너지소모를 피하는 편이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나를 돌보며 살아야하니까 나의 루틴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이다.
직장인으로, 엄마로, 딸로- 내가 해야할 것들은 꽤 많지만 내가 나를 위해 꼭 지키는 것은 세가지 정도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잠시라도 했다는 위안을 주는 매일 책읽기, 건강하게 스트레스를 없애주는 운동, 잠들기 전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필사. 사실 이런 것을 빼먹어도 큰일 나지는 않지만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내 자신은 안다. “아, 내가 오늘 나를 위해 살지 못했구나.”하고.
조금 더 젊었던 시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했다는 위안을 주는 독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은 탓인지, 하루를 잘 닫는 것이 더 큰 위안이 될 수 있음을 배워간다. 그래서 온 가족이 잠들고 혼자 앉은 식탁, 한글자 한글자 필사를 하며 “오늘도 잘 보냈다”라는 마음을 꼭 담아본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시간에 가장 적합한 필사책은 마음시선의 것들이다. 최근에는 『고전명문장 필사100』을 쓰고 있는데, 분량도 적당하고 주제도 명확해서 하루를 정리하기에 참 좋다. 너무 많은 분량은 하루의 마무리에 피곤함을 더해주고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게 되는데, 마음시선의 『고전명문장 필사100』은 집중해서 몇 분 쓰고, 또 생각할거리를 주는 문장들이 모여있어서 필사자체에도 큰 의미를 준다. 마음시선에서 출간되는 여러 필사책들은 주제가 꽤나 명확하기 때문에,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이나 바라는 것 등에 따라 골라 쓸 수 있어 좋다. 또 책 자체가 실제본이라 쫙 펼쳐지기 때문에 글씨를 잘 못쓰는 사람도, 오랫동안 손글씨를 쓰지 않은 사람도 정갈하게 필사할 수 있음도 큰 장점.
학창시절에는 왜 선생님들이 빡빡이를 시키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보니, 손으로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은 손으로 한번, 눈으로 한번 읽고 쓰는 것이엇으며, 마음에도 꾹꾹 눌러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그렇게 집중하는 시간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며, 다른 상념들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더라. 그래서 나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스스로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 남에게만 좋은 사람이라서 스스로를 다독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꼭 필사를 하시면 좋겠다. 하루 5분에서 10분이라도 스스로를 돌볼 수 있길 바라며 말이다.
오늘, 『고전명문장 필사100』를 통해 데미안을 썼다. 나의 존재에 대해 한참 고민하던 즈음, 문득 데미안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속삭여준다.
대충 싱클레어의 성장소설
일반 사람들늬 내면의 방황을 잘 표현한 소설
정신분석학이 잘 가미되어 있는 소설
이런 이유들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을만한 소설
but
초반이랑 중반까진 재밌지만 후반은 내가 데미안을 읽는건지 데미안이 나를 읽는건지 모르겠음
공간 서술이 불친절하고 번역이 조금 부드럽지 않음
기독교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음
단점은 데미안을 읽기 힘든 내 지적수준
친정아빠의 최애책인 데미안을 드디어 완독했다. 중학생때부터 아빠가 읽어보라고 하셨지만 그때는 잘 와닿지도 않고 재미가 없었다. 중간중간 몇번 더 읽어보려고 시도했던거 같은데 매번 앞부분만 읽고 말았던거 같다. 그래서 나에게 데미안은 늘 프란츠 크로머에게 괴롭힘 당하는 싱클레어의 불행한 어린 시절로만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40이 넘어서 드디어 처음으로 완독하게 되었다.
작가 친구에게 이 책이 아빠가 좋아하시는 책이라고 했더니 아빠가 왜 이 책을 좋아하시는지 생각해보며 읽으면 재밌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후 아빠의 사상이 이해되면서 왜 우리 아빠가 이 책을 좋아하시는지 알겠더라. 아빠는 어려서부터 초인에 대한 동경이 있으셨다. 그래서 늘 정신수양을 중요시여기시고 단전호흡을 지금도 매일 하신다. 이 책의 데미안은 아빠에게 그런 초인의 모습을 그려주었던거 같다.
