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베아트리체'
🤔 이 두 장을 읽고 책에서
🔹️ "방탕아의 삶이 신비주의자를 위한 준비"라는 데미안의 통찰과
🔹️ 싱클레어가 '외부의 신(부모)'에서 '내면의 신(자아)'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핵심내용이다.
🧐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 "두 세계의 붕괴와 자아의 재건"으로,
🔹️ 철학적으로는 "이분법적 세계관(선/악)의 해체와 내면적 통합의 과정"으로 표현하고 싶다.
😌 다시 이 두 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고 답을 생각해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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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1: 싱클레어는 술집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신을 파괴한다. 보통의 도덕적 관점(기독교적 이원론)에서 이것은 명백한 '악'이자 '실패'다. 하지만 데미안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시를 들며, "방탕아의 삶은 신비주의자를 위한 최고의 준비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싱클레어의 방황을 단순한 일탈로 봐야 할까? 아니면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의례'로 봐야 할까?
🔹️ 이분법의 초월: 기존의 세계(부모님의 밝은 세계)에서는 '방황'이 금지된 것이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이 방황을 통해 선과 악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타락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조차 나 자신'임을 자각하게 된다.
🔹️ 사유의 틈새: 데미안의 말처럼, 내면의 누군가(무의식적 자아)는 싱클레어의 의식보다 더 현명하게 그의 인생을 이끌고 있다.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는 과정은 껍질을 깨기 위한 진통이자, 기존의 낡은 도덕관을 허물어뜨리는 '사유의 틈새'를 만드는 작업이다. 즉, 타락 없이는 구원도, 통합도 없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 소결론: '타락'은 성장을 한 과정이자,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자신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각을 위해 필요한 성장통 같은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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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2: 싱클레어는 공원에서 본 소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이고 숭배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그녀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를 통해 싱클레어는 다시 '밝은 세계'를 구축하지만, 이것은 부모님이 주었던 과거의 밝은 세계와는 다르다.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를 통해 만든 '환한 세계'와 과거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 정신세계의 이동 (신→방황→사랑) : 과거(부모)의 수동적으로 주어진 규율, 의존적인 평화로부터 현재(베아트리체)의 "부서진 삶의 한 시기의 폐허들로부터 자신을 위해 지은 세계", 즉, 자신이 능동적으로 창조한 세계로 이동한다.
🔹️ 승화 : 싱클레어의 메모처럼 그는 성적 충동(방황)을 억누르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숭배와 기도'라는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승화)했다. 베아트리체는 실존 인물이라기보다, 싱클레어가 지향하는 '자신의 지향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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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3: 싱클레어가 그린 초상화는 처음에는 베아트리체를 닮았지만, 점차 데미안을 닮아가고, 나중에는 싱클레어 자신과도 닮은 묘한 모습이 된다. 그리고 텍스트의 마지막에 이르러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마저 시야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왜 싱클레어를 구원한 베아트리체는 사라져야만 했으며, 그 자리에 다시 데미안(혹은 운명)이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 자기 자신은 알 수 없는 침잠한 모습: 그림 속 얼굴이 데미안이자 곧 싱클레어 자신이라는 점은, 이제 그가 외부의 이상형(소녀)을 좇는 단계를 지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마주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 융합적 세계로의 진입: 베아트리체는 '밝은 세계'의 재건이었지만, 여전히 '밝음'에 치우쳐 있다. 하지만 데미안은 밝음과 어둠, 선과 악이 공존하는 '통합된 자아'이자 '운명' 그 자체다.
🔹️ 다시 데미안과의 연결고리: 이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친구'로서가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이자 자신이 도달해야 할 표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사춘기의 방황을 끝내고 진정한 자아 실현(개성화)의 길로 들어섰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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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합적으로,
🔹️ 싱클레어는 이 대목에서 바로 과거의 기독교적 이원론을 나타내는 두 세계를 극복하고,
🔹️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는 현대적 개인의 탄생 과정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
철학을 만나는 지름길/ 철학의 뒷계단
책을 읽는 즐거움,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즐거움,
나는 이러한 즐거움을 추구한다.
나의 박사 과정은 교육철학이다.
그리고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교육철학적 접근을 할 때 교과서 외의 다양한 이야기를 가미한다. 그러나 지식이란 끝이 없다.
