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맙소사. 어찌하여 저에게 이렇게도 서늘한 소설을 읽게 하셨습니까! 유메노 규사쿠의 작품이 평단에서 “가장 위험한 소설”혹은 “미치광이의 작품”이라는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았다는 말을 읽고도 나는 겁도 없이 『소녀지옥』을 꺼내어들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평이, 모두 완벽히 들어맞는 소설이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유메노 규사쿠 연작소설집 『소녀지옥』은 속히 마음의 지옥을 그대로 묘사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추리라고 말하기도, 미스터리라고 말하기도 묘한 그 어딘가. 인간의 마음 저 깊은 곳이라고 말해야할까. 마음에도 블랙홀이 있다면 바로 그안에서 꺼낸 듯한 이야기들이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 단편 3가지가 묶여있음에도 그 이야기들이 너무 강렬하여 오래도록, 모든 이야기가 머리를 맴돌았다. 첫번째 단편이었던 “별 것 아니었다”에서는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간호사가 “별 것 아닌”계기로 죽게 되었음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은 지나친 순수와 애정, 심리적인 압박을 깊이 다루고 있었다. 유리코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갉아먹히는 사람의 모습을, 그 심리의 변화를 무척이나 섬세하게 만나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유명인들의 자살이나 마녀사냥 등이 떠올랐다. 우리가 “별 것 아니게”던지는 시선이나 말이 타인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사장 소름 돋았던 “살인 릴레이”. 버스 여차장이 연쇄 살인마라고 확신하는 운전기사에게 접근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서간체를 이용하여 더욱 깊이 서늘해졌다. 내적 갈등이나 불안, 광기어린 집착 등이 사람을 어디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를 느끼게 했는데, 도미코의 독백이나 편지에 드러나는 불안이나 잘못된 확신을 읽으며 여러번 혼란에 빠져들었다. 또 결국 자신의 목을 옭아매는 것이 우리 스스로임을 다시 한번 깨닫기도 했고.
세번째 이야기인 “화성의 여자”는 여학교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기괴한 방화와 신원미상의 변사체를 다루고 있다. 서서히 드러나는 복수와 질투, 부도덕성 등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은 여러 진실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발견하는 가면같아 더욱 소름이 돋았다. 현실에서도 사회적 지위라는 가면을 쓴 추악한 이들의 이야기를 흔히 만날 수 있기에 결국 진정한 지옥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소녀지옥』을 읽는 내내 섬세한 심리묘사 속에서 오늘날의 우리를 보기도 했고, 거의 매일 뉴스를 통해 만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우리 내면 어딘가에는 미움이나 질투, 소유욕이나 피해망상, 집착 등의 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그 '숨은 악마'들을 서서히 드러내기에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또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이들이 겪는 심리적 외면까지를 마주하며 더욱 더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고, 집단성이 만들곤 하는 차가운 외면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소녀지옥』은 사실 술술 읽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문장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내용이 숨이 턱턱 막히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인간의 모습과 그것을 꿰뚫는 날카로움때문에 한순간도 눈을 땔 수 없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각각의 인물들을 무척이나 섬세하고 날카로이 표현한 점에 있어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더 많은 것을 보려고 노력하게 되는 책이었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특별한 조합을 이룰 때 탄생하는 ‘레시피’라는 독창적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한 연작소설집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비틀린 상상력이 스며들며, 웃음과 감동이 교차한다.
1️⃣ 〈방귀 전사 볼빨간〉
‘방귀쟁이 며느리’의 후손인 여고생 홍이가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방귀로 세상을 구한다는 엉뚱한 이야기.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설정이지만, 그 속에는 타인의 시선에 맞서는 용기와 자기 긍정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단순한 코믹을 넘어, 웃음 속에서 성장의 감동을 전한다.
→ 유머 속에 따뜻한 성장의 순간이 숨어 있다.
2️⃣ 〈깜박이는 쌍둥이 엄마〉
육아와 가사에 지쳐 매일 깜박거리는 슬기의 이야기.
형광등처럼 깜박거리다 남편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황당한 설정 속에, 기억과 존재의 불안, 그리고 가족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잊힘’이라는 두려움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며, 현실의 피로를 판타지로 승화시킨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 잊혀짐 속에서도 가족의 온기를 지켜내려는 인간적인 따뜻함이 인상적이다.
3️⃣ 〈살아있는 오이들의 밤〉
좀비 맞서는 ‘오이 헤이터’들의 이야개. 황당한 설정이지만, 그 안에 인간의 두려움과 생존 본능을 풍자적으로 비춘다.
