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BOOKFLYBOOK
홈
홈
검색
검색
발견
발견
커뮤니티
커뮤니티
알림
알림
Profile
프로필
AI 추천
FLYBOOK AI

플라이북 AI에게
물어보세요!

지금 필요한 책을 찾아드려요!

Flybook AI

게시물

8
user
badge

주진숙

membership
@j274870
Review content 1
📚세 얼굴의 나, 트리만과의 대화! 📚욕실의 까마귀, 그리고 나! 📚김병호 저자 <나와 트리만과>! 🐦‍⬛나를 비추는 트리만의 시선! <나와 트리만과>는 과학적 상상력으로 인간 존재를 다시 묻는 철학적 서사를 담은 SF 추리소설로, 과학과 감성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죽음, 연결, 정체성에 대해 깊은 사유를 그린 이 작품은 삼중가닥의 DNA, AI의 지휘, 멸종 이후의 인간이라는 설정을 그린 작품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과 미래를 다룬다. 단순한 SF소설보다, 존재론적 질문과 서정적 감성을 잘 결합한 이 작품은 새로운 DNA를 가진 존재가 인류에게 던지는 충격의 선언을 그린다. 죽음, 연결, 그 경계에 선 인간과 성(性)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그린 이 작품은 과학과 철학,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작품으로, 인간이라는 오래된 구조를 다시 짜는, 철학적 실험이자 서정적 선언이다. 삼중가닥의 DNA, AI의 지휘, 그리고 멸종 이후의 인간, 과학의 언어를 빌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생명과 의식, 그리고 인간다움의 마지막 경계를 다루고 있다. SF 소설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작품은 죽음과 삶, 개체와 집단, 육체와 의식의 경계를 탐색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연결의 또 다른 이름! 현대의 SF소설은 기술의 상상력에 기대고 있지만, 이 작품은 존재의 감각과 사유의 깊이로 나아가고 있는 작품이다. 어느 기자의 시선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의 배경에는 삼중가닥 DNA, 인공지능의 개입,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의 등장한다. 트리만이라는 불리는 그들은 성별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생식이 두 단계로 이루어졌고, 세 가닥 DNA를 통해 새로운 생명 방식을 제시한다. 이들의 존재는 성의 고정된 이분법을 넘어선 상상력, 그리고 성,생식, 종의 다양성과 인류의 적응력에 대해 급진적인 도전인 것이다. 이 작품은 기술 문명 이후의 세계를 그린다. 하지만 핵심은 인간이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가이다. 생명과 의식의 구조가 흔들리는 경계에서, 저자는 죽음을 단절이 아닌 연결의 또 다른 형태로 그린다. 죽음과 연결, 인간과 비인간, 과학과 서정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 차가운 과학적 설정 위로, 절제된 문장과 서정적 이미지가 겹치며 인류의 멸종 이후에도 남을 인간다움의 마지막 흔적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연결이다.! 죽음을 새로운 형태의 연결로 재정의하는 이 작품은 생명과 의식을 경계를 허물고, 읽는이에게 깊은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주인공과 트리만이라는 관계는 자아의 분열과 통합을 상징하고, 표지에 세 개의 얼굴이 등장하는데, 이는 인간 내면의 다층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상적이면서도 은밀한 장소인 욕실은 자아를 직면하는 공간이다. 표지에보면 까마귀가 있는데, 까마귀는 죽음과 예언, 혹은 감시의 상징으로 그리는데, 말은 없지만 존재만으로도 분위기를 압도하고, 트리만과 나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정체성, 그리고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그린 작품!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연결로 재정의하고, 인간의 의식과 존재가 소멸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삼중가닥 DNA를 가진 새로운 존재와 AI가 지휘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깊이 있게 생각해보게 하고, 인간의 본질을 다시 짜는 철학적 실험같은 작품이다. 삼중가닥 DNA, AI가 지휘하는 사회, 멸종 이후의 인간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을 그린 이 작품은 그동안 SF소설에서 볼 수 없는 참신한 이야기로,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서정적이고 밀도감이 있어, 짧은 분량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SF, 추리, 철학, 서정성이 잘 결합한 작품으로,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니, 꼭 한번 읽어보길! 다양한 독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와트리만과 #김병호 #SF소설 #철학적서사 #SF추리소설 #철학 #서정성 #인간존재 #과학 #신간 #신작도서 #도서리뷰 #도서추천 #소설리뷰 #소설추천 #책리뷰 #책추천 #세종마루
나와 트리만과 (김병호 소설)

나와 트리만과 (김병호 소설)

김병호|세종마루
3달 전
user
badge

:)

membership
@eudaimoniaaa
“곤충의 세계를 여행하게 된 인간 관찰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극은 인간존재와 무섭게 닮아 있는 곤충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들을 보여 주며 진행된다. 무가치한 똥에 일생의 욕망을 투자하는 쇠똥구리들과 타자의 목숨을 빨아 부와 권력을 누리는 피범벅의 맵시벌이 있는가 하면, 무책임한 성적 놀음으로 청춘을 탕진하고 문학과 시인을 패러디하며 능욕하는 나비들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과학으로 무장하고 종족 학살을 위해 구령에 맞춰 전진하는 전쟁 중독자 개미들이 있다. 차페크의 벌레들은 혐오스럽고 치졸하지만 속속들이 인간적이다. 그들의 욕망과 잔악한 악행들은 곧 흉측하게 일그러진 인류의 초상이다. 다만 카프카와 달리 차페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조리 속에서 위기를 맞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 찬란히 불타고 삶의 끝맺는 하루살이들의 아름다움과 같다는, 휘발성 그 자체의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한다. 금세 사그라지는 것, 너무나 힘없이 짓밟히고 피 흘리는 것, 의미를 찾기에는 너무나 짧고 어리석은 존재, 이 유한성과 한계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을 흥미롭고 신비스럽게 한다. “
곤충 극장

