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씨가 성당 예배 후 느낀 점 같은 문장들
p.106 “멋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초자연적으로 빛나는 눈으로 버나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끈질기게 물었다.
”멋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거짓말하고 외면했다 그녀의 거듭난 듯한 얼굴과 마주치자 그는 마치 자신의 고립을 비난하는 것처럼 느꼈으며 동시에 야유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예배를 시작할 때나 다름없이 지금도 비참한 고독을 느꼈다 아니 그 충족되지 않은 공허감. 생기를 잃은 포만감으로 인해서 더 더욱 고립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보다 위대한 존재와 융합되었지만 그는 고립되었을 뿐 융합되지 못했다 모가나에게 포옹당하고 있을 때조차도 고독했다 진실로 평생 경험했던 것보다 더욱 가망없이 고립되어 있었다 #독서습관만들기
#예배회복작전타임#문일준#도서협찬
공동체 예배 회복을 위한
52주 실전 매뉴얼
❝예배 구경꾼에서 진정한 예배자로!❞
✔ 예배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 미리 예배를 준비하고 싶다면
✔ 예배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실전 메뉴얼을 찾고 있다면
✔ 예배 관람객에서 벗어나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나고 싶다면
📕 책 속으로
서울 왕십리교회에서
청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저자가
룻과 나오미가 누린
예배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회복이
공동체의 청년들에게도
일어나길 바라며 집필한
예배 회복 실전 전략서!
📕 예배, 어떻게 드릴 것인가?
예배 회복을 위한
작전타임은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예배란 무엇인가?
2️⃣ 예배, 어떻게 드릴 것인가?
3️⃣ 예배의 각 요소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2. 예배, 어떻게 드릴 것인가?> 는
나를 위한 작전타임이었다.
"나 중심적 예배가 아닌,
하나님 중심적 예배를 드리라!" _p.76
이 문장을 읽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은혜를 받았다'는 느낌도 안들고
찬양이나 반주가 어떻다는 등
부차적인 핑계를 대며
새롭게 등록한 교회에
마음을 두지 못했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예배회복을 위해
내가 집중해햐 할 것은
나를 만족시키던 "나중심적 예배"가 아닌,
"하나님 중심적 예배" 였다.
🔖 한 줄 소감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_p.18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예배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님 중심적 예배를 드리며
내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2026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일단, 이것부터 삶에 적용함으로 실천을 시작합니다.
"예배의 시작을 내 느낌이나 기분에 두지 않기!"
@세움북스 감사합니다
#추천합니다#세움서포터즈 마지막도서
[2026_4]
#2025#도서제공#세움북스신춘문예작품집#도서제공
메마른 영혼을 촉촉하게 채워줄
신춘문예 수상작 기독교 단편소설 ·수필
❝크리스천 작가들의 다채롭고 풍성한 삶의 이야기와 메시지❞
✔ 삶 속에서 믿음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싶다면
✔ 획일적인 신앙 서적이 아닌 새로운 감성을 찾고 있다면
📕 책 소개
기독교 문학의 활성화를 위한
세움북스의 다섯 번째 신춘문예 작품집
믿음, 삶, 고민, 사랑 등
다채로운 주제들을
각자의 시선으로 솔직하게 풀어냈다.
세상 속에서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스며들고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단편소설#수필
📕 그때, 나비가 날아와서
총 10개의 작품 중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다.
주인공 영은이가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을
'나비'를 통해 표현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간.신.히. 예배에 참석만 하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새로운 교회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낯선 이유만 찾아 헤매는 나의 모습이
영은이가 새로운 교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고 반성했다.
영은이의 이야기가 내 모습 같아서
읽는 동안 가슴이 먹먹했고 여운이 오래 남았다.
🔖 한 줄 소감
신앙서적은 간증집 위주로만 접했는데, 단편소설로 만나니 신선했다.
내년 <세움북스 신춘문예>에는 더 많은 기독교 작가들이 발굴되고, 기독교 문학이 더욱 다채롭게 빛날 수 있기를.
언젠가는 기독교 문학에 SF장르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
@세움북스 감사합니다
#세움북스신춘문예#기독교문학#그때나비가날아와서#문지선#2025_229
📘25#16 특강 예배모범
2025.07.22.~08.02
⏩️예배, 똑바로 드리자!
✅느낀 점
시광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지금, 구체적으로 예배지침에 대한 적용점들을 알려주는 이 책이 우리 교회와 진짜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많은 이들이 그럴 것 같은데, 내가 자라면서는 예배생활과 경건에 관해 수많은 하위 율법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토요일에 늦게까지 깨어있으면 안 된다는 것, 슬리퍼를 신고 교회에 가면 안 된다, 주일에 돈 쓰면 안 된다 등)
지금 우리 교회는 그저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다른 부수적인 것들에 대한 지침을 언급하진 않는다. 복음을 알면 알아서 잘 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미 대다수가 율법주의의 폐단을 깊이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이 예배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깊이 고민한 결과물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있었고, 현재 내가 반성해야 할 점, 문화적으로 개선해야 할 점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지금 장년부 사역팀으로 섬기고 있는 올해 예배회복운동을 하면 어떨까 고민하게 되었다.
✅정리
예배는 교회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고, 그래서 바른 예배를 위한 원리와 질서가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공부한다 생각하고 예배모범의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예배순서: 예배로의 부름>영광송>십계명 낭독>죄의 공적인 고백>사죄의 선언>감사찬송>성경낭독>목회적 기도>말씀 선포>기도>헌상>강복선언>성례 시행
1. 서문
종교개혁 초기에 예배 질서를 바로잡고자 각국의 언어로 공동기도서를 작성했는데, 그 안에 포함된 여러 의식들이 설교보다 중요해지며 말씀 선포의 장애물이 되었고, 교인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다시 형식/외형 중심이 되어버린 예배를 개혁하고자 다시 성경에 근거하여 예배모범을 만들게 되었다.
2. 회중의 모임과 공예배에서의 태도에 관하여
회중은 예배를 나오기 전, 해야 할 일을 끝내고 예배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마음을 정돈하며 결석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며 예배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한다. 굳이 언약백성을 여러 부서로 나누지 않는다. (장소의 제약이 생긴다면 여러 예배를 만들기보다 분립하는 것이 대안) 모든 예배 순서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역들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임한다.
3. 성경의 공적인 낭독에 관하여
설교 본문을 읽는 것은 하나님이 회중을 향해 하는 말씀을 대신하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해있으며 하나님께 복종함을 인식하게 하는, 주꼐서 자기 백성을 세우고자 거룩하게 하는 방편이다. 목사는 적절한 분량을 읽되 필요한 경우 해석을 해줄 수 있으며 사적으로도 성경을 읽도록 장려해야 한다.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 글을 가르쳐서까지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고, 신구약을 한 장씩 봉독하며 일독을 할 수 있게 했다.)
4. 설교 전 공기도에 관하여 (목회기도)
원죄와 자범죄를 고백하며 삼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더불어 공교회와 권세자, 직분자인 목사와 교사를 위해 기도하고, 특정 도시와 회중을 위해, 주님의 규례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잘 사용될 수 있도록 기도한다. 외적 은혜의 방편들로 하나님을 풍성히 누릴 수 있길 기도하며 한 번 더 말씀을 전달하는 목사와 듣는 회중을 위해 기도한다. 말씀을 듣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 행위가 무익하고 해로운 곳으로 향하나, 삼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와 교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목회기도는 목사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장로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장로가 목회기도를 맡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5. 말씀 선포에 관하여
적절한 주제를 선정하고 본문을 구성해야 한다. 교리를 잘 끌어내고, 논증과 예화를 적절히 사용하며 의심에 대해서도 대응해 제거해줘야 한다. 설교를 통해 세심하게 권면, 책망, 위안을 줄 수 있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인도되어 그분을 영접하도록 그분을 밝히 드러내야 하고, 회중 역시 듣는 일이 자신의 역할임을 인식해야 한다. (가장이라면 더더욱!)
6. 설교 후 기도에 관하여
설교 전 기도가 조명을 위한 기도하고 한다면 설교 후 기도는 적용을 위한 기도라 할 수 있다. 주신 말씀에 감사하며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간단하게 기도하고, 말씀에 대한 화답으로 찬양한다. 주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이 권장되고, 특별한 시기에는 따로 기도할 수 있다.
예배의 마무리는 강복선언으로 하도록 하고, 이 때 미사여구를 붙이기 보다는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선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목사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복을 선언하며 손을 드는데, 회중은 눈을 감지 않고 바라보아야 한다. 강복선언은 설교를 맡은 목사가 해야 한다.
7. 성례의 집례에 관하여
주께서 인치심을 나타내는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의 시작과 같은데, 필요 없이 늦추지 말고, 사적으로 목사가 아닌 사람이 세례를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인이 아닌 경우 보호자의 인도 아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례는 받는 사람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표를 넘어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의식이므로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고, 이미 세례받은 자도 지켜보며 세례의 효력이 향상된다. 세례의 방식에는 물에 완전히 빠뜨리는 침수, 물을 뿌리는 세수, 물을 붓는 관수의 방식이 있다.
8. 주님의 만찬의 성례에 관하여
성찬은 당회가 결정하되 자주 행해져야 한다. 미리 공지하여 성도들이 잘 준비된 상태로 성찬에 나아올 수 있도록 하고, 목사는 성찬하는 것에 대해 경고와 초대, 격려와 확신을 주며 우리의 생명을 상징하는 빵과 언약, 평화, 기쁨, 안식을 상징하는 포도주를 나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과 하나의 교회를 이루며 신비로운 사귐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성찬은 세례받은 자만 참여할 수 있고, 장로들은 평소에 성도들이 성찬에 준비될 수 있도록 심방해야 한다.
9. 시편 찬송에 관하여
종교개혁의 산물로 찬송이 온 회중에게로 돌아왔으므로, 성도들은 찬양 가사의 뜻을 잘 알고 마음을 다해 찬송을 불러야 한다. 특히 찬송가를 직접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0. 주님의 날을 거룩히 지키는 것에 관하여
일요일 하루 전체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리스도의 인식일로 지킨다. 미리 주일을 준비하고, 공예배의 모든 순서에 참여해야 한다. 주일에 들은 말씀은 가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11. 결혼 예식에 대하여
결혼이 성례는 아니지만 당회의 치리 가운데 결혼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교회에서 결혼 당사자의 연령, 상호 및 보호자의 동의 등을 파악하고, 미리 결혼의사를 회중에게 알린다. 기도와 말씀 선포, 약속과 언약으로 소박하게 예식을 진행한다. 예식에 참여한 교회의 회원들도 해당 가정을 도울 책임이 있음을 기억한다. 결혼 날짜와 대상이 혼인 명부에 기록되고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12. 환자 심방에 관하여
목사는 성도들이 건강할 때 죽음을 준비하도록 권면해야 하고, 성도들 역시 자신의 영혼 상태에 관해 목사와 자주 의논해야 한다.
환자가 복음에 대해 무지할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가르치고, 영적으로 불안정하거나 회개가 필요하다면 그 상태를 인식시키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시켜야 한다. 실패 중 노력하는 자와 낙담하는 자에게도 복음을 제시해 위로해야 한다. 구원에 대해 정확히 가르치고 환자를 위해 기도한다. 또한 갑작스러운 죽음이 이후 주변인들의 삶에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재산이나 빚, 회복해야 할 관계 등을 정리하도록 한다.
13. 죽은 자의 매장에 관하여
매장의 문제는 교회의 공적 업무가 아닌 유가족들이 감당할 문제로 본다. 다만 미신적인 행위를 금하고, 다른 의식 없이 즉시 묻을 것을 권고한다.
14. 공적 금식에 관하여
하루 종일 계속되는 공적인 금식은 그것이 요구되는 특정 상황에 할 수 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많은 신자들이 공감하는 때에 진행해야 관습화되지 않는다. 단순히 밥을 먹지 않는 것 이상으로 세상적인 말과 생각이나 육적인 쾌락, 사치품 등을 멀리하고, 공적으로 성경 읽기와 말씀과 찬양에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해당 사안에 대해 간구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바라도록 한다. 목사는 진심을 다해 공적 금식일을 인도하고 성도들이 금식일과 같은 마음을 계속 품을 수 있도록 끈질기게 권면해야 한다.
15. 공적 감사일에 관하여
특별히 감사한 일이 국가적으로 있을 때 하루를 구별해 모일 수 있는데, 이 때는 짧은 기도와 권면의 말씀과 찬송 및 설교 등의 시간을 보낸다.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일종의 축제를 즐기는 날이다. 이렇게 감사한 날에는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며 가난한 자를 위해 연보한다.
16. 부록: 공예배를 드리는 날과 장소를 다루며
명확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규정적 원리에 따라 하고, 명확하지 않은 것은 분별력있게 적용해야 한다. 안식일이 아닌 날에 주님의 날을 지키지 않고, 절기들을 따로 지킬 필요가 없다(성경에 보증된 바 없음).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 하나님께 집중하며 예배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택하도록 한다.
*퀘이커적 예배: 퀘이커는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기독교 평신도 운동인데, 내면을 통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주장한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는 무언예배를 드린다. 설교자도 없고 찬양도 없고,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끝난다.
*이머징 예배: 1990-2000년대 이머징 처치 운동에서 파생된 형태로 다양한 예술 요소(조명, 영상, 향기, 설치미술 등)를 활용하고, 정해진 순서가 없고, 회중이 개별적,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참여한다. 전통적인 예전 요소도 새롭게 해석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터툴리안: 고대 교회 시대 때 초기 기독교 신학 형성과 교리 발전에 기여한 인물, 삼위일체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하며 그 개념을 정리했고, 헬라어(그리스어)를 기반으로 한 신학을 라틴어로 정리하며 서방교회 신학의 초석이 됨. 변증가로서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과과 논쟁하며 정통 신학을 수호함
*우거하다: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부쳐 살다.
*건덕: 건전한 덕
*안돈하다: 사물이나 주변 따위가 잘 정돈되다. 또는 그렇게 만들다. / 마음이나 생각 따위가 정리되어 안정되다. 또는 그렇게 만들다.
*경책하다: 꾸짖다.
*재예: 재능과 기예를 아울러 이르는 말
*redress: 부당한 것을 바로잡다.
*젠트리: 잉글랜드의 사회계층으로 귀족보다는 낮고 농민보다는 높은 지주 계급. 작위는 없지만 재산이 많았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상류층, 청교도 운동의 주된 지지층이기도 함
#믿음서바이벌#김신구#도서제공
✔ 믿음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 싶다면
✔ 고난 중에도 욥처럼 불평하거나 원망치 않고 참 예배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면
가난한 개척교회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김신구 목사의
현실적인 #신앙간증 이야기
🌿
가난한 가정 형편에서
어떻게 목회자의 자녀가 되었고
장난꾸러기 사내아이가
어떻게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힘든 시기를 거치며
어떻게 성경을 삶으로 살아내었는지
어떻게 기도하고 찬양했는지를 그렸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하지만 재밌게 풀어낸 간증을 읽으며
말씀으로 살아내는 삶을
더 깊고 간절하게 소망하게 되는 신앙 에세이 🙏
🌿🌿
어릴 적 엄마 몰래 '헌금 삥땅하기'는
저자와의 같은 추억을 공유한다는 동질감에
여러 에피소드 중 가장 흥미진진했다. 🤣🤣
🌿🌿🌿
개구장이 소년이 하나님을 만나
그리스도인으로 다듬어지는 과정을 보며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나의 믿음도 다듬어지고 있는 중이 아닐까. 😅
#간증의재발견#세움북스#서포터즈#2025_60
📕24#38 아이야 엄마가 널 위해 기도할게
2024.11.22~12.15
*️⃣“언젠가 우리가 더 돌보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남겨 두고 갈 자녀들을 위한 최고의 보험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책의 한 구절에서는 부모가 있는데 왜 어린이 회심집회가 필요하냐는 말이 나온다. 그만큼 부모에게 자녀의 회심과 영적 교육의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내 또래의 자식세대가 제대로 신앙생활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 그 부모가 잘못 키웠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난 좋은 부모 밑에서 나 역시 하나님을 아는 자로 자랐기 때문에 이런 교만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남을 비교하면서 내가 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내가 부모가 되면서 스스로 했던 생각의 화살이 나를 겨냥하게 되었다. 아직 28개월과 2개월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이들이 나중에 교회를 가지 않는다고 하거나 신앙적인 회의에 빠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봐 문득 정말로 겁이 나고 심장이 쿵하는 느낌마저 든다.
온유는 벌써 예배와 기도가 뭔지 느낌적으로 알고, 부를 수 있는 찬양도 제법 된다.
며칠 전에는 똥이 잘 안 나오자 변기에 앉아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다며, 똥이 안 나올 때는 하나님께 "똥이 잘 나오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잘 가르쳐야 하며, 얼마나 모범을 보여야 하는가.. 나 역시 엄마를 떠올리면 언제나 집 한 켠에서, 방에서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습이 바로 떠오른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가는 나에게 그 사람을 얼마나 존경할 수 있는가와 맞물린 부분이기도 하다. 나의 자녀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부모가 되고 싶다.
*기경: 논밭을 갊
*상명: 시력을 잃어 앞을 못 보게 됨 (참척의 의미로 자식의 죽음을 당했을 때도 사용됨)
*언어도단: 말할 길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어이가 없어서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24#8 박영선의 기도
2024.04.03~05.20
⏩️”곧 인생의 어느 만큼까지 하나님에게 맡기느냐의 싸움입니다.“
책모임이 지지부진하다 결국 폭파하게 되었다ㅠ
최근 건강이슈로 앉아서 책 보는 게 어렵기도 했고,
일하랴 통근도 힘들고 바로 육아에 투입되랴
심적인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기도... 나의 일상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책을 읽다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하나님 자체를 높이고 예배하는 기도보다는 일상의 습관과 같은 기도 그리고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해결해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내 삶을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예수님과의 추억,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고 하나님과 함께 한 경험이 성도로서 내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이미 응답이 없어도 기도 자체가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다가갈 수 있다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자체를 즐겨 들으시는 분이라니!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종종 기도로 할 말만 툭 해놓고, 나머지는 "제 맘 아시죠?"하고 이후를 맡겨버리거나, 삶에서 맺어져야 할 열매들을 맺는 데 노력하지 않고 기도 행위만으로 퉁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도를 통해서 내가 신자로서 맡겨진 삶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할 일인데, 내 책임을 외면한 것이었다.
어떤 내용이라도, 어떤 표현이라도.. 개의치 않아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과 관계 자체를 즐길 줄 알아야겠다.
p65 인디언들은 물웅덩이 수면으로 내리꽂히는 바람의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한다. 한낮에 내린 비에 씻긴 바람 그 자체의 냄새를 좋아한다. 소나무 향기도 마찬가지다.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 공기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동물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똑같은 숨결을 나눠 갖기 때문이다.
p67 내가 보기에 당신들의 삶에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당신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을 쫓듯이 부와 권력을 따라 뛰어다닌다. 그러나 손에 움켜잡는 순간 그것들은 힘없이 부서져 버린다. 당신들은 사랑을 말하지만 확실하지 않고, 약속을 말하지만 그것도 분명하지 않다. 당신들의 현재는 더없이 불안해 보이고, 마치 집을 잃은 코요테가 이리저리 헤매다니는 것과 같다. 당신들이 햇살 비치는 들판에 앉아 자연을 응시하거나, 고요히 자신을 비춰 보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당신들은 계절의 바뀜도 하늘의 달라짐도 응시하지 않는다. 보라, 순간순간 하늘은 변화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들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조차 잊어버린 이상한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늘 생각에 이끌려다니고, 남는 시간은 더 많은 재미를 찾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를 돌아보는 침묵의 시간이 없다면 어찌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어찌 어머니인 대자연의 품에서 태어난 자식이라 할 수 있는가.
p69 나는 내 상황의 주인이다. 내 몸의 주인이며, 내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며, 내가 내 나라의 주인이다. 나는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로지 위대한 정령에게만 의지한다.
늙은 인디언들을 만나면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위엄 때문에 마치 한겨울의 숲 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p78 그 위대한 신비에게 바치는 인디언들의 예배는 침묵과 홀로 있음 속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신과의 만남이 이렇듯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유는 모든 언어가 불완전하고 진리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다.
p83 광대무변한 자연의 세계와 그것이 지닌 수많은 경이로움들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측량하지 않았다. 원인과 결과에 따른 제한된 사고방식은 인디언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우라는 모든 것 속에서 기적을 발견했다. 씨앗과 알 속에서 생명의 기적을, 번개와 불어나는 강물에서 죽음의 신비를.
p88 조용히 자작나무의 수런대는 소리, 사시나무의 은빛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밤이면 소리 없이 여행하는 별들의 대장정을 손짓해 보였다. 침묵, 사랑, 경외감, 이것이 아이를 가르치는 세가지 기준이었으며, 아이가 좀 더 성장하면 자비심, 용기, 순결의 기준이 뒤따랐다.
p89 때가 되면 아이는 스스로 기도하는 자세를 배우고, 절대의 힘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다가갔다. 아이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피를 나눈 형제이며 누이라고 느꼈다. 아이에게 폭풍우 치는 바람은 위대한 신비가 보내는 소식이었다.
p98 진정한 인디언은 자신의 재산이나 노동에 값을 매기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힘과 능력으로 베풀 따름이었다. 힘들고 위험한 일에 자신이 선택되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p100 어떤 추위와 배고픔, 어떤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이빨을 곤두세우고 덤벼드는 위험과 죽음 앞에서도 선한 일을 하려는 그대의 의지를 포기하지 말라.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4월) 21일
🔖 오늘의 문장입니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 - 이 중대한 일을 우리 인간은 무시하기 쉽습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 바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쌓아올릴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이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인가를 건설하거나 변혁하기 전에, 또한 비난하거나 파괴하기 전에 우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무엇을 추구하며 돌아다닌다든가, 지도받기를 원하거나, 교사나 도사를 찾아다닌다든가, 요가나 복식 호흡, 또는 예배를 보는 등 스승이라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모두가 쓸데없는 일이 아닐까요?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자기로부터의 혁명 1」
"야, 하다못해 마라탕과 양꼬치도 한국에서 정착을 했는데 우린 이게 뭐니."
'야버즈'는 조선족 작가 전춘화가 지금까지 쓴 소설들을 모은 첫 소설집이다.
'야버즈'가 뭔가 해서 찾아봤더니, '鸭脖子yā bó‧zi'(근데 야쁘오즈 아닌가?^^; 왕년의 중국어과 출신의 허접한 발음ㅎㅎㅎ)였다. 즉, 야버즈는 오리 목에 붙어 있는 고기로 중국에서는 유명한 음식이지만 한국에서는 차이나타운에 가야지만 겨우 맛볼 수 있는 무명에 가까운 음식이다. 분명 가까이에서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선입견을 가진 쉬운 야버즈 요리는 조선족과 닮은 구석이 있다.
사실 조선족은 우리나라에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 나야 뭐 10년 넘게 중국어 예배부에서 봉사하면서 조선족들을 많이 만나봤기 때문에 편견이 없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매스컴이나 언론에서 떠드는 조선족들의 이미지가 전부이기에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실려 있는 5편의 소설 모두 그런 편견 속에서 싸우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분명 우리말로 쓰여 있지만, '룡' 등 한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나 어휘들이 나오다 보니, '중국 소설'이라고도 할 수 없고, '한국 소설'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느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겉도는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독보적이고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미나리'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책을 읽으면서 1층은부터 5층까지 예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겠다. 1층은 아직 입문한지 얼망안되는 사람들 2층은 조금은 됐지만 그래도 아직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 3층은 조금식 예수님의 존재를 일아가고 주일예배에 형식적으로 나오는사람 4층은 예수님의 존재느끼지만 주일예를 형식적으로 나오는사람들 5층은 예수님의 존재를 귀하게생각하고 주일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사람둘이다. 나를 대비해봤을때 난 4층과 5층 사이에있지만 4층 조금 가까운 사람인고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좀 더 발전 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023년 첫 책 읽기 완독.
새해 계획을 세우며 고민을 하는데 다윗 왕이 생각났다.
왕이지만 광야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럼에도 그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 예배가 끊이지 않았다.
쫓길 때, 광야 굴 속에 있을 때 하나님과 더할 수 없이 밀착되어 있었으며 그때 그 험난했던 개인사가 자기 영혼을 별처럼 만드는 놀라운 은혜였음을 깨닫고 다윗은 주옥같은 시들을 읊는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겠습니다.
예술 하는 사람은 인생의 쓴맛을 알아야 한다더니 바로 다윗 왕을 두고 한 말 같다.
다윗의 인생을 사는 방식을 올해 나의 계획이자 목표로 세웠다.
항상 기뻐하고, 늘 찬양하며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다윗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서 알 것이다.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다윗. 목동에서 왕의 자리까지 오른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다.