김영사에서 이 책이 나왔을 때 줄 곳 관심을 두고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이상이다. 책 한 권에 내가 알고 싶었던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토요일 대학원 강의를 마치고 학교 도서관에서 몇 주를 읽었다.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학부생들에게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 사상을 이야기 할 때 가끔은 나의 사심이 들어갔다. 위대한 교육 사상가의 이면에 역기능적인 부분을 발견하고 실망했던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책에서는 그의 행적을 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매독 걱정을 하면서 그들과 상종했다. 그러다가 호텔에서 단순한 일을 하는 아가씨와 알게 되었고, 몹시 애를 써서 그녀에게 읽기를 가르쳤다. 그리고 23년 동안이나 함께 살고 난 다음 마침내 그녀와 결혼했다. 위대한 교육이론가인 루소는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자신의 다섯 아이를 모조리 고아원으로 보냈다.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게 굴고 또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던 점은 정말 아이러니컬하다.
우리는 흔히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를 악처로 기억한다.
남편의 철학 활동을 못하게 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창문에서 남편의 머리 위로 더러운 물을 쏟아 붓거나 남편의 뒤를 따라와 사람 많은 시장에서 외투를 벗겼다.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를 다룰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도 잘 다룰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했다.
크산티페는 남편 소크라테스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무엇을 얻었을까?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의 악행을 피해 못마땅한 집을 떠나 더욱 열심히 철학적인 토론에 몰두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면 그는 절대로 유명한 사상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아내가 소크라테스에게 철학하기를 방해하려고 한 일로 그는 더욱 더 깊이 철학할 수 있었다.
17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이자 근대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배우들이 이마에 부끄러움이 나타나지 않도록 가면을 쓰고 등장 하듯이 나도 세계라는 무대에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데카르트는 수수께끼의 철학자다. 오늘날 까지도 그의 가면은 완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 속한 소아시아지역의 상업지역 밀레토스 출신의 영리한 남자 탈레스가 2500년 전에 최초로 철학을 시작한 이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파스칼,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을 대표하는 34명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압축해 놓은 책이다.
많은 사상가 중에는 이전에 깊이 알지 못했던 철학자도 있다.
한 권으로 압축된 분량 속에서 대표적인 사상과 철학 세계가 너무 쉽게 풀이되어 있다. 소설을 읽듯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의 내면으로 들어가 본 시간이었다.
철학이란 용어의 딱딱함과 지겨움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리는 책이다.
너무나 재미있고 흥미로워서 학부생들의 시험기간 그리고 토요일을 포함한 주말의 시간을 이 책과 함께 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수업 내용과 곁들여서 첨가해 줄 내용은 요점을 정리해 저장해 두었다.
삶에서 철학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교육 철학 이란 학문을 만나면서 나에게 철학은 삶의 전반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울러 철학 사상가의 전기나 그들의 저작을 통해 통찰의 순간을 맞이하길 원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길다고 해도 짧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뀌어 있을 무상한 것들을 잠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았던 순간을 돌아보게 된다.
언젠가 우리는 죽음이란 마지막 목표를 앞에 당도할 것이다. 본인의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세상일을 다시 본다면 아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소크라테스의 조산술, 산파술,
플라톤의 형이상학
돌이켜보면 사물의 본질에서부터 우리는 질문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철학자의 길을 따라가며 이어진 질문들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사상을 해석하는 시간은 엄청난 즐거움이었다.
철학적 물음과 사유의 시간, 논리학을 파고드는 길고 긴 여정.
수학적인 정교함을 갖춘 논리체계의 철학에 언제나 매료 된다.
철학은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자신의 세계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다면 이 책 읽기를 권한다.
많은 사유의 시간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순간들은
학문의 즐거움에 빠져있었던 나날이다.
2500년 서양철학사를 대변하는 사유의 전사 34명과 함께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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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괴물이 갑자기 ‘선샤인 보이’로 돌변하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과거의 나’를 말하면서 이제는 깨끗한 새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변화는 조금씩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변화는 어느 순간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닦는 일은 평생의 과정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디트리히 본회퍼, 막시밀리안 콜베, 또는 테레사 수녀 같은 위대한 영웅과 성자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
이제껏 성취한 모든 것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 덕분이라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부류가 성공하고 나면 오만방자해진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은 금수저가 아니어서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면서 비관론에 빠지거나 나름대로 이리저리 정체성을 짜맞춰보려는 시도를 한다. 반면 제3의 길을 가는 사람, 자신의 소명을 찾고, 자신의 신의 사랑을 받는 피조물임을 깨닫는 사람은 지나친 오만과 겸허에 빠질 위험을 모두 피해간다. 그럼 성공에 이르더라도 겸허한 자세와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게 된다. 내가 능력을 가진 것이 나만의 공적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이 나와 같지 않기에 타인임을 인정할 때, 공감이 시작된다.