곤충 극장

카렐 차페크 (지은이), 김선형 (옮긴이)
열린책들
1년 전
user

김정민

@enowxcml
"선택이라는 풍요 속에 드리우는 그림자"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두 할 수 있다" 라는 구호를 외치며 살고 있다. 과거에 우리는 입소문을 통해 또는 한정된 시간으로 방송되는 TV를 통해 우리는 선택의 폭을 넓혀갔다. 하지만 현재는 인스타그램이라는 SNS를 통해 방대한 선택의 바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시간의 제약, 물리적 한계로 하지 못했던 영역을 어느덧 선택할 수 있는 영역으로 바꾸어 나갔다. 선택이 가능해지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욱 완벽하고 섬세한 선택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한 선택을 위해 우리는 모든 정보를 얻으려고 했고 모든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우리에게 불안과 우울감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여러 성적 취향을 '선택'할 수 있게 됨으로써, 모든 정보를 얻어 결혼을 '선택'하게 됨으로써, 피임 도구의 발달로 임신을 '선택'할 수 있게 됨으로써 우리는 후회 없는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선택을 해도 후회는 항상 남아있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존재는 결여를 근본적인 특징으로 하며, 그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그것을 채워 줄 수 없다."라고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속 기생하고 있는 선택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완벽한 선택을 바라고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에 속 시원한 해결책은 없지만 사실 어떤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가장 속 시원한 해결책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레나타 살레츨
후마니타스
2년 전
user
badge

행발

@haengbal
충격적이다. 산다는 것 , 인간존재의 이유,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 처절하게 지속해 나가거나 자살하거나. 나에게는 나오지의 유서가 이 책의 메인이다. '인간은 모두 똑같아' 라는 말이 세상에 만들어 낸 침울한 무의식은 얼마나 위험한 지. 모두 나름으로 존엄한 우리라서 나라서,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게 됏다. 낡은 도덕과 새로운 세상 사이의 과도기에 살고 있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것도 같고 어쩌면 내 무의식 속 문제와 의문의 본질적인 배경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뒤로 갈수록 재미있다. 우리 모두의 깊은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의문과 우울에 대해서 솔직하고 세세하게 생동감이 넘치게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이야기 하고 있어서! 어쨋든 이런 책만 읽으면 적당히 속아가면서 살아야되는 현실에서 멀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ㅋㅋㅋ그치만 이런게 나뿐 아니라고 위로해주는 책. 어쩌면 이런 책이 진짜 힐링일지도.
사양 (斜陽)

사양 (斜陽)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
에너지가 방전됐을 때
추천!
3년 전
user