사무엘하는 사울 왕의 죽음에서 시작해 다윗 왕이 죽기 전까지의 이야기로 왕으로써의 다윗보다는 인간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송태근 목사님의 맛깔나는 해석으로 지루하거나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2부 스완부네 집 쪽으로는 본격적인 스완의 사랑을 이이기하고 있다.
사랑 이야기라 다소 읽기가 수월했지만 당시 프랑스 문화와 문학에 있어서 매춘부의 역할, 의미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그냥 읽는다면 고구마 1000개는 먹은 듯한 답답함과, 그들의 허세, 한량 놀이에 책을 덮고 말 것이다. (그야말로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해할 수 없는 스완의 사랑.
스완은 완벽함 그 자체이다. 유대인 금융계 큰손, 사교계 거물(왕족과 귀족을 넘나들며 만남), 수준 높은 예술적 취향과 교양을 갖추었다. 그런 반면 그가 죽을 만큼 사랑하는 오데트는 고급 매춘부 출신이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스완을 만나면서도 다른 남자들과 계속 만난다. 경박하기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문학에 대해 예술에 대해서도 지식이 없다. 얼굴이 이쁘고 몸매가 좋다는 것이 장점이다.
2부 끝부분에 가서 스완의 오데트에 대한 콩깍지 사랑이 벗겨지는 듯한 독백이 다소 사이다를 마신 듯 시원함을 준다.
"나의 마음에 썩 들지도 않고 나의 취향에 맞지도 않는 여자를 위하여, 나의 생에 중 여러 해를 낭비하였고, 내가 심지어 죽으려고 하였으며, 나의 가장 심각한 사랑을 쏟았다니!"
#프루스트에게 (스완) 있어서 사랑이란.
헛것, 환상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남녀 사이의 사랑을 필연, 운명의 낭만적 사랑을 거부한다. 사랑은 우연하고 우발적인 것이며, 사랑하는 이의 무의식적 힘의 산물이라 한다. 그렇기에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오데트를 보았을 때 별 호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 날 오데트의 집에서 오데트를 보티첼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와 일치시키며 단숨에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의 옆에서 서서, 풀어헤친 머리채가 볼을 따라 흐르듯 늘어지게 내버려 둔 채, 활기를 띠지 않은 때에는 지치고 침울해 보이는 그 커다란 눈으로, 머리를 숙여 들여다보려는 편화 쪽으로 힘들이지
않고 몸을 기울이기 위하여, 가볍게 춤을 추는 듯한 자세로 다리 하나를 구부리는 모습이, 시스 티나 예배당의 어느 벽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이트로의 딸 시뽀라의 모습과 아찌나 흡사한지, 스완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시뽀라와 오데뜨 간의 유사함 속에서 발견한 희열이 더욱 깊었고, 장차 스완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운명적 만남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떠오른 환상의 조작이 사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스완은 오데트를 향한, 불안과, 질투, 환멸의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오데트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깨질까 좌 불안해 하하고, 질투 때문에 못 견뎌하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완...그런 스완의 모습을 3부 고장의 이름 - 이름에서 '나'(화자)가 스완과 오데트의 딸인 질베르트를 향해 오마주 한다.
스완을 향한 화자의 무한 존경과, 동경을 느낄 수 있다.
"스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그를 닮기 위하여, 탁자 앞에 앉아 나의 코를 잡아당기고 눈을 비비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나는 특히 스완처럼 대머리였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가 나에게 어찌나 비범한 존재로 보였던지, 나와 일상 만나는 사람들 역시 그를 알고, 아무 날에나 사람들이 그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 등을 나는 경이로운 일로 여겼다."
'나'(화자)의 질베르트를 향한 고구마 사랑, 신경증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우연일까? 무의식의 환상일까?
유다의 별 2권 - 도진기
1권에 이어서 고진과 이유현의 사건 조사는 계속된다. 우선 컨테이너 박스에서 자살한 것으로 위장한 여순철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이유현은 용접전문가를 불러서 컨테이너 박스를 조사하지만 외부에서 용접을 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또한 일본에서 안병조를 살해한 사람이 반요한일 것으로 추축했으나 반요한의 시신이 국내에서 발견되면서 범인 추적이 오리무중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수하 3명이 동시에 살해되자 목숨에 위협을 느낀 임인건도 끈을 가지고 사라져 버린다.
고진과 이유현은 모든 사건의 중심에 용해운이 있다고 생각하고 용해운의 어머니가 안계시므로 이모를 만나서 그의 어린 시절부터 조사하기로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용해운의 어머니의 이름은 용여순으로 아들이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 그들은 그점에 착안해서 용해운의 이모에게 찾아가 용해운의 어릴적 이야기와 아버지에 대해 조사하기로 한다. 용해운의 이모 용귀순은 여동생과 제부의 만남과 용해운의 어린시절 일화를 들려준다.
동생이 수원터미널에서 매표원으로 일할 때 진성모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진성모가 바로 용해운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제부 진성모는 일도 하지 않고 동생이 먹여살렸는데 어느날 한 여자가 여동생네 집에 찾아와 자신이 진성모의 아내라고 하며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얘기도 해주었다. 시기상으로 동생보다 후에 만나 딸을 낳은 그 여자때문에 동생과 진성모가 헤어졌다고 했다. 진성모의 얼굴이 궁금한 그들에게 그녀는 사진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더 수사를 진행하여 진성모를 조사했다. 그는 이미 5년 전에 죽은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진성모의 어머니 이름이 진상화라는 점이었다.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은 진성모와 진성모의 자식으로 또 어머니 성을 물려받은 용해운이 무언가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고진과 이유현은 전남 영암으로 진상화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녀가 젊을때 다방을 하던 시절에 진성모의 아버지를 만났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녀가 채 스무살이 안되던 시절에 성모의 아버지는 이미 오십줄에 들어선 나이많은 남자였다.
그 남자는 성모가 태어난 후 홀연히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20여년 전에 사망한 남편을 경찰서에서 확인했다고 했다. 남편의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묻자 그녀는 이대철이라고 알려주었다. 성모의 아버지의 사진이 있는지 묻자 역시 사진은 없다고 했다. 사진 찍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고 했다. 그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용해운이 다녔던 초등학교와 수원의 C공고를 찾아가 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자 그들은 수원역 부근에 있는 용해운이 다녔던 중학교를 찾아갔다. 그곳의 교장이 마침 용해운의 3학년 때 담임이었던 김일환 선생님이었다. 그로부터 학창시절의 용해운의 일화를 듣게 되는데 그는 폭력을 쓰지 않고도 자신의 추종자를 만드는 능력이 있는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조사한 바를 바탕으로 고진은 다음과 같이 추리했다. 1937년 용문산 꼭대기에서 자살한 사람이 백백교주 전용해가 아닐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시신을 그의 아들 전중기가 확인하고 아버지가 맞다고 했는데 혹시 아들이 아버지와 짜고 탈출한 것이라면 어떨까? 그렇게 탈출한 전용해가 이대철이란 이름으로 살아갔다는 가설을 세운다. 그러나 이유현은 당시 백백교주의 발표 나이를 들어 틀린 추리라고 몰아세운다. 당시 발표된 백백교주의 나이가 43세로 고진의 주장과는 나이대가 맞지 않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고진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백백교주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숨긴 것으로 유명하므로 공식적으로 발표된 나이 또한 조작된 나이일 것으로 보았다.
고진과 이유현은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백백교주 시신 발견에 대한 경찰 자료를 검사하기로 하고 화미령 변호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1937년 전용해의 시신을 발견한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확인한다. 최초 시신 발견자는 당시 19세의 떠꺼머리 총년 이춘달이라고 되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그 동안 잠수를 타고 행적을 감추고 있던 임인건이 '베스솔트'라는 마약에 취해서 알몸으로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태연하게 사무실에서 카나리아를 먹다 경찰에 체포되어 병원에 강제 수용되었다. 임인건에게 마약을 먹인 인물을 용해운으로 보고 있지만 증거가 없는 상황이었다. 답답하지만 사건은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뉴스에 곳운사에 화재가 났다는 보도가 나온다. 고진은 이 뉴스를 보고 이유현에게 연락한다. 곡운사가 중요한 이유는 백백교주 전용해의 유골이 화장되기 전 임시 보관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국과수에서 보관중이던 백백교주의 유골이 불교계의 소송으로 폐기 결정이 났기 때문이었다. 고진과 이유현은 곡운사로 달려간다. 곡운사에서 보관하던 백백교주의 유골을 훔치려던 일당은 곡운사의 승려가 발견하여 다행히 도난을 당하지는 않았다. 승려의 말로는 그들의 차량이 12인승 스타렉스로 엔진 튜닝을 한 차였다고 밝혔다. 고진은 백백교주의 유골을 확인하게 해달라고 하고 포르말린에 담긴 유골을 확인하는데 유골에서 원래 있던 윗니들이 모두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범인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유골에서 윗니를 뽑아간 것이었다.
일본에 요청한 백백교 사건 재판에 제출되지 않은 수사 기록 중 동경 지방문서 보관소에 있던 자료가 이유현에게 도착했다. 여기에는 시신을 처음 발견했던 이춘달의 심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고진은 이춘달이 백백교의 어린 전령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리를 한다. 그렇게 일본에서 온 자료를 보면서 사건을 정리하던 그들에게 남기만을 찾았다는 연락이 오고 그들은 남기만을 찾으러 남양주로 간다. 그들이 남기만을 발견했을 때 그는 기름을 넣는 큰 드럼통을 용접하는 중이었다. 그를 발견하고 이유현이 그에게 다가가는 도중에 용접하던 통이 폭발하며 남기만이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제 용해운의 심복은 네 명이 모두 죽어버렸다. 고진은 이게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용해운의 지시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용해운이 백백교주의 유골에 숨겨진 암호를 찾기 위해 국과수에 들어갔으며 그 유골이 곡운사로 옮겨지자 그곳에서 윗니를 모두 뽑아갔다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그 암호는 유골의 이빨에 기록했던 것으로 보였다.
고진은 화미령에게 함께 끈에 적힌 암호를 풀어보자고 부탁한다. 그리고 화미령은 자신이 푼 암호를 알려준다. 그녀가 푼 암호는 '천원우'였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해 낸 장소는 백백교가 소유했던 천원금광이었다. 고진과 화미령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들이 굴에 들어가 확인한 것은 이미 깊게 파인 구덩이 뿐이었다. 그들은 한발 늦은 것이었다. 화미령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버리고 고진은 그곳으로 그들을 안내해준 강영덕과 술잔을 기울이며 그에게서 백백교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고진은 한가지 힌트를 얻는다. 백백교의 본부가 있던 계곡의 이름이 우원천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풀은 암호를 거꾸로 하면 우원천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은 그곳으로 출발한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교회건물로 보이는 것이 서 있었다. 먼저 들어간 이유현은 조금 후에 들어간 고진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간 이유현은 보이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이 예배석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들이 계속 의심하고 있던 용해운이 앉아 있었다.
용해운을 마주한 고진은 그동안 자신이 생각한 그의 범행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용해운은 증거가 없는 헛소리라며 부인한다. 그러는 사이에 지하실에서 올라온 이유현이 용해운의 옆에 나타난다. 용해운을 제압해 그를 체포할 수 있을 것인가?
후반으로 갈수록 이 사건의 배후가 드러나는데 용해운의 뒤에는 생각치도 못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조금 긴 이야기지만 2권으로 들어오면 사건이 조금씩 풀리면서 진짜 배후의 모습에 다가가게 된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 예배가 비대면 예배로 넘어가면서 많은 교회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또한 전도 역시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한 목사가 쓴 책이 바로 '도시의 어부들'이다.
이 책을 쓴 이영철 목사는 '3분 브릿지'만 있으면 누구든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3분 브릿지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15년 전, 나의 대학생 시절 CCC에서 훈련 받았던 '사영리 전도'였다. 갑자기 그 시절에 거절당했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온몸이 화끈거렸다.
사실 나는 코로나라는 핑계로 교회 출석 안 한 지 2년이 넘어간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전도법으로 사람들이 믿을까?'라는 의구심과 '타성에 젖지 않고, 열정적인 목사님이 계시다니.... 도전이 되는데!'라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책이었다.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현재 교회에서 선포하고 가르치는 복음은 예수 믿으러 교회에 와서 거듭나서 거룩해져서 복 받고 교회 잘 다니다가 봉사 많이 하고 천국에 가는 복음이다. 하지만 진정한 복음은 하나님 나라 복음이다.' 잊지 말자!
인간은 고대로부터 수많은 법을 만들어 왔다. 그것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자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신에게도 분명한 법과 기준이 있다. 그 법은 신이 창조한 세계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신의 형상인 인간을 죄로부터 지키기 위함이었다.
신에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신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본다. 그래서 신은 형식적인 예배를 받을 수 없다. 신은 과부의 두 렙돈은 감동적으로 받지만, 비싼 밥을 사 주면서도 부모가 미워서 쳐다도 안 보는 아들 앞에서 괜찮은 척 거짓 행세하는 부모가 아니다.
아들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아버지도 괜찮은 척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그 선을 넘지 못하고 있는가! 그러나 신은 그런 척을 할 수 없는 존재다. 그는 진실하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치마를 입고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한 남자 선배가 치마 길이가 짧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교회 올 때 이렇게 짧은 치마 입고 오면 안 돼. 형제들이 시험 든다 말이야."라며 어쭙잖은 충고를 했고, 그때 당시 나는 갓 20살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례한 충고인지도 모르고 받아들였고, 그 후에는 무릎 밑으로 내려가는 긴 치마를 입거나 바지를 입었던 기억이 난다.
현재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에 민주화를 경험하고 사회적인 발전과 더불어 여성의 지위와 지적 수준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여전히 가부장적인 남성 위주 의식에 머물러 있는 거 같아, 항상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특히 여성 성도들조차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거 같아서 더 안타깝다.
이 책은 여성 구약학자의 시각에서 구약성서 안에 얼마나 '여성 혐오'와 '성폭력'이 많은지를 알려준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함을 마주하는 과정이 있어야지만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약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폭행 사건이 다섯 번 등장한다고 한다.
1. 창세기 34장 세겜의 성폭행 사건
2. 사사기 19장 기브아 거민의 성폭행 사건
3. 사사기 21장 집단 납치 사건
4. 사무엘하 13장 암논의 성폭행
5. 사무엘하 16장 압살롬의 성폭행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귀찮아서 안 적은 건 절대 아니고, 정리하다 보니 화딱지가 나서 못 올리겠다. 궁금한 사람들은 직접 읽어보시길.....)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고대 사회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의 처리 과정이 가해자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성폭력의 피해자인 여자들의 목소리를 성서 본문에서 듣기 어렵고 오히려 그 여자들을 비난하거나 무시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성경해석이었다고 하더라도, 성경에 도대체 왜 이러한 끔찍한 사건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남아있고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지는 깊이 생각해볼 문제인 거 같다.
나는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기원전 시대와 오늘날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으며, 시대가 지날수록 사람들의 의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들은 옛날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스스로 성경공부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들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한 편협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이번 책 속에 다룬 내용들을 '불편'하게만 여기고 그 부분만 '생략'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닌, 열린 사고로 성경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사도신경은 매주 예배때마다 암송을 한다.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믿는 지 고백하는 것이다. 매주 읽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사도신경을 세세하게 설명해주며 우리의 신앙이 무엇을 기초로 하는지 알려준다. 만화로 되어 있어서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코로나시대때 나는 온라인으로 처음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이 대면예배때에서 들었을 때 보다 더 잘 와닿았다.
목사님들은 온라인 예배를 부정적으로 보는것 같았다.
물론 대면 예배보단 못하긴 하지만,
나는 의문이 들었다.
왜 교회로 가야하는걸까 ? 우리는 교회로 모여야 하는거지 ?
코로나를 떠나서 내가 교회 가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반주자로써 피아노 반주를 하려고 ?
교회안에서만의 그들만의 리그?
세상은 교회를 안좋은 시선으로 보는데
예전처럼 설교만 잘 드리고 나만 잘하면 되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 도서관에서 책 제목보고 고르게 됐다.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
우라가 교회를 가는 이유
그리거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그 답을 준 책이다
이 책은 소장각이다 구매할것.
코로나 시대에 읽는 약 100년전쯤 전염병 시대 소설
의사 리외를 보면 의료진이 얼마나 힘들 지 엿볼 수 있다. 일반인도 많은걸 잃지만 리외도 얻은 것 없이 잃기만 하고 끝난다.
소설에서는 페스트가 끝나고 완결이 되는데
코로나는 언제쯤 끝나는건지 원...
종교가 왜 엿같이 계속 모이는 지에 대한 한 부분도 보여준다. 저 시대에 페스트의 감염경로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어서 저랬겠지만, 비말로 감염되는거 아는 현대인들은 도대체 왜 마스크 벗고 예배하고 춤추고 난리를 치는걸까....
ㅅㅂ
’알츠하이머의 종말, 뇌를 읽다‘는 책들과 일맥 상통하는 책이다. 뇌의 가소성을 향상시켜 두뇌 회전력을 강화하고, 뇌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내용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책도 독자가 할 수 있는 실천 사항은 결국 적당한 운동, 건강한 식생활을 통한 영양 공급, 휴식(수면) + 몇 가지 테크닉(명상 등)으로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이다. 문제는 사회 구성원에 속하여 살면서 이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들을 어떻게든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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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누구나 똑똑해질 수 있다
뇌가 둔해지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생물학적 요인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나이가 들면서 크기가 줄어든다. 시간이 흐르면 뉴런neuron으로 불리는 뇌의 신경세포는 줄어들거나 소멸된다. 신경세포와 신경세포를 연결하는 시냅스synapse도 감소한다. 뇌를 종횡무진 하는 초고속도로망이 고장 나는 것이다. 혈관도 좁아진다. 처음에는 현미경으로만 관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지만 결국에는 자기공명영상magnetic resonance imaging(이하 MRI)에서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노화에 따른 뇌의 위축 현상은 너무나 일반적인 일이라 신경영상의학과 의사라면 MRI만 보고도 나이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요는 뇌가 줄어들면 인지기능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뇌 앞부분이 위축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복잡한 퍼즐을 풀거나 결정을 내리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데 전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나중에는 말과 걸음까지 느려지고 간단한 계산조차 어려워진다. 뇌에서 기억 영역이 위축되면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억하기 어려워지며 방향 감각도 저하된다.
뇌의 위축 현상이 과연 노년기에만 걱정해야 할 문제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하지만 뇌가 위축되면서 발생하는 현상은 이르면 40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 대부분이 자신의 두뇌가 예전처럼 명민하지 않음을 느낀다.
신경과학계가 최근 수년 새에 정확히 파악하게 된 놀라운 사실은 인간의 뇌에서 기억력, 집중력, 문제해결력과 연관된 부분에는 ‘가소성’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뇌가 계속해서 변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뇌는 위축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성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뇌의 두께, 밀도, 크기가 증가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상태를 ‘뇌 기능의 강화enhanced brain performance’라 부른다.
뇌가 성장하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 성장이 몇 년이나 몇십 년이 아닌 불과 몇 주나 몇 개월 만에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경세포, 시냅스, 연결성, 혈관 숫자의 증가와 같은 뇌 가소성은 다음의 세 가지 요인으로 결정된다.
1. 뇌에 유입되는 산소의 증가
2. 뇌신경영양인자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이하 BDNF)라는 중요한 단백질 농도의 증가
3. 뇌파 활동의 균형
뇌의 성장과 위축은 그러한 변화가 미세하든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크든 뇌의 크기와 관련된다. 특히 뇌 기능을 최고조까지 이르도록 하려면 클수록 유리하다. 해마가 성장하면 단기 기억력이 향상된다. 마찬가지로 전두엽이 커지면 의사결정력이 개선되고 정보처리 속도가 빨라진다. 얽히고설킨 소통 시스템의 연결성이 확대되면 창의력과 추상적인 퍼즐을 푸는 능력이 개선된다
노화에 따른 질병들을 예방하기 위해 식생활을 개선하고 체중을 감량하며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조심해야 한다는 점은 다들 잘 알고 있다. 뇌졸중과 심장질환이 우리 몸에 엄청난 손상을 가하며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우리 몸에 부담을 준다는 사실도 잘 안다. 하지만 이런 질환들이 뇌를 위축시킨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1/ 성장하는 뇌, 죽어가는 뇌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인간의 뇌는 아동기에 성장이 끝나고 구조가 고정된다는 학설이 일반적이었다. 그 이후에도 노년기에 뇌가 위축된다는 정도만 밝혀졌다.
눈 바로 위 전두엽 피질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동작을 조절하는 기관이다. 우반구의 전두엽은 음악, 미술 등 예술작품 감상과 언어 발성과 연관된다. 좌반구의 전두엽은 논리적인 사고, 집중, 문자 기호의 이해 등을 관장한다.
세라의 귀 가까이에는 측두엽이 자라나고 있다. 측두엽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언어를 듣고 이해하는 청각을 관장하는 것이다. 좌반구와 우반구 측두엽의 깊숙한 곳에서는 해마가 형성된다. 해마는 기억과 관련된 모든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세라의 전두엽과 측두엽 사이에는 두정엽이 형성되는데, 이는 피부에 전달되는 갖가지 감각 정보를 처리하게 된다. 특히 세라의 촉각, 무게나 동작을 감지하는 능력, 고유감각proprioception(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특정한 때에 신체 부위가 어디에 있는지 인지하는 능력), 자기지남력self-orientation(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인지하는 능력)에 관여한다. 우반구의 두정엽은 세라가 길을 찾는 것을, 좌반구의 두정엽은 연산하는 것을 돕는다.
뇌 뒷부분에는 시각을 담당하는 후두엽이 생성된다. 세라는 후두엽 덕분에 사물을 볼 수 있고 자신이 보는 사물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세라의 뇌에서는 변연엽이라는 기관도 형성된다. 이는 전두엽과 측두엽의 피질 영역과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뇌 구조를 통합하여 이르는 명칭이다. 그중 하나인 편도체는 아몬드 모양의 구조로 좌반구와 우반구에 하나씩 존재하며 감정을 조절한다. 시상하부도 변연엽의 구성 요소로서 사람의 맞섬 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외부로부터의 해로운 자극이나 스트레스에 맞서 싸우거나 피하는 생리학적 방어기전), 식욕, 신진대사와 관련된 호르몬을 조절한다. 시상하부와 편도체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둘 다 해마와도 연관이 크다.
세라의 피질을 이루는 각 부분은 서로에게 메시지를 전송하고, 10여 개의 뇌 심부 구조와 척수와도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이러한 메시지 교환은 뇌에서 도로 역할을 하는 신경다발을 통해 이루어진다.
세라의 뇌가 발달함에 따라 전기 신호를 전송하고 수신하는 교신 활동이 신경세포를 활성화하고 서로 연결한다. 신경세포가 시냅스 틈새를 통해 다른 신경세포로 신호를 쏘아 올리면 신경세포 사이에 ‘연결성’이 생기고 생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신경세포가 강화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래서 신경학자들은 “동시에 신호를 쏘아 올리는 신경세포는 동시에 연결된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신경세포가 신호를 쏘아 올렸지만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지 않으면 연결성이 줄어들고 위축되어 결국에는 사라진다. 이처럼 사용하지 않아 사라지는 현상을 ‘미사용 위축disuse atrophy’이라 부르는데 주로 노년기에 발생한다. 신경세포끼리 신호를 주고받고 연결성을 형성하는 과정은 특히 뇌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일생 동안 계속되는 활동이다.
해마는 두뇌를 크게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뇌에서 가장 연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가장 먼저 위축된다. 하지만 그만큼 성인기에 가장 빨리 성장하는 곳도 해마이다. 해마의 크기가 변화하면 기억력과 인지기능에 눈에 띌 만큼 큰 변화가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마가 독자적으로 활동한다는 말은 아니다.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생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기억을 생성하고 저장하는 데는 뇌의 다른 영역들도 관여한다.
해마를 단수로 표현했지만 사실 해마는 총 2개로 좌반구와 우반구에 하나씩 있다. 좌반구와 우반구의 해마는 서로 형태가 동일하며, 바닷속에 사는 해마와 언뜻 보면 비슷하다. 실제로 해마(hippocampus)는 그리스어 hippos(말)와 kampus(바다 괴물)에서 유래했다. 해마는 부분별로 공간, 정서, 사건의 순서, 사실 등에 대한 기억을 관장한다.
20대 초반쯤 되면 세라의 뇌는 발달을 마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뇌가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계속 언급하겠지만 그 후로도 세라의 뇌가 성장하고 변화할 여지는 충분하다.