→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드러나는 인간의 연대와 유머가 묘하게 짠하다.
세 이야기는 모두 정부의 비밀기관 ‘대한민국 레시피 조사국’이라는 기발한 설정으로 연결된다.
현실 속에 존재할 법한 공공기관의 형식을 빌려, 일상의 허무함과 희망을 블랙코미디로 버무린다.
각 단편이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풍자극처럼 맞물리는 구조가 흥미롭다.
처음엔 단순한 코믹 단편집인 줄 알았는데, 읽을수록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따뜻한 성장서사로 다가왔다.
기발함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힐링 코미디 소설집.
#지구생물체는항복하라#정보라#연작소설집
장애, 기후, 노동, 생계와 생태계를
해양 생물과 엮어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작은 타일 그림들이 모여
거대한 모자이크 벽화가 되는 것 같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첫 번째 이야기 속 문어의 대사다.
책을 덮고 나는 고백한다.
❝나는 정보라 작가에게 항복한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와 SF 요소를 섞어 비빔밥을 만들었다. 각각의 재료가 입 안에서 다 살아있으면서도 조화로운 신박한 비빔밥 같은 책
🔖신선함에 진중함이 가리지도, 진중함에 신선함이 퇴색되지 않는 신박한 책
#추천합니다#2024년90번째책
멀고 아름다운 동네. 원미동.
다음 책을 고르는 시간은 흥미로웠다. 토지를 읽었던 그 긴 시간 동안 그새를 못 참고 사버린 책이 한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다 읽고 싶어서 산 책이지만 우선 외국 소설을 제외했다. 최근 작품들도 손에 가지 않았다. 토지의 여운을 한 번에 깨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다음 읽을 책의 선택은 그전에 읽은 책의 영향을 받는다. 전 여친이 다음 연애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언젠가 동인천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원미동 사람들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제목이었다. 그런데 작가가 양귀자? 작가님의 #희망#나는소망한다내게금지된것을 읽었고 특히 #모순 은 내가 읽어본 장편 소설 중 최고로 뽑는 책이기에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오! 역시는 역시다.
원미동이란 지명, 많이 들어보았는데. 성북동 비둘기가 생각난 걸까? 왠지 강북 어딘가 동네이겠거니 했다. 앵? 아, 여기가 부천이었구나. 인천에 사는 내게 참 가까운 동네. 원미동. 그래서 오가며 본 표지판에서 분명히 봤을 것 같은 동네 이름이 낯설지 않았나 보다.
아차 싶었다. 난 단편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하소설을 좋아할 만큼 친숙해진 캐릭터와 쉽게 이별하는 것이 싫은데 단편은 익숙해질만하면 끝나버리니. 꼭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기승전이 대단하다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스토리 때문에 완성도 높은 단편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 물론, #칵테일러브좀비 라는 책의 #오버랩나이프나이프 라는 단편은 기가 막혔지만.
원미동 사람들은 단편이 아니었다. #러브액츄얼리 처럼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모든 이야기가 원미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등장인물들 역시 서로 서로 얽혀있는 내용이다. 거기에 한 겨울에서 시작해 계절이 바뀌며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지기에 읽기 편했다. 책표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네. 양귀자 연작소설집.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이 좋았던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 속 서로 이어지는 플롯, 진진이의 화법, 거기에 90년대라는 정감 가는 배경이었다. 원미동 사람들은 그보다 더 과거인 80년대. 내가 꼬마 어린이였던 시절의 부천 원미동이라는, 도시라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한 동네. 또 다들 뭔가 부족함이 있는 서민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삶은 솔직했고 정감 있고 애틋하기까지 하다.
덕분에 원미동을 가봤다. 소설 속 감흥을 간직한 채 가본 원미동은 내겐 그리 멀지 않은 아름다운 동네였다. 80년대와는 많이 바뀌었겠지만 조마루 감자탕 본점의 뼈해장국은 맛있었다. 원미산에서 만난 개냥이가 반가웠고 원미구청 앞 원미동 사람들의 거리가 소설 속 배경으로 잘 찾아왔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러다 소설 읽을 때 마다 그 배경 다 찾아다니겠어…ㅋㅋ
김혜진 소설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뭔가 가슴께가 답답해지면서 더는 못 읽겠다고 생각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김혜진이 핍진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서도, 애초에 현실이라는 것이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무엇이기에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 큰맘 먹고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을 읽었다. 이 소설집은 연작소설집이 아니지만, 여덟 편의 단편 모두 화자는 '나'고 중심인물은 '너'다. 대단하다, 이 작가. 내가 이렇게 한 권으로 묶이는 소설집 좋아하는 거 어찌 아시고! 물론 내 취향과 전혀 상관없는 창작이었겠지만. 인물들이 줄곧 '너'와 '나'로만 호명되기에 이들의 성별과 개인성은 무화된다. 끊임없이 그들을 상상하면서 읽어야 하는 것이 제법 힘이 들었다.