새바

@1b7mgtbsu2je
이 책은 구약 성경 '전도서'의 내용을 더 깊이 상고해볼 수 있게 도와준다. 헛된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니, 참되고 유익한 인생이 되도록 살아야겠다. —————— 이 책에 대하여(역자의 글) 엘룰은 자신의 변증법의 결론 역시 성경에서 찾았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통한 전도서 해석이다. '결론'이란 모든 분석을 마친 후에 내리는 최후의 말이다. 그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코헬레트(히브리어로 '전도자'를 뜻함. 어원에 대해서는 이 책의 '논쟁적 후기'의 내용 참조)의 최종 분석에 동의한다. 1장 첫말 전도서의 첫 번째 낱말(헛됨)부터 우리를 멈추게 한다. 히브리어 '헤벨(hebel)'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결과적으로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안개'이다. 모든 것이 아침에 땅에서 올라와 태양 속으로 사라지는 안개처럼 흩어진다. 다음으로 '헛됨'이다. 즉, 이런저런 길로 들어서서 이런저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다 헛되다는 말이다. 아벨은 의인이요 경건한 사람으로서 희생제물을 드렸다. 그런데 그것 또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의(義)가 살해당해 죽었다. 그는 그렇게 당할 짓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사라졌다. 진보란 없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며 또 뜬다. 그것은 항상 그렇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얼마 후 남으로 되돌아온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되, 바다는 채워지지 않는다. 강물은 그것이 가는 곳에서 그 흐름을 되풀이한다. 코헬레트가 기원전 5~3세기에 전도서를 썼을 때,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살았던 근동지역에 3천 년에 걸쳐 새로운 것들이 있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과학과 기술, 도구를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전도서 1장 8절에서 지적하듯이 인간에 대해 말한다. 새것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의 진보란 없다. 인간은 언제나 더욱 완벽한 도구들을 가질 수 있다. 그는 더 많은 것들을 조작할 수 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이 아니다.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그의 조건(시공간) 속에 갇힌 채 남아 있다. 징기스칸이 칼로 살해했던 것과 우리가 핵폭탄으로 살해하는 것 사이에 행위 방식에는 현저한 변화가 있지만, 죽인다는 행위 자체에는 변화가 없다. 살인, 탐욕, 지배 등은 변하지 않는다. 참으로 해 아래서 새것이란 결코 없다. 고전적인 구별방법을 사용하자면, 인류의 양적인 성장은 있을 수 있으나, 질적인 발전은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다 무(無)로 귀결하는가? 우리가 계획하는 든 것이 무 외에 다른 출구를 갖지 못하는가? 아니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이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 1장에서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무익하며 진보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 뒤, 즉시 2장에서 철저하게 시작한다. 코헬레트의 태도에는 모순이 없다. 오히려 반대로 심오한 일관성이 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단지 현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늘,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어야 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2장 묵상 인간의 삶은 오직 단 한 번 일어나고, 우리는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인지 나쁜 결정인지를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오직 단 한 번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결정들을 비교해볼 수 있도록 제이, 제삼, 제사의 삶이 우리에게 부여되지 않는다. 3장 권력 악당이 있어 그가 권력을 가질 때 우연히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악당은 위에 있는 더 나쁜 자들에게 복종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더 높은 곳에 있는 더 나쁜 자들에게 굴복한다. 이와 같이 권력의 사다리로 올라갈수록, 상대해야 할 자들은 더 악하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전 4:2). 이것은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단언하는 몇 안 되는 성경 본문 중의 한 곳이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기 때문이며, 피억압자가 의지할 곳이 아무도 그의 눈물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며, 폭력이 사방에 있기 때문이며, 위로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것이다. 4장 돈 두 번째 큰 헛됨은 돈이다. 본질적인 것은 근본적인 모순에 있다. 즉 돈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과 돈이 헛되다는 것이다. 돈을 추구하는 것은 끝이 없다. 결코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 우리가 살고 바랄 뿐인 구경거리의 사회는 돈에 대한 갈망과 사랑을 암시한다. 돈을 쓰든 간직하든 간에, 돈은 환상이요, 연기요, 안개이다. 그것을 중요시하는 것이 헛됨이다. 당신은 부자로 죽지만 마치 가난한 죽음과도 같을 것이다. 죽음 저편에서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 부를 얻고 후손에게 남기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이 후손이 뭘 할 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너는 네가 남기는 것이 어디에 쓰일지 모른다." 돈은 순전히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행복 -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기 - 과 관련된다. 이것은 그다지 악한 것이 아니다. 결국 악이란, 돈을 모든 것을 가능케 하며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 시대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지 돈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수단은 기술이다(나를 원망하지 말라). 그러나 이 기술은 돈이 있을 경우에만 구체적으로 활동하며 발전할 수 있다. 어제 인간을 지배한 것이 돈의 매력이었다면, 오늘날은 기술의 매력이다. 5장 노동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일하는 것이 결국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이 성취하는 것은 즉시 연기로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이것은 이미 노동이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고 아무 가치도 없음을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우리 입에는 오직 한마디 말뿐이다. 즉, '기회의 평등', '재능의 인정', 정의, 그리고 공정한 보수를 받을 권리이다. 결국 창출된 가치에 따라 온전히 임금이 평등하기를 바란다. 코헬레트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며, 우리의 존재와 이 세상 속에 내재하고 있다. 가장 좋은 노동과 노동 조직과 경제 조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도 당신은 인간에게 닥치는 불리한 때와 가혹한 시간을 막지 못하리라. 당신은 '행운'과 '우연'을 막을 수 없으리라.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가 도래하는 날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4:4). 일의 경쟁, 다른 사람들의 제거, 최강자의 승리, 성공했을 때의 시기 유발! 이것이 노동이다. 이러한 소송 앞에서 "노동을 정죄하자, 일하기를 멈추자"라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전도자의 교훈이 아니다. 일하지 않기 위해서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전 4:5). 일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 3:10). 조금 뒤에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수고'(전 3:13)가 나온다. 그러므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노동이 유익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선물이기 때문이다. 노동이 헛되고 무익한가? 