불행히도 뇌라는 인지도시는 성장하기도 하지만 쇠퇴하기도 한다. 30대에 이르면 세라의 인지도시에도 쇠퇴하는 조짐이 이미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해마는 퇴화가 가장 빨리 일어나는 동시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50세 이후로 해마가 매년 0.5퍼센트씩 줄어들기 때문에 단기 기억이 감퇴한다. 노화와 더불어 세라가 미약하게나마 기억력 저하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50~60대인 사람들은 정신력이 과거보다 둔화된 것 같다고 호소하는 일이 많다. 이는 일반적인 노화 때문일 수도 있고 복용하는 약물 때문일 수도 있다.
정보처리 속도, 작업기억(다른 감각기관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잠깐 동안 수용하는 능력), 학습력이 중년에 ‘급감’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일부 기능은 둔화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중년의 뇌가 젊은 뇌에 비해 우위를 보이는 분야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경험이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우리는 정보를 얻고 그를 토대로 미래에 결정을 내린다. 그 결과 중년에 이르면 의사결정을 좀 더 노련하고 이성적으로 내릴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알코올 남용, 외상성 뇌 손상, 과도한 스트레스, 수면 장애, 비타민 B12 결핍, 비만, 심혈관계질환 등의 요인이 결합하면 인지도시의 도로와 구역이 파괴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더 건강해지려고 복용하는 약들도 뇌 기능을 저해할 수 있다. 하지만 유지보수를 게을리 하지 않고 조심하기만 한다면 세라가 노화를 하더라도 뇌는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뇌를 성장시키는 4대 핵심 전략
1) 시냅스를 늘려라: 우리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면 그때마다 시냅스가 생겨나며(시냅스 신생synaptic genesis), 계속해서 사용하면 시냅스가 한층 강화된다는 점은 이미 오래전에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효과적인 ‘뇌 훈련’을 통해 곧바로 시냅스 신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최근에서야 알려졌다.
2) 도로를 확장하라: 뇌의 각 영역은 신경섬유다발로 이루어진 연결망을 통해 신호를 주고받는다. 예를 들어 해마가 전두엽과 교신하려면 이 경로를 이용해 신호를 전송해야 한다. 교신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먼저 신경섬유다발을 이루는 신경세포 간에 시냅스가 충분히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신경세포의 미엘린화가 상당히 진전되어야 한다. 시냅스를 늘리면 그러한 연결성이 강화된다. 동시에 미엘린화를 통해 축삭의 미엘린을 탄탄하게 유지하고 여기에 영양분을 공급하면 신호를 전송하는 속도도 쏜살같이 빨라진다.
3) 혈관을 강화하고 숫자를 늘려라: 그저 혈관을 건강하게 유지한다고 해서 뇌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혈관 신생을 통해 그 숫자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다. 앞으로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무엇보다 운동이야말로 혈관 생성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혈관의 숫자가 늘어나면 1000억 개의 뇌세포에 공급되는 혈액과 산소도 늘어난다.
4) 신경세포 신생을 촉진하라: 뇌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신경세포 신생이 일어난다는 점은 이미 오래전에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가 성장기에도 신경세포를 생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경학 연구로 입증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신경세포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 뇌에서 신경세포가 매일 만들어진다 해도 일종의 비료 역할을 하는 뇌신경영양인자BDNF와 같은 특정한 조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새로 생성된 신경세포는 곧바로 소멸된다. 또한 신경세포 신생이 일생에 걸쳐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년기에 이르면 발생 속도가 느려진다. 중년에 뇌의 예비능력을 탄탄히 구축해놓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운동, 명상, DHA로 더 잘 알려진 오메가-3 지방산, 수면 등이 뇌의 신경세포 신생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밝혀졌다.
과거에는 뇌 기능 강화를 위해 뇌의 염증을 방지하거나 뇌졸중처럼 뇌 손상을 가할 수 있는 질병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뇌의 노화를 늦춰야 한다는 입장이 대세였다. 물론 그러한 요인을 예방하는 것도 뇌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해로운 요인 때문에 뇌가 위축되면 성장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뇌를 성장시키려면 무엇보다 산소, BDNF, 건강한 뇌파 활동 등의 세 가지 메커니즘이 결정적이라는 점이 최근 들어 확실해지고 있다.
우리 뇌에는 엄청난 양의 산소가 공급되어야 한다. 산소가 있어야 신경세포가 끊임없이 신호를 발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산소는 시냅스 생성과 신경세포 생성에도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뇌신경영양인자를 뜻하는 BDNF는 최근 신경학계에 혜성과도 같이 등장한 스타라고 할 수 있다. BDNF는 해마의 신경세포 생성에 반드시 필요한 재료로 알려졌다. 해마가 끊임없이 새로운 신경세포를 만들어내는 것은 일종의 백업back-up이라고 보면 된다. 소멸된 신경세포만큼 보충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 생성된 신경세포가 계속 자라나 완성되려면 사용되어야 한다. 사용되지 않은 신경세포는 곧바로 성장을 멈추고 소멸된다. 하지만 BDNF가 있으면 성장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BDNF는 효능이 뛰어난 비료에 비유할 수 있다.
건강한 뇌파를 유지한다는 것은 신경학계에서 최근에 급부상한 개념이다. 이는 뇌파가 이상적인 주파수 범위 내에 들도록 뇌를 훈련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뇌파가 건강해지면 뇌의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키고 뇌 기능을 개선할 수 있다.
우울증 환자의 좌반구에서는 우반구에 비해 과도하게 느린 세타파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ADHD 환자의 전두엽에서는 좌우반구를 막론하고 매우 느린 뇌파가 관찰되었다. 반면에 불안 장애가 있는 사람의 경우, 우반구에서 베타파가 과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뇌파가 너무 빠르다는 이야기다. 차분하고 편안하며 정상적인 상태인 뇌에서는 알파파가 지배적이었으며 세타나 베타파는 소량에 불과했다. 바로 이런 패턴이 건강한 뇌파다.
뇌가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성장이 한계에 이르더라도 뇌의 효율성은 계속 증가한다. 이는 근육을 키우는 것에 비유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두박근 크기가 최대치에 도달하더라도 그 힘은 계속 강화된다. 뇌도 마찬가지다. 성장이 한계에 이르러 더 커지지 않더라도 뇌는 점점 더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단적인 사례가 천재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뇌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뇌는 일반인에 비해 한층 복잡한 형태로 접혀 있었다. 이러한 패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중이지만, 일반인에 비해 뇌의 피질이 크게 늘어 접힌 자국도 더 많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브레인 피트니스
혈중 콜레스테롤과 혈압이 상승하는 것은 뇌에 공급되는 산소의 양이 최적량이 아님을 알리는 경고 신호다. 그로 인해 산소가 극히 부족해지면 결과적으로 심장마비와 뇌졸중에 걸릴 수도 있다.
• 총 콜레스테롤: 200mg/dL 미만. 200~239mg/dL은 경계 수준이며 240mg/dL 이상은 높은 수준.
• LDL(저밀도 지질 단백질): 100mg/dL 미만. 130~159mg/dL은 경계 수준, 160mg/dL 이상은 높은 수준, 190mg/dL은 극히 높은 수준.
• HDL(고밀도 지질 단백질): 60mg/dL를 초과해야 최적 수준으로 본다. 남자는 40~49mg/dL, 여자는 50~59mg/dL이 평균치인데, 40mg/dL 미만으로 낮을 때는 심장질환의 위험 인자로 간주한다.
• 혈압은 최고 혈압 120, 최저 혈압 80 이하일 때 정상으로 간주한다. 최고 혈압이 129~139이고 최저 혈압이 80~89인 사람에게는 경계성 고혈압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일반적으로 혈압이 140/90보다 높을 때 고혈압으로 진단된다.
• 갑상선: 갑상선 자극 호르몬이 0.4~4.0mIU/L이면 정상이다.
• 비타민 B12: 200pg/mL를 넘어설 때 정상으로 본다. 그러나 나는 B12가 뇌 기능에 미치는 중요성을 감안하여 사람들에게 항상 500pg/mL 이상 유지하도록 권고한다. B12 수치가 정상으로 나오더라도 500pg/mL 이하인 경우 B12 섭취량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 비타민 D: 비타민 D 결핍은 흔히 나타난다. 비타민 D 결핍은 각종 신경계질환은 물론 피로, 기억력 저하, 치매를 유발한다. 40nmo/L 이상일 때 정상이지만 비타민 D가 뇌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여 60nmo/L 이상을 유지하도록 권고한다.
• 헤모글로빈 A1c: A1c 또는 HgA1c로 불리는 당화 헤모글로빈은 당뇨병 여부를 진단하는 데 필요한 수치다. HgA1c가 6.5퍼센트를 초과하면 당뇨병이다. 6~6.5퍼센트는 당뇨병 전 단계로 보며 6퍼센트 미만은 정상이다.
• 공복 혈당: 100mg/dL 미만일 때 정상으로 본다. 100~125mg/dL이면 당뇨병 전 단계이며 126mg/dL 이상이면 당뇨병이다.
• CRP: 심혈관계의 건강상태를 알려주는 수치로 1mg/dL 미만이어야 위험요인이 없다고 본다. 1~3mg/dL일 때 중등도 위험 수준, 3mg/dL을 초과할 때 고위험 수준으로 본다. CRP 수치가 증가하면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의심해볼 수도 있다.
• 페리틴: 페리틴 수치는 혈액에 철분이 얼마만큼 축적되어 있는지를 알려준다. 남자의 경우 12~300ng/mL, 여자의 경우 12~150ng/mL일 때 정상 수준으로 본다. 12ng/mL 미만일 때 철 결핍성 빈혈을 유발할 수 있다. 페리틴 수치가 높으면 알코올성 간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 테스토스테론: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정상 범위는 300~1000ng/dL이다. 테스토스테론이 낮아지면 성욕이 감퇴하고 발기부전을 겪을 수 있다. 또한 피로감을 느끼거나 활력이 떨어져 집중력도 떨어진다. 테스토스테론 저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흔하게 일어나지만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환자가 많다.
• 혈액검사 수치 이외에도 체중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인치로 측정한 허리둘레를 키로 나눈 허리-키 비율로 정상 체중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인치로 따져 허리둘레가 키의 절반(키×0.5)에 미치지 못해야 정상이다.
반드시 경고 카드를 받아야만 하는 1순위 요인들로는 당뇨병, 고혈압, 수면무호흡증, 심장병, 뇌졸중, 흡연, 불면증, 과체중 또는 비만, 활동량 부족, 영양 결핍, 외상성 뇌 손상과 같은 병력이나 습관이 있다.
몸이 건강해야 뇌도 건강하다
뇌는 우리 몸의 사령부로 활동하는 동시에 다른 장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음은 뇌 기능을 저해하거나 심지어 뇌 크기를 줄일 수도 있는 신체 질환들이다.
• 난청: 난청이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시끄러운 음악을 듣거나 귀의 달팽이관 입구를 틀어막는 형태의 이어폰을 착용할 때 청력에 손상이 갈 수 있다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 시력약화: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그 이외의 전자제품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으면 눈이 피로해지고 그 결과 시력이 약화된다.
• 불면증: 불면증을 당연한 일로 치부하고 간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은 수면 부족이 뇌 기능을 억제하고 뇌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불면증은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다.
• 코골이: 코를 고는 행위 자체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뇌의 산소를 고갈시키고 해마를 크게 위축시킬 수 있는 폐쇄성 수면무호흡증의 신호일 수도 있어 주의를 요한다.
• 의약품: 고용량으로 복용했을 때 인지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의약품들도 있으니 주의하자. 발륨 등 불안증 치료제, 앰비엔 등 수면제, 퍼코세트 등 마약성 진통제, 아미트리프틸린 제제와 같이 과거에 주로 쓰이던 항우울제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 흡연: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암 발병률을 높일 뿐 아니라 뇌를 위축시키고 인지기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 폐질환: 만성 천식, 만성 폐쇄성 폐질환, 폐기종 등이 있으면 격렬한 운동을 하기 어렵다. 그 결과 뇌에 충분한 산소가 공급되지 못하고 뇌 성장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 잇몸질환: 잇몸질환이 있으면 우리 몸의 각 장기에 염증을 일으키고 기억력이 저하되며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커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 갑상선질환: 갑상선기능저하증은 비만과 같이 뇌 건강에 안 좋은 문제점을 여러 가지 유발할 수 있다. 갑상선기능항진증은 초조함이나 피로감은 물론 심부전증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뇌를 위축시키는 요인이 된다
• 심혈관계질환: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병 등은 심혈관계 건강에 해롭다. 심혈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앓을 가능성이 커진다. 뿐만 아니라 뇌에 충분한 혈류가 공급되지 못해 뇌가 급격하게 위축된다.
• 비만: 과체중이나 비만(특히 복부비만)은 뇌를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단기간 내에 인지기능을 떨어뜨리고 결국에는 치매까지 일으킬 수 있다. 체중을 감량하거나 건강한 체중을 유지하려면 식단을 바꾸고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모두 뇌를 성장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 성 기능 장애: 성 기능은 건강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성 기능 장애는 심장병, 당뇨병, 우울증처럼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이나 의약품의 부작용을 알리는 신호라 할 수 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낮아도 성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행복감이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등 정신 건강에 타격을 끼칠 수 있다.
• 빈뇨: 신장, 전립선, 방광에 문제가 있으면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빈뇨는 숙면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특히 밤마다 소변이 마려워 자주 깬다면 방광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수준으로 뇌가 위축된다.
• 폐경: 주로 45세에서 55세 사이에 폐경기가 찾아오는데 그로 말미암아 수면 장애가 생길 수 있다. 또한 뇌에 안개가 낀 듯 몽롱한 상태가 나타나면서 기억력이 저하되거나 사고가 느려지거나 경미한 정신착란증을 일으키는 여성도 있다. 중요한 점은 폐경이 직접적으로 뇌를 위축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요통: 대부분은 통증이 있더라도 견디고 치료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만성 요통은 뇌의 크기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특히 뇌의 경로를 손상시키고 뇌를 위축시킨다고 알려졌다.
• 발목 부종: 부종으로 발목이 붓는 증상은 신장이나 심장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특히 뇌를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알려진 심부전증의 증상일 수 있다. 부종을 치료하려면 그에 선행하는 질환부터 치료해야 한다.
• 비타민 D 결핍: 우리는 피부도 장기 가운데 하나이며 신체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라는 점을 잊는 경향이 있다. 피부와 관련된 문제점 중에서 뇌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비타민 D 결핍이다. 이는 피부를 햇빛에 충분히 노출시키지 않을 때 나타난다. 과도하게 노출하는 것도 건강에 해롭다.
• 팔다리 저림: 당뇨병이 생기면 처음 나타나는 증상이 발가락이 저리거나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당뇨병 역시 뇌를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 우울증: 우울증은 확실하게 뇌를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해마의 크기를 줄이고 인지기능을 떨어뜨린다. 우울증 환자들은 주로 기억력, 집중력, 주의력, 동기에 문제가 생겼으며 의욕을 상실했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우울증을 치료하면 위축된 해마는 불과 6개월 만에 다시 복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불안증: 불안증을 앓으면 불면증, 뇌졸중, 심장마비를 겪을 위험도 커진다. 특히 코르티솔 수치가 늘어나 해마에 악영향을 끼친다. 약물뿐 아니라 명상, 스트레스 완화, 인지행동치료, 신경뇌파치료도 불안증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주의력 결핍 장애Attention Deficit Disorder(이하 ADD): 과다 행동이라는 특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성인에 대해서는 비공식 용어인 ADD가 많이 쓰인다. ADD가 있는 사람은 부주의하고 산만하며 정리정돈을 못하고 건망증이 심하다. 우울증과 불안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뇌파가 정상범위에서 벗어나는 패턴을 띤다. 무엇보다 주의력과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전두엽에서 너무 느린 세타 뇌파가 나타난다. 집중하지 못하는 증상이 별 것 아니라고 간과하기 쉽지만 ADD를 앓는 사람들을 보면 인지기능이 크게 손상됨을 알 수 있다. 다행히 ADD 치료제나 요법은 그 효능이 뛰어나다. 특히 신경뇌파치료는 ADD의 치료 효과를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2/ 내 안에 잠든 천재를 깨우는 4가지 습관
운동
연구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운동이 노인성 치매의 위험을 줄인다는 결과에 주목했다. 그러나 운동을 하는 사람의 뇌에서 정확히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는 최근에서야 밝혀지기 시작했다. 2009년에 발표한 연구에서 에릭슨과 그의 동료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운동량이 많은 노인들이 해마 크기도 더 크다는 점을 입증했다. 연구진이 1년 후 MRI를 재촬영한 결과 유산소 운동을 한 이들의 해마는 1년 동안 2퍼센트 정도 성장했다. 원래 해마는 노화와 더불어 매년 0.5퍼센트씩 줄어든다. 그렇다면 연구 대상의 해마는 4년이나 노화를 늦춘 셈이 된다. 그에 비해 스트레칭 그룹은 평균적으로 전신의 건강상태가 개선되지 않은 것은 물론 해마가 1.4퍼센트 정도 위축되었다. 이는 해당 연령대에서 해마가 위축하는 정도와 거의 일치한다. 이야기는 해마가 커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수많은 연구가 운동을 하면 피질의 크기도 커진다는 점을 입증했다.
연구진은 매주 걷는 블록수에 따라 연구 대상을 분류한 다음 신체검사를 시행하여 그 결과를 검토했다. 그런 다음 9년 후에는 후속 검사로서 MRI를 촬영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연구진은 연구 대상이 인지장애와 치매를 앓고 있는지 검사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1주일에 약 10~15킬로미터 정도로 규칙적인 걷기 운동을 한 이들은 다른 이에 비해 전두엽, 후두엽, 해마 영역의 회색질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증가했다. 또한 1차 검사로부터 13년이 지난 후에 시행된 인지기능 검사에서 인지장애를 앓을 가능성이 훨씬 더 작다는 사실이 나타났다. 운동이 회색질은 물론 백질에 변화를 끼친다는 점은 다른 연구에서도 밝혀졌다. 일리노이대학교의 연구진은 60세에서 79세 사이의 인지기능이 정상인 59명을 대상으로 무작위 임상 시험을 시행했다. 6개월 동안 유산소 운동을 한 이들은 연구가 시작될 때에 비해 전두엽과 측두엽의 회색질과 백질이 증가했다. 반면에 체조와 스트레칭만 한 이들에게서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운동이 뇌를 성장시키는 기전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연구가 진행중이지만, 무엇보다 운동을 통해 BDNF 수치가 증가하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보인다. 이는 특히 해마의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지만 운동이 뇌를 성장시키는 데는 다른 요인도 작용한다. 우선 운동을 하면 심장의 펌프 작용이 활발해져 우리 몸 곳곳에 혈액이 좀 더 효율적으로 전달된다. 그럼으로써 심혈관계 건강이 개선된다. 그에 따라 뇌에 공급되는 혈액량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운동을 하면 ‘좋은 콜레스테롤’로 알려진 혈관의 HDL 수치가 증가하기 때문에 혈액 순환이 좀 더 원활해진다. 동시에 혈관 신생을 촉진한다. 당신이 운동을 하면 뇌혈관계에 새로운 혈관이 만들어지며 그로 말미암아 뇌 곳곳에 공급되는 산소량도 늘어나는 것이다.
일종의 ‘기억 근육’이라고 부르는 해마에서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와 시냅스의 생성을 촉진하고 모세혈관이 가지를 치도록 돕는다. 미토콘드리아가 공급하는 에너지는 뇌의 다른 영역이 활력을 되찾고 손상을 수선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미토콘드리아야말로 궁극적으로 젊음의 원천이라고 본다. 미토콘드리아가 많이 생성되면 될수록 우리가 장수하고 노년기에 명료한 사고력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
운동이 뇌를 변화시키는 기전을 한 가지만 더 알아보자. 운동은 뇌파도 건강하게 만든다. 가장 바람직한 알파 범위의 뇌파 활동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알파 뇌파가 주를 이루면 차분하고 기민하며 집중력이 강화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뇌를 강화시키기 위해 얼마만큼 운동을 해야 하며 어떤 운동이 좋은지 입증하려면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도 격렬한 유산소 운동이 뇌에 유익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걷지 않는 것보다는 걷는 것이 확실히 유리하다. 운동 강도를 높이고 근력 운동을 더하면 더 뚜렷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운동은 BDNF 생성을 촉진하고 산소 공급량을 늘리며 건강한 뇌파가 흘러나오도록 한다. 운동량을 늘릴수록 해마에 형성된 ‘기억 근육’도 커진다. 뇌 성장을 최적화하려면 주 5일, 하루 30분의 격렬한 유산소 운동을 한 다음 15분간 저항 훈련을 하도록 하라.
반드시 운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의사로부터 “아무 문제없으니 운동해도 좋다”라는 진단을 받은 다음 운동을 시작하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적당한 강도의 운동을 선택해 꾸준히 하자.
음식, 제대로 먹으면 똑똑해진다
뇌를 강화하는 데는 무엇보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고 DHA, 몇 가지 플라보노이드flavonoids 및 비타민 등 뇌를 성장시킨다고 알려진 주요 영양분을 추가로 섭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저 브레인 푸드로 각광받는 재료 몇 가지를 더 먹는다든가 보조제 몇 알을 복용하기만 해서는 뇌가 강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비만,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대사질환, 뇌졸중 등 뇌 위축요인을 유발하지 않는 음식만을 섭취해야 한다.
먼저 기본 식단부터 건강하게 구성하라. 지방과 콜레스테롤이 적고 섬유질과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히 함유된 음식과 채소, 견과류, 과일 등으로 구성된 식단이 인지기능의 감퇴를 늦춘다는 사실이 수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러한 식단을 유지하는 사람은 노화와 관련된 인지장애를 앓을 가능성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낮다.
혈액 내 비타민 B, C, D, E의 수치가 높은 사람들은 낮은 사람에 비해 뇌 용량이 더 컸고 기억력 검사에서도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오메가-3 지방산의 수치가 높은 사람 역시 뇌 용량이 더 컸으며 실행기능 검사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생존하려면 염분을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 식단에는 필요 이상의 많은 염분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1일 염분 섭취 권장량은 1500밀리그램이며, 2300밀리그램 이상은 섭취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인의 1일 염분 섭취량은 3400밀리그램을 넘는다. 특히 가공식품과 포장식품의 염분 함유량이 높다. 염분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고혈압, 심장병, 뇌졸중에 걸릴 가능성이 커지므로 결과적으로 뇌가 위축될 수 있다.
뇌 용량이 적으며 기억력, 정보처리 속도, 주의력, 언어력에서 낮은 점수를 얻은 사람들의 혈액에서 보우먼 박사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이 있다. 이들은 주요 비타민과 오메가-3 지방산의 혈중 수치가 낮았고 트랜스지방의 수치가 높았다. 당신도 알다시피 트랜스지방은 불포화지방산으로 자연에도 존재하지만 주로 패스트푸드, 도넛, 대량 생산된 쿠키, 케이크를 비롯한 가공식품에 사용되는 식물성 기름 일부가 수소화됨으로써 발생한다. 트랜스지방은 ‘나쁜 콜레스테롤’인 LDL을 증가시키는 반면 ‘좋은 콜레스테롤’인 HDL을 감소시킴으로써 심혈관계질환에 걸릴 가능성을 끌어올린다. 현재는 보우먼 박사 덕분에 트랜스지방이 뇌의 위축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건강하지 못한 식품은 위와 같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발생하는 문제 이외에도 뇌에 즉각적인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초콜릿 케이크를 허겁지겁 먹고 나면 혈당이 치솟아 일시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사고력이 둔화될 수 있다. 탄수화물이 적고 단백질이 풍부하며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고 뇌를 위축시키는 식품을 멀리하라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가능한 혈당 지수가 높은 음식은 피하라. 그렇게 하면 일시적으로 당뇨병 증상이 나타나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미 항공우주국의 의뢰로 장거리 우주비행용 식량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해조류에 함유된 DHA가 건강 증진에 뚜렷한 효능을 보인다는 점을 발견했다. 일부 어류, 해조류, 보조제를 통해 섭취할 수 있는 DHA는 성인기 뇌 건강과 아동기 뇌 발달에 없어서는 안 될 성분이다. 눈과 심장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우울증, 암, 당뇨병을 예방하는 데도 효능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뇌를 강화하는 다른 요인들과 마찬가지로 DHA도 뇌의 염증을 완화하며,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아밀로이드반amyloid plaques의 크기를 줄인다. 하지만 DHA가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지는 아직까지 단언할 수 없다. 또한 DHA 수치가 낮으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각한 질환과 장애가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어떤 연구에서는 법을 어겨 형을 살고 있거나 행동 장애가 있는 사람들, ADHD 증세가 있는 어린이들, 치매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DHA 수치가 평균치보다 낮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DHA의 경우, 음식물만으로는 필요한 양을 섭취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주 2회 연어, 청어, 넙치, 참치 등 DHA 함량이 높은 생선을 섭취하고 1일 1000밀리그램(어린이는 100~200밀리그램)의 보조제를 복용할 것을 권장한다. 어류에서 추출한 DHA 보조제는 대개 심장 건강에 좋은 EPA도 함유하고 있다. 해조류에서 추출한 DHA 보조제를 복용해도 상관없다. 그 약효는 어류에서 추출한 DHA와 다를 바 없다.