이 책을 다 읽고나서 헤르만 헤세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니체를 조금 찾아보니 우리 아빠의 성향과도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니체의 사상을 좀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데미안 이후로 나는 니체의 사상에 빠져들게 되었다.
한스에게 데미안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결말이 달라졌을까?
시골에서 상경해서 기숙사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그리고 그 수재들 속에서
난생처음 가위 눌리는 경험을 할정도로 스트레스 받던
고등학생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의 아이들의 두통에도 둔감해지지 않도록
지금부터 노력해야겠다.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내기만을 강조하기 않기를..
*이 후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존 스타인벡은 <에덴의 동쪽>이나 <분노의 포도>로 유명하다. 1900년대 미국의 상황을 무척이나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가로, 퓰리처 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사실주의 작가의 작품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회 모습을 보여줄 뿐 생각은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그가 두껍지도, 서사가 긴 장편 소설도 아닌, 지금까지와는 조금은 다른 작품을 쓰게 되는데 그 작품이 바로 <진주>다.
<진주>는 멕시코 원주민의 민담을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본 이야기에 앞서 작가의 말인 듯 보이는 페이지에선, 작은 도시에 진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고, 그 이야기에서 진주를 어떻게 찾고, 어떻게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알려주며, 선과 악, 흑과 백 그 중간이 없는 무척이나 극과 극인 이야기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내고 자신의 삶을 거기에 빗대어 이해"(...7p)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이라기보다는 민담이나 동화에 가깝다. 하지만 원주민의 움집 묘사가 끝나가나 싶게 아이가 전갈에 물리는 사고로부터, 아이를 의사에게 데려가는 장면, 의사가 치료비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치료를 거부하는 장면 등을 읽으며 독자는 곧 마음 속에 폭풍이 일게 된다.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악한 것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그다음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욱 가관이다.
어릴 적부터 "권선징악"을 책으로 배우며 자라난 아이는, 청소년기를 거치며 사회의 부조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 부조리를 바라보며 거긱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잘 조율하며 조금이라도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통해 우리는 어른이라는 존재가 모두 선하거나 모두 악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적어도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존재들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진주>에서 그런 존재는 없다.
키노와 후아나, 아기 코요티토는 완벽하게 선한 존재다. 그런 존재는 결국 행복해져야 한다는 논리처럼 이들이 "커다랗고 완벽한" 진주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원주민들을 제외한 존재들은 완벽한 악의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그 진주로써 앞으로 무언가를 아는 존재가 되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싶고, 더 나은 삶을 바라는 키노는, 여러 고난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끝도 극적이다. 읽는 내내 화가 나고 끔찍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이 동화는, 마지막에 더없는 슬픔과 그나마 선의 승리에 조금은 안심하게 된다.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이 동화를 통해 무엇을 얻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아마도 그동안 살아왔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함과 정의를 믿고 싶다. 한 명이라도 그런 생각을 품고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변하겠지...하는 믿음을!
완전히 자기자신이 되는 것에 대한 질문에서
바로 나의 모습인(싱클레어)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에게
답을 찾으며 그것을 뛰어 넘어가는 과정으로 요약됨.
무엇보다 복잡한 상징과 추상적인 철학으로 책은 난해함.
하지만 내 안에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두세계의 통합을 위해
겪는 혼란과 성장통을 넘어서면 만나게 되는
자기한계의 초월, 자아의 해방 또는 완전한 자유 따위를
한번쯤은 고민해 볼만한 가치는 있음.