궁극적으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헛된 것에 열정을 쏟을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모든 것을 시도해야 한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우리를 게으름으로 이끄는 자의 이상한 충고인가) 이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지는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 당신은 당신의 일의 효과와 열매를 모른다. 그러므로 시도하고, 애쓰고, 시작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녀라. 이것이건 저것이건 성공할 수 있다. 효과와 결과는 당신의 소관이 아니다. 철저히 우연의 소관이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유익한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런 것인지 알려고 그렇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이 당신의 손에 미친다면 그것을 완성하라.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손이 할 수 있는 대로 희생물을 찾는 살인자, 전쟁을 벌일 뿐인 군인 등으로 무한히 위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 일은 헛된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야 한다? 일이란 부조리하지만 모든 것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코헬레트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계시이다. 6장 행복 코헬레트는 행복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헛된 것임을 마치 서문처럼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초의 충동이었고 최초의 시도였다. 행복은 어제나 오늘이나 헛되고 어리석고 무의미(행복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행복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지만 주의하라. 이것은 절대 최상급이 아니다. 그것은 '해 아래서'의 인간 조건과 관계된 것이다. 그것은 헛되지만 나머지 것들보다 낫다는 것이다. 첫째로 행복이란 역시 자기 자신의 일을 즐거워하는 데 있다(전 3:22). 둘째로 확실히 고려해야 할 차원은 사랑하는 아내와의 관계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전 9:9). 이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고 경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헛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행복이 헛되다는 사실 때문에 낙담하지 말라. 당신이 행복할 때 주저 없이 행복하며, 이 단순한 행복에 빠져라. 축제는 즐거운 것이다. 우울한 생각은 갖지 말라. 음식과 포도주는 좋은 것이다. 그 밖의 것을 추구하지 말라. 오늘은 행복의 날이다. 이 순간을 절정으로 살아라. 내일 불행이 찾아올 것이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마 6:34). 특별히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서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날을 생각할지로다 …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전 11:8,9). 우리는 인간의 수단으로, 단지 우리의 인간적인 수단만으로 훨씬 더 잘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헛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아볼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7장 선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4).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가 같은 방식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이다. 정의가 없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의인이 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어떤 보상도 없다. 모든 것이 헛됨의 작용에 의해 뒤집히거나 왜곡되거나 혼동된다. 인정받거나 좀 더 나은 명성을 기대하지 말라. 선하고 의로워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평가되려는 생각을 갖지 말라. 그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와 사회는 헛됨과 악의 토대 위에 있으며, 어떤 식으로 건 우리에게 최소한의 기준도 제공할 수 없다. 8장 인간적인 답 만일 모든 것이 이처럼 무(無)로 귀결하고,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데로 귀결한다면, 빈손으로 남게 될 것을 애써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 애써 바람을 잡을 가치가 있는가? 가치가 없다. 하지만 아무튼 살아야 할 시간, 만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시간이 있다. 비록 상대적인 것들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높이에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상대성이 그 절정과 완전성에 이르는 것을 다음 구절에서 발견한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니나"(전 3:1). 코헬레트는 결코 자살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렇다. 살아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 근원을 보게 될 것이다. 살아야 한다. 10장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가 사물에 있지 않고, 반대로 사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연 가운데 지혜를 연구해서는 안 되고 지혜를 통해 자연을 연구해야 한다.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하며, 배워야 한다. 코헬레트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지식과 지혜를 분리하는 것은 막중한 오류이다. 그러나 지혜 역시 '해결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헛됨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한편에 지혜가 있고 다른 편에 광기와 미련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코헬레트에게 이것은 외양상 명백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다. 우매자가 우매한 것인지 지혜자가 지혜로운지 결코 확실하지 않다. 무엇을 기준으로 나눌 것인가? 이런 질문은 전도서 전면에 걸쳐 제시된다. 이것은 세상에서 바르게 처신하기 위해 근본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지혜의 업적은 오직 한 사람의 죄인, 즉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망가뜨리는 자에 의해 결국 못쓰게 되고 소멸된다. 외양상 순전히 인간적인 사건에서도 지혜는 죄를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연대(連帶)를 보여준다. 지혜자는 타인들에게 유익할 수 있고 그들을 구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룹, 사회, 국가 안에 있는 한 죄인의 영향력을 이길 수 없다. 이것이 지혜의 한계이다. 11장 반어법 지혜자와 마찬가지로 그의 지혜도 잊혀진다. 우리는 지혜가 별도의 위대함이라든지 객관적 체계가 아니라, 지혜자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음을 봐야 할 것이다. 지혜자가 잊혀질 때 그가 생각하고 하고 입증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오늘날 이 교훈들을 말하고 경고하며 젊은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설명하는 것이 엄밀하게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힘들여 매울 수 있었던 지혜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지혜자는 잊혀졌고 그의 지혜는 쓸모없다. 그 무엇도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될 수 없다. 1930년대에 저질러진 어리석음은 1960년대와 1980년대에 다시 반복된다. 지혜가 돈을 벌고 사회에서 자리를 마련하여 명예를 얻는 데 매우 유용한 반면, 진정 지혜로운 자는 경멸되고 거부된다. 당신이 '지혜로울수록', 당신은 모든 것이 헛되며 바람을 잡는 것임을 배운다. 결과적으로 당신은 당신의 고통을 증가시킨다. '도덕적 용어로 이 무제한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탐욕이라고 불린다. 어떤 사물이나 쾌락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등됨을 탐하는 것이다. 즉, 지식(과학)으로 소유할 수 있는 (물론 무의식적이고 순수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탐하는 것이다. 지식에 의해 얻은 소유의 덕택으로 인간존재가 무한정 증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번뇌의 근원이며 다른 번뇌는 없다. 