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
이기주의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과 동등한 존재, 똑같은 욕구를 지니고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한 명의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러한 까닭으로 개인주의자는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다르게 오히려 공동체를 소중히 여긴다. 공동체를 개인의 대립항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오럿이 개인인 상태로 머물게 하는 일종의 보호막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는 집단과는 다르며, 개인주의자는 연대의 중요성을 안다. 집단의 규칙이기에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서 다른 개인과 연대한다. 타인도 자신처럼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타인의 욕구와 감정 또한 자신의 것만큼 중요시 여긴다. 자신의 권리가 소중하기에 그만큼 타인의 권리도 존중한다.
12p.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리하여 자신이 누군지 알고자 끊임없이 애쓴다. 반면 타인에 대해서는 쉽게 규정짓는다. 성별, 학벌, 출신지, 결혼 여부 등으로 뭉뚱그려서 파악한다. 자신은 너무나 복잡한 반면, 타인은 너무나 단순한 대상으로 취급하곤 한다. 각각의 정보마다 특정한 값을 설정해둔 다음, 해당 값에 인물을 가져다 맞춘다. 물론 어떤 의미엣 ㅓ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사람들은 바쁘고, 시간은 부족하니 말이다. 정보마다 특정 값을 설정하여 해당 값을 모두 더하는 것은 사람을 파악하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보 값이 편견과 선입견에 근거하여 틀린 경우가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그러한 방법이 과연 옳은가 하면, 그렇게. 도출해낸 결과값이 누군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그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57p.
우리 사회에서 주류 혹은 다수의 관념에서 어긋나는 많은 영역에는 이러한 요구가 존재한다. “본인들이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내가 궁금한 건 왜 굳이 거리에서 남들 다 보는 곳에서 저런 행동을 하느냐는 거지.” “자기가 성폭력 피해자면 피해자지 왜 굳이 저런 이야기를 만날 하고 다니지?” “이혼했다고 난 특별히 편견 없어. 근데 왜 굳이 저런 말을 해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 “여성 인권이 더 열악한 거 잘 알겠는데, 그걸 왜 티를 못 내서 안들이야?”
이와 같이 소수자, 마이너적인 정체성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되, 티 내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을 ‘커버링’이라고 부른다.(…) 요약하자면 “어떤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그 낙인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행위”를 이야기한다.
98p.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언행이나 인식이 특별히 더 나쁘거나 무지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보편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아이랑 놀아줄 바에 차라리 회사에 나가는 것이 나을 정도로 육아가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집에 머물고 있거나 실질적인 ‘돈‘을 생산하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쉬고 있다‘는 말을 무신경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주부를 백수의 동의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수라는 사실을.
또한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속으로 발끈하며 굉장히 화를 냈던 것은 실은 나 자신이 어느 정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나 역시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타이틀과 직함을 중요시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집에서 쉬고 계시는 거네요?” 라는 질문을 통해 나는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101p.
책 속에서 그는 “남의 시선을 어떻게 이기나요?”라는 질문에 “이겼다기보단 견뎠어요”라고 대답한다. 마음으로는 이기고 싶었지만 사실은 이기질 못했다고. 그래서 신경은 쓰였지만 그냥 견뎠다고.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은 그림을 그리고 싶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생계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청소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밥벌이‘수단이기 때문에 견디는 것이라고. 그 말에 왠지 묘하게 위로를 받았다. 그 말에 기대어 이후의 많은 순간을 견뎌왔던 것 같다.
실은 견디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116p.
딸들은 지금의 젊은 여성들처럼 키우면 된다. 좋은 것은 좋다고, 싫은 것은 싫다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여성이라는 이름에 따라오는 부당한 압력에 순응하지 않도록.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설사 성폭력을 겪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며 수치스러워하지 않도록. 누군가 밀쳐서 넘어지면 울지만 말고 일어나서 싸우도록.
133p.
“내가 한 것이라곤 살아남은 것뿐인데 나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허스킨즈 역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살아남았기 때문에 모든 사건이 밝혀진 이후에도 끊임없이 진실성을 의심받았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완벽한’ 피해자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악마‘나 ’괴물‘처럼 철저하게 악의로 똘똘뭉친 ’완벽한‘ 가해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완벽한‘ 피해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피해자는 없다.
159p.
그래도 나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늘 웃기만 했다. 예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내면 그드이 비웃고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다른 많은 여성 중 하나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기는 싫었다. 계속해서 쿨한 사람이고 싶었다. 너무도 격하게 남성 커뮤니티의 일부에 속하고 싶었다.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웃고, 같은 방식의 농담을 하면 그들이 가진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같이 웃었다.
162p.