여덟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너'와 '나'는 분명히 다르지만, 꼭 같은 지점이 있다. 이를테면, '나'를 통해서만 말해지는 '너'의 특성. '너'는 "내가 다 알 수 없는 사람"이고, "무엇을 상상하고 기대하든지" "어김없이 비껴가고 어긋나고 말"(35쪽) 사람이다. 화자인 '나'는 '너'의 본인만 모르는 단점을, 치부를, 천성을 낱낱이 고발한다. '너'는 독자인 내가 봐도 너무 답답하고 무능하고 제 생각만 한다. 그렇지만 '나'는 꼭 한 번 이렇게 말하고야 만다. "그러나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었을까." (78쪽) (이래서 김혜진의 소설이 답답하다는 거다.)
한때 수업을 들을 뻔도 했던 소영현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날카롭다. 그러니까 쉴 새 없이 '너'를 폭로하는 '나'의 어떤 권위에 대한 의문. 김혜진은 '너'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다. '너'에 대한 말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어떤 '나'의 모습에 관해 폭로하는 것이다. '너'와 '나'밖에 없는 세계에서 '너'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으니까.
읽으면서 가만가만 드는 생각을 해설에서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음, 이 책은 어떤 끈기의 결실이구나, 끝까지 밀어붙이고 치열하게 전투하여 얻어낸 무엇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책을 한 번 더 읽어야만 할 것 같고, 그럴만한 책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김혜진을 더, 더 읽어봐야지.
술술 읽히는 책인데 술술 읽으면 안 되는 책이랄까. 연작소설이어서 그런 것 같다. 수업 텍스트이기도 해서 한 번은 술술, 한 번은 꼼꼼하게 읽고 정리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별로였는데,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은은하게 좋았다. (형식적으로는 윤이형의 『붕대 감기』(작가정신, 2020)도 떠올랐고. 물론 완전 다르긴 합니다만.) 여성, 퀴어, 노동을 주로 다루어온 조우리이고, 이번 작품에서는 여성과 퀴어와 그들의 관계가 보다 부각되어 있다.
조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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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에게는 혈연관계가 아닌 일곱 명의 조카가 있다. (이 연작소설집은 한 사람당 한 개의 이야기, 즉 일곱 편의 단편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모인 성희는 조카들이 어렸을 적 나는 이런 어른이 되어야지, 하고 상상했던 조각들의 모음이자 교집합이다. 그는 조카들에게 미션을 보내고, 그것은 펜팔을 가장한 후원이다. 자신이 가진 사소한 것들을 아이에게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어른. 그리고 202X년, 일곱 조카에게 성희의 마지막 미션이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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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삶으로 하는 여러 층의 이어달리기를 형상화한다. 이어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각도, 속도, 보폭, 자세 모두 중요하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연습이야. 이어달리기는 주자들이 같이 연습하는 게 제일 중요해." 연습이다. 이 책은 수없는 배턴 터치의 훈련장이다.
주의할 점 하나, 배턴은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넘겨주는 것이다. 인물들이 손에 쥔 배턴은 삶의 일부 혹은 전부를 담을 수도 있지만, 배턴을 받을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터치는 무책임하다. 주의할 점 둘, 배턴은 주고받는 것이다. 진짜 달리기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삶의 이어달리기에서는 누구도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당분간 삶은 끝이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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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는 편지로 조카들에게 미션의 내용을 전해 왔다. 그는 편지를 쓰기 전에 미리 수첩에 내용을 적은 다음 옮겨 적는다. 왜? "남겨두는 거야." 성희는 자신의 수첩을 들여다보면서 마저 대답했다. "보내고 나면 내가 쓴 편지는 다시 읽을 수가 없으니까." 그에게 "말은 약속이기도 해서, 무슨 약속을 했는지 잊지 않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도 편지를 쓰고 난 후 그걸 찍어놓은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보냈던 나의 마음은 온전히 너를 위한 것이지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언젠가,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인용된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문장은 이러하다.
"답장은 없어도 괜찮아. 내가 너에게 어떤 말을 주었는지 내가 알고 있으니까. 기억하니까. 그거면 충분해."
(P.S. eBook으로 읽어서 인용한 구절의 페이지를 병기할 수 없었다!)