사과 껍질은 다양한 효능이 있어 인기 있는 플라보노이드로 급부상하고 있는 케르세틴quercetin을 다량 함유한다. 케르세틴은 동맥경화반plaque 생성을 막고 고혈압의 위험을 줄인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피로 회복을 돕고 지구력을 증강하는 효능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블루베리에 항산화와 소염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뇌에도 좋다는 사실이 다양한 연구로 입증되었다. 2012년 영국 레딩대학교의 연구진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반 사료를 먹인 쥐에 비해 블루베리가 포함된 사료를 먹인 쥐는 공간기억력이 개선되었고 학습 속도도 한층 빨라졌다. 또한 블루베리를 먹인 쥐의 해마에서 BDNF 수치가 증가했다.
밝은 노란색 가루 형태의 커큐민은 커리 향신료인 강황에 들어 있는 천연 성분으로, 염증을 방지하며 뇌에 공급되는 혈류량을 증가시키는 등 다양한 효능이 입증되었다. 커큐민이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독성 아밀로이드 단백질의 응집을 저해한다는 동물 연구 결과가 있었다. 불행히도 음식물을 통해 섭취하는 커큐민은 혈관으로 흡수시키기가 어렵다. UCLA의 그레그 콜Greg Cole 박사가 이끄는 연구진의 임상 실험에서 커큐민이 인체에서 뚜렷한 효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온 것도 그러한 까닭 때문일 것이다. 연구자들은 커큐민의 흡수를 좀 더 원활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 방법 가운데는 커큐민을 피페린piperine(후추에 많이 포함된 유기 화합물)과 결합시키는 것도 있다. 현재로서는 향신료를 통해 커큐민을 섭취할 것을 권장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실컷 먹으라고 말하는 음식은 드물다. 하지만 코코아만큼은 실컷 먹어도 된다고 권한다. 플라보노이드가 풍부하게 함유된 코코아를 섭취하면 혈압이 낮아진다. 이는 무엇보다 코코아에 혈류를 개선하는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
카페인은 해마의 BDNF 생성을 촉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적어도 쥐 연구에서는 그러한 결과가 나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지방 사료를 먹인 쥐의 해마에서 카페인이 BDNF 수치의 감소를 막거나 오히려 그 추세를 역전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카페인 섭취가 과다하면 초조함, 위장 장애, 고혈압 등의 문제점이 나타날 수 있다.
호두와 피스타치오에는 콜린choline이 풍부하다. 콜린은 기억력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의 생성을 촉진하는 필수 영양소다. 피스타치오는 비타민 E와 오메가-3도 다량 함유하고 있으며 항산화제 역할까지 한다.
적포도의 껍질에는 레스베라트롤이 함유되어 있다. 이는 항산화제 역할을 하는 폴리페놀polyphenol로 뇌에 공급되는 혈류를 증가시키고 동물에게서 BDNF 생성을 촉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토마토는 비타민과 항혈소판 인자를 다량 함유하므로 혈관 흐름을 원활히 하고 뇌에 공급되는 산소량을 늘리는 역할을 한다.
비타민 B12는 8가지로 이루어진 비타민 B군 가운데 하나이며 엽산B9과 더불어 중추신경계가 작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또한 발가락과 손가락까지 이어진 신경의 작용에도 관여한다. 무엇보다 비타민 B12와 엽산은 신경 줄기의 절연체 역할을 하는 미엘린의 생성에 없어서는 안 될 영양소다. 이 두 가지 영양소의 수치가 감소하면 신경세포를 보호하는 기능도 약화된다. 그 결과 신경세포 간의 신호 전달에 차질이 빚어져 인지기능이 저하되며 사고력이 둔화된다. 특히 비타민 B12의 수치가 낮아지면 피로감과 우울증이 나타날 수 있다.
비타민 D가 뼈의 건강에 좋다는 사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뇌에서 일어나는 몇몇 화학작용에도 관여한다. 결핍될 경우 피로감, 우울증은 물론 정신분열증, 다발성 동맥경화증, 치매에 이르는 여러 가지 신경계질환이나 정신적인 문제점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신체 내 비타민 D의 수치가 하락하면 BDNF 수치도 감소하고 피질도 얇아진다.
소염 물질인 비타민 E는 심장마비와 뇌의 염증 방지 등 다양한 효능을 발휘한다. 알츠하이머병의 발병은 물론 진행을 늦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나 최근 비타민 E를 고용량 복용하면 해롭다는 연구 결과도 급부상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보조제를 고용량으로 복용하지 않도록 한다.
수많은 보조제가 뇌를 강화하는 효능이 있다고 광고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광고와 정반대 사실이 입증되거나 아직 효능이 입증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은행나무 추출물과 코코넛유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알코올은 심장 건강에 이로우며 뇌를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HDL 수치를 올리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핵심은 ‘적당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당량은 여성의 경우 1일 1회 제공량(와인 약 110그램, 맥주 약 340그램에 해당), 남성의 경우 2회 제공량을 의미한다. 따라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와인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켜야 뇌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작성한 목록에서 음주는 상당히 낮은 순위를 차지한다. DHA를 보충한 건강한 식생활이 최고 순위이다. 과자와 탄산음료를 해치운 다음 적포도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면 더 큰 손상만 유발할 뿐이다. 특히 ‘적당량’조차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코올로부터 완전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
명상, 마음이 편해야 뇌도 편하다
명상은 베스의 뇌를 성장시키고 인지기능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명상이 끝난 다음 그녀의 머리에 EEG 장치를 부착해보면 뇌파가 주로 알파존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알파 뇌파는 차분하고 집중력과 주의력이 강화된 뇌의 상태를 나타낸다. 몇 주 동안의 훈련을 통해 그녀는 명상 없이도 그러한 뇌파가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명상과 같은 마음 챙김 훈련은 단기간 내에 그 효과를 발휘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뇌파를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한다. 또한 뇌의 구조를 바꾼다는 것도 장담할 수 있다.
알파 뇌파는 차분함, 민첩함, 집중력, 주의력 등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내 뇌는 여섯 살 배기 딸을 재우거나 머리를 쓰다듬을 때 알파 뇌파를 내보낸다. 또한 베스가 명상을 할 때도 알파 뇌파가 흘러나온다. 명상을 하지 않을 때 베스의 뇌에서는 베타 뇌파가 극대화된다. 이는 그녀의 주의가 산만해졌거나 신경이 곤두섰음을 나타내는 신호이다.
일례로 명상은 해마의 크기를 키우고 집중력이나 감정을 관리하는 영역의 시냅스 생성을 촉진한다. 뇌의 도로를 확장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명상은 아직까지 낯설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결코 새로운 기법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명상이 행해지고 있다. 상당수가 신앙 체계의 일부로 시작되었지만 미국에서는 특정 신앙 체계나 종교와 관계없이 단독으로 명상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10분 정도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명상 상태에 깊이 빠지면 그야말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다. 이는 사소한 효과가 아니다. 만성적으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독성이 있는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혈관으로 분비된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줄이는 효과만으로도 명상은 뇌 성장요인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 매일 규칙적인 명상으로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면 독소로부터 뇌를 보호할 수 있다. 그 결과 단기간 내에 뇌 기능이 개선되고 서서히 뇌가 성장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명상은 빠르고 불안정한 베타 뇌파를 억제하고 알파 뇌파를 촉진하여 우리 뇌를 차분하고 집중력이 강화된 상태로 이끈다. 뿐만 아니라 명상에는 뇌의 각 영역이 조화롭게 작동하도록 하는 효과도 있다.
명상이 건강한 뇌 활동을 촉진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해마의 크기를 키우고 BDNF의 생성을 촉진한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에 나왔다. 연구에 따르면 명상은 수면의 질을 개선하며 면역 기능을 강화하고 염증을 방지하는 것은 물론 혈압과 심박수를 낮춘다. 그로 말미암아 심혈관계가 건강해지며 뇌에 공급되는 혈류량이 증가한다.
명상에는 집중력과 감정을 조절하는 효과가 있다.
기도는 뇌 성장을 돕는다. 또한 종교 활동이 사망률을 낮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공동체에 소속되면 예배, 교리공부 모임, 자원봉사 등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기회가 엄청나게 늘어난다. 그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긴장이 해소되며 심지어 환희를 느낀다는 사람들도 많다.
명상을 비롯한 마음 챙김 기법으로 틀림없이 마음이 차분해지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그 효과가 재빨리 사라질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예를 들어 하루 종일 짜증을 내고 비관에 사로잡혀 있다가 30분간 명상을 한다고 해서 뇌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 챙김(명상이나 호흡 훈련을 통한 스트레스 해소)은 BDNF 생성을 증가시키고 심혈관계 건강을 개선하며 건강한 뇌 활동을 촉진한다. 마음을 안정되고 집중력 있는 상태로 유지하면 할수록 뇌가 성장할 가능성도 커진다. 뇌 성장을 최적화하기 위해서는 1일 20분씩 1주일에 5일 명상이나 다른 뇌 이완 훈련을 지속하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지자극 훈련을 통해 뇌가 성장하는 효과는 무엇보다 학습과 기억의 출발점인 해마가 극히 가변적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훈련’을 하면 측정이 가능할 정도로 해마 크기를 키울 수 있다.
스웨덴 룬드대학교의 연구진은 3개월간 1주일에 7시간씩 학습강도가 매우 높게 외국어를 배우는 스웨덴 국군 통역아카데미 학생들의 뇌 MRI를 학습 전과 학습 후에 촬영했다. 연구진이 MRI로 살펴본 결과 해마는 물론 언어와 관련된 피질의 영역이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층 흥미로운 점은 학습량이 많은 학생일수록 해마의 성장 정도도 더 컸다는 사실이다. 특히 남들보다 외국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한 학생은 피질의 운동 영역도 더 크게 성장했다. 어째서일까? 외국어를 학습하려면 모르던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해야 하고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 입과 턱을 반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자연히 운동 기능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지자극 훈련의 효과를 입증하는 흥미로운 연구를 한 가지 더 살펴보자.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의 연구진이 런던 택시기사의 뇌를 MRI로 촬영한 결과 이들의 후방 해마(길을 찾는 능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영역)가 다른 사람에 비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경력이 긴 택시 기사는 동료에 비해 해마가 컸다.
다른 활동을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연구 결과가 있다. 예를 들어 농구선수는 눈과 손의 협응과 균형을 관장하는 소뇌가 성장한다. 수학자는 다른 이에 비해 측두엽이 크다. 골프 초보는 골프에 통달하게 될수록 피질의 감각 운동 영역이 증가한다. 실제로 불과 48시간 동안 골프를 연습한 사람도 MRI로 뇌의 크기가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지자극 훈련
인지자극 훈련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치매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드게임, 독서, 악기 연주, 춤과 같은 인지자극 훈련을 꾸준히 했을 때 치매에 걸리는 위험이 감소하고 노년기에 인지기능이 강화된다는 점을 그간의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한 활동을 꾸준히 함으로써 일생에 걸쳐 뇌의 예비능력이 구축되고 뇌의 크기가 더 커지며 그 기능이 강화된다. 그 때문에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훈련을 운동하듯이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활화하는 것이 한층 바람직하다.
식당에서 식사를 끝마친 후 점원이 음식값을 계산해주기 전에 손으로 써서 계산하거나 암산을 한다든지, 휴대전화에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대신 머리로 기억하는 연습도 좋다. 네비게이션을 사용하는 대신 지도로 길을 찾아라. 당신이 구입한 식품의 금액을 계산 전에 어림셈하는 습관을 길러라. 생각하라! 기회가 생길 때마다 머리를 쓰라.
인지자극 훈련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뇌의 각 영역을 교차 훈련시키는 활동부터 택하는 것이 좋다. 목공일이 대표적인 예다. 가구를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재료를 사용할지, 무슨 가구를 만들지, 어떻게 조립할지 생각하려면 주의력과 집중력을 동원해야 한다. 가구 각 부분의 크기를 계획하고 측정하다 보면 수학 연산을 담당하는 뇌 영역을 사용해야 한다. 도구를 사용하고 목재를 다루려면 손재주, 구성, 주의력을 담당하는 영역에 의존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전두엽, 두정엽, 후두엽이 동원된다. 손으로 하는 일치고는 대단한 효과다.
정기적으로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는 것도 권장한다. 예를 들어 브리지 게임이 인지자극 훈련으로 적합하긴 하지만 1주일에 3시간씩 브리지만 하기보다는 그 시간 동안 새로운 활동을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왜일까? 이는 학습이 강력한 뇌 성장요인이기 때문이다. 기존 시냅스가 강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냅스가 생성되어야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
뇌 영역 간의 교차 훈련 이외에도 인지자극, 신체활동, 사회적인 상호작용 간의 교차 훈련도 바람직하다. 이를 통해 효과가 배가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을 알려면 자전거를 탈 때 얻는 효과를 생각해보면 된다. 자전거 타기는 뇌를 성장시키는 데 좋은 운동이다. 하지만 자전거 동호회에 가입하면 훨씬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동호회 회원 간의 상호작용이 인지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전거 동호회에 가입하여 이동 경로를 계획하는 일을 떠맡는다면 효과는 한층 커진다. 경로를 계획한다면 자전거에 올라타기도 전에 인지자극 훈련을 하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운동과 의도적인 인지자극이 뇌의 교차 훈련에 좋다는 얘기는 너무 당연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가치도 무시하지 못한다. 실제로 일부 인지자극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인 상호작용이야말로 효과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다. 경험봉사단 프로그램을 예로 살펴보자. 남들과 정기적으로 교류하는 데 따른 효과가 얼마만큼 큰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칼슨은 사회적인 측면이 분명 영향을 끼친다고 보며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감정과 관련된 정보는 그렇지 않은 정보보다 기억에 더 깊이 새겨진다. 따라서 오래 저장될 가능성도 더 크다. 다리 붕괴나 학교 총기 난사 등의 사건에 관한 뉴스를 보고 무력감이나 깊은 슬픔을 느낄 경우, 그 사건을 기억할 가능성도 커진다.
또한 해마는 무엇보다 당신에게 적합하거나 특이하다고 간주하는 정보부터 기억한다. 물론 해마로 들어오고 저장되는 모든 정보가 그대로 복구되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도 해마는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지만 피질로 전달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정보만을 취사선택한다. 해마가 어떤 기억은 저장하고 어떤 기억은 망각하도록 즉석에서 판단하고 분류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다행한 일이다. 경험하는 일마다 사소한 세부사항까지 빠짐없이 기억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렇게 되면 기억의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취사선택할 방법도, 기억에 맥락을 부여할 길이 없어진다.
3/ 뇌 나이를 지키는 12주 두뇌 혁명
20~30대
이 연령대에 있는 사람이 기억력이나 인지기능이 감퇴되었음을 호소하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주의력에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이때는 뇌를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놔야 한다. 그래야 현재 인지기능을 극대화하고 앞으로 나타날 노화의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활동이 적합하다.
• 주의력을 강화하라: 주의력 결핍 장애가 우려된다면 전문가의 진단을 받도록 하라. 명상과 간단한 훈련으로 집중력과 주의력을 개선할 수 있다. 주의가 산만해지는 일을 줄이고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날마다 갖도록 하라.
• 장기적으로 뇌 건강에 좋은 습관을 만들라: 이런 습관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까지 효과를 발휘한다. 이를 하루라도 빨리 일상화해야 효과도 더 커진다. 양치질하는 습관을 들였듯이 뇌에 좋은 음식을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며 허리-키 비율에 신경 쓰고 숙면을 취하며 뇌를 자극하는 일을 습관으로 만들라.
• 건강한 정신을 가꾸라: 자신한테 적합한 스트레스 해소 전략을 모색하라.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날마다 그러한 목표를 향해 조금씩 전진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도록 한다. 예를 들어 변호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면 관련 과목을 수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만족감을 느끼도록 하라.
• 뇌를 손상시키는 질병을 치료하라: 수면무호흡증,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기타 혈관 위험요인이 있거나 의심되는 사람은 꾸준히 치료받아 위험 요소를 줄여야 한다. 이러한 질병의 영향은 계속 축적되기 때문에 방치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뇌에 입는 손상도 커진다.
40~50대
일반적으로 여성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 사이에 폐경을 겪는다. 폐경기에는 일시적으로 뇌에 안개가 낀 듯 몽롱한 상태가 나타나고 기억력과 주의력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 남성 역시 이 시기에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떨어지므로 기억력이 저하될 수 있다. 또한 노화가 진행되면서 뇌를 위축시키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이때는 기억력이 깜박깜박하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연령대인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활동이 적합하다.
• 신체 활력을 유지하라: 마라톤을 하거나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해도 무방한 연령대다. 하지만 굳이 격렬한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도보 산책 모임에 참여하거나 춤을 배운다거나 테니스 실력을 높이는 활동이면 충분하다.
• 정신 건강을 유지하라: 배우자, 직장동료, 자녀 등과의 관계가 건전한지 확인해야 할 때다.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고 그러한 관계에서 만족감을 얻는다면 알파 뇌파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요가나 명상, 호흡 훈련을 시도하라.
• 잠을 충분히 자라: 노화가 진행됨에 따라 수면 장애를 겪기 쉽다. 수면부족을 일상화하는 생활환경을 조성하지 않도록 한다. 예를 들어 매일 밤 9시까지 일을 하고 아침 5시에 일어난다면 수면 부족이 되풀이된다. 반드시 7~8시간의 숙면을 취하도록 하라.
60대 이상
노화와 더불어 갖가지 만성질환에 걸릴 가능성도 커진다. 그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뇌 노화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다. 그러한 영향을 상쇄하려면 다음과 같은 활동이 적합하다.
• 신체 활력을 유지하라: 뛰어난 스포츠 실력으로 동년배를 놀라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상적인 노화의 일환으로 몸이 둔화된다. 걷기, 수중 에어로빅, 춤 등 당신에게 잘 맞는 운동을 찾아 열심히 하라!
• 건강을 유지하라: 건강상태를 꾸준히 관찰하고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심장질환 등의 지병이 있다면 의사와 상의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 또한 노년기에는 몇몇 영양소를 흡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인지기능에 타격을 끼칠 수 있는 요인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신경 써야 한다. 예를 들어 갑상선 기능이 저하되면 비타민 B12와 D의 흡수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 DHA를 복용하라: DHA는 모든 연령대에 중요한 영양소이지만 노화가 시작한 된 이후에는 한층 중요성을 띤다.
• 활발한 사회활동을 유지하라: 요즘에는 인생은 60부터가 아니라 80부터라고들 한다. 그러한 추세를 반영하듯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노인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부담이 없으므로 시간적, 재정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사회활동을 극대화할 여건이 갖춰진 시기다. 새로운 추세에 동참하여 그룹여행, 요리 강좌, 소셜네트워킹 등의 활동을 시작하라.
스트레스, 이렇게 풀자
• 미리 계획하라: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이나 종이플래너를 구입하여 일간 계획과 주간 계획을 미리 기록한다. 나는 새해 첫날에 시간을 내어 그 해에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 10가지를 정한다. 매달 첫 번째 일요일에는 그 달에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정한다. 또한 매주 일요일에는 그 다음 주에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15분 동안 기록한다. 매일 아침, 5분 동안 그날 마쳐야 할 일들을 적는다. 이러한 일간 계획은 주간, 월간, 연간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을 미리 파악하는 것은 스트레스 지수를 크게 낮추고 무리한 일정을 짜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 거절하는 법을 배우라: 다른 사람이 도와달라고 부탁할 때마다 쉽사리 응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남의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따라서 부탁을 거절할 수 있어야 스트레스도 줄어든다.
•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노출을 최소화하라: 스트레스 차트도 도움이 되지만, 결국에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태도를 바꾸라: 스트레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상황을 큰 틀에서 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도록 노력하라. 살다 보면 어떤 일은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도록 수련하라. 자주 웃으라.
• 행동으로 옮기라: 아프리카의 기근이 걱정되거나 세금을 과도하게 납부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직접 나서도록 하라. 편지를 쓰거나 기부를 하거나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다. 사소한 행동이더라도 실행에 옮기면 불안감으로 점철된 생활 패턴을 깨는 데 도움이 된다. 상황을 주도하는 데서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다. 부정적인 생각을 되풀이하다 보면 마음만 괴로울 뿐이다.
• 자기 성찰을 행하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정신없이 이 일 저 일을 처리하다 보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는지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몇 주에 한 번씩이라도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내가 지금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내게 맞는 일은 무엇이며 맞지 않는 일은 무엇인가? 내게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러한 일을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ABC 기법을 이용하여 태도와 감정을 바꾸도록 노력하라.
• 스트레스가 통제 불가능한 수준이라면 도움을 받으라: 스트레스가 과중하거나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 불안 장애 등이 우려되는 상황이라면 의사의 진찰을 받으라.
뇌졸중, 이렇게 예방하라
• 고혈압을 예방하라: 고혈압은 뇌졸중의 가장 중요한 위험요인이다. 따라서 반드시 자신의 혈압을 파악하고 정상 범위 내로 유지해야 한다.
• 2형 당뇨병을 예방하라: 당뇨병은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등 다른 위험요인과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자체로도 심각한 뇌 위축요인이다.
• 혈관 흐름을 원활히 유지하라: 고지혈증은 온몸의 동맥을 경화시켜 뇌로 향하는 산소의 흐름을 방해한다. 자신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확인하고 HDL와 LDL 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서로 알아가기도 전에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라고 숙덕대곤 했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은 여러분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원형 경기장에서 죽음을 앞둔 "퍼피투아”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과 입을 맞추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되세요?
우리 중 누군가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면서 “영혼이 육체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세상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에 대해 말할 때 어떻게 표현하시나요?
p26
우리 초대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은 예배가 매력적이어서가 아니고, 사람들을 예배에 초청하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능력과 사회적 일탈 행동이 저희의 교회를 성장하게 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왜 성장하나요?
여러분의 교회에는 '생명을 주는 일탈' 행위가 어떤 것이 있나요?
여러분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나요?
p42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삶에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류와 화해하시고 인류를 회복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해되고 생동감을 느끼게 된 사람들의 삶 안에는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삶이 생동감이 있고 자유로울 때, 자신의 소유를 나누며 원수를 사랑하고,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을 품고 살아가거나 죽어 가는 모습 속에서 그런 매력적인 힘이 발현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해 주면서 생명을 전하는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p59
저희를 보고 말이 별로 없다고들 하더군요. 그리고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을 전하라고 권유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르게 사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저희는 가난한 분들, 버려진 아이들, 혼자 된 분들이 늘 마음에 있습니다. 그분들이 예수님처럼 보여서요.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가요?
저희는 '위대한 것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것을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교회의 설교는 그리고 삶은 어떤 모습인가요?
p60
지난 부활절에 우리 교회에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분은 우리 교회 가족이 되었지요. 그분은 세례를 받기 전 3년 이상을 우리 교회지도자 그리고 인도자와 만났답니다. 여러분 교회의 새 가족 허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위에서 말한 새 교우가 세례를 받기에 합당한지에 대한 질문은 그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인도자에게 물었고, 그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세례 후보자가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가고 있나요? 그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지속해서 섬기던가요? 모든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운가요?" 여러분의 교회는 세례 전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하나요?
여러분은 믿음과 행동 그리고 소속감은 어떤 연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믿음이 있으면 행동이 좀 부족해도 교회의 일원이 되고 교회의 일원으로 지내다 보면 삶이 변한다고 생각하시나요?
p78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
김규항의 '예수전'이 온전히 예수의 인성에 대해서 썼다면, 팀 켈러의 '예수, 예수'는 온전히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 썼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다루고 있다. 마태복음을 읽고, 두 책 '예수전'과 '예수, 예수'를 비교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예수, 예수'는 세상에 하나님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가 태어난 '성탄절', 크리스마스에 대해 바로 안다면 기독교의 근간인 복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크리스마스와 예수 탄생의 참뜻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1~ 4장까지는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알아보고,
5장부터 누가복음 중심으로 우리가 그 선물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
" 크리스마스란 하나님의 은혜와 성육신을 통해 그분과 화평해질 수 있고, 일단 그분과 화평해지면 밖에 나가 다른 누구와도 화평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복음을 받아들여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된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를 통해 온 세상에 평화가 증대된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들끼리도 서로 화목해진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짐으로써 마침내 지신의 흠과 약점을 인정하는 법, 자존심을 버리는 법, 굳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릴 수 있는 방법.
1. 불화 자체를 인정한다.