눈치는 약자의 언어라고 한다. 본인들도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그토록 무신경하면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용감한 시도를 하 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해도 되기 때문이다. 줄곧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듣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검열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대응을 하는 것조차 힘들다. 또한 부류편함을 표현하는 순간마저 침착함과 상냥함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몰라 두려우니까.
173p.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내가 사는 세상과 그가 사는 세상이 같지 않다는 것을. 돈을 번다는 것과 ’살 만하다‘는 것의 의미가 꼭 같지는 않다는 것을. 하루 종일 노동을 해서 돈을 벌 수는 있지만, 그 삶이 반드시 인간답다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295p.
별것도 아닌 말을 듣고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는가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했는데, 아마도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알고 있어서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했던 말이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싫어하는 게 너무나 많은 나. 비뚤어진 나. 부정적인 나. 그런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나 자신.
296p.
그러고 보니 무언가가 괜히 마음에 들지 않거나 거슬리던 때는 늘 비슷했던 것 같다. 타인에게서 내 안의 어떤 거슬리는 지점을 찾아냈을 때.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어 발버둥치는 사람이 보기 싫게 느껴지던 순간은 내 안에 인정욕구가 갈급한 상황이었고, 타인의 비위를 맞추려 무리하는 사람이 괜히 눈에 밟히던 때는 내 안에 비굴함이 넘치던 시기였다. ‘쿨한 척‘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고 우스워 보일 때는 나 지신이 냉소로 가득할 때였다. 누군가의 속내를 간파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은 내가 그와 같은 속내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세상이 악의와 음모로 가득해 보이던 때는 나의 내면이 황폐하던 시점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불만이 극대화되었을 때,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을 때 분노는 늘 밖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뻗어나간 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나의 어떤 지점을 타인에게서 정확히 찾아냈다. 그리고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잊기 위해, 내가 싫어하는 나의 단점을 지닌 상대방을 맹렬히 미워하곤 했다. 내가 현재 미워하는 상대방의 속성이 분명 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했다.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범죄소설의 대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자전적 소설이자 유일한 로맨스 소설!
📚영화 <캐롤> 원작소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저자의 <캐롤>!
💭두 여인의 금기된 사랑! 미국 아카데미 6개 부문에 후보에 오른 영화 <캐롤>의 원작소설! <캐롤>은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자, 유일한 로맨스 소설로, 첫 작품 집필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시기에 얼마라도 벌기 위해 맨해튼에 있는 대형 백화점에서 인형 판매 사원으로 일하던 중 딸의 선물을 사로 온 모피 코트를 걸친 금발 여성에게 매혹된 후 바로 플롯을 짜로 스토리를 썼고, 그 다음날 본격적인 창작에 돌입해 완성시킨 작품이 바로 <캐롤>이다. 동성애자였던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1950년대 미국이라는 시대 배경에 사회적 지탄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란 듯이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결말을 주는 이 작품은 캐롤이라는 인물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대해 다룬 작품이다. 자신들의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자 하는 삶을 변화시키려는 두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시대를 초월하는 문학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저자가 레즈비언 소설가 딱지가 붙을 것을 염려하여, 1952년 '클레어 모건' 이라는 필명으로 책을 출간하였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 이 작품은 저자가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 말년에 이를 때까지 이를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 <캐롤> 이 아니라 <소금의 값>으로 출간했었고, 1990년에 <캐롤>로 재출간하여 자신이 이 작품의 저자였다고 밝혔다. 참고로 <캐롤>은 출간 당시 100만부가 팔려나갔다고...
💭이 작품은 2015년 토드 헤인즈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이 되었다.(주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아카데미 6개 부문 노미네이트). 이 작품은 퀴어 로맨스 형식을 띠는 작품이지만, 사랑의 본질, 자기 정체성의 발견, 그 당시에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 그린 작품으로 그 시대에 대한 저항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두 여성은 1950년대 미국 사회에서 금기된 사랑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숨기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극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랑의 진정성과 감정의 깊이를 강조하여 테레즈와 캐롤과의 관계를 그려냈다. 테레즈는 처음엔 수동적이고 불확실한 인물이다. 하지만 캐롤과의 여행을 통해 자신의 욕망과 삶의 방향을 자각하게 되고,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한 작품이다. 캐롤은 이혼 소송 중이며, 딸의 양육권을 두고 사회적 압력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데, 이는 사회적 지위와 가족을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저자는 동성애를 사랑의 한 형태로 그려냈다. 성별이나 사회적 조건을 넘어서, 사랑 그 자체의 힘과 아름다움이다.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선택하였고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모습으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인물인 캐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페미니즘적 시선을 갖게 된다.