인간관계에서 지나친 감정이입 능력은 해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다툴 때에는 상대방 입장에 서 보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과 공감이 요구하듯 그것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만일 당신이 위기상황이나 생존의 위협에 직면해 있거나 육체적 고통을 겪는 중이라면 누가 더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통을 이해하고 차가운 머리를 유지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일까?
공감능력을 예찬할 때, 우리는 자신과 이웃 간의 차이를 지우게 되고 적절한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주로 미디어를 소비할 때에만 동경심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상대하기 편한 이웃이라는 것도 허튼 소문에 불과하다. 심리학자 블룸에 따르면 오히려 정반대다. 타인을 주도면밀하게 학대하고 괴롭히는 사람들 중에는 뛰어난 공감능력을 가진 경우가 종종 있다. 오히려 타인에게 무심한 사람들은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렴. 네가 만날 사람들은 모두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니까.”
제대로 된 공감에 대한 최고의 조언이 밥 딜런의 자서전에 들어있다. 그 책에서 밥 딜런은 자신의 할머니를 고상하고 친절하며 현명한 여인으로 그리고 있다. 위의 글의 밥 딜런의 할머니가 건넨 조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정의’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만 정작 정의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도대체 ‘정의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또 ‘공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격식 없이는 무격식도 없다. 내면 깊숙이 규칙을 받아들이고, 올바르고 적절한 행동을 오랜 시간 연습하며 체득한 사람만이 격식에 이곳저곳 변형을 가하며 즉석에서 응용할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규칙을 내면화한 자만이 힘들지 않게 규칙을 다루고, 규칙에 익숙한 자만이 그것을 우회하는 법도 안다. 늘 넥타이를 매던 사람이 옷깃을 풀어헤치면 꾸밈없는 인상을 주지만, 항상 헐렁한 차림으로 다니던 사람이 양복을 입으면 변장한 원숭이처럼 어색하게 비치는 법이다. 규칙을 깨려면 먼저 규칙에 통달해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용서를 받았다.
인간은 타인에게 훨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충분히 스스로에게 관대하니, 타인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져도 된다. 우리는 완벽한 부모가 아니고, 완벽한 형제도 아니다. 우리는 완벽한 배우자와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 또한 절대로 완벽한 아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용서와 관대함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자주 곤란한 상황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일단 그것이 이익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웬만큼 철이 든 대여섯 살쯤 되는 꼬마들은 거짓말 하는 쪽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는다. ‘네가 꽃병을 깨뜨렸니?’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네’라고 대답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이고, ‘아니오’라고 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나이를 먹고 삶이 복잡해질수록 거짓말도 덩달아 복잡해진다. 단순한 거짓말이 집채만 하게 커져 버린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경고 메시지는 거짓말은 끝없이 가지를 치는 골치 아픈 특성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처럼 무성하게 자란 거짓말은 결국 한눈에 파악하기조차 힘들어진다.
“내 안에 도사린 범법자를 응시하세요!”
이것이야말로 솔제니친에 필적할 만한 통찰이 아닌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안에서는 거센 반발이 치솟아 오를 것이다. 하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잘못을, 특히 거짓말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
어려움도 삶의 일부이고, 고통도 나의 것이다.
기분이 엉망이면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안 좋을 수도 있다고 상상해보라. 어두움 없이는 밝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온, 쿨함, 태연함 같은 가치들도 물론 멋지고 좋다. 그러나 고통 앞에서 초연한 척 꼼짝도 하지 않는다면(어차피 아무 소용도 없는 걸, 200만 년 후에 돌아보면 일도 별 것 아닐 거야 등,), 또는 정반대로 고통을 깡그리 없앨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당신은 어딘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리셋 버튼은 그런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상처를 감수한다는 것은 굳이 늘 사랑받고 존중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못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늘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 만인의 연인이 되려는 사람은 억지웃음을 띠며 살아가야 한다. 사랑만 받는 것을 원치 않는가? 그럼 남을 깨물 수도 있어야 한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깨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실제 그런 생동을 취할 상황과 맞닥뜨릴 일이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