2.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3. 그리스도께서 해 주신 일만 믿고 기존 생활 방식에서 돌아선다. 주님의 주권에 대한 자신의 저항을 마침내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 주신 일만 믿고 기존 생활 방식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이다.
5장 ~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누가복음 1장 예수님의 어머니의 마리아를 믿음으로 반응하는 수도인의 본보기 삼는다.
1) 잘 들어야 한다.
영적으로 잘 듣는 법
(1) 음성을 전달하는 메신저의 실력에 너무 한눈을 팔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매체가 곧 메시지는 아니다. (발람의 나귀 ) 메신저의 결점 때문에 보화를 놓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생각하라.
이는 숙고한다는 뜻이다.
단순해 보이는 말도 깊이 묵상하면 다차원의 의미와 끝없는 개인적 적용을 캐낼 수 있다.
(3). 마음에 새겨라.
생생히 간직하거나 음미한다는 뜻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려 한 게 아니라 내면 깊이 받아들여 즐기고 누렸다. 마음에 새기는 일은 기술이라기보다 태도다.
2) 하나님과의 화목
평화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이 땅에 평화가 없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과 죄인들이 화목하게 된다"라고 선포한다.
3)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가까워질 때마다 병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했다.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누리고 있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 그분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우리는 두려움에 가득 차고 공포에 지배당하게 되었다.
4) 복음을 바라보라.
시간을 들여 복음의 메시지에 담긴 내용을 파악하면 그동안 당신 삶을 어둡게 지배하던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복음은 구주가 나셨다는 사실이다. 그분을 당신의 구주로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그분께 맡길 수 있는 답은, 어린 아기가 능하신 그리스도 주라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아들이 당신을 위해 철저히 통제권을 잃으셨으니 당신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그 결과 두려움이 점차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크리스마스를 보라. 그분이 하신 일을 보라. 당신이 그것을 보고 깨닫고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는 정도만큼 두려움이 물러가기 시작할 것이다.
결론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영적 빛과 깨우침이 왔다는 것, 우리가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화평을 누린다는 것이다. 일단 그분과 화평해지면 밖에 나가 다른 누구와도 화평해질 수 있다. 크리스마스를 통해 온 세상에 평화가 증대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속성을 입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주신 위해 한 선물이다.
"때때로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평범한 통로로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작아져 한 뼘 인간이 되신 신비"를 세상은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은 거창한 볼거리를 원한다.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도 평범하고 흔한 통로로 왔으나 세상은 이를 몹시 비위에 거슬려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상한 행위와 성취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행위로 시작된다. 바로 겸손히 구하는 일이다. 그러면 시간이 가면서 우리 안에 생명과 기쁨이 자라는데 역시 평범하다 못해 거의 따분한 실천들을 통해 자란다. 매일 순종하는 것,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 예배에 참석하는 것,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와 이웃을 섬기는 것, 환난 중에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이다. 기쁨의 통로가 평범하다 해서 거기에 구애받지 말라. 그 평범한 속에 복음의 비범한 풍요로움이 숨어 있다. 사실을 기억하라. "
나는 뭐(직업)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직업을 소명과 동일시 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고 유일한 청중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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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명: 궁극적인 존재 이유
제 대신 다른 사람이 결코 해줄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해서 그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문제는 우리 인생의 모든 계절에 걸쳐 무수한 모습으로 떠오르게 마련이다.
현대인의 고민은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삶의 목적은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한 상태에 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 당신의 인생의 중심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길이다.
2/ 진정한 추구자는 그 어디에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찾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추구를 주도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를 그분께로 나아가게 해서 추구를 완성시키지 않는 한 우리의 추구는 항상 부족한 것이 될 뿐이다.
3/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즉,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체질화된 존재’이기보다는 ‘부름받은’ 자들이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우리를 개개인으로 보고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말한다. 즉, 우리를 독특하고, 특별하고, 고귀하고, 중요한, 아울러 자유로이 반응하는 존재로 대한다.
“지금 우리가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몰아내고 그분이 우리를 취하시게 할수록 우리는 더욱 진정한 자아가 되어 간다.” 다른 대안은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그분께 저항해서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 칠수록, 나는 물려받은 유전과 성장 배경, 환경과 자연적인 욕망에 더욱 지배당하게 된다.
4/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
소명에 대한 성경적 개념의 네 요소:
첫째, 소명은 단순하고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소명(부르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둘째, 구약 성경에서 소명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만들거나 존재하게 한다는 뜻이다.
셋째, 소명은 신약 성경에서 더욱 특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것은 구원과 거의 동의어이다. 이런 맥락에서, 소명(부르심)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도록 그분에게로 부르신다는 의미로 사용된 예가 압도적이다.
넷째, 소명은 신약 성경에서 또 다른 중요하고도 확장된 의미를 갖는데, 이는 후대의 교회 역사에서 더욱더 꽃을 피우게 된다. 더 깊은 차원에는 제자도가 있는데, 이는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에서’를 내포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자연스럽고도 합당한 반응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일차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이차적인 소명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정주부나 법조인으로 혹은 교직으로 부름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이 이차적인 소명으로서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가 소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첫째 자리를 지키도록, 즉 일차적인 소명이 항상 이차적인 소명 앞에 오도록 분명히 해야 한다.
종종 소명의 총체적인 성격이 왜곡되어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영적인 것을 격상시키는 일종의 이원론이 되었다. 이런 왜곡을 ‘가톨릭적 왜곡'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가톨릭 시대에 발생했고 지금도 가톨릭 전통의 주류 입장이기 때문이다. ‘개신교적 왜곡’도 일종의 이원론을 낳았는데 이번에는 영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세속적인 것을 격상시켰을 뿐 아니라 후자를 전자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만약 신자가 하는 모든 일이 믿음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진다면 모든 이원론적인 구별은 무너진다. 고차원/저차원, 성스러운/세속적인, 완전한/허용된, 관조적인/활동적인, 일등급/이등급의 구별이란 더 이상 없다. 소명이란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일차적인) 부르심에 대한 반으로써 자신의(이차적인) 부르심을 성취하는 것이다.
소명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교회뿐 아니라 종교개혁이 일어난 국가들의 세계관과 문화를 변혁시켰다. 소명은 ‘재능(달란트)’의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을 순전히 영적인 은사로만 보지 않고 현대적인 의미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보게 만들었다.
5/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만을 위한
“당신도 내가 하는 일에 온통 정신을 쏟아붓는다면 금방 그만두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정신은 딴 데 둔 채 일하는 거죠. 내 정신은 내 일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데 - 일을 수입원으로 생각하는 것만 제외하고는 - 이것은 정말 부조리한 것입니다.” 터클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발견한 것은, 일이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애쓰며 매일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왓슨은 이상을 품고 시작했다 - 일찍 일하러 가서 늦게까지 남아 있고, 주어진 과제마다 110%씩 일하고, 더 많은 일거리를 요청하고 …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곧 난파하여 항로에서 이탈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만큼이나 유능하고 생산성 있는 사람들도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고 그 결과 생산성이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왓슨은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했는데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발견을 했다. “놀랍고도 부조리한 사실이지만, 내가 더 이상 일을 잘 하려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자 사람들이 내 속에 있는 어떤 권위 같은 걸 알아채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나는 굉장히 잘나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양심이 한 쪽 귀에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위도식하면서 봉급만 받아먹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자기 일에 대한 노라 왓슨의 고통 섞인 토로는 사회 계층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나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을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니다. 전자에게는 이러한 분석 자체가 사치스럽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그런 분석이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그들은 대게 만족스럽게 일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일이든 어떤 유의 일이든 깊은 소명 의식이 없다면 결코 만족감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소명’ 자체도 누군가 부르는 자가 없다면 공허할 뿐이며 일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인격적 신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소명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직업을 다음과 같이 재정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해야 할 어떤 일을 하도록 부르는 것, 곧 소환하는 것”이다. “일 중독자는 알코올 중독자와 같이 무차별적인 강박 관념을 갖고 있다. 그런 사람은 일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이에 비해 소명감을 지닌 개인은 의미 있는 일을 찾는다.”
개신교적 왜곡은 세속적인 것을 영적인 것과 완전히 단절시키고, 소명이란 용어를 일을 대치하는 하나의 용어로 축소시켜 버렸다. 존 칼빈의 경우 소명을 일과 거의 동일시한 것은 사실이다. 마틴 루터의 경우, 신자가 자기 일을 하는 중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라 한 데 비해, 칼빈은 때때로 더욱 담대하게 소명과 일을 동일시하곤 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에 따르면,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은 ‘세상적인 소명’(worldly calling)을 ‘세상에 저항하는 최종적이고도 과격한 항거’라고 여긴 데 반해, 개신교 개악자들은 그것을 세속성에 대한 종교적 재가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값비싼 은혜가 제자도 없는 값싼 은혜로 변질되었다.” 이 개신교적 왜곡의 재앙에서 회복될 길은 있는가? 먼저는 부르는 자(caller)를 배제시킨 소명의 개념을 뒤엎고, 다음으로 일차적 소명의 우선순위를 회복해야 한다. 부르시는 분이 없다면 소명도 없고, 단지 일만 있을 뿐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일차적인 소명을 우선 위치로 복귀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소명의 배경이 되는 예배를 회복하고 또한 소명의 핵심인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일을 너무나 즐기고 좋아하고 사실상 일을 예배하는 나머지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 중심에서 밀려나지는 않는가? 우리는 섬기는 활동이나 유용성, 하나님을 위해 생산성 있게 일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그분 자체를 잊어버리는 않는가? 우리는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애쓰고 있지는 않는가? 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우리의 이름을 장차 길이 남기기 위해?
우리는 특별한 일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름받았다.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다른 어떤 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것이다.
6/ 당신에게 걸맞은 일을 하라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 중 너무나 많은 부분을 일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직업이 우리의 정체성을 부여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에 걸맞은 인물이 되어 간다. 그러나 소명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뒤집어엎는다. 소명 의식은 직업 선택에 선행해야 하고, 소명을 발견하는 길은 우리 각자가 창조될 때 부여받은 재능을 분별하는 것이다. 소명은 “당신의 존재는 당신이 하는 일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존재에 걸맞은 일을 하라"라고 말한다. 대주교 윌리엄 템플은 진정한 소명감 없이 이기적인 동기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아마 젊은이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많은 시간과 힘을 하나님께 충성하는 방향에서 고의적으로 이탈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능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재능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재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청지기’일뿐이다. 우리의 재능은 항상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이다.
현재 우리의 소명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일을 발견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축복이다. 현대 사회에서 중,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소명과 일이 서로 조화되어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현대인은 일과 소명 간의 만족스러운 조화를 맛보지 못한다. 일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당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단 한 문장으로 기술할 수 있는가? 이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당신의 소명도 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없다. 기껏해야 소명의 일부분만이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부분적인 것마저도 명료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한계를 갖고 있다.
솔제니친이 다른 러시아 작가를 인용하여 내린 결론은, 항상 간단명료한 소명을 동경해 온 모든 이에게 큰 격려가 된다. “많은 인생이 신비로운 의미를 갖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바로 읽어 내는 것은 아니다. 대개 그것은 은밀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우리는 그것을 해독하지 못할 때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절망에 빠져 버린다. 위대한 인생의 비밀은 대개 자신에게 주어진 신비로운 상징들을 해독하고 이해하며, 그래서 참된 길로 걷는 법을 배우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7/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전
요즈음 상황에서 교회가 직면한 가장 깊은 차원의 도전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의 도전이 아니며 군사적인 도전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영적이고 신학적인 도전인데, 그것은 무엇보다 믿음을 행위로 표현하며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교가 주도하는 각각의 위대한 문명이 인류를 위한 최상의 비전을 제시하겠노라고 경쟁하는 이상 우리에게 흐리멍덩한 사고와 미지근한 삶은 마땅치 않다.
8/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 되게 하라
하나님의 일차적 부르심, 곧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항상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소환과 초청, 율법과 은혜, 요구와 공급이 그것이다. 틀림없이 전자가 먼저 오게 마련이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 측면을 놓치고 있다. 그 결과 가벼운 신앙을 가지고 아무렇게나 행동하게 되는데, 그런 모습에서는 갈보리는 차치하고라도 시내산이나 갈릴리에서의 부르심을 경청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현대의 힘과 이익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할 때에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현대 세계에서 결정적인 권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때 그분의 소환에 너무나 강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루터와 더불어 “여기에 내가 섰노라, 나는 이 밖에 할 수 없노라” - 이것이 최초로 인쇄된 것을 보고서에 덧붙여 있다 - 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9/ 유일한 청중
하나님의 결정적인 소명에 귀 기울이면서 산 인생은 다른 모든 청중을 밀어내는 단 한 분의 청중 - 유일한 청중(the Audience of One) - 앞에서 살아 낸 인생이다.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사는 삶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격려를 받지 못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자이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는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제일 못한 일만 드러나 크게 불평하게 될 것이다.”
10/ 불꽃같은 인생
하나님의 소명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면서 “우리의 눈을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
11/ 책임성: 과연 누구에 대한 책임인가?
소명에 응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책임성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책임성의 다른 이름은 순종이다. 우리에게는 부르시는 분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부주의한 침묵, 거룩한 침묵 혹은 절박한 침묵을 변명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미 부르심을 들었고, 따라서 우리의 책임성을 인정하고 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하나님만 제외하고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책임성에 대한 테스트인 것이다.
12/ 소명의 사람들
우리의 공동체적 소명에 헌신한다는 것은 현대의 임의적인 개인주의 성향에 단호히 저항해야 함을 뜻한다.
우리의 공동체적 소명에 대한 헌신은 모든 개인적인 소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적과 유익을 존중해야 함을 뜻한다.
우리가 공동체적 소명에 헌신한다는 것은, 개혁은 지속되어야 하며 심지어는 개혁을 개혁하는 것도 필요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13/ 그 도를 따르는 자들
소명이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도달한 자가 아니라 이 생애 동안 항상 ‘그리스도의 추종자’요 ‘그 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란 사실이다.
소명이 그 성격상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좇아갈 때에만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이다.
소명은 ‘그 도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을 하나의 여정으로 보는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인생을 여정으로, 믿음을 여행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소명이 분명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우리는 각각 그 여정의 다른 단계에 와 있으며, 살아 있는 한 아무도 최종 목적지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망각하여 인생을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모든 것을 흑백으로 분명히 나누고 정확하게 이름 붙일 수 있으며 최종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 편이고 다른 사람은 아니며, 누군가는 이미 도달했고 다른 이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땅 위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순례길을 걷는” 자들이다.
루이스는 [피고인석의 하나님 God in the Dock)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심술궂은 어떤 노파의 경우를 보자. 또 한 번도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지만 쾌활하고 인기 좋은 남자를 예로 들자. 만약 그 노파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심술궂은 사람이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그 남자가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얼마나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당신은 이 두 사람에게 나타난 결과만을 비교해서 기독교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경우에 그리스도께서 어떤 원재료를 가지고 일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소명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모두 각기 다른 단계에 위치해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한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음을 알려준다.
14/ 고상한 미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
소명의 이면에는 자만심의 유혹이 있다. 나는 선택받았어. 내는 재능 있는 인물이야. 나는 정말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당신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소명의 경이감이 무서운 자만심으로 자라난다. 자만심과 허영심은 깊은 소명 의식을 지닌 사람들에게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영적인 삶에서 최악의 저주는 자만심이다”라고 썼다. 자만심은 두 가지 특징적인 방법으로 소명을 왜곡시킨다. 첫째, 부름받은 사람은 소명 자체가 매우 고상한 것이기 때문에 자존심에 특히 약하다. 둘째, 부름받은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자존심에 특히 약한데, 그 이유는 군중의 인간적인 칭찬을 단념하고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살려는 소원 때문이다. 물론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우리가 그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면서도 그 청중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일 때이다.
우리 각자 속에 있는 자존심이라는 죄, 즉 홀로 스스로를 뽐내는 단단한 ‘자아’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뿐이다. 그런데 좋은 소식은 그런 은혜가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5/ 네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 자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재능뿐 아니라 우리가 성취하기를 갈구하는 깊은 욕구를 알아야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욕구가 그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것이 아닌 이유는 우리에게는 의식적으로 갖는 선한 욕구와 함께 잘 의식하지 못하는 저급한 욕구도 있기 때문이다.
질투는 사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이고, 당신의 재능과 소명의 영역에서 가장 심한 경쟁 관계에 있는, 즉 가까운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결국 질투는 자기 파괴적인데, 그 이유는 질투하는 자가 즐길 수 없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한 사람식 부르신다. 비교는 부질없는 짓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억측은 시간 낭비이며, 질투는 어리석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부름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책임이 있으며, 그분만을 기쁘시게 해야 하며, 결국에는 그분으로부터만 인정받게 되어 있다. 우리가 혹시라도 유혹을 받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서로를 비교하면서 남의 진보를 우리 자신의 소명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한다면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 역시 듣게 될 것이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나를 따르라!”
16/ 더 많이, 더 많이, 더 빨리, 더 빨리
우리가 돈과 소유를 추구하게 되면 그 추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으로 자라나서 탐욕을 부추기는데, 이는 성경에서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된 것으로, 또 현대에는 일종의 ‘중독’으로 묘사하게 된다.
소명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매 순간 즉각적이고 결정적으로 돈과 시장을 뛰어넘는 권위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돈으로 보상받기 때문이 아니라 부름받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이다. 상업의 길과는 정반대로, 소명의 길은 하나님을 위해서 혹은 하나님 아래에서의 인생 자체를 위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의 만족이 급여, 승진, 인정 등과 같은 외형적인 보상보다 더 중요하다.
17/ 나태함이란 이름의 질병
나태함은 진, 선, 미의 본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추구를 포기한 상태, 곧 노골적인 영적 낙담 상태를 의미한다.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의 가치에 대해 내적으로 낙담한 상태로서, 결국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식의 자포자기적인 태도로 빠져들게 된다.
현대적인 나태함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상태 - 따라서 영원과 불멸에 대한 신앙도 상실한 - 는 삶 자체의 생명력이 고갈된 상태로 치닫게 된다. “현대인의 비극은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 아는 것이 점점 더 줄어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 자체에 대해 점점 더 관심이 없어지는 데 있다.” 편리함과 안락함, 소비주의의 세계, 삶이 안전하고, 쉽고, 호화롭고, 최신 설비를 갖추게 되면 나태함이 가까이 오게 마련이다.
실패로 점철되는 중년의 위기, 애초에 할 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것보다 더 굴욕적인 경험은 없다. 진정한 중년의 위기는 보통 세 가지 매우 다른 욕구 사이의 긴장으로 말미암는다. 성공적인 경력, 만족스러운 일, 풍성한 개인적 삶 등에 대한 욕망이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 외적인 이유 - 봉급이나 사회적인 지위, 부모 및 동년배의 압력 등 - 때문에 직업을 선택한 경우, 나중에 그 일이 내적인 이유 - 우리의 재능과 소명 - 와 걸맞지 않는다면 상당한 좌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소명과 직업(경력) 간의 모순은 어떤 경우든지 우리를 부적임자로 낙인찍어 버린다. 이로 말미암는 중년의 위기는 매우 혹독할 수 있으나 그것은 또한 위기만큼이나 기회로 판명되는 경종일 수도 있다. 소명에 따른 직업이 충족스러운 만큼이나 소명을 거스르는 직업은 좌절감을 안겨 준다.
우리는 우주의 창조주에 의해 개인적으로 부름받은 만큼 우리가 하는 일 속에서 우리 삶의 매 순간과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의미를 발견한다. 또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도전받고, 감동되고, 책망받고, 격려 받기 때문에 한순간이라도 편안하고, 미지근하고, 진부하고, 지루한 것에 안주할 수 없다. 그 소명은 항상 더 높고, 더 깊고, 더 먼 곳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속 깊은 재능과 열망에 눈을 뜬 이상, 직업보다 소명을 항상 먼저 고려해야 하고, 오직 소명의 관점에서만 가장 깊은 만족감을 추가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18/ 창문이 있는 세계
소명은 세속화를 지향하는 거대한 현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영적인 훈련에 정진하고 초자연적인 실제를 경험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대 세계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 없이도 ‘잘 굴러간다’. 심지어는 그분의 교회에서도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 현대인은 명백히 종교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속 깊은 차원에서는 세속적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지중에 사실은 무신론자인 이유이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실제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무신론자이다. 그들이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실제적으로는 초자연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일상적인 삶은 우리 자신을 중요한 인물인 양 치켜올리고 타인 의존적인 생각과 행동 패턴으로 몰아넣는 반면, 고독은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함으로써 그러한 올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일’과 ‘여가’를 정반대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일은 심각한 것이고 여가는 노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일은 지겹고 여가는 재미있다고 말한다. 일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고 여가는 무상의 놀이라고 생각한다. 일은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여가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보다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은, 현대 세계는 일과 여가를 너무나 이상하게 뒤섞어 버린 나머지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일을 예배하고, 노는 중에 오히려 일하며, 예배 중에 오히려 노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당신은 창문 없는 세계에 살고 있지는 않는가?
19/ 신앙의 세 가지 관점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모든 영역의 주님이심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유화 privatiazation를 강요하는 현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소명은 오늘날 공정인 삶의 영역에서 믿음을 위협하는 죽음의 삼각 함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
사유화란, 현대화가 삶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갈라 놓고, 사적 영역을 개인의 자유, 성취, 믿음이 작동하는 특별한 장으로 강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사유화된 자유의 결과는 제한되어 있으며 또한 제한시키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례 없는 자유가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에 한정된 자유일 뿐이다. 사유화된 신앙은 총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서구 그리스도인의 문제점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마땅히 지녀할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베드로의 배를 빌린 다음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베드로는 억지로 순종했는데,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삶 전체의 주님이시다. 그분의 소명에 응답하는 것은 설교뿐 아니라 고기잡이의 세계에도, 물가뿐 아니라 호수 깊은 곳에까지 미친다.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 심지어는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는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이 요구에 비추어 점검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최근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으로 두드러지게 행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신자들은 여전히 사유화된 울타리에 갇힌 채 삶의 모든 부분에 걸쳐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 부름받은 만큼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항상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정당 노선 - 혹은 정치 운동, 강령, 의제 등 - 에의 동조 사이의 긴장 관계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정치 운동과 너무나 밀착되어 기독교적 차별성을 상실하면 교회는 죽음에 이르는 포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자기 나름의 별도의 영역과 기관 - 그것이 대형 교회든, 기독교 사업이든, 기독교 인터넷 회사든 - 에 집중할 경우 보음의 핵심에 있는 외향적인 변화의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당신의 믿음은 집에서만큼 일터에서도 일관성 있게 작동하는가?
20/ 일편단심으로 사는 인생
페르디난드 마젤란 총사령관은 남아메리카를 돌아가는 길을 최초로 발견했고 - 그곳이 ’마젤란 해협’이다 - 최초로 지구 전체를 (거의) 일주 했으며, 위대한 탐험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탐험가가 된 그는 역사상 가장 강한 의지를 지닌, 일편단심의 인물 중 하나였다.노 놀라운 사실은 마젤란이 자신의 진짜 동기를 스페인 왕궁의 후견인들에게조차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후견인들의 근본 동기는 이익이었고 그의 동기는 발견이었다. 그들은 그 항해에서 향료를 획득하여 부유해지려 했다. 한편 마젤란은 아메리카를 돌아가는 길을 통해서 지구를 한 바퀴 항해함으로써 세계가 둥글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마젤란의 배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마젤란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기함이었던 트리니다드호는 폭풍에 파선되었고, 다섯 척의 배 중 마지막으로 남은 빅토리아호만이 26톤의 향료를 싣고 절뚝거리며 고향 세빌로 귀향하였다. 처음에 승선했던 승무원 265명 가운데 불과 18명의 유령 같은 생존자만이 62,900km에 달하는 세계 일주 항해를 완수했다. 그들이 이룩한 것은 기적이었다고들 말한다.
소명은 다원화를 강요하는 현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 힘겨운 시대에 중심 잡힌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우선순위와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원화 pluralization란 선택과 변화의 확산이 선택안의 수를 급속히 배가시키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사적인 영역의 모든 차원 - 소비재로부터 대인 관계 그리고 세계관 및 신앙에 이르기까지 - 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과중한 짐에 치이고 포화 상태에 이른다. 할 일은 너무 많은데 시간이 너무 없다. 하지만 삶의 쳇바퀴는 계속 돈다. 소명은 그 자체로 파편화에 반대하는 특성이 있으며, 중요한 지점에 힘을 가함으로써 이 포화된 세상에서 중심 잡힌 삶을 살도록 길을 열어 준다. 첫째, 소명은 선택을 숭배하는 현대의 치명적인 우상을 전복시킨다. 우리가 부름받은 이상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둘째, 소명은 우리 인생에 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파편화되고 혼돈스러운 현대 세계 속에서 연속성과 일관성을 의식하게 해준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소명을 좇아가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불확실하고 혼란스럽더라도 그리스도의 소명을 좇으라. 그리하면 당신은 인생의 줄거리를 갖게 될 것이다. 셋째, 소명은 우리가 광적이 되지 않고도 일편단심의 자세를 갖도록 돕는다.