💭사랑의 이야기이자, 자아와 사회, 자유와 억압, 여성성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다루는 이 작품은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젊은 무대 디자이너 지망생 테레즈와 상류층 여성 캐롤의 만남과 사랑! 문체가 절제되고, 감정의 과잉 없는 소설이지만, 충분히 읽는이의 마음을 흔드는데 충분한 작품이다. 테레즈의 내면 독백은 혼란과 설렘을 느끼게 하고, 두려움과 확신 사이를 오가며,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아름다운지를 잘 보여준다. 캐롤을 단순한 이상형을 그려낸게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현실적인 인물로 그려냈다는 점.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자유와 자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1952년 당시, 동성애를 다룬 소설을 대부분 끝에서는 비극으로 끝낸다. 하지만 이 작품은 희망적인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시대를 앞선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감정의 진정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품! 문학적, 사회적, 감정적 깊이를 모두 갖춘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작품이다. 저자의 진심과 경험이 녹아든 작품이라 그런지, 감정의 진정성이 강하게 느껴지고, 영화와 함께 소설로 다시 주목받음으로써, 시대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저자는 유명한 범죄 소설의 대가이다. 그녀가 쓴 유일한 로맨스 소설이 바로 <캐롤>이다. 저자의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특별한 작품! 사랑의 본질과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문학적 성취가 있는 작품이니, 꼭 한번 읽어보길! 읽다보면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캐롤#퍼트리샤하이스미스#로맨스소설#퀴어소설#동성애#영미소설#미국소설#소설리뷰#소설추천#책장파먹기#책리뷰#책추천#캐롤영화원작소설#원작소설#영화화#도서리뷰#도서추천#그책출판사
🌆우리는 도시종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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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유토피아인 동시에 디스토피아이다.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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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미국 민족학자 겸 행동연구가 존 B. 칼이 쥐를 고밀도로 풀어 '쥐의 도시'를 만들었어요. 이 지뒬이 점차 '지옥'으로 바뀌며 새끼 방치, 비행청소년, 사회부적응자, 두목, 성욕과잉과 동성애 성향까지...
급격히 변하는 도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쥐들이 변한 모습은 지금의 우리 도시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아요.
🪓
기후, 식량부족, 전염병, 자연재해, 전쟁, 약탈, 학살까지
다양한 이유로 멸 당한 도시 'metropolis'의 역사를 #브릭독 에서 함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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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시작인 문명의 탄생과 동시에
목욕, 먹거리, 다양한 여가문화가 생기고 음악, 미술, 수학, 천문학, 광학, 의학, 공학 등의 학문들 또한 발달해요.
도시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고
다른 도시의 사람들이 또 궁금증을 가지고 방문하며 교역이 이뤄지며 거대한 망이 형성되며
그 망을 따라 도시가 또 커져가요.
💎
사람이 모이고 희귀품이 오가며 돈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 계속 세워지고 높아지는 마천루를 따라 어두운곳에 쌓여가는 페기물과 동물의 사체, 버려진 소수자의 인권이 점점 썩어가고요.
인간의 돈, 금, 귀중품의 소유욕은 점점 커지면서
서로 뺏기위한 전쟁이 일어나고, 누군가가 망해야만 끝나요.
🛤
이 도시 또한 무언가를 짓밟고 뺏어가며 지켜낸 자리이고 견고함일지도 몰라요. 그럴수록 더 당당하게 주체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어야겠어요. 청계천처럼 자연과 더불어 이 공동체를 지키고, 폐기물과 쓰레기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대체에너지를 활용하고 녹지를 키워갈 수 있는 도시개발이 지금부터 미래를 위해 당연하게 진행되길 바래요.
🙏
브릭독이 아니었으면 절대 완독하지 못했을거에요. 책을 읽고싶지 않아 피해다녔던 과거의 나, 그래도 버텨냈던 또 다른 나를 칭찬합니다.
🏙 함께 읽어주신 브릭독 여러분 감사합니다 ♡
융 @yoongs_books
챠챠라 @yooou_hui
세이지 @bookisage
소나기 @summerrain1927
심플 @simple.p.c.e
보통 @botongbook
미실 @reviewer_0003
현기 @agatha_791115
현경 @kyeong_words
경애 @thebooklog_kaka
은정 @silverpapa03
봄 @jenny.the.reader
선먀 @sun__book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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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 울림을 나누는 울림zzzz입니다
🫧 이 울림이 오래 이어지기를.... @uz_zz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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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metropolis#인류문명사#벤윌슨#매일경제신문사#매경출판#도시역사#인문교양#벽돌책#북스타그램#책스타그램#서평#리뷰
다큐멘터리 감독 이은혜와 마주 앉은 일이 있다. 그는 영화제가 끝나면 곧 출국할 예정이라 했는데, 한국에선 결혼을 할 수가 없는 때문이라 했다. 동성 간 결혼을 한국은 막고, 미국은 허용한단 이야기. 그러고보면 몇년 전 그런 뉴스를 접한 것도 같았다.