이번으로 <파리대왕>은 4회독째다. <데미안> 만큼이나 읽을수록 이해가 깊어지고 또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책이다. 워낙 상징이나 비유가 많기도 하고 그 속에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기 위해 천천히 정독이 필요하다. 또하나, <파리대왕>을 여러 번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번역 문제였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던 것. 대강이야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고 배경 묘사 또한 그런 거 아닐까, 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유난히 상징과 비유가 많은 이 책에서 혹시나 놓친 것이 있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문예출판사의 책을 한번 구매했었다. 두 출판사의 책을 비교해 보고 거기서 거기인 듯한 느낌에 책장 위에 올려두었다가 나중에 짐을 옮기며 보니 책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버려 버린 적이 있다. 이번 문예출판사의 새로운 책을 받기 전까지 두 손 모아 바랐던 것이 바로 번역이다.
"정글을 후려친 소년 둘레의 흉터 자국은 온통 열탕처럼 무더웠다."... (7페이지, 민음사)
"정글 속으로 움푹 파고든 긴 암벽은 그야말로 열탕이었다."...(7페이지, 문예출판사)
민음사 버전도 뒤쪽으로 가면 읽을 만하지만 이 앞부분은 도저히 용서가 안됐다. 이번 새로운 책을 받아 이 첫 페이지부터 펼쳐들고선 얼마나 감사했는지~! 이제 학생들도 별 어려움 없이 책 내용에 집중하며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싶다.
제목 <파리대왕>은 책 속에 직접 등장한다. 환영같기도 하고 실제같기도 한 그 장면은 나같은 기독교 문외한은 잘 몰랐던 "바알제붑"이다. 요즘 아이들은 신비아파트나 게임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단다. 결국 섬에 남겨진 아이들 중 욕망, 본능에 충실한 아이들과 신사의 나라 영국의 국민 한 사람으로서의 의지를 지키려고 한 아이들 사이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자극적이다.
또한 파리대왕이 우리의 야만성, 잔인성, 폭력성, 악마성을 의미하면서 우리 마음 속 "일부분"이라고 하는 부분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읽을수록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점에 소름끼치는 소설이다. 몇몇 논란거리가 있음에도 훌륭한 소설인 이유이다.
*이 후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스스로에 향하는 길, 그것은 꿈을 따라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에 연속이다.
진실로 소망하지 않는 무언가는 깨어져야만 한다.
그것에 얽매인다면 골동품 냄새가 난다.
그치만 알을깨고 나오는 것은 지독하게 고통스럽다. 찢어지는 느낌일 것이다. 스스로에게로 향함이란 마지막까지 깨지 못한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그 마지막이 되어버린 세계는 지금까지 깨왔던 세계와 미묘하게 같이 호흡하는, 겹쳐보이는 것일 것이다. 그 점이 나는 아름답다고 느낀다.
싱클레어에게 그 세계는 데미안이 아니였을까.
1. 나는 기다릴 수 있고, 사색할 수 있고, 그리고 단식할 수 있다.
2. 데미안의 불교버젼. 부처도 방황하고 성장함.
3. 배움은 의미가 없으며, 본질적인 자아를 깨우침에 의미가 있음.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기에 스스로가 깨우쳐야만 얻을 수 있음.