소명 의식은 당신의 삶에서 궁극적인 나침판인가? 1941년 에리어트(T. S Eliot)는 “인생이 단 하나의 동기만 표명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 한 가지 동기가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면 대답은 ‘아니다’이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단 하나의 동기만을 지향하고 견지할 만큼 지혜롭지도 순수하지도 강하지도 않다. 그 길에는 광신이나 실패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동기가 하나님의 소명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대답은 ‘예’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오늘이든 내일이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 인생의 불변하는 궁극적인 근원지이자 내용이요, 이유이자 목적지이다. 소명은 하나님에 대한 ‘긍정’이요 현대의 혼란스러운 요구에 대한 ‘부정’이다. 소명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줄거리를 파악하는 열쇠이고, 혼란한 세상에서 수수께끼 같은 우리 존재의 의미를 풀어내는 열쇠이다.
당신은 필요를 채워 달라는 소리에 이끌려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고 있지는 않는가? 당신은 좋은 일을 하느라고 최선을 종종 놓치게 되어 좌절감을 느끼지 않는가? 당신은 단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픈 열정과 순수한 마음을 갖고 싶은가?
21/ 한낮에 꿈꾸는 사람
로렌스가 비전에 관해 가장 감동적으로 기술한 대목은 [지혜의 일곱 기둥]의 서문에 나온다. “모든 사람은 꿈을 꾸지만 똑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밤에 먼지 쌓인 마음의 한구석에서 꿈꾸는 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그것이 헛된 꿈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한낮에 꿈꾸는 사람은 위험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실제로 행동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그렇게 행동했다.” ‘한낮에 꿈꾸는 자’란 로렌스의 용어는 소명에 응답하는 것을 잘 묘사하는 표현이며, 소명의 독특한 특징 한 가지를 예증해 준다. 소명은 현재에 대하여 외부적 관점을 꿰뚫고 들어옴으로써 기독교적 비전과 비전에 찬 그리스도인의 일차적인 근원이 된다.
그 부르시는 자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최종 목적지는 미지의 것일지 모르지만, 그분의 부르심을 좇는 자는 하늘의 음성과 앞서가는 비전을 갖고 있으며 그 비전은 모든 현 상태를 전복시키고 모든 안식처를 뒤흔들어 놓는다. 소명의 비전은 세 가지 면에서 보호되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가짜 비전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진정한 비전이 우리를 끌어당겨 빠뜨릴 수 있는 함정을 경계함으로써 비전 있는 믿음을 보호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유사품에 기만당하지 않도록 경계함으로써 비전 있는 믿음을 보호해야 한다.
22/ 평범한 것에서 광채를
우리 자신이나 다른 인간 청중을 위해서 한 단조로운 일은 항상 단조로운 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한 단조로운 일은 높임 받고 변화된다. 19세기의 위대한 중국 개척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가르치곤 했다. “작은 일은 작은 일이다. 하지만 작은 일에 신실한 것은 큰일이다.” 이와 비슷하게 마더 테레사도 “나는 큰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한다"라고 말했다.
23/ 당신이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소명과 감사, 선택받음과 경이로움 사이의 연계성은 실제적으로 우리 삶의 두 가지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첫째,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으므로 우리도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마땅함을 상기시켜 준다. 둘째, 소명과 은혜의 연계성은 감사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우선적이고도 지속적인 반응이어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24/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성 프란체스코의 소명은 무너진 교회(그리고 교회들)의 재건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은 복음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좇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추구한 모습은 항상 하나님의 겸손한 바보가 되는 것이었다. 소명은 제자도의 대가를 수반한다. 가장 큰 도전은 자아를 버리고, 자신을 고난받고 배척당한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진정한 바보’는 하나님이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 -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지혜가 없는 자 - 이다. 그러나 ‘바보처럼 비치는 자’는 다르다. 그들은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는 실제로, 문자 그대로 객관적으로 바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보로 비치고 또 그렇게 대우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자기 가족에게 미치광이로 여겨져 버림받았으며, 결국에는 로마 친위대 앞에 선 채 조롱거리가 되셨다. 세상의 죄를 짊어지기에 앞서 그분은 세상의 어리석음을 짊어지신다. 예수님은 홍포와 가시 면류관과 갈대 홀로 치장된 채, 고의적으로 바보 같은 왕의 모습을 한 조롱당하는 왕이 된다.
첫째, 바보처럼 되는 것이 소명에 필수적인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과 동일시되는 데 따르는 대가를 지불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세 가지 순교가 있다고 가르쳐왔다.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 금식처럼 금욕의 영적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녹색 순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는 백색 순교가 그것이다. 따라서 제자도란 ‘백색 장례식’, 곧 우리 자신의 독립성에 죽음을 고하는 장례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어떤 멋있는 용어를 사용하든지 간에 고난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고난을 피하는 존재이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예수님이 반드시 고난을 당하고 버림받아야만 메시아(그리스도)이신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 역시 그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둘째, 바보처럼 되는 것이 소명에 필수적인 이유는 그로 인해 우리가 세상의 본질에 정반대인(antithetical) 존재, 세상 앞에서 반문화적인 존재로 분명히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합리성, 정상, 온전한 정신 상태의 규준을 결정하는 분은 예수님이지 교수나 학자, 여론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바보로 취급받는 것이 위로가 되고, 우리가 세상에 순응하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더 심한 바보로 여기지 않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셋째, 바보처럼 되는 것이 소명에 필수적인 이유는 그것이 손해에 반응하는 그리스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옥스퍼드의 철학자 오스틴 파레는 한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예수님이 기꺼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세상에 보여 주길 원하신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되고 우리가 담당할 역할로 인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25/ 때가 왔도다
오직 바보만이 타이밍의 중요성을 무시할 것이다. 올바른 일을 제때 하는 것은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타이밍은 인생의 본질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아래서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인생 목적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 - 그분이 세례 받으실 때 선포된 것으로서 사복음서 모두 분명하게 기록되고 있다 - 으로 분명하게 이해했다. 첫째,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포로 상태의 종말, 하나님 나라의 도래, 그분의 ‘평화의 길’을 놓치는 모든 이에게 닥칠 임박한 재앙 등을 선포하는 선지자로서 말씀하고 행동하셨다. 둘째, 예수님이 인격화된 새 이스라엘, 곧 친히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메시아로서 - 자신을 중심으로 옛 이스라엘이 용서받고, 치료되며, 재정의되고, 재구성되는 - 말씀하고 행동하셨다는 점이다. 셋째, 당대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던 사실로서 예수님은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실제로 인간의 몸으로 능력 가운데 찾아오신 것처럼 말씀하고 행동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 네 가지 주제가 우리의 소명 안에서 타이밍 감각을 가지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첫째, 소명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문제다. 둘째, 소명은 타이밍을 맞추기 위한 부적절한 방법을 포기하는 문제다. 다른 대상을 신뢰하려는 유혹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자세는 소명에서의 타이밍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올바른 대상에게 권위를 부여해야 하며, 우리가 다가갈 대상뿐 아니라 우리가 등을 돌려야 할 것에 대해서도 분명히 해야 한다. 셋째, 소명은 준비 자세의 문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최고의 순종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분의 미세한 음성이나 표시에도 응답할 채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넷째, 소명은 결단의 문제다. 하나님은 자기 인생의 과업에 유보 없이, 후퇴 없이, 헌신할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세상에 관여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결코 방향을 전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관심사와 이상을 바라보는 눈을 항상 갖고 있기 때문이다.
26/ 최후의 부르심
소명은 인생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특전과 그 도전에 중심적인 것이다. 소명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열쇠와 같은데, 그 이유는 인생의 말년에 맞이하는 세 가지 큰 도전에 대처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첫째, 소명은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 목적의식을 갖고, 그래서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는 가운데 인생 여정을 걸어가도록 박차를 가해 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인 우리는 여행자이며, 비록 그 길은 이미 찾았지만 목적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가 직업에서 은퇴할 수는 있으나 개인적인 소명에서 은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소명이 우리로 유종의 미를 거두게 돕는 이유는 우리의 직업상의 종결과 소명의 종결을 혼동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명과 직업을 동일시하는 ‘개신교적 왜곡’이 마지막으로 그 흉한 두상을 쳐드는 곳이다. 만일 우리가 소명을 우리가 하는 일에 한정시키게 되면 그 일이 우리의 손에서 멀어질 경우 - 갑자기 실직한다든가, 파면한다든가, 치명적인 병에 걸릴 수 있다 - 우리는 우울증이나 깊은 회의에 빠지기 쉽다. 직업을 소명과 뒤얽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직업을 잃는 것이 곧 소명 의식을 잃는 것을 뜻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 의식이 우리가 맡은 최상의 최고의 과업보다 더 깊고, 더 넓고, 더 길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우리가 홀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최종적인 형태, 곧 용서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 존 코튼의 명설교는 죽음을 맞이한 시점에서 소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멋있게 묘사한다. “다른 사람들은 소명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될 때 매우 수치스러워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소명을 포기해야 할 경우에 그는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편안하고도 담대하게 그것을 내려놓는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하도록 부름받기 전에 먼저 어떤 존재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소명은 모두 그분에게 부름받은 것 안에서만 성취된다. 그러므로 소명은 경력보다 선행되어야 할 뿐 아니라 경력보다 더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직업이 종말을 맞이할 때에도 소명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직업에서 은퇴할 수는 있으나 소명에서 은퇴할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실직할 수 있으나 아무도 언제든지 소명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셋째, 소명은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도록 격려함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돕는다.당신은 자신의 비전과 자신이 성취한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 때문에 좌절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장막이 걷히고 당신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 그리고 당신이 어떤 존재가 되도록 부름받았는지를 - 알게 되기까지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말라.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 ‘홀린 사람’, 기형도
사내가 달걀을 하나 건넨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1시쯤에
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
스팀 장치가 엉망인 까닭에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아내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서울에서 아주 떠나는 기분 이해합니까?
고향으로 가시는 길인가보죠.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다가 손끝을 다친 듯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조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죠. 서울 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조치원도 꽤 큰 도회지 아닙니까?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 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보인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 ‘조치원’,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은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 ‘10월’, 기형도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 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그 집 앞’,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빈집’,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 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 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 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우리 동네 목사님’,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착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 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는 몇 장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 ‘봄날은 간다’, 기형도
구겨진 불빛을 펴며
막차는 떠났다.
적막으로 무성해진 가슴 한켠 공지(空地)에서
캄캄하게 울고 있는 몇 점 불씨
가만히
그 스위치를 끄고 있는 한 사내의 쓸쓸한 손놀림.
- ‘388번 종점’, 기형도
당신이 세수하신 물에선
항상 짠 냄새가 나요
가끔은 몇 개씩
조개껍질이 둥둥 떠 있어요
고양이 털이 가늘게 부드러워
새벽에 흘린 코피가 아직까지 젖어 있고
집은 멀기만 한데
신발 끈이 자꾸만 풀어져요.
당신을 잊고 있는 밤이면, 어머니
우주비행사가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이
우리 집 꽃밭에 소리 없이
별똥처럼 내려앉을 것입니다.
- ‘귀가’, 기형도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풀리지 않으리란 것을, 설사
풀어도 이제는 쓸모없다는 것을
무섭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외투 깊숙이 의문 부호 몇 개를 구겨넣고
바람의 철망을 찢으며 걸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이 세상에서 애초부터
우리가 빼앗을 것은 무형의 바람뿐이었다.
불빛 가득 찬 황량한 도시에서 우리의 삶이
한결같이 주린 얼굴로 서로 만나는 세상.
오, 서러운 모습으로 감히 누가 확연히 일어설 수 있는가.
나는 밤 깊어 얼어붙는 도시 앞에 서서
버릴 것 없어 부끄러웠다.
잠을 뿌리치며 일어선 빌딩의 환한 각에 꺾이며
몇 타래 눈발이 쏟아져 길을 막던 밤,
누구도 삶 가운데 이해(理解)의 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난 겨울은 빈털털이였다.
숨어 있는 것 하나 없는 어둠 발뿌리에
몸부림치며 빛을 뿌려 넣는 수천의 헤드라이트!
그 날[刃]에 찍히며 나 또한 한 점 어둠이 되어
익숙한 자세로 쓰러질 뿐이다.
그래, 그렇게 쓰러지는 법을 배우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온몸에 시퍼런 절망의 채찍을 퍼붓던 겨울 속에서 나는!
- ‘겨울, 우리들의 도시’, 기형도
토저의 기도(http://blog.naver.com/neobarabbas/221865406298)에서는 기도라는 주제로 바로 다이빙을 하는 반면, 팀 켈러의 기도에서는 기도를 정의하려고 노력하며, 여러 종교에서 사용하는 기도들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들에 대해 Bench Marking을 하며, 형식이 있음을 알아본다. 그리고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기본 원리원칙 제시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열심을 낼수록 나의 내면과 실생활이 풍성해지며, 게을리할수록 내 삶은 빈궁을 경험하게 된다.
별점: ★★★★★
J.I 패커와 캐롤린 나이스트롬이 쓴 기도에 관한 책에는 이 모든 내용을 멋지게 함축하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 기도란 그런 여정이다.
기도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하나님과 이웃보다 성공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은 심령에 각질을 입혀 감정과 감각을 떨어트린다.
기도는 또 다른 존재와 함께일 때만 가능하다. 그 존재는 하나님이시며 대단히 독특한 분이다. 그분께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 준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으신 하나님을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로 믿고 다가가 부르짖게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 영과 나란히 동행하면서 더 많은 증거들을 더하여 보여주신다.
크리스천은 주님과 실감 나는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벧전 1: 8, 새번역)"
그러므로 기도를 배워야 한다. 우선, 몇 달에 걸쳐 시편을 통독하면서 한 편 한 편 요약하고 정리했다.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내 마음과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는 평온한 경험뿐 아니라 악을 밟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기 위한 힘겨운 씨름도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도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
에베소서 1장 15-19절에 있는 기도를 빌립보서 1장과 골로새서 1장, 그리고 에베소서 3장의 간구와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바울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장면을 금방 포착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 2장에 바울은 독자들에게 평화를 위해, 선량한 정부를 위해, 도움이 필요한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예수님과 달리 보편적인 기도 모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동료 크리스천들에게 주실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한 가지를 끊임없이 구했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주님을 더 잘 아는 것'이었다. 바울은 크리스천이 반드시 얻어야 할 결정적인 응답은 환경의 변화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지식이라고 말한다.
대다수 현대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이나 상황에 토대를 두고 내면생활을 가꿔 간다. 남들의 평가, 사회적 지위, 물리적인 번영, 성과 등에서 내면의 평안을 찾는다. 크리스천도 주님을 믿지 않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딛고 서지 않으면 크리스천들 역시 "세상이 그렇다고 장담하는 이러저러한 요소들을 성공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행복과 불행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정체성까지 시대가 제시하는 견적에 맞출 게 틀림없다.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직전,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5-6절을 비롯해 몇 가지 사전 아이디어를 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데서 이뤄지는 개인적인 기도 생활이야말로 영적 상태를 족집게처럼 진단해내는 영적 시험지다.
사사로운 기도 생활을 풍성하게 가꾸지 않아도 공적으로는 현란하며 신학적으로 견실하고 열성적인 기도를 드리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분과 더불어 대화하는 상황에서 어김없이 나타나는 특징만큼 흉내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은밀히 드리는 개인적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는 나란히 깊이를 더해 가게 마련이다.
기도가 위대한 것은 곧 인간의 삶 가운데 미치는 하나님의 손길과 영광이 크고 넓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성경은 일관되게 이 진리를 증언하는 길고 긴 간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기도로 백성들을 고쳤으며,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변질되고 타락했음을 통렬히 비판하는가 하면, 오로지 기도로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주님은 시시때때로 자주 뜨겁게 부르짖으며 눈물로(히 5:7) 기도하셨으며 더러는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셨다. 성령이 내리고 임한 것도(눅 3:21-22),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용모가 변한 것도(눅 9:29) 모두 기도하실 때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더없이 큰 위기 앞에서도 주님은 기도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는 제자들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고(요 17:1-26)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하며 숨을 거두셨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기도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이 마음에 들어오셨음을 보여 주는 주요 지표 가운데 하나였다.
기도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신앙이나 기도가 완전히 배제된 문화를 찾아보려 안간힘을 써 본들 백발백중 허사로 돌아갈 따름이다. 아주 외전 곳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부족들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사이의 소통"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상존하게 마련이다. 인간의 내면에 기도하고자 하는 본능이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불치의 향수병'이라고 불렀다.
북미 원주민 샤먼은 의식 중에 곧잘 황홀경에 빠지고,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찬트를 음송하며, 맨하튼 사무실에서는 수행자들이 요가에 열을 올리고, 17세기 청교도 사역자들은 몇 시간씩 목회기도를 드렸으며,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에게서는 방언기도를 흔히 볼 수 있고, 무슬림들은 이마와 양손, 두 무릎과 두 다리를 땅에 대고 메카 방향으로 엎드려 수주드를 행하며, 하시딤은 몸을 앞뒤로 흔들고 절하며 간구하고, 성공회 사제는 공동기도서를 낭송한다.
신비적인 기도에는 "신이 보이는 높이까지 오르고 또 올라서 마침내 그 거룩한 존재와 하나가 되는" 길고 긴 '정화' 절차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예배자가 순수한 사랑에 도달해서 신 앞에 나서기에 적합한 자격을 얻는 과정인 셈인다. 그러나 예언자들과 시편 기자들의 경우, 기도는 자신을 정화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방법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주님의 은혜에 기대는 일이었다. 인류가 찾아내거나 이뤄 낸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에서 행하시는 역사라는 뜻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간혹 믿지 않는 이들의 기도에도 흔쾌히 응답하신다"라고 했다. 니느웨 사람들(요나서 3장)은 두말할 것도 없고 사악한 왕 아합(왕상 21:27-28)의 부르짖음에까지 귀를 기울이셨던 사례만 보더라도 주님께 그래야 할 무슨 의무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백 퍼센트 그분의 '긍휼'과 '주권적인 자비'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런 점들ㅇ르 종합해 보면, 기도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반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비록 허공에 대고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몸짓에 그치더라도, 기도는 바로 그 존재와 실재에 닿고 또 반응하기를 추가하는 행위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반응'으로 기도를 규정하는 한, 그 지식의 진량과 순도에 다라 기도는 변화무쌍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을 통해 거듭나는 순간(요 1:12-13, 3:5), 주님은 우리에게 그저 하나님의 피조물에 그치지 않고 자녀의 신분이 되었으며 하늘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음을 알려 주신다(갈 4:5-6).
크리스천들은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된 성경과 그 중심 메시지인 복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공급받는다.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인 성경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로 반응(그저 ‘반응’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기는 하지만) 할 수 있다. 성경 말씀과 성령님 덕에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답변’이 될 수 있다. 온전한 대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가장 온전한 의미의 기도란 어떤 것일까? 기도란 하나님이 거룩한 말씀과 은혜로 시작하신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가서 마침내 주님과 온전히 만나는 단계에 이르는 일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실해질수록 기도는 더 풍성해졌으며 변화의 폭이 인생 전반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기도의 능력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 또는 기교가 아니라 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렸음을 알 수 있다.
소견대로 하는 기도는 비극이다
성령님의 선물로서의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대화로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대화가 진전되고 무르익으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발전한다. 일생 속에 하늘나라가 이뤄지는 셈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도 패턴에는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시 86:11-12)라는 고백과 함께 온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기까지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과정이 어김없이 따라다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가? 성경을 통해서다. 성경은 기록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도를 하려면 먼저 성경을 펴고 그 간구를 들으신 분에 관해 배워야 한다. 성경을 읽으며 깨달을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게 된다.
하나님이 초점임을 아는 이들이 드리는 기도가 가능하려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뿐만 아니라 … 그분에 대한 교리와 개념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도는 하나님 말씀을 읽는 일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성경과 기도는 한 덩이가 되어 크리스천을 참하나님과 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준다.
마르틴 루터는 누구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가선’ 안 되며 그랬다간 기도를 하면서도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지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고 못 박아 말한다.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성령님이 마음에 역사하신다. 미리 뜻하신 이들의 마음에 미리 뜻하신 방식으로 역사하시지만 말씀 없이는 결코 일하지 않으신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제각기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 경이로움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말과 감탄사를 찾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패커는 말한다. “침묵기도는 기도의 정점이 아니라 … 말로 드리는 간구 사이사이에 찍힌 쉼표와 같다.
크리스천이 드리는 기도라 할지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게 아니라면 결국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기도하면서 알아 가고 싶은 미지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이스라엘의 역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는 잘 알려진 하나님께 아뢰는 것 사이에는 또렷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제 입맛대로 신앙적인 성취를 탐닉하지만, 후자는 순종하는 믿음을 행동에 옮긴다. 기도의 핵심은 자기표현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답하는 법을 체득하는 데 있다.
성경을 읽지 않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걸 확인할 길이 없다.
그들은 믿는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집’, 즉 ‘살아 있는 돌들로 지은 성령님이 머무시는 성전(벧전 2:4-5, 엡 2:20-22)’이 된다.
다윗은 왕좌에 앉히고 집을 지어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받고 나서 기도할 마음을 찾았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그보다 무한정 더 크고 위대한 약속을 이미 받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저 집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을 좇는 이들 하나하나로 그분의 집을 삼겠다고 말씀하신다. 거룩한 임재와 아름다움, 영광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기억할 때마다 크리스천의 가슴에는 그 엄청난 약속의 말씀이 사무치고 번번이 기도할 마음을 찾을 것이다.
기도는 결코 주문이 아니다
티머시 워드는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주셨던 말씀, 곧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을 만나는 으뜸가는 길임을 강조한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공급받는 관계에 들어간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따라서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서슴없이 아버지 품으로 달려갈 수 있다. 기도는 이처럼 친밀한 관계와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껏 느끼고 누리는 방법인 동시에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확신을 토대로 평안하고 기운찬 삶을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4-16).
기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하나님이 원만하게 이끌고 계시며, 나쁜 일들도 결국은 유익한 열매를 맺으며, 좋은 선물들을 결코 가둬 가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멋진 미래가 찾아오리라는 점을 또렷이 확인 시켜 주는 중요한 도구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신다(딤전 2:5, 히 8:6, 12:24). 이제 크리스천들에게는 궁극적인 중보자요 지극히 높으신 대제사장이 생겼다(히 4:14-15). 커다란 간격을 없애서 주님과 친구처럼 사귈 수 있게 하신 것이다(출 33:11 비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요 14:13-14), 15:16, 16:23-24).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건 … 그분만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이며 … 창조주와 소통하는 외길임을 인정하고 간구한다는 뜻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화해시키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하셨다.
인생만사가 순조롭게 심중에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안전하다 싶으면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것저것 해 달라고 간청하는 데 큰 몫의 시간을 할애하고 가물에 콩 나듯(뭔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 때) 죄를 고백한다. 오랜 시간 차분히 앉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경우는 드물거나 전혀 없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 계시다는 걸 알지만 무언가를 얻어 내거나 행복해지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탓이다. 대부분은 그분을 행보 그 자체로 삼지 않는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감수하신 크고도 놀라운 희생을 깨닫고, 소망의 대상을 물질에서 그리스도로 바꾸며, 예수님께 기대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하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유익과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지 감이 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섬기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는 참되고 거룩한 지식을 갖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제대로 된 아빠 엄마 밑에서 자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중얼거리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엄연하게 말해서 ‘제대로 된’ 부모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거스틴과 루터, 기도를 말하다
어거스틴은 무얼 어떻게 기도할까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첫 번째 원리로 내세운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요소들이 엉클어져 ‘뒤죽박죽’이 되지 않았는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장 큰 사랑을 드리는 게 마땅하지만 주님을 막연히 의식하기만 할 뿐, 실질적으로는 그분의 은혜와 임재를 지상에서 누리는 번영과 성공, 지위, 애정, 또는 쾌락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어거스틴은 마음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동떨어져 황폐해진 상태임을 받아들이면 그때 비로소 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이 제시하는 첫 번째 기도 원리를 받아들였다면,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보상이나 쾌락 따위는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기쁨을 줄 따름이며, 거기에 마음을 둬 봐야 그 행복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구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나님을 으뜸으로 사랑하며 그분을 알고 흡족하게 해 드리는 일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긴다면, 기도하는 제목과 방법은 두루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거스틴은 잠언 30장 8-9절 말씀을 본보기로 내놓는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어거스틴이 내놓는 세 번째 지침은 주기도문을 연구하며 구체적인 기도 방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네 번째 원리는 암흑기에 드리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고난은 …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다. … 하지만 고되고 아파서 … 시련을 거두시길 간청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건을 바꿔 주시길 구해야 할까, 아니면 견뎌 낼 힘을 청해야 할까? 어거스틴은 솔직한 소망(“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과 하나님을 향한 순종(“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가리킨다. 어거스틴은 마음의 소원을 쏟아 놓는 중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루터는 규칙적인 훈련으로 기도를 몸에 배게 하라고 조언했다. 하루에 두 번식 하나님과 만나기를 권했다.