그리고 이것이 지식에 대한 커다란 열정이며, 이것만이 절대적인 탐욕을 만족시킨다. 고통은 지식에 대한 탐욕과 가능성 사이의 결합에서 유래한다. 지식은 인간에게 최종적인 답을 결코 주지 못하며, 탐욕은 항상 더욱 멀리 계속 전진하기를 요구한다. 지식은 그 자신 논리만으로 전진하지 않고 이 논리와 인간의 탐욕의 결합에 의해 전진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으로 무한히 고통당한다. "너희가 욕심을 내지만 얻지 못한다"(약 4:2). 12장 참된 지혜 오히려 지혜의 첫 번째 말은 이미 지혜의 헛됨과 그 한계를 인정하는 데 있었다. 코헬레트는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런 분별력 가운데서 살고 노동하고 기뻐하도록 초대한다. 이 분별력이란 의미가 없다는 확실성, 우리를 명확하게 해주고 사물을 정돈하며 세상과 역사를 이해하고 도덕적 가치의 범위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지혜란 없다는 끊임없이 확인되는 확실성이다. 지혜란 "그렇지만…."이다. 인간이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참 지혜는 가능한 지혜가 없다는 식견을 갖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변한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예언서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꾸도록 해다. 얼마나 많은 역사가들이, 매우 유치하게도,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선지자가 실수했다고 쓸 수 있었던가. 하지만 정반대이다. 예고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예언은 성공했다. 왜냐하면 예언의 목적은 인간에게 피해야 할 것과 피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완벽하고 패러다임적인 예는 요나의 예언이다. 파국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견해를 바꾸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처신이 바뀜으로써 하나님이 뒤로 물러나 사태를 처음으로 돌리신 것이다. 코헬레트는 우리가 미래를 장악하여도 현재로 소급하는 것이 전적으로 헛되다고 경고한다. 당신은 누구도 훈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일을 모르는 이상 무엇이 좋은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돈을 유익한 방식으로 축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결국 그 돈의 유익을 누가 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노동에 삶의 의미를 둘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업적을 내일 누가 사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쉴리방은 에밀 시오랑(Emil Cioran)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시오랑은 말하기를, 죽음이 삶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그러면 달리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삶이 죽음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13장 지혜의 시험 지혜의 두 기둥은 불가해한 미래에 대한 인식과 만물 안에 있는 죽음의 식별이다. 매우 놀랍게도 코헬레트에게는 헛된 것으로 선포되지 않는 유일한 인간 실재가 있는데, 그것은 '말'이다.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호 유사성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끊임없이 헛됨에 빠질 위험이 있다. 말이 많음은 악이요 재앙이다. (당신의) 말이 많을수록 (당신의) 존재는 줄어든다. 말의 홍수는 존재의 축소를 낳는다. 말은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 코헬레트는 대화에 있어서,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도, 신중할 것을 권면한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전 5:4,5).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말에 신중해야 하며 자신의 언어를 다스려야 한다. 당신은 말에 근거해 파산된다(우리가 흔히 우리의 행위로 판단된다고 믿어온 것과는 반대이다). 당신이 함부로 말할 경우 하나님은 이 말과 관련해 당신이 행하는 것을 파괴할 수 있다.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게 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전 5:6하). 코헬레트는 우리로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첫째로 그는 "낭비하는 법, 대비하지 않는 법, 집착하지 않는 법, 걱정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했고, 둘째로, "주고 나누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했다. "오늘 주고 지금 나눠라. 왜냐하면 내일 재앙이 네게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일 어쩌면 당신은 더 이상 줄 수 없을지도 모르며, 나눠줄 것이 당신에게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상황이 당신에게 유리하기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리 못하리라"(전 11:4). 성공은 어떤 것인가? 여전히 상대적인 것으로, 당신이 성공했을 때 당신은 타인에게 줄 수 있고 당신의 식물을 물에 던질 수 있다는 유익 외에 다른 것이 없는 성공이다. 소유란 이런 것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15장 엘로힘 전도서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엘로힘(Elohim)으로 불리며, 결코 자신의 백성에게 계시된 이름인 거룩한 네 글자 말(YHWH, 즉 '야훼')이 아니다.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이며(창세기 1장), 우주 생성의 주체이다. 엘로힘은 복수형인 반면, 일반적으로 그것과 함께 쓰이는 동사들은 단수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한 분이신 다수의 하나님(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엘로힘은 그가 특별한 관계를 세우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 시 또 다른 독특함을 보여준다. 엘로힘은 모든 것과 어떤 것을 의미하는 '신'이란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엘로힘이 멀리 있는 절대적인 신이라면, 야훼는 자신을 드러내고 우리 역사에 들어와서 인간 존재에 참여하는 신이다. 엘로힘은 자격 없는 어떤 신성의 의미가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의 의미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우리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타자이며, 그를 고착시키고자 하는 곳과는 다른 곳에 계시다. 그런데 코헬레트가 전적으로 확신하는 한 가지 현실이 있다. 그것은 이 캄캄하게 감춰진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고 그 곁에 있으며 우리의 삶에 침투해 있어 그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행동과 경험과 지혜와 지식에서 하나님을 축출하려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커져 압도적인 존재가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동시에 보아야 하며, 만사를 붙들고 계시는 이 하나님에 대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16장 모순 우리가 이런저런 계획을 세울 때, 이러한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때가 있음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17장 주시는 하나님 무엇보다도 먼저 '주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이 백성의 하나님이었던 분이다. 자유를 주셨고, 율법을 주셨으며, 언약을 주셨고, 말씀을 주셨으며,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던 하나님이다. 그는 모든 것을 선물로 시작한다.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이 베푸신 재능(선물)에 입각하여 인간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기다리는 감사는 완전히 동일하게 무상의 것이다. 하나님은 의무 없이 표현되는 마음의 자유로운 기쁨일 경우에만 그 감사를 즐거워하신다. 선물은 도덕, 구속(拘束), 상호성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는 '업적에 의한 구원'이란 없다. 기쁨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기쁨을 줄 수 있는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하며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환영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물은 또한 노동이 행복을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 전 3:13, 5:18,19). 