헤르만 헤세의 새로운 책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수월하게 잘 읽었던 책이지만 <데미안>은 중, 고등학교 시절 3번의 실패에 이어 성인이 된 후 6회독을 한 이후에야 겨우 책이 손에 잡힌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알았다. 어떤 책을 통해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 전기와 후기로 나뉘며 <수레바퀴 아래서>는 전기에 속하고 극심한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겪으며 프로이트의 제자 칼 융과의 치료를 통해 나아가며 그 이후 작품들이 후기에 속한다는 사실을. 때문에 이 후기 작품들은 자기 자신으로의 천착이며 끝없는 연구를 통해 발견한 것들의 상징이자 비유로 가득하다. <싯다르타>는 무려 <데미안> 이후의 작품이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만큼의 내가 성장한 것인지 그동안 열심히 읽었던 독서의 효과 때문인 건지 아님 <싯다르타>는 원래 그런 건지 나름 수월하게 읽혔다. 다만 정말 열심히 읽었다. 옆에 이면지를 두고 싯다르타의 행적을 따라 적어가며 최대한 싯다르타의 사유를 따라가려 애썼다. 뜬금없는 행동이 전혀 이해가지 않는다 해도 편견없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마지막 싯다르타의 결말에 이르렀을 때에는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결국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분명한 선도 분명한 악도 없다는 것이 <데미안>이었다면 시작과 끝, 정신과 육체가 나뉘는 것이 아닌 모두 하나로 흐른다는 사실이 <싯다르타>이다.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나 대신 싯다르타가 대신 체험해 준다고 생각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특히 강물로부터 배우는 싯다르타를 읽으며 나이 50이 넘어가자 자연 현상에, 내게 일어난 일들에,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갖게 되었던 사실을 떠올린다. 자만했던 20,30대를 지나 현실에 충실했던 40대였다면 결국 이 모든 것이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 최근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이제야 <싯다르타>를 읽게 된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으로 끝날 독서가 아닌 곁에 두고 몇 회독을 해야 할 책이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전쟁에 대한 비판적 시각까지..?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사건들, 인물,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다.(다소 이해하기 어려워 답답한 부분도 있지만) 하지만 마지막 챕터와의 연결은 다소 어색한것 같다.
데미안에서 반복하며 말하고자 하는 ‘성숙한 내면을 찾는다’ 는건 나한테 비추어 봤을때 뭘 의미하는건지 잘 알 수 없다. 이야기 끝에서 나를 찾았다 라고 생각한 그의 모습은 변치않는 성숙한 나일까?
부분적으로 이해가 가능했고 동감했던 부분은, 이상적이고 바른 가정에서 태어난 싱클레어는 한치의 오류도 범해서는 안될것 같다는 강박을 어렸을적 가졌을 것이라는 것. 조금 비뚤어진 태도와 행동들을 돌이킬수 없는 과오로 여겼다는것. 사실 거짓과 허풍, 힘쎈 무리의 사람과 한번쯤 어울리고 싶어하는건 누구나 겪어볼만한 일일뿐 ‘두 세계’로 묘사할만큼 양극단에 존재하는건 아닌데. 그 시절 나도 한번쯤 느꼈던 과정과 감정. 거의 모든 이가 선과 정의라고 여기는 이야기나 관행에 대해 반항적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또한 나의 어릴적 태도와 너무 유사하기에 읽기에 친숙했다.
한 단락, 한 장 통째로 이해되지 않는 곳이 부분 부분 있다. 읽고 또읽고 필사까지 해봤지만 글만 익숙해질뿐 와닿지는 않는다. 그에반해 이해를 넘어 한번쯤 경험해본듯한 느낌에 대한 묘사나 생각해본듯한 문장들은 전율이 돋았다.
- 이런 충격들은 늘 ’다른 세계‘로부터 왔고 늘 두려움과 강압과 양심의 가책을 수반했다. 그것들은 늘 혁명적이었다. 내가 그 안에 그대로 머물고 싶던 평화를 위협했다.
-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아.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것 말이야.
전쟁을 겪지 않는 세대에 태어났음을 감사하며,
앞으로도 겪지 않길 바라며..~
헤르만 헤세의 소설은 읽어 봤지만 에세이는 처음인데
고향,자연,예술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읽으며
‘헤르만 헤세가 보고 느꼈던 세상은 이런 것이구나’
온전히 그를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또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뇌 또한 볼 수 있었는데
데미안,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
내가 좋아하는 이 책들도 저런 고뇌의 시간을 통한
산물이란 걸 알게 되니까 더 깊게 와 닿는것 같다.
역시 헤르만 헤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