크리스천은 감정을 떠나 반드시 기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마음을 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므로(에 3:41) 자발적으로 기꺼이 간구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십계명이나 그리스도의 말씀 같은” 성경 본문을 혼자 읊조리는 이른바 ‘음송’을 추천한다. 루터는 이런 훈련을 통해 “마음을 움직이고 이끌리며 … 기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생기길 바란다"라고 했다.
묵상을 권유하면서 루터는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는, 명령을 하나하나 깊이 생각하며 가르침, 즉 그 말씀을 주신 참뜻이 무엇인지 살펴 하나님이 무얼 요구하시는지 진지하게 고찰한다. 둘째는 그 깨달음을 감사로, 세 번째는 고백으로, 네 번째는 기도로 연결시킨다.
루터는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도하기 전에, 주기도문의 간구를 한 구절 한 구절 끌어내어 기도하기를 권한다. 주기도문에 맞춰 저마다의 필요와 관심사를 다른 말로 표현하거나 개인적으로 적용하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바탕에 깔고 기도하는 연습은 정신세계를 철저히 장악하게 해 주며 하나님께만 온 신경을 쓰는 과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나라가 임하오시며”에 기대면 공동체와 사회, 인간관계 가운데 복음이 들어가 퍼지길 기도하게 된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최근에 저지른 죄와 실수를 열거한 목록에 눈길을 돌리게 이끈다.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를 하다가 선한 생각들이 샘솟는다면 다른 기도 제목들은 잠시 미뤄 두고 그런 생각이 마음에 깃들일 여지를 확보하라. 침묵 가운데 귀를 기울이고,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령님이 친히 말씀을 선포하시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보통 크리스천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믿었다. 루터는 내면의 느낌을 하나님의 계시로 여겼던 조지 휫필드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뜻을 전하신다.
칼뱅, 기도의 원칙을 논하다
칼뱅이 내놓는 첫 번째 기도 원칙은 ‘경외’ 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기도란 우주를 다스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독대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관해 무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상대에게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를 불쑥 내뱉을까 봐 진심으로 염려하고 겁을 내는 것이다. 경외하는 마음이 깊은 까닭에 엉망진창이 되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아무 자격 없이 영원토록 한결같은 은혜를 받는 수혜자가 되었음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스럽고 행복한 두려움이 갈수록 깊어지게 마련이다. 주님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을까 몹시 걱정스러워한다. 칼뱅은 이 경외감이야말로 기도의 핵심부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기도 원칙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의식은 허구를 몰아낸다”는 것이다. 열매 맺는 기도를 드리려면 스스로의 허물과 연약함에 무자비하리만치 정직해야 한다.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쓰는 ‘허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알고 회의와 두려움, 허무 따위를 솔직히 인정하며 그분 앞에 나와야 한다. ‘거지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야 한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허구’를 벗어 버릴수록 기도 생활이 그만큼 풍성하고 깊어질 것이다.
세 번째 원칙은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원칙은 크리스천은 확신과 소망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확신과 소망을 품고 구하라. 그릇된 청을 드리게 될까 두려워할 필요 없다. 당연히 그런 경우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지혜로 그 결과를 조절하신다. 응답이 없거나 기대했던 답이 아니더라도 기도로 그의 큰 뜻 안에서 평안을 갖도록 하라.
다섯 번째 원리는 ‘원리’라는 단어의 한정적인 면을 설명하고 있다. 칼뱅은 말한다. “제대로 기도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원칙에 관해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들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야 할 철칙이어서 완벽한 믿음과 회개가 없거나 열성이 부족하고 간구하는 내용이 올바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단박에 물리쳐 버리시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점 흠 없이 올바르게 기도했던 이는 어디에도 없다. … 이러한 자비가 없다면 누구도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없을 것이다.” 다섯 번째 원칙은 은혜의 원칙이다. 칼뱅은 크리스천들에게 원칙을 잘 따르면 응답받을 만한 가치를 얻는다는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고 말한다.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얻을 수 없다.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
기도는 은혜로, 은혜를 좇아 빚어져야 한다.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선물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얻었기에 행복한 두려움을 누리거나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원칙은 크리스천이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의 속성(값 없이 은혜를 베푸시는)에 맞추어 조절하고 그리하여 주님과 점점 하나가 되게 만드는 수단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요술 주문 같은 게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든, 심지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간구도 듣고 응답하실 수 있다. 짓눌려 사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하시는 경우도 흔하다. 무엇보다 그분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 능력이나 경력에 의존하지 않고 구원을 베푸시고 용납해 주신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발상을 버려야 합니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엄청난 권한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선한 행실에 기댈 게 아니라 주님의 청구권에 의지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기도 중의 기도, 주기도문을 말하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크리스천이라면 존귀한 이름을 품은 존재로서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므로, 부름을 받은 그 호칭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선하고 거룩해질 힘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님을 드높여 드리고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요청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저 착하게 사는 차원을 넘어 늘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에 경이감을 품는다는 뜻이다.
“나라가 임하오시며”
왕이신 하나님이 감정과 욕구, 사상과 헌신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 왕권을 펼쳐 주시길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려 주셔서 온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하길 구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나라의 완결과 완성”을 구하는 것이다.
“뜻이 이루어지이다”
루터는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온갖 질병과 가난, 수치와 고통, 역경을 기꺼이 견디며 주님의 거룩한 뜻이 그 가운데서 우리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음을 알게 해 주소서”라고 풀이했다.
칼뱅은 어떤 환경이 닥치든 낙담하거나, 쓰라린 아픔에 시달리거나, 냉담하지 않도록 제 의지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어거스틴이 여기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칼뱅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언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게 아니라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편이 되는 것들을 구하라”고 강조하며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을 신뢰하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터는 사업과 거래, 노동 시장에서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하루하루 끼닛거리를 앗아 가는 악의적인 착취’에 대적하는 기도다. 루터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번영과 공정한 사회 질서를 갈구하는 간구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루터는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간구를 교만에 도전일 뿐 아니라, 영적인 실상에 대한 검증으로 규정했다.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쓰라린 상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원한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스스로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큼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구하는 위선과 마주칠 따름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어거스틴은 이 간구를 두고 “이는 시험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시험에 끌려들어 가서는 안 된다는 기도다”라고 구분 지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마 26:41)는 죄에 굴복할 가능성이란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원문은 “악마(사탄)에게서 구하시옵소서”로도 번역할 수 있다. 루터는 이를 두고 “악한 나라에서 뿜어 나오는 구체적인 폐해 … 가난, 수치, 죽음 … 한마디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는 기도”라고 썼다. 어거스틴은 곧 세상의 사악한 세력, 특히 호시탐탐 해칠 기회를 노리는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길 구하는 기도라고 해석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초기 성경 문서나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성경에선 찾아볼 수 없는 구절이다. 칼뱅은 세상의 그 무엇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챌 수 없음을 기억하고 ‘평온한 안식’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의 시금석을 따르라
성경 말씀은 구절구절, 올바르게 기도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요 16:24-26)과 믿음(약 1:6)에 기대어 구하지 않고, 이기적인 동기(약 4:3)를 가지고 간구한다면 삶의 어느 영역에서든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가운데 부르짖는다면(시 66:18) 기도는 ‘큰 효력’을 내지 못할 것이다(약 5:16).
1 기도는 의무이자 훈련이다
기도는 좋든 싫든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규칙적으로, 꾸준히, 작심하고, 끈덕지게 드려야 한다. 설령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기도를 멈춰 선 안 된다.
2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다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드리는 기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나누었던 더없이 소중한 경험, 즉 거리낌 없는 대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기도를 대화로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마음속에 주관적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을 기도로 보는 방식과 하나님이 주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보는 방식이 있다. 루터의 경우에서 보듯, 성경을 읽을 때마다 확신과 깨달음이 드는데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따라야 할 바른 방향은 후자 쪽이라는 예기는 이 책의 전반에서 이미 나누었다.
패커는 습관적으로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성경을 읽고,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 무얼 알려 주는지 깊이 생각하며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찬양으로 이어 간다”면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이만큼 중요한 도구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3 기도는 찬양과 고백과 간구가 어우러진 상호작용
주기도문은 찬양과 경배로 시작해서, 필요를 채워 주시길 요청하고, 죄를 고백하고 내면의 변화를 간구한 뒤에, 베풀어 주신 은총은 물론이고 역경에 대해서까지 감사하는 쪽으로 넘어간다. 성경의 기도서 등을 보면 이런 기도 ‘문법’, 또는 차원들이 하나같이 중요한 쓰임새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도 형식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하다. 주께 간구할 때마다 이런 기도 방식들이 빠짐없이 드러나고 서로 어울리며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4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드려야 한다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참 아들이신 예수님이 헤아릴 수 없이 큰 희생을 치르셨고, 성령님이 거룩한 자녀의 신분을 내면에서 규정하신 덕분에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임을 가슴 깊이 인식하고 감사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주님의 거룩한 인격과 구원사역을 압축해 놓은 일종의 속기록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궁금증이 생긴다. 성자나 성령님은 안 되고 오로지 성부 하나님께만 기도드려야 하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14, 마 11:28). 그렇지만 주기도문에서는 아버지께 간구하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나 성령님께 구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예기는 전혀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기도는 아들에게 감사하고 성령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늘 아버지께 드린다.
5 기도는 애정과 경외감이 공존하는 마음가짐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기도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 여태까지 나온 기도와 관련한 훌륭한 서적들 가운데는 기도와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얼마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짚어 보라고 권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면에서 기도는 그저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며, 백 퍼센트 의존적인 인간과 예수님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일 뿐이다. 너무나도 무력해서 무얼 기도해야 좋을지도 모를 때 성령님이 도우신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이를 강력히 뒷받침한다(롬 8:26). 무얼 하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주께 갈 수 없다(요 6:44). 극도의 무력감을 느낄수록 주님이 함께하시며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신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7 기도는 하나님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기도는 형식과 관계없이(찬양, 고백, 감사, 간구 등) 세상 만물과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으며 실제로는 아무 탈도 없음을 알게 된다. 정반대로 허상을 무너뜨리고 영적인 상태가 생각보다 더 위태로움을 일깨운다. 이처럼 기도는 자아를 요란하게 흔들며 소리친다.
8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이다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사랑, 성령님이 약속하신 내주하심, 용서를 받았다는 인식, 주님의 임재 앞에 나가는 특권, 죄스러운 습관을 이겨 내는 능력 등은 마음으로 받아서 실생활에 활용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하나같이 추상적인 개념에 그치고 만다.
기도란 그리스도가 이루셨으며 크리스천이 믿고 있는 모든 사실들을 우리의 능력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진리가 마음에 작용해서 새로운 본성과 반응, 기질을 만들어내는 외길이기도 하다.
9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려는 노력이다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은 기도를 통해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이슈가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의 위대하심을 감각적으로 감지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게 아니라 마음에 거룩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걸 느끼게 된다.
10 기도는 정직한 자기 인식
기도는 단순히 부족하다는 느낌을 넘어 자신과 극도로 솔직하게 마주 서는 단계까지 이끌어 가야 한다.
11 기도는 철저하게 신뢰하는 마음가짐
어떤 기도를 드리든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손수 보내 주시는 선물을 따지거나 가리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도록 도와주시길 구하는 간구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루터는 무모하리만치 끈덕지게 조르며 기도하는 걸 일컬어 ‘하나님 공략’이라고 했다. 기도는 수동적이고, 차분하며, 조용한 행위가 아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인정하는 자세에 토대를 두지 않고 그저 ‘끈기’와 강청하는 기도만 강조하면, 원하는 응답을 받아내지 못할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성숙한 크리스천들일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상황을 견뎌내는 게 풍성한 생활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끈기와 순종이 기도 안에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한다.
12 기도는 온 삶을 하나님 사랑에 굴복시키는 마음가짐
주님께 온전히 충성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그저 기도를 이미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요소들을 더 얻어 내기 위해 동원하는 이기적인 방편으로 사용할 공산이 크다. 바로 이런 진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람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라는 말씀 이면에 깔린 진리다. 핵심은 세상에서 갖고 싶어 하고 소중히 여기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소망하고 애지중지하는 자세에 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이것저것을 요구하는 기도를 시작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내게 꼭 필요한 건 하나님뿐임을 절감하지 못한다면 온갖 간구와 간청은 그저 또 다른 형태의 걱정과 욕심으로 변질될 수 있다.
말씀을 묵상하라
기도가 참으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되려면 규칙적으로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거룩한 음성을 듣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깊이 체험하는 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지만, 영적으로 더 깊이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상적인 경로는 바로 말씀 묵상이다. 시편 1편을 찬찬히 짚어 보면, 적어도 묵상의 세 가지 유익을 약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안정이다. 둘째로, 묵상은 속사람 또는 성품의 변화를 약속한다. 셋째로, 묵상은 복을 부른다.
성경 어느 본문을 묵상한다는 말에는 미리 치열한 연구와 해석을 거쳐 그 뜻을 파악한 상태라는 전재가 깔려 있다. 성경적인 묵상은 성경을 깊이 있게 해석하고 공부한 결과를 토대로 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이성적인 사고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작업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 스스로 신이 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을 묵상하는 갖가지 구체적인 방법들이 있지만, 영국의 신학자 존 오웬은 세 가지 기본적인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일단 성경 공부와 기도, 그리고 묵상을 구별하는 데서 출발한다.
묵상은 진리를 공부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삼는 말씀 공부와 다르다. 또한 하나님 자신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상정하는 기도와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 묵상은 … 사랑과 기쁨, 그리고 겸손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 단계는 성경의 진리를 바라보는 명료한 시각을 선택하고 확보하는 이른바 ‘생각의 초점’을 잡는 과정이다.
말씀을 묵상하는 으뜸가는 방법은 암송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눈앞에 벌어진 이러저러한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할 때 암송했던 말씀이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오웬은 생각을 가다듬었으면 이제 묵상의 두 번째 단계인 ‘마음 쏟기’로 넘어가라고 말한다. 생각을 정리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구원과 영원, 인간의 상태 따위에 관해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정확히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면 더욱 온전하게 거기에 소망을 두고 만족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어떻게 성경의 진리에 기대어 삶을 바꿔 가야 할지 가늠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깨달음을 주시는 시점을 헤아리는 노력이다. 하나님이 하필 오늘 그 말씀을 보여 주신 까닭은 무엇일까?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큰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유쾌하고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다. 진리를 깊이 파고들다 보면 허물을 지적받고, 낮아지며, 곤란한 처지에 몰리거나, 평안과 위로를 찾는다든지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감격과 기쁨을 맛본다. 묵상은 이 지점, 이런 마음자리를 목표로 한다.
세 번째 단계는 무엇인가? 오웬은 하나님의 임재와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실상을 알고 감격하고 있다면 그 자리에 머물며 마음껏 누리라고 권한다. 고상한 풍미에 젖은 이들은 경험적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 포도주보다 더 달콤한 그리스도의 사랑, 그밖에 무엇이 됐든 짜릿하게 미각을 자극하는 더없이 상쾌한 향취를 맛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크리스천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벧전 1:8) 하는 타당한 근거가 된다.
묵상을 할수록 “스스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절감하는 겸허한 자각”만 돌아온다손 치더라도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런 경험은 영적인 실상과 마주할 수 있는 더 큰 기회로 이끌어 간다.
오웬에 따르자면, 묵상은 정신으로 진리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감정과 태도, 마음을 쏟는 자리 등 삶의 온갖 영역에 반영하며, 성령님이 주시는 깨달음과 영적인 현실을 좇아 반응하는 걸 가리킨다. 그러므로 기도를 위한 묵상은 생각하고, 마음을 돌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거나 주님의 부재를 인정하고 거룩한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세 가지 요소로 이뤄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다 안다"라고 말하는 것과 그 사랑이 얼마나 넓고, 크고, 높고, 깊은지 절감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실제로는 갑부였는데 쪼들리며 살았다니! 바울은 크리스천들에게 그것만은 피하라고 당부한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만나야만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오웬은 “하나님을 직접 뵙는 환상을 품고 묵상하는 습관이야말로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길러야 할 중요한 소양”이라고 끈질기고도 단호하게 주장했다. “크리스천의 삶과 생각은 하늘의 복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는 쪽으로 흘러가야 하며, 지금 여기서 맛보기들을 경험하며 빚어져 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말은 주님의 성품과 말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이 중심으로부터 만족스럽고, 즐겁고, 위로와 힘이 되는 걸 가리킨다.
오웬은 시시때때로 하나님 안에서 희열을 맛보며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주님의 손길을 체감하는 경험만이 세상의 가짜 하나님이 주는 질 낮고 부분적인 위안에 넋을 빼앗기며 격정과 욕망의 노예가 되는 비극을 피할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다른 이들의 손가락질이나 고난,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감정적인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오웬은 침묵기도가 가끔은 괜찮지만 그런 방식으로 간구하도록 주문하거나 이상적인 형태로 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한다.
감사와 찬양이 먼저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다시 말해 주기도문에는 찬양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는 데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며 다른 종류의 기도를 이끌어 내는 자극제다. 곧장 간구나 고백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기도 생활 전반에 걸쳐 찬양과 경배가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찬양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해로운 부분들을 바로잡고 영적으로 건강한 내면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악조건이 아니라면, 대체로 찬양은 내면의 건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드러내는 지표가 되는 듯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이란 너나없이 행복을 추구하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무언가에 집착하는 법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바로 그 집착을 사랑으로 인식하고 경험한다.
인간이 마주한 비참한 현실은 하나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 자녀와 배우자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배우자가 기대만큼 지지와 애정을 보여 주지 않을 때마다 폭발적으로 분통을 터트리거나 깊은 좌절에 빠지기 십상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을 으뜸으로 소중하게 여기면 배우자를 제대로 사랑할 여유가 생긴다.
인간 됨됨이의 뼈대를 다시 짤 수 있을까? 어떻게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섬기고 높여야 한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찬양과 경배 말고는 그런 마음을 키울 방도가 없다.
불행한 사건들이 간구와 간청을 불러일으킨다면 행복한 일이 생기면 감사하고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솟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로마서 1장 18-21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죄가 지닌 특성을 지적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 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 커녕”(새번역)이라고 꼬집는다.
루이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어던 하나님이 이를 지으시고 내게 주셨을까?”를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면서, 항상 그럴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훈련은 일상생활 가운데 더 풍성한 기쁨을 찾고 밀도 높은 기도 시간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단언한다. 아울러 “가장 낮아졌을 때 경배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하면 지극히 높아진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는 몹시 어렵다"라고 조언한다.
위대한 종교 개혁가로 처음으로 공동기도서를 펴냈던 토머스 그랜머는 다음과 같은 일반 원칙을 따랐다.
1 찬양 - 하나님의 이름
2 신조 - 기도의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진리
3 간구 - 구하고자 하는 일들
4 염원 - 요청을 들어주셨을 때 찾아올 선한 결과
5 예수님의 이름으로 - 예수님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기억
그랜머가 쓴 유명한 성만찬 개회 기도회에서도 이와 같은 구조를 볼 수 있다.
1 전능하신 하나님,
2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소원을 다 아시며,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사오니,
3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 마음의 온갖 생각을 정결케 하시어,
4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공경하여 찬송케 하소서.
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스코틀랜드 대요리문답은 “인간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주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백과 회개는 필수다
죄의 대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치르셨다. 죄를 뉘우치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죄의 저주가 미치지 못한다(롬 8:1). 이를 잊으면 고백이 복음적인 회개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혹하게 자책하는 식의 참회에 가까워진다.
스토트는 죄를 고백한다는 말은 곧 죄를 등지고 결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백과 결별은 결코 분리되면 안 될 요소들이지만, 크리스천 중 열에 아홉은 고백과 동시에 죄와 절연하고 마음을 돌이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약화시키는 결단 없이 죄와 허물을 털어놓는데 그친다. 그러므로 스토트는 참다운 회개는 인정과 거부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오웬은 오로지 율법의 정죄, 곧 스스로 공덕을 쌓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관념에서 출발한 멸살은 죄에 물든 심령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인정과 칭찬을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소중히 여겨선 안 된다. 주님의 은혜에 잠기면 다른 이의 눈에 괜찮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욕구를 떨쳐 버릴 수 있다.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데다 무겁기까지 한 짐이다. 감사가 넘치고 불안감이 걷힌 순전한 기쁨을 맛보기까지 값없이 주신 은혜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자.
남에게 무정한 말을 하거나 고약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속으로 누군가를 희화화함으로써 자신을 합리화하지는 않았는가? 내게 쏟아 주신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하며 냉정하고 불친절한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나를 참아 주신 주님의 인내를 기억하며 짜증을 내지 않을 때까지, 냉담함이 없어질 때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무한한 관심을 내게 보이셨는지 돌아보며 온정과 애정이 느껴질 때까지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자.
하나님 뜻대로 간구하다
최상의 결과를 기대하되 하나님께서 다른 일들을 행하신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따름이다. J.I 패커는 여기에 적어도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먼저 하나님께 간구할 때, “우리가 구하는 제목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을 기도에 반드시 포함시켜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대단히 명철하고 현실적인 생각이다. 필요를 고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와) 다른 뜻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편이 더 선하며 (우리가 최선이라고 여기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계획하신 대로 이뤄지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사례들을 볼 때, 간구에는 요청하고, 불평하고, 조르는 등 대략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로, 자신과 남들의 필요를 아뢰는 통상적인 기도가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세상을 향한 기도’를 보통 중보라고 부른다. 간구의 두 번째 범주는 성경 전반에 걸쳐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시편에 나타난 이런 형식의 기도를 전통적으로 ‘애가’라고 부른다. 고통과 환난을 겪으며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힘겨운 씨름을 벌이면서 주님이 역사하는 방식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 한편, 거룩한 속내를 깨달아 알고 현실을 견뎌 내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이들의 기도다. 간구의 세 번째, 그리고 가장 광범위한 범주는 이른바 ‘하나님께 조르는 기도’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품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때를 끈덕지게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받아야 할 ‘고난의 잔’을 옮겨 주시길 기도했지만 간곡한 요청은 기각되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나 합당한 처분을 예수님께 내리셨다 인류가 받아야 할 형벌을 주님께 대신 내리셨다. 덕분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성자에게나 합당한 대우를 우리에게 해주신다(고후 5:21).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셨기에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담대하고 구체적이며 열심히, 정직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소원을 아뢰어야 한다. 하지만 그와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지혜로운 사랑을 인정하고 끈질기게 순종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 덕분이며, 그러기에 무엇이든 그분의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
매일 기도하라
통상적으로 하루에 한 번 갖는 경건의 시간에 만족할 게 아니라 더 자주 기도할 필요가 있다. 루터는 하루에 두 번 기도하길 권했고 칼뱅은 간단하게 자주 드려야 한다는 쪽이다. 하루의 틀을 잡을 때, 24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 번 이상 시간을 정해서 온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모든 크리스천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보인다.
14세기에 활동했던 아프리카의 신학자 아타나시우스는 적었다. “무슨 필요나 어려움이 됐든지 간에, 같은 책(시편)에서 거기에 맞춤한 말씀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 병을 고칠 방도를 알게 되는 겁니다.” 이어서 시편은 그때그때 ‘합당한’ 말씀을 제시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죄를 회개하며, 감사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인생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이 거룩한 노래들은 우리 자신과 잘 들어맞으며 굽이굽이마다 영혼의 필요를 채워 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첫 번째는 원문 그대로 기도하는 방법이 있다. 시편 90편은 그런 식으로 기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두 번째는 주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시편을 자신의 말로 바꾸어 개인화하는 기도 방법이다. 시편으로 드리는 세 번째 기본적인 형태는 ‘반응하며 기도하기’라고도 불린다. 전문이 아니라 주제나 주장만 가져다가 찬양과 고백, 간구의 실마리로 삼는 방식이다.
시편에는 그리스도를 대단히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편이 많아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한다. 2편과 110편은 보좌에 앉으신 메시아를, 118편은 거절당한 메시아를, 63편과 109편은 배반당한 메시아를, 22편과 16편은 죽고 부활하신 메시아를, 45편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하늘의 신랑이 되시는 메시아를, 68편과 72편은 승리하신 메시아를 보여 준다. 이런 시편들은 예수님의 뛰어나심과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찬양하며 그 안에서 쉼을 누릴 기회를 준다.