다른 모든 오류의 근원인 핵심적인 오류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계화하거나 영(靈)을 법제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적인 실재에 입각해 논리적인 추론을 펴서 "즐거움이나 부가 있다면,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그 즐거움이 가장 비열하고 야만적이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어떤 것이라도, 그 부가 어떤 것이라도). 한편 코헬레트가 보여주는 길은 무엇이 하나님의 선물인지 식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을 식별하고 그의 활동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 최상의 것이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전 2:26). 전도서에는 하나님이 착한 사람을 행복하고 번창하게 해준다는 '주장' - 전통적인 교훈(일례로 욥을 보라) - 이라고는 결코 없다. 하나님이 지혜, 지식, 희락을 주었고 그것이 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착하게 만들었다. 그는 실제로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선물을 배가시켰다. "청년이여 네 어릴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궁극적으로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심판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심판이란 즐거움의 날개를 자르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즐거움의 의미와 깊이와 지속을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직 복된 소식의 보장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담당하신 몫이다. 아직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이 그의 심판을 통해 정의를 주신다는 확언이다. 무엇보다도 코헬레트는 하나님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그는 당신에게 젊음과 힘과 심지어 즐거움을 주신다. 당신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직 악이란 정확히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음을 망각하는 것이리라.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오직 지혜만이 선물과 심판 사이의 바른 관계에 있다. 18장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내가 정녕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행복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앞에서 경외를 경험하기 때문이다"(전 8:1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행복하다. 이 경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이기 때문이고, 그것을 경험하는 자에게 주님의 임재를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19장 전도자의 최종 교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청년의 때 하나님을 기억하라. 즉, 모든 가능성이 당신 앞에 열려 있는 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당신 힘이 온전히 남아 있는 때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때는 노망이 들거나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가 되었을 때가 아니다. 당신의 구원에 너무 늦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과 이 창조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위해 섬기는 일에 너무 늦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시편 111편 10절). 이제 우리는 "누가 우매와 지혜를 분별하며, 이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갖는다. 코헬레트는 지혜가 오직 첫걸음 -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걸음 - 만을 따른다는 것을 안다. 나머지 모든 것은 그것에서 유래하는 바, 곧 헛됨, 덧없는 즐거움,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 인간의 미친 행동이다. 논쟁적 후기: 나는 왜 이 책을 써야만 했는가? 전도서는 하나의 결론이지 가능한 출발점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본문 자체에 부합한다고 여긴다. 전도서의 모든 단언과 이의 제기는 경험의 축적 후에 마치 구두점처럼 나타난다. 결과(outcome)가 아니라 결론(conclusion)이다. 왜냐하면 전도서에서 출발하여 또는 전도서 이후에 크게 할 말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많은 불확실한 것들 가운데서 적어도 히브리 역사가들과 주석자들이 일치하는 네 가지 사항이 있다. 먼저 기록 연대이다. 폭넓은 '격차'(BC 7세기에서 BC 3세기까지) 사이에서 많은 이견을 보인 끝에, 오늘날 본 텍스트는 BC 350~250년 경으로 연대가 잡힌다. 즉,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시기에 대한 선호와 더불어, 그 정복 전이건 후이건, 대략 320년이다. 두 번째 일치 사항은 솔로몬이 실제로 이 책 전체의 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저자로 지칭된 '코헬레트'의 어원이다. 마지막으로 코헬레트의 히브리어가 매우 서툴다는 것이 의견의 일치이다. 즉 거의 시적이지 않은 허풍 떠는 문체와 더불어 쇠퇴기의 변조된 언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이것이 분명 찬란한 이국(異國)의 영향을 아들인 뒤 맛소라(Masoretic) 텍스트에 심각한 변화를 보여주는 화려하고 지나치게 장식적인 언어임을 인정한다. '코헬레트'(qohelet)는 회중을 의미하는 '칼'(quhal)에서 유래한다. 내가 보기에 코헬레트는 직함이나 기능이 아니라 다만 동기 없는 명칭으로, 십중팔구 마지막 저자에게서 유래하며 책 전반에 표현된 '빈정댐'과 '문제 삼기'라는 문맥에 위치한다. 달리 말해, 명칭은 책의 내용으로 이해되어야지 어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석자들은 기록 연대가 결정된 이상 솔로몬은 전도서를 기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솔로몬은 텍스트에 명백하게 명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전도서를 쓴 의도에 대해 의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요 예루살렘의 왕인 다윗의 아들이다. 다시 말해 그는 두 왕국(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열 이전에 위치하며 따라서 솔로몬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헛됨'이란 단어 헤벨(hevel)이 우상들을 내포하며, 심지어 헛된 우상들로 번역될 수 있음을 볼 것이다. 그런데 통치 말년에 솔로몬이 우상숭배하는 왕이 되는 것을 잊지 말자. 모든 것이 연기, 헛됨, 우상이라는 선포는 솔로몬의 경험 그 자체와 관계한다. 이처럼 모든 것은 텍스트 자체로 집중하며 그것을 솔로몬의 권위 하에 위치시킨다. 그의 이름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다. 코헬레트는 마치 그가 왕인 것처럼 쓴다. 그는 자기 자리에 있다. 그는 자기 책이 마치 솔로몬에게서 유래한 듯이 그것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는 왕국 없는 왕이다. 그는 위대한 왕이 아니지만 왕처럼 자리 잡는다. 그의 책은 왕과의 관계를 표현한다(군주국을 정당화하고 백성으로 왕을 돕도록 불러내기까지 할 수 있는 왕이다). 코헬레트는 왕과 신하의 관계(어쩌면 왕과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의 명칭이다. 근본 질문들에 대한 이 간단한 회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내게 남은 것은 전도서가 숙곳(Souccoth) 축제의 주 낭독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다시 말하는 일이다. 숙곳이란 장막절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해 나무로 만든 오두막집 축제이다. 나는 이 축제의 전체 의미와 관련해 전도서의 전부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솔로몬이라는 왕의 책이요, 성전 헌당 책이요, 놀라운 언약의 책이요, 허술한 인간 피난처(나뭇가지 집)의 책이요, 헛된 인간 소유(광야)의 책이요, 하나님의 절대적 왕권의 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수확을 끝내고 겨울로 들어가는 시기의 책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백성에게는 기쁨의 시기요, 일주일 간의 축연이다. 그때 이 책은 백성에게 축연 그 자체의 헛됨을 상기시키며, 바로 복잡한 상징들로 인해, 그 의미가 피조물의 이해력에서 벗어나는 하나님의 활동의 신비를 상기시킨다. 
존재의 이유

