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은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찬국 씨의 책 중 세 번째로 읽는 책이다. <그동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읽기>와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를 읽었다. 전기가오리에서 호평을 들은 몇 안되는 교수님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내가 읽었던 두 작품이 꽤나 만족스러워서 세 번째 책까지 집어들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은 나에게 꽤 익숙한 이름이다. 도서관 철학과 사회과학 코너 한켠에서 항상 보이는 이름이었고, 주요 저서들 또한 흥미가 가는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헌데 익숙하기만 하지 뭐하는 양반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게 흠이다. 예전에<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와 <사랑의 기술>을 잠깐 집어든 적이 있지만, 수치스럽게도 거의 다 읽지 못한 채 도로 반납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에리히 프롬과의 인연을 박찬국 씨가 이어주어서 참 감사할 따름이다. 그것도 아주 재밌게 말이다. 왜 그 대중서 특유의 그 느낌 있지 않은가, 똑같은 말만 반복하거나 너무 깊이가 얇거나, 글쓴이 TMI만 남발하거나.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걱정을 싸악 내려주었다. 대중서치고 생각보다 깊이있고 일목요연하게 프롬의 사상에 정릭되어 있고, 그의 사상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또한 알기 쉽게 잘 짚어주신다. 역시 박찬국씨다
에리히 프롬은 독일 철학자이다. 그는 소유욕강한 어머니와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걱정을 많이 하고 집착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자랐다. 그런 양육환경때문일까, 프롬은 결혼한 여성들도 한참 연상에 자신을 포용해줄 사람들은 만나게 된다. 프롬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은 불교, 유대교,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이 있는데, 한때 프로이트의 사상에 매료되기도 하였으나, 인간관계에서 성적 욕망을 위주로만 강조하는 프로이트의 사상은 비판적으로 견지하였다. 어릴적부터 유대교 사상을 받아들였고, 커서는 유대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이 편협한 민족주의라고 생각하고 등을 돌렸다. 프롬은 정신분석학에서 놀라운 성취를 거둔 정신분석학 학자이자, 전쟁반대와 사해동포주의를 외치며 인류의 평화를 위해 열심히 운동하는 운동가이기도 하다.
프롬의 사상은 실존주의적인 측면도 있다. 프롬은 인간에게는 동물과 구별되는 실존적 욕망이 있으며, 이 욕망이 좋은 쪽으로 발현되어야 자유로운 삶을 살수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실존적 욕망(결합,창조,헌신)이 좌절되어 고독감,무력감,허무감에 빠진다. 게다가 사람의 인생은 존재지향적삶과 소유지향적 삶으로 나뉘며, 비록 근대현대 사회는 소유지향적이며 네크로필리아(생명보다 죽어 있는 인공물이나 소유물에 집착)적 성격이 짙지만, 존재지향적 삶을 살아야 하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프롬은 또한 종교적 측면에서도 할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프롬은 명상을 하고, 불교의 선이라는 것에 호평을 하였기도 하다. 프롬은 종교가 가지는 성격을 크게 두 가지로, 인본주의적 성격과 권위주의적 성격으로 나눴다. 인본주의적 성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의 참된 역할, 신을 본받는 삶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이고, 권위주의적 종교는 기복신앙적이며 교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의 종교들이 두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서 권위주의적인 폐해가 곳곳에 있는데도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프롬에 대해서라면 마조히즘과 사디즘에 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프롬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근대인들이 택하는 방식이 대표적으로 마조히즘과 사디즘이 있다. 흥미로웠던 점은 사디즘음 희생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희생자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또한 마조히즘은 자아를 마조히즘적 속박에 내맡김으로서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을 망각하는 방식으로 불안에서 벗어나 안정감을 취하는 행동으로 본다는 점이 통찰력있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그의 생각이 다 맞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큰 의의를 갖는 건 사실이다. 이 책을 읽은 뒤에 에리히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을 것인데, 이 책을 통해 배경지식도 쌓고 프롬의 사상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어 매우 유익했다. 프롬의 다음 책들이 기대가 된다.