박상영의 전작―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창비, 2019)에는 20대 퀴어 화자가,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문학동네, 2021)에는 10대 퀴어 화자가 등장했다. 그리고 2022년, 점차 나이를 먹어가는 박상영의 화자들. 이번 연작소설집에는 30대 중산층 게이 커플 두 쌍(과 미혼 여성 한 명)이 등장한다. 그들은 본격, 노동하는 사람들. "요즘 애들"이라는 멸칭을 들어야만 하는, 그 모든 모욕과 부조리를 '사회생활'이라며 퉁 치고 넘어가야 하는 이들이다.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에게도 이 사회는 버겁다. N포 세대니 헬조선이니 하는 신조어는 이젠 지겹다. 그렇다면 퀴어는? 퀴어에게 '미래'란 게 있나? 분명한 건,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희정, 봄날의책, 2019). (이 책은 근래 '퀴어 문학 '제발' 퀴어하게 읽기' 수업 들으며 찾아 읽었다. 정말 제목 그대로를 말하고자 하는 책.)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출산, 양육 등 청장년기 인간발달의 과정 과정이 얼마나 비성소수자, 그러니까 이성애자에게만 가능한 일인지를 뼈저리게 깨닫는 퀴어. 제 한 몸 건사하기 위해 패싱을(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행해진다.
그런 와중에 이 소설은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 그렇게 말해야(만) 하는 사실이 아프다. 박상영의 화자들에게 믿음밖에는 남은 게 없는 것 같아서. 「요즘 (퀴어) 애들」에겐 「우리가 되는 순간」 같은 건 허상일 뿐이고, 그들은 「보름 이후의 사랑」조차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박상영이 이 모든 걸 팍팍하게 썼을 리 없다. 박상영은 박상영이니까. 그는 자유롭게 인물과 인물을 잇고 살을 붙여 '지금-여기'의 퀴어 화자들을 탄생시킨다. 자조 섞인 위트 덕분에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명랑하게 흘러가고, 페이지도 따라 훌훌 넘어간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에게 지나간 과거보다 다가올 미래에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지. 성장의 어떤 단계들을 뛰어넘는 순간, 이전으로는 도무지 돌아갈 수 없는 우리. '성장'이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는 뜻이라면 퀴어에게는 정확히 그 '안정'이 없다.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명시적인 선이 없다. 말 한마디에 무너질 수 있는 선이니까 '고찬호'와 '김남준'과 '유한영'과 '임철우'는 불안정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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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게 나였다." (「믿음에 대하여」, 258쪽)
돌고 돌아 '나'로 돌아왔을 때의 체념과 비애. 그럼에도 자괴감과 안도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아프지······) '나'라는 벼랑 끝에 서 있는 박상영의 화자들은 어디로 나아갈까. 박상영은 우리게 무엇을 더 보여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감상을 마쳐요.
이산화 작가의 단편소설집인 ‘증명된 사실’을 재밌게 읽고 또 하나의 흥미로운 책이 나왔다는 생각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이 책은 연작소설집이다. 책 제목 그대로 기이현상청에서 있었던 일을 소재 삼아 이야기를 소설로 엮어낸 소설집이다. 그러나 연작소설이어서 그랬을까. 어떤 에피소드는 흥미로운 반면에 어떤 에피소드는 지루하고 다 읽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긴 소설일수록 읽기 버거웠는데, 이는 작가가 긴 호흡의 소설을 쓰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집중력을 유지하도록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부호까지 들도록 만들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도 마치 기이현상청이 존재하는 듯이 쓰고 있던데, 그럴 거였으면 아예 한 에피소드 정도는 기이현상청과 ‘기이’를 소개하는 에피소드를 추가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면 좀 더 기이현상청과 기이에 흥미가 갔을 것 같은데…
모두 8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집.
고등학교 때 문학 문제집에서 '일락서산'의 앞부분만 접하며 '현대화된 고향을 보며 느끼는 상실감' 정도의 주제와 어려운 옛날 말들투성이의 어려운 글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진짜배기는 그 뒷부분부터였다.
거칠 것 없는 충청도 사투리와 비속어들, 아주 기똥차게 놀아주는 당시 아이들의 놀잇거리들, 세시풍속, 마을 사람들의 사건이 정말 재밌다. 비속어의 수위 때문에 참고서나 교과서에 수록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글솜씨가 워낙 위트 있고 찰져서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도 이 이야기가 불과 50년전의 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관촌수필>이 고향 버전이라면 또다른 작품인 <우리동네>는 서울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무조건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