존재의 이유

자끄 엘륄
규장(규장문화사)
5년 전
user
badge

남쪽나라

@namjjoknara
안나카레니나/톨스토이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 은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라고 격찬했으며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완벽한 작품으로, 현대 유럽 문학 중에서 이 작품에 비견될 만한 것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저는 책장을 다 덮고서 한 줄 독서평을 쓴다면 이 작품은 '한국판 사랑과 전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쓰고 싶었습니다. 이 책 속에는 사람에 대한 위선, 잘못된 신념, 권력에 대한 욕망, 불타는 사랑 등 사랑과 전쟁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요소들이 다 포함되어 있으며 종교관, 결혼관, 계급사회에 대한 사회구조 등 사람이 살아가는데 겪는 모든 고민이 응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얼핏 보면 막장드라마 같은 이 작품이 세계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위대한 문학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안나 카레니나'라는 인물을 통해 그 모든 문제를 제시하고 사랑의 본질과 인간존재의 문제를 독자 자신들의 속마음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잣대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처음과 끝, 그리고 두꺼운 책의 내용 속의 의미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사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첫 문장의 의미를 통해 이미 안나의 행복이 어떤 불행으로 이어질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열차에서 시작되어 공교롭게 열차에 몸을 던짐으로써 그 불행이 끝납니다. ​ 전편에 흐르는 내용을 보면 불륜을 저지른 한 여인의 운명적 사랑과 그 사랑이 식어버렸을 때 그 여인이 받았을 충격은 어떤 비극적 결말을 향해 가는지 잘 보여주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가정교사와 바람난 오빠를 화해시키기 위해 모스크바로 왔다가 오히려 자신이 무도회장에서 만난 젊은 백작 브론스키와 바람이 나게 되고 원래 불꽃같은 사랑은 활활 타올랐다가 불씨가 되는 사랑이 줄어들자 금방 사그라들게 마련이죠. ​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브론스키의 사랑만 간절히 원한 안나는 결국 사회적 냉대와 브론스키와의 사소한 다툼 등으로 고뇌하다 결국 자신의 잘못을 용서 빌며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 안나가 생각한 행복한 가정은 브론스키와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사랑, 그 사랑 이외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브론스키와 불행이 시작되고 파멸의 길을 앞에 두고선 수만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 안나가 생각한 불행은 스무 살이나 많은 남편과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것부터 시작합니다. 다른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자 8년 동안이나 부부로서 잘 살아왔던 그녀의 남편은 흉측하게 보이기 시작했으며 무엇이든지 마음에 들지 않아 합니다. ​ 사랑하는 사람에겐 뭐든 좋게 보이지만 한 번 미워지기 시작하면 모든 게 싫은 거랑 같은 거겠죠. 연애를 해 본 사람들은 잘 알거에요. ​ 여기서부터 불륜의 자기 합리화가 시작됩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내 잘 못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의 무관심과 사랑 없는 결혼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 그녀가 브론스키를 떠올린 그 순간, 그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해 아주 따뜻해 타버릴 듯 뜨거워' 무도회에서 처음 마주한 브론스키를 생각하며 안나는 한 번의 만남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껴버립니다. 자신 스스로가 도덕적 순수함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 감정은 첫 만남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버립니다. ​ 브본스키는 안나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편의 근엄한 모습을 보면서 '루저의식'을 느끼며 젊은 수컷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그래,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거야. 사랑할 수 없겠지' 말하며 혼자 상상해버립니다. '그녀의 감정은 그녀의 양심에 달린 것, 그리고 내 영역 밖의 일.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해진다' ​ 안나의 남편은 안나가 브론스키와 만남을 의심하면서 안나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말할지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소심한 남자의 전형인가요, 아님 아내에 대한 배려일까요. ​ 안나의 남편은 불안과 걱정이 앞서면서도 아내의 사생활과 아내에 대한 믿음으로 질투와 의심은 아내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 그는 질투가 대단히 수치스러운 감정이며 아내를 믿는 것이 그가 해야 될 일이라며 감정을 자제합니다. 이 친구 착해도 너무 착한 것 같습니다. 부인을 정말 사랑하는 것 같네요. '저 사람은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니야. 오로지 사교계 사람들의 눈이 무서운 거지. 그래서 극도로 흥분한 거지' 어렵게 안나에게 꺼낸 한마디가 오히려 안나에게 오해를 사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린 거네요. ​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안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려고 오히려 남편에게 뒤집에 쒸웁니다. '어쩔 수 없어.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 ​ 안나의 마음은 이미 다른 남자에게 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 사랑한다고 말하자 '사랑? 사랑? 그가 사랑을 알기나 알까? 마음속에 경멸을 담아 내뱉은 말을 보면 안나의 불타는 마음속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브론스키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러시아 사교계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 브론스키 어머니는 아들의 불륜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기뻐했다. 그녀의 생각에 매력적인 청년으로 전성기를 맞는 일은 사교계에 불륜을 낳는 것밖에 없었다 '경멸 받아 마땅한 여자가 죄를 지은 것으로 내가 불행해질 수는 없지. 나는 그녀가 내게 넘긴 이 괴로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출구를 찾아내는 일만 하면 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이 자식 완전 쓰레기 같은 놈이었군요. 처음엔 불륜을 의심하고도 가정을 지키려는 멋진 남자인 줄 알았더니 자신의 미래가 안나로 인해 걸림돌이 되자 이제 나 몰라라 하는군요. 결국 이 자식은 자신의 위신과 사회적 평판이 더 중요했던 거군요. 사랑은 개뿔 '난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 그녀나, 그도 결코 행복해지면 안 되지' 이젠 남 주기는 더 아깝다는 심보 같은데요. 그래서 이혼도 못해주고 별거로 지내기로 한 건가 봐요. 정말 무서운 남자인 것 같습니다. 위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 같네요. 안나와 결혼해서 그동안 지내왔던 8년의 세월은 위선과 자신의 안위 때문에 살아왔다는 걸 안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 생활은 지옥과도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은 파멸시키고자 하는 사람을 먼저 미치게 한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이 원하던 직위 임용 소식의 편지를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익숙해질 수 없는 환경이란 없다. 레닌은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말도 안 되는 우정을 나누고 타락한 여자의 집에 찾아가서 아내를 슬프게 하는 이런 상황들로 목적 없는 삶에 대해 많은 회의감을 느끼게 됩니다. ​ 안나는 브론스키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사랑에 쏠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 생각에 브론스키는 이제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어있으며 사랑의 일부가 다른 여성에게 옮겨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안나는 브론스키가 만나는 모든 여성에 대해 질투하기 시작하고 그에게 분노하게 됩니다. 안나는 자신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브론스키의 행동에서 조금씩 느끼고 있습니다. ​ 물론 그것은 브론스키가 원인이 아니라 안나 자신이 선택한 불안과 초조와 분노가 뒤섞인 감정들이었습니다. '난 오직 사랑만을 원해. 그런데 그 사랑이 없어졌어. 그러니 모든 게 끝난 것과 마찬가지야' 아마 브론스키도 자신에 대한 안나의 이러한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이 많이 부담되었을 것입니다. 안나는 육체의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정신적 지배를 통해서 주변의 시선을 통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 젊은 브론스키는 처음엔 사랑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자신에게만 너무 의존하는 안나를 보면서 사랑보단 집착과 애욕의 감정을 더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 이 소설은 사랑과 쾌락에 대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에 대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은 평생 온전한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랑 이외에도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친인척뿐만 아니라 직장, 친구, 육아와 경제적 여건 등 수많은 관계 속에서 현실과 마주해야 합니다.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요?' 행복한 결혼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랑이라는 특징적인 것이 아닌 여러 구성요소들이 결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아이의 순진한 미소가 버텨주고 아이가 자라 부모 곁을 떠나면 '살아온 정'이라는 감성의 추억으로, 어느 한 가지 부족하면 나머지 부족분을 채워가는 부부생활이 되어야 그 결혼생활은 오래 유지될 것입니다. ​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안나와 브론스키, 키티, 레빈의 개인 심리 묘사를 감정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나가 보여준 의식의 흐름은 인간이 과연 진정한 사랑은 무엇을 갈구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 가정을 버린 대가로 모든 원죄를 품에 안고 떠난 안나, 시대의 사회 규범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사랑을 찾고 싶어 감정에 충실한 안나, 우리는 안나의 도덕성과 불륜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성숙하지 못한 인간과 사회적 비난과 냉대보다는 이해와 믿음으로 성숙한 사랑을 지향할 수 있는 배려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따뜻한 남쪽나라 통영에서...
안나 카레니나 3 (세계문학전집 221)