큰 성공 안에 쇠망의 씨앗이 들어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p.96)
이 책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내가 언젠가 역사서를 읽다가 생각한 것을 시작으로 책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에서였다. '제국은 왜 흥망을 반복하는가?' 말이다. 여러 역사서를 읽다 보면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제국도 결국 서서히 무너지고, 절대 커지지 못할 것 같은 제국도 서서히 성장한다. 그리고 그 성장한 제국도 결국에는 무너진다. 그저 생태계의 원리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동안 읽은 책 앞에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랫동안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글로 써오신 저자의 저력을 완전히 느꼈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정확한 포인트로 짚어내고, 간결한 부제로 묶음으로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저 오랜 역사 속 이야기들을 마치 오늘날의 이야기로 바꿔주는 느낌이랄까.
경고음이 처음 울릴 때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주의해야 한다. (...) 로마공화정 말기에도 현명한 정치가가 있어 꼭 필요한 개혁을 과감히 시행했더라면 어떠했을까. (p.77) / 지도자의 능력이 몽골제국의 역사를 좌우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p.88) / 누구든 안팎으로 문을 모두 걸어 잠그면 스스로 질식하고 만다. 전성기에 오스만제국이 보여준 개방성과 종교적 관용에서 터키공화국이 새 희망을 발견하였으면 한다. (p.167)
이 문장들은 나라에도, 조직에도, 어쩌면 개인에게도 참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대부분의 실패는 경고음이 처음 울릴 때만 해도 바로잡을 수 있다. 비록 아픔이 따르겠지만, 그런데도 바로잡을 수는 있다. 수많은 역사는 그저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우리 삶에 거름으로 삼아야 하기에 우리나라에, 우리 조직에, 내 내면에 울리는 경고음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반대로 나라가, 조직이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하나의 경고음이 될 필요도 있겠다. “애초에 시민은 공직에 나갈 길이 차단되어 있었고, 귀족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시민들의 불만은 당연했다. 기원전 494년부터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후 200년 동안 시민은 점점 많은 권리를 쟁취하였다. 고대 역사에서 보기 드문 쾌거였다. (p.41)”의 문장에서 느낄 수 있듯, 혼자서는 작은 목소리라도 모이면 큰 경고음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높은 곳에 계시는 분들은 하나하나가 모이면 무서운 경고음이 될 수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고 이끌어가셔야 할 테고.
이 책을 읽는 내내 단순히 과거의 것을 정리하고 풀이해주는 느낌이 아니라, 역사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세계가 어떻게 흐를지를 이야기해주는 느낌이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역사를 재미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미 지나가 버린 이야기”라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역사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유행도 돌고 돈다. 유행이 10년이나 5년을 주기로 돈다면 역사는 조금 더 큰 주기로 돌고 돌아 우리의 삶을 채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좋은 점은 살리고, 나쁜 점은 미리 대비하여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이제는 역사를 고쳐 말하고 싶다. “지난 시간으로 내일을 대비하게 하는 것”이라고. 아마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동안 역사를 어렵다고 생각하여 피하기만 했다면, 이 책을 권해본다. 아마 이 책을 통해 역사도 재미있는 거구나, 뭔가 많은 것을 남기는 거구나- 하고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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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입문서. 페미니즘에 흥미는 있는데 그게 뭐야?라거 묻는 모든 이에게 추천한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용어가 아니다. 페미니스트는 비하도 조롱의 대상도 아니다.
인권을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자라면 “너 인종주의자 같아”라는 말이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말인가. 그런데 “너 페미니스트 같아”라는 말은 어쩐지 비난의 말로 들리는 건 왜일까. 우리 사회는 어떤 프레임으로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를 규정하고 있는가. “난 평화주의자야”, “전쟁반대론자 맞아”, “난 기독교도야”라고 나의 신념을 밝히는 것이 자연스러운만큼 “난 페미니스트야”라고 편안히 말할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