조지 허버트는 기도를 ‘교회들의 잔치’라고 불렀다. 드와이트 무디 또한 어느 날 기도를 마치고 나서 “하나님이 내게 오셨다. 얼마나 강렬한 사랑을 경험했는지 제발 주님의 손안에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이 책은 우리들의 강력한 영적 무기인 기도에 대해 다각면으로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그 기도가 더욱 빛을 발하도록 활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기도가 순종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면서 기도를 할 것(그냥 받는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은혜 말고), 어린아이라 해도 쓸데없이 소원을 비는 행위는 아무 유익이 없음을 일찍 깨워쳐 줘야 한다는 점, 아직 기도할 것이 많은데 기도 시간이 끝났다는 이유로 멈췄던 것, 기도는 솔직하게 해야 한다는 점, 그 무엇보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자들이라는 점,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지 알려고 해야 한다는 점 등 기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별점: ★★★★★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수정하시고, 우리가 더욱더 그분의 아들을 닮게 만드시며 그분의 거룩하심과 자비와 사랑과 영광이 크게 드러나도록 우리가 기도했던 문제를 종결시키시는 영적인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만일 우리의 일상생활이 분주하고 무의미한 일들로 가득하며, 진심으로 기도하려는 절박함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좀 더 친밀하게 알아가는 아름다운 여정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1/ 기도를 배우라
온 삶으로 기도하라
가장 좋은 기도는 그 사람의 삶 전체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한 기도는 오직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결과로 주어진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기도가 되고, 온 삶이 찬양과 예배의 거룩한 제사가 되며,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탁월함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지속적으로 교제하지 않고, 세상을 많이 따랐으며, 기도를 힘든 순간이나 중요한 응급 상황의 비상탈출구로만 여기는 신자에게 기도는 의무이자 무거운 부담이다. 그러나 모든 삶이 기도가 될 때 기도에 대한 부담이나 율법적 속박은 사라진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구애에 응답한다면, 그의 주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도를 위한 비옥한 토양이 바로 거룩한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설득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기도를 포함한 여러 가지 면에서 징계하여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실 수밖에 없다(히 12:10). 그렇게 되면 그 여정은 더 힘들고 복잡해질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는가? 달리 말하면, 우리의 기도는 응급 상황의 기도들로 가득한가, 아니면 온종일 기도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가? 기도가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지려면 야고보서 4장 7,8절, 베도로전서 5장 6-10절, 열왕기하 22장 18-20절에서 도움을 얻으라.
성(聖)과 속(俗)의 심리학
그리스도인의 내적 평안을 방해하는 것 중 하나는 우리의 삶을 두 영역, 즉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나누는 습관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오랫동안 힘들게 일해야 하고, 이 세상의 것들에 많은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거기서 우리는 더 고차원적인 삶을 누리며, 하늘나라의 지위를 보유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즐긴다.
성과 속의 딜레마에서 오는 어려움을 피하려면 진리가 우리의 피 속에 흘러 우리의 생각 전체를 좌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실제로, 단호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능력과 기도로 가득했다. 우리도 그분과 같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려면 거룩하지 않은 행위는 없다는 사실을 매일 깨닫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면 마당의 잔디를 깎는 일, 설거지, 창고 정리, 운동, 선반 정리, 보고서 작성, 그 외에 수백 가지 세속적인 행위들이 우리에게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기도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성과 속의 심리학에서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는 기도할 때나 일상의 생각 속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실제적으로 단호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에 대해 묵상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이 거기서 벗어나게 해주실 때 당신의 기도 생활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주목해보라 하나님은 당신이 주변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해 기도하게 하실 것이다.
묵은 악습에서 벗어나라
‘성과 속의 심리학’에서 온전히 벗어나려면 지적인 생각과 경건의 기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오직 적극적인 믿음을 발휘함으로써만 이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이 그것들을 받으신다고 믿는 것이다. 개인적인 기도 시간에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계속 하나님께 말씀드리라. 그리고 생업에 힘쓸 때에도 생각 속의 기도로 그 시간들을 보충하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3,24). 얼마 후 바울이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고기는 깨끗하며, 모든 날은 거룩하고, 모든 장소는 신성하며,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교회는 날과 절기와 시간들을 다시 지키게 되었다. 특정한 장소들이 특별히 거룩한 곳으로 표시되었고, 특정한 날이나 장소, 사람에 차이가 생겼다. 처음에 두 가지였던 성례는 서너 가지로 늘어나더니 로마 가톨릭이 승리하면서 일곱 가지로 정해졌다.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논리적 결론에 도달한 성-속의 이단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겠다. 그것의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종교와 삶의 완전 분리다.
날과 때를 지키는 것이 우리 사이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과 '성금요일'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점점 더 자주 들려오는 단어들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부름받은 사명 안에 거하게 하자. 그러면 그의 일은 사역자의 일만큼 성스러울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일이 성스러운 것인지 세속적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이유다. 동기가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 주 하나님을 믿으며 나아갈 때 그의 행동은 이전처럼 평범한 행동이 아닐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선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에게는 삶 자체가 제사장의 직무가 될 것이다.
모든 일이 제사장의 사역이 되게 하는 훌륭한 기술을 연마하자. 토저는 이 과정에 속한 네 단계를 지적한다. 1)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믿음 2) 우리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 내어드림 3) 개인적인 기도 4) 일상의 생각 속의 기도
올바른 생각이 올바른 기도를 이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악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더럽힌다고 가르치셨으며, 심지어 생각과 행동을 동일시하기까지 하셨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와 같은 말씀을 보라. 바울도 빛나는 미덕들의 목록을 나열한 후 "이것들을 생각하라"라고 명령했다(빌 4:8). 물론 우리는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없고, 우리의 죄들을 없애거나 타고난 성품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받은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기꺼이 거하시는 깨끗한 성소로 만드는 걸 도울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그 마음을 받아 즉시 다스리실 것이며,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질 것이다. 특히 우리가 오랜 시간을 두고 날마다 기도로 우리의 생각을 단련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훈련(즉 일을 하거나 여행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오랫동안 해나가면 거룩한 생각의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올바른 생각이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진다. 올바른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사탄은 하나님과 전쟁을 하고 있다. 거기엔 중요한 것이 걸려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장악하는 것이다." 토저는 지난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자유롭게 했던 생각을 우리의 참된 영적 상태를 알아보 시금석으로 사용하라고 말한다. 그 생각들의 성향이 내적인 마음의 방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기도는 순종을 대신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려 해야 한다. 나는 우리의 문제가 기도로 순종을 대신하려는 데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유일한 약점이 기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은 정말 중요한 순종의 문제에서 여러모로 부족했던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성 15:22). 기도는 결코 순종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 통치자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물들로부터 순종이 동반되지 않은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면 죄의 형벌을 면하게 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기쁨으로 순종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순종하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순종의 대체물로 사용하기를 멈출 때, 기도는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 대신 드리는 기도를 받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것을 대신하려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밖에 안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과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매일 순종과 기도 생활에 대한 열정을 회복시켜 주셔서 매일의 도전과 기회들에 대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기도와 순종에 대해 율법적인 속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가 더 많이 순종할수록 하나님이 기도를 더 많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하기 쉽다. 신자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며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보여주시는 것에 대해 더 많이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역에 기도로 동참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인간적인 은사나 재능으로도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사역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고백할 것을 주장하며 '교만한 육신'을 그토록 강하게 압박하는 것이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영적인 삶과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들을 충족시킨다.
만일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이루려 하셨던 일들을 달성하려 하신다면, 그러한 기도와 하나님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세 번째 조건일 것이다.
부흥은 자정 후에 탄생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 거룩하고 성령 충만해진다고 할 수 있다.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점을 분명히 하셨다. 문제는 우리를 충만케 해달라고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실 만큼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을 원해야 한다는 데 있다.
개인적인 부흥과 승리하는 삶의 교리를 배우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버리는 어둡고 험난한 언덕을 걸어 올라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부름받은 사람들은 많고, 택함 받은 사람들은 적다. 실제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는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잠시 멈춰 서서 동경하는 눈으로 강 건너를 바라보다가 비교적 안전하게 보였던 옛 삶의 폐허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흥은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온다. 그들은 마음의 갈망들이 모두 하나로 축소된 사람들, 즉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길 갈망하여(골 1:10-18) 모든 일에 그리스도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들이다.
조건 없이 기도하라
노리치의 줄리안이 놀라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구세주께 기도를 드린 후 이런 지혜로운 말을 덧붙였다. "또한 저는 아무 조건 없이 이것을 구합니다." 그 마지막 문장이 그녀의 마지막 기도에 능력을 부여했고, 해가 갈수록 홍수처럼 넘치는 응답을 험하게 해주었다.
성공적인 기도는 조건이 없는 기도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해치실 수 없고 반드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그다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을 담대히 구하며, 대가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
침묵의 힘
가장 고차원적인 기도는 요청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거룩한 순간의 기도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기적들이 평범해 보이고 놀라운 기도 응답들이 별로 놀랍지 않게 보일 만큼 거룩한 연합이다.
오랜 기도에도 응답이 없을 때
만일 우리가 계속 기도함에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 마음의 자연적인 불신을 확고하게 굳혀버릴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불신으로 가득했다.
가장 나쁜 것은 우리가 기도에 실패함으로써 원수가 현장을 장악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일 것이다. 마귀는 항상 승산 없는 싸움을 하며 도망 다녀야 한다. 그런데 이 불경스러운 원수가 잘난체하고 경멸하면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둔다고 해보자. 그때 하나님의 일이 매우 지체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도가 계속 응답되지 않을 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응답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는 성경적인 기도가 점점 줄어들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이루어주시도록 도우려는 자신의 노력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응답되지 않은 우리의 많은 기도들이 잘못된 동기로 구한 결과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또한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의 다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처리하지 않은 죄(개인적인 죄나 공동의 죄, 또는 둘 다) 때문일 수 있다(시 66:18).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가 기도 응답을 받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우리는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또는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 이 믿음과 불신의 문제에 있어서 성령 하나님께 성령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달라고 간구하라.
2/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의 유익
기도에는 어떤 유익이 있는가? 하나님이 행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음으로 할 수 있고,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기도로 할 수 있다. 단, 믿음으로 기도를 드렸을 때 그렇다.
조지 뮬러는 믿음은 사용할수록 성장한다고 말했다. 큰 믿음을 가지려면 이미 가지고 있는 작음 믿음을 사용하기 시작해야 한다. 경건하고 신실한 기도를 실천하면, 그것이 자라서 날마다 더 강해질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구하기 때문에 받고 혹은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아는데 많은 지혜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 아니겠는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세 가지 방법
중요한 것은 소원을 비는 일이 대부분 어린아이들이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도 소원을 빌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일찍부터 배워야 한다.
갈망하는 대상이 타당하고 무고한 것이라면, 그것을 얻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 둘째는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가능성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으나,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 안에 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도가 직접적인 답이다.
어떤 것들은 단순한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전반적인 기도의 개념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노력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갈망의 대상들로 구성된 범주가 있다. 이것은 결국 노력과 기도로 귀결되며, 우리가 바라는 대상과 목표들이 대부분 이 범주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며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 한다.
신자가 기도에 헌신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에서 비롯되며, 숨 쉬는 것만큼 일상적인 일이다. 기도와 노력이 거룩한 균형을 이루고 시기적절하여 하나님이 항상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상황이 있다. 소원은 하나님을 제외하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을 방정식과 해답에 포함시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하는 단순한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과 늘 연결되어 있길 원하신다!
기도는 사람과 상황을 변화시킨다
우리의 모든 기도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의 말에 따라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바꾸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내내 하고자 하셨던 일들을 행하실 수 있도록 그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상황을 변화시키실 수 있게 한다.
습관적으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과정 속에서 기도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상황들('하나님께서 물질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도록 만드셨으므로')을 변화시킬 것이다.
기도의 씨름
기도를 평가할 때 우리는 그 기도를 누가 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즉 우리의 단호한 마음인가, 성령인가? 기도가 성령에게서 비롯되었다면 그 씨름은 아름답고 놀라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열된 열망의 희생자라면, 우리의 기도는 다른 행위와 마찬가지로 육적인 것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단호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원하는 때에 기도 응답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 뜻대로 되길 원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기를 갈망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탈출구나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 둘러싸이도록 하실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할 때 성령으로부터 기도가 시작된다(약 4:7,8).
기도할 때까지 기도하라
우리가 진실로 기도하기 전에 기도를 중단하는 습관은 불행히도 흔한 일이다. 종종 마지막 10분이 처음 30분보다 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효과적으로 기도하기 위해 적절한 분위기로 들어가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세상에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로 흐트러진 생각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씨름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도하러 갈 때 우리 마음이 냉담하고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 느껴진다면 우리 스스로 그 상태에서 나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토저는 은혜의 보좌 앞에서 정직하고,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히 7:25) 분께 다시 초점을 맞추라고 제안한다.
하나님의 자아와 기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주실 것이다. 단, 그것이 그분의 뜻 안에 있다면 말이다. 당신이 '나는(I am)'이라고 말할 때 언제나 'am'을 소문자로 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는(I AM)'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가 어디에서 파생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 존중은 잘못이 아니며, '나는 -이다', '나는 -할 것이다', '나는 -을 한다'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신 본래 하나님의 메아리로서 소문자로 말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한다면 말이다.
죄의 정의는 타락한 자아이다. 죄는 위로 올라가 하나님의 자아를 취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 자신이 자아가 될 거야.” 그리고 하나님은 배제되었다.
당신은 온순하고 경건하게 “오, 하나님, 당신이 계시기 때문에 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 대문자로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라고 말해왔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탄생이 의미하는 바다. 그것이 곧 회개이고 믿음이다.
당신은 기도 제목들을 하나님께 다 말씀드리고 나와서, 당신이 그 목록을 잊지 않고 다 기도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과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분 앞에서 당신의 기도 제목 중 일부가 수정되고 재구성되는 느낌,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을 느끼는가?(빌 4:6,7)
진리의 두 날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균형을 잃는 것은 종종 선호하는 특정 본문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다른 관련된 본문은 덜 강조함으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이다. 진리를 부인하는 것만이 진리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강조하지 않는 것도 결국은 똑같이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이론상으로는 진리를 고수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무시함으로 아무 효력이 없게 만드는 이상한 입장에 있게 한다.
그는 캠벨 몰간의 말을 인용한다. “모든 진리는 ‘기록되어 있다’라는 말에 있지 않다.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다시 기록되어 있다’라는 말속에 온전한 진리가 있다. 새가 균형을 잡고 날 수 있으려면 오른쪽 날개가 왼쪽 날개와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균형과 대칭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두 번째 본문을 첫 번째 본문과 대조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균형에 초점을 둔 매우 강력한 성경 구절이 야고보서 4장 1-10 절이다.
정직한 기도의 능력
비상한 통찰을 가진 또 다른 영적 작가는 기도할 때 완전히 무례해 보일 정도로 솔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우리가 기도를 하는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면 고상한 척하지 말고 하나님께 그대로 말하라고 한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일들이 따분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라. 이 조언은 일부 예민한 성도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하나님은 정직한 영혼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곧 그의 무지함을 고쳐주실 수 있으나 위선에 대한 치료책은 알려진 바가 없다.
꾸밈없는 어린아이는 여전히 우리 모두를 위한 거룩한 모델이다. 우리가 모든 가식을 거부하고 사람들 앞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완전히 정직하기를 배울 때 기도는 더 능력 있고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17세기 프랑스 주교, 프랑소와 페넬롱(Francois Fenelon)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에 대해 몇 가지 강력한 발언을 했다.
당신의 마음에 있는 것을 모두 하나님께 말씀드려라. 친한 친구에게 마음속 기쁨과 아픔을 모두 털어놓듯이. 하나님께 당신의 어려움을 말씀드리면 그분이 당신을 위로해 주실 것이다. 그분께 당신의 열망들을 말씀드리면 그것을 정결케 해주실 것이다. 하나님께 당신이 싫어하는 것들을 말씀드리면 그것을 정복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당신을 유혹하는 것들을 말씀드리면 그것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주실 것이다. 선한 일에 대한 무관심과 악을 선호하는 부패한 마음, 당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다 털어놓으라. 당신의 자기애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게 만드는지, 당신의 허영심이 어떻게 가식을 부추기는지, 당신의 교만이 어떻게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숨기는지 다 말씀드려라.
당신이 이렇게 자신의 모든 약함과 필요와 어려움들을 털어놓으면 결코 할 말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주제가 계속 갱신되기 때문에 결코 고갈되지 않을 것이다. 서로 비밀이 없는 사람들은 절대로 대화의 주제가 부족하지 않다. 그들은 감출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저울질하지 않는다. 할 말을 찾지도 않는다. 그들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한다. 고민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 하나님과의 그런 친숙하고 거리낌 없는 대화에 도달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토저는 “우리가 모든 가식을 거부하고 사람들 앞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완전히 정직하기를 배울 때 기도는 더 능력 있고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앞으로 정직한 기도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기를 바란다.
기도의 영성을 드러내는 공적 기도
기도는 듣는 사람들을 향해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하는 것이기에 솔직히 그것을 염두에 두고 기도해야 한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못했다. 그 사람의 기도는 자아의식이 부풀려져 있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축소되었으며, 가치에 대한 의식은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체적인 기도는 ‘나’ 중심적이었지 ‘하나님 중심’이 아니었다.
세리의 기도에서 반복되는 말에 어떤 마법 공식이 있었던 것은 확실히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세리의 마음, 즉 죄에 대해 민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기도한다면 공적으로도 그와 같이 기도할 것이다.
가끔씩이라도 우리의 기도를 글로 기록하여 그것이 ‘나’ 중심적인지 ‘하나님’ 중심인지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놓고 당신의 마음과 기도의 말들을 살펴주시길 간구하라.
구약 성경들의 기도, 신약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내용을 두 달에 한 번은 꼭 공부하도록 하라. 기도에 관한 연구를 할수록 당신의 기도에 변화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라!
공적 기도와 사적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감을 나타내야 한다. 그것은 매일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더 강력해진다. 예를 들면, 당신과 하나님과의 친밀감은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만큼 풍부한가?
가장 좋은 것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람이 홀로 외롭게 싸워야 하며, 때로는 금식과 기도로, 말로 다 못할 만큼 피곤하게 싸워야 한다. 모든 사람은 독창적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모방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마치 자기 혼자만 기도할 수 있는 것처럼 기도해야 하며, 그의 접근법은 개인적이고 독립적이어야 한다. 성경 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생의 중요한 순간에, 다른 사람들의 깊은 필요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신 후에, 최후의 만찬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드린 기도가 예수님의 삶에 배여 있었다.
리더십의 영적 자격을 갖추라
리더십은 비전을 요구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면 어디서 비전이 오겠는가?
로마서 12장 12절은 모든 신자들이 '기도에 힘써야' 한다고 말하며, 유다서 1장 20절은 신자들에게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려면 하나님의 말씀(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것),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행하는 것),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매일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본질적으로 모든 신자들은 '기도에 힘쓰라'라는 권면을 받으나, 그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기도여야 한다.
E. M. 바운즈는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혹은 더 좋은 기계나 새로운 조직이나 방법이 아니라, 성령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들이다. 즉 기도하는 사람들, 기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성령은 방법이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 흘러나온다. 그분은 계획이 아니라 사람들, 즉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하나님은 언제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들과 정반대되는 것을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려면, 자신이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그분의 넓은 뜻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또는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간청을 들어주어야 할 의무를 갖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직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의 기도만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해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일 3:21,22; 요 15:7).
하나님이 언제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궤변은 기도하는 사람이 훈련을 받지 못하게 만든다. 이 부드러운 궤변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이 세상에서 진지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할 필요성을 무시한다.
자신에게 참된 믿음이 있는지의 여부도 모른다. 자신의 요청이 수락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바꾸셨고 그에게 다른 것을 주셨다고 선언하는 단순한 책략으로 그 결과를 회피하기 때문이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이 짧은 문장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응답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실 때가 있음을 배운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믿음에 현혹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세속적인 신자는 응답이 거절당할 때 경건하게 자신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하나님이 언제나 기도에 응답해신다는 생각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성경으로부터 오는 단단한 음식은 신자의 삶 속에서 성령의 능력 주심과 역사를 동반하며, 그것이 성경의 진리를 사실로 만든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단단한 음식을 갈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젖으로 만족하며 말씀의 기본 원리들을 반복해서 배우는 것에 머물러 있다(히 5:11-13). 또한 그들이 듣고 싶은 말만 해주고 그들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켜줄 스승들을 많이 두었다(딤후 4:3). 그 최종 결과는 세상과 벗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며, 그 증거가 자신의 불순종 때문에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멘토인가? 그런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께 적어도 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라.
개인적으로 나는 때때로 나의 죄나 바쁜 일정, 또는 잘못된 우선순위로 인해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최선을 거부하게 될까 걱정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손해는 내가 우주의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협력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손실을 느끼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계속 기도하기를 바란다.
3/ 믿음의 기도로 나아가라
목표를 명중시키는 기도
기도에 있어 가장 큰 함정 중 하나가 막연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하여지기 원하는 당신은 "난 지금 그걸 받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을 시험하시게 하고, 그분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을 주셨는지 안 주셨는지 알려고 하라.
막연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받았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런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킬 수 있다.
모든 일에 기도로 나아가라
마음의 평안은 문제를 부인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데서 온다는 걸 명심하라. 믿음으로 당신은 당신의 형제요, 인간의 아들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께 부탁할 권리가 있다. 또한 하나님이 당신을 보살펴주실 거라면 왜 염려해야 하는가!
모세, 여호수아, 다윗이 경건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든 것을 기도로 하지는 않았고, 그 결과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통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이나 힘으로 결정 내리기로 할 때, 우리는 그들처럼 엘리트 그룹에 속했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정을 내릴 때, 그에 따른 결과가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가장 해로운 결과들은 우리의 믿음과 미래의 순종, 우리의 구세주이자 주님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신자들과 불신자들 앞에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훼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기도로' 하기를 부지런히 힘쓰자.
우리의 중재자, 예수님
예수님은 하늘에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구하심이라"(히 7:25).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신다. 그러므로 힘을 내라!
예수님이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과 관련하여, 성경은 그분이 구체적인 영역에서 기도하신다고 말한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시련이나 폭풍우를 지나더라도 우리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둘째,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이런 폭풍우가 삶을 무너뜨리고 우리로 길을 잃게 만들 수 있지만 또한 우리의 믿음을 정결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신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가 시련을 대할 때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보기를 원하신다. 셋째, 주님은 이런 폭풍우나 시련들이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형제와 자매들을 강하게 해주는 배경이 되길 원하신다.
기도로 준비하라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제자들에게 커다란 반지에 박힌 작은 다이아몬드 같은 말씀을 주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가오고 있는 일을 예상하고 기도하셨으며, 그에 대비하셨다. 내가 당신의 양심에 새겨두기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싸움을 싸우기 전에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미리 예측하고 앞서가는 기도를 연습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날마다 앞서가는 기도를 연습할 수 있을까?
언제나 기도가 이긴다
"곤경에 빠지는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의 힘이 약한 이유는 기도가 거의 사라지고 침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하고 강건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고난이 와도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시계를 보며 "기차를 놓치겠어"라고 말하면서 황급히 뛰어나가지 말라. 당신이 급히 가야 한다면 신약성경을 가지고 가라. 출근길에 뉴스나 뉴스를 읽는 대신 신약성경을 읽고, 그다음에 고개 숙여 하나님과 대화하라. 싸울 준비를 하라! 아침에 기도를 아예 건너뛰기보다는 어딘가에서 기도를 부여잡으라.
절대 기도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기도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고, 기도하면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물론 그것이 참된 기도이고 말로만 하는 기도가 아니며, 당신의 삶이 당신의 기도와 조화를 이룬다면 말이다. 기도하면 실패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기도하라
복음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는 상태로 축소시킬 것을 주장하며, 따라서 합리적인 신앙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간 이성의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그런가 하면, 복음주의적 신비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인간의 이성을 믿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과 믿음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위에 있다. 우리가 신자가 되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작은 이성을 무한히 초월하는 영역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화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믿음은 결코 이성과 반대로 가지 않는다. 믿음은 단지 이성을 무시하고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믿음은 가장 높은 종류의 이성이다. 믿음은 우리를 곧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고,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가신 휘장 뒤로 들어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이 이루시는 일들에 다가간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장기간에 걸쳐 성도들 안에 다섯 가지 일을 행한다. 첫째, 기도하는 사람들을 낙심시킨다. 둘째, 자연적인 마음의 불신을 확인해 준다. 셋째,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부추긴다. 넷째, 원수에게 신성 모독할 기회를 준다. 다섯째, 원수가 영역을 장악하게 한다. 당신의 환경에서 원수가 장악한 영역을 되찾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신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응답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