안나 카레니나 3 (세계문학전집 2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민음사
5년 전
user

비밀의 방

@bimileuibang
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바로 답할 수 있습니까? 1.당신은 누구 입니까? 2.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3.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한 데카르트는 인간존재의 본질을 사고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의심할 수 있어도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유하는것 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끊임없이 사유하고 고민해 왔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무얼 위해 사는가?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명확하게 답을 찾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특히 평범한 일반인은 더더욱 자신이 누군지 알지못함 속에서 헤매이며 살고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였기에 삶의 방식 또한 알지 못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삶의 목적 또한 불분명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매일매일 쫓기듯 사는 삶. 인생의 순간순간 다가오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목적에 대해 질문하게 됩니다. 조동천 목사는 '세 가지 질문'을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안내해 주고있습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 이라고 하였습니다. 목적,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히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절망을 불러오게 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책은 성경 마태복음 4장에 기록된 예수께 성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 나누었던 대화를 바탕으로 세 질문의 의미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와 답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에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정리 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능력이나 경제력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소유와 비교해서 나의 나됨을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가치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더 시간이 가기전에 반드시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은 그 길을 안내해 주는 안내서 입니다. 조동천 목사님의 깊이 있는 성경 해석과 새로운 관점에 놀라울 따름 입니다. 책이 얇고, 글밥 이 크며 삽화가 있어 읽기에 편하고 재미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애매모호하지 않게 명확히 설명해주고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태도와 방향성을 꼭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안내서는 직접 읽어야 하기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 합니다.)
세 가지 질문 (내 인생을 변화시킨)

세 가지 질문 (내 인생을 변화시킨)

조동천
두란노
7년 전
user

가가책방

@zdkwlfg0s5br
인간에 신뢰를 어떻게 상실하게 되며 무엇이 좌절과 절망을 만들어 내는지 돌아보게 하는 책. 왜 요조는 인간 실격에 이르렀는지, 돌아보자. #신뢰 #인간실격 #인간존재 #자아
인간 실격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read
다 읽었어요
10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