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어쩌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환자가 되어 원 조정에 들어간 고려 출신 환관들은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으로 원하던 권력과 부귀영화를 성취했을 것이며, 기회가 닿을 경우 고려와 고려 국왕을 위해 자신들의 힘을 쓰기도 했을 것이다. (p.140)
적어도 나의 선 안에서 고려양에 대해 제대로 다루고 있는 책은 거의 없는 듯하다. 고려양, 사전적인 의미로는 “고려 말기 원나라에서 유행하였던 고려의 풍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k 문화처럼 복식, 음식 등 전반적 생활상이 몽골에서 유행했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름답게 기록되지 못했는데, 고려 출신의 황후를 들인 것 때문에 원나라가 몰락한 것으로 판단하던 당대의 세태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처음 이 책을 알고 호기심과 고민이 동시에 들었다. 고려와 몽골에 관해 기술한 책을 그리 많이 읽지 않았기에 오는 호기심과, 같은 이유에서 오는 부담감이랄까. 얼마 전 한 책에서 “알려진 모든 사실이 수집되고 그것들이 객관적으로 재현된다면 논쟁할 필요가 없다”라는 (역사에 대해 생각하기, 사라마자) 말을 읽고 생각이 많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기록과 해석의 역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들이 나름 고려라는 나라를 인지시킬 수 있는 대상도 사료에 이름을 올릴 일이 없는 일반 현지인들이 다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러한 삶이 이 시기 국적을 바꾼 고려인들보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모습이었을 수 있다. (p.83)
고려양은 분명 단순한 문화교류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역사, 시대상, 욕구, 관계, 사회적 지위 등까지 모두 담고 있어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 사람 (적어도 내 세대까지는) 고려양을 이런 풍습이 있었다 정도로만 배웠을 듯하다. 나 역시 그랬기에 이 책은 더 울림을 준다. 고려와 몽골의 관계사를 지속해서 공부해온 작가님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고려양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이 책을 읽으며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 한마디로 이 부분을 넘겨버린 역사 선생님이 떠올랐는데, 만약 그때 10분이라도 이 부분을 짚어주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쉬이 읽어지는 책은 아니나,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있는 책임은 분명하다. 이 책으로 인해 고려에 대해, 원나라에 대해, 또 명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니 말이다.
자녀가 장성할 때까지 십수 년간은 대개 여성의 집에서 생활을 하는 솔서혼 풍습이 있었던 고려의 여성들과 그 부모의 입장에서 견디기 힘든 부분이 아니었을까? (p.127)
뒷받침없이 우리의 문화라고 우기기만 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중국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중국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 문화도 아주 많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를 공부해야 함은 당연하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또 역사를 잘 모른다면 한복과 김치에 한푸, 파오차이 등의 오명을 씌운 역사는 또 되풀이될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리가 우리 것을 잊고 살면 먼 훗날에는 우린 것이 아닌 게 된다. 부디 이런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우리 역사를 조금 더 많은 생각으로 바라볼 일이,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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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인간을 다루기 때문에 역사의 '대상'은 '인물'이나 '장소'의 역사보다 더 자명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 “훌륭한 역사가는 동화의 거장과도 같다. 그는 인간 육체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어느 곳에서든지 자신의 이야기 기원이 있다는 것을 안다.” ('마르크 블로크' 저서 인용) 당시에는 그 의미가 덜 분명해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직유법은 놀랍다. (p.125)
생각해보면 역사서를 좋아하고, 부지런히 읽는 편인 것 같은데 그 시작을 모르겠다. 몇 살부터 역사서를 좋아했는지, 제일 먼저 읽은 것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의미다. 한때 그것을 골똘히 고민해본 적 있으나 답을 찾지는 못했는데, 비로소 오늘 이 책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역사는(...) 뚜렷하게 드러나는 구조 혹은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p.9)”는 저자의 말처럼, 명확한 선도 없고, 수시로 변해야 할 역사를 무슨 수로 내가 단답화할 수 있단 말인가.
한때는 나도 역사를 '암기과목'의 선상에 두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랬기에 학생 신분에서 벗어난 지금도 왜 역사를 공부하냐는 물음에 지식의 확장, 서사적 재미 같은 고리타분한 말 말고는 대답할 길이 없었고.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삶이나 인구, 건강, 집단, 국가, 그리고 불평등이나 역할, 이념 같은 부분까지를 역사를 바탕으로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어서.” 정도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나 역사를 쓸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몇몇 기본 선행조건을 가지고 있는 누구나 과거의 특정 국면에 대한 사실을 기록할 수 있다. (p.173)
이 말을 틀어보자면 누구나 자신의 기준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특정 성별에, 특정 사건에, 특정 인물로 인해 '빙산의 일각' 같은 역사를 알아 온 것일지도 모르고. 그런데 이것을 많은 이들이 알고도 몰랐다. “알려진 모든 사실이 수집되고 그것들이 객관적으로 재현된다면 논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p.198)”라는 저자의 말이 요샛말로 “뼈 때리는 말”같다. “의미는 끊임없이 유동한다. (p.299)“는 저자의 말처럼 더는 갇힌 의미로 역사를 묶어두기보다는 과거의 기록에 의문을 가지고 “어떻게 변화해왔고, 변화하는지”로 시야를 옮겨야 할 것이다. 특정 사람이나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지어 온 역사가 아닌 타 학문과 긴밀한 관계를 주고받고, 끝없이 논쟁하게 하는 역사 말이다. 그래야만 역사는 죽지 않고 흐르고, 만들어지고, 유의미할 테다.
이 책을 통해 역사를 수용하는 태도나 역사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역사 자체가 변화해온 과정을 새 시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개념을 쌓아가는 것도 필요한 공부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누구의, 어디의, 무엇 등의 시각으로 키워온 시간을 바꾸기는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역사는 다른 학문보다 공공의 삶에 더 많이 관여하기 때문에 현세적 시각이 중요하다. 이 책의 또 다른 목적은 역사가 혼종의 영역임을 여러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요약하자면 역사학이 학문으로서 살아 있게 하는2개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하나는 학계와 공공의 세계 사이를 잇는 다리로서의 역할이고,다른 하나는 역사학과,학교,박물관,심지어 정부 기구 내에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논쟁이다. (p.337)
늘 그렇지만, 역사를 담은 책들을 읽어내는 일은 갈수록 어려운 것 같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되고, 더 많이 고민하게 한다. 이런 고민과 흥미가 날카로워지는 것이 '목적 달성'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한걸음 깊이 다가갈수록 어려움과 즐거움이 동시에 생기니 말이다. 무작정 읽어왔던 역사서를 보다 명확하게 바라보게 하는 냉철한 책이었다.
감히 저자의 이름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이 책을)사라! 조금 더 깊어질 것이니.” “마자!(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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