2015년 미국 연방 대법원 결정으로 50개 주 모두에서 합법화된 동성결혼 이야기를 나는 저기 케냐 북부 자연보호구역에서 기린 개체수가 급감한다는 사실처럼 여겼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테니까. 그러나 가까운 이들마저, 존중하고 존경하는 이들까지도 동성애에 혐오를 감추지 않으니 나는 이것이 더는 내 문제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혐오가 인간을 잠식하는 비결이 무지와 무관심, 쫄보근성에 있단 걸 알기에 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레즈비언도 산부인과도 관심 없는 내게 이 또한 사람과 병원의 이야기란 걸 알게 해줬다. 여기까지.
기묘한 한국사
책을 잡으면, 특히 재미있는 책을 잡으면 아무리 바쁜 일도 제쳐두고 책 속에 빠져 드는 버릇이 있다.
'기묘한 한국사' 벌써 제목이 나를 끌어들인다.
다음 주 강의 준비가 태산 같은데 책상 위의 책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느낌이다.
금요일 늦은 시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역사와 관련한 책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다.
소설보다 재밌고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한국사 미스터리라니!
이 보다 더 구미를 당기는 책이 있을까?
책 속의 내용은 내가 이미 다른 책을 통해 알고 있었던 내용도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이 더 많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어떤 부분을 읽을 때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어떤 부분의 역사를 읽을 때는 통쾌해 지는 시간을 지나며 주말 동안 이 책 읽기를 끝냈다.
책을 읽고 나니 우리가 왜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되는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준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투장이 심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 되었던 내용을 읽고 조금 놀라기도 했다.
투장은 남의 묫자리에 자신의 조상 무덤을 쓰는 것이다.
노비로 사는 것이 지긋지긋해 자식은 양반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노비들이 양반집 무덤을 파헤쳐 조상을 묻기도 했고, 권력을 가진 관리들은 탐해선 안 될 왕권까지 넘보며 왕실의 무덤을 침범했다.
명성왕후 시해의 핵심에 있었던 친일파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왕비를 죽인 자의 아들에게 국민의 배고픔을 덜어준 노고를 치하하는 훈장이 수여 된 이야기는 역사의 아이러니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아버지의 친일 행적으로 보낸 시간들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터라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알게 되었다.
나라 잃은 설움은 두 번 다시 이 땅에서 일어나서는 안된다.
일제침략하에서 독립이 되고도 미군 군정하에서 일본 앞잡이들이 정부의 중요 요직과 경찰로 다시 활동하며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한 내용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안일한 정치가 다시 재조명되며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부분에 힘이 실리기도 한다.
베일에 가려졌던 조선 궁녀의 사생활과 눈 감아주었던 궁녀들 간의 동성애와 조선시대 내시들의 권력에 놀라며 책에 더욱 몰입했다.
고려 시대 내시는 조선 시대 내시와 달랐다.
환관, 환자, 화자의 한자에는 '성' 상실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내관, 내시는 남성을 일컫는 말이다.
과거에 급제한 남성 문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데.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들과 성리학의 시조라 불리는 대학자 안향도 내시였다.
우리나라는 사고를 당한 아이들이 내시가 되었지만 중국은 한족이 아닌 이민족 포로에게 궁형을 내려 환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의 내시는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입양으로 가족을 이루고 살았으며 군주 아래에서 권력을 누릴 수 없었지만, 양반을 능가하는 월급을 받는 직업이라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부자가 가진 의외의 직업은 역관이었다. 역관이 되기 위해서는 외국어 공부를 해야 했고 역관을 양성하는 기관인 사역원에 입학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왕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번갈아가며 사림파와 훈구파를 배척하며 수 많은 사화의 역사를 낳았다.
그러한 가운데 이루어진 고문의 형태가 실로 잔인하기 그지없다.
세조와 조카 단종의 이야기는 tv 사극을 통해 여러 번 보았지만 책을 통해 읽으니 또 다른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된다.
오늘날 국민이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잡음이 있는가?
하물며 왕권과 주위를 둘러싼 세도가의 등 살에 백성들은 참으로 고단한 시대를 지나온 것 같다.
숙청과 권력과 또 다른 암투!
역사 속에는 예부터 많은 음모론이 존재했다.
우리 역사에 있었던 기묘한 일들을 한 권의 책으로 읽는 시간은 흥미진진함과 아울러 가슴 아픈 기억을 더듬는 시간이기도 했다.
책을 잡고 책 속에 완전히 몰입해 읽었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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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멈추지 않을거야
이 책을 선물 받고 한동안 책상 위 한 곳에 오래도록 놓여있었다.
책을 받았을 때 책 페이지에 있는 '고전 속 퀴어 로맨스'란 문구에서 나도 모르게 이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선입견이란 것은 가끔은 우리가 가 보지 않은 세계에 대해 어떠한 검증도 없이 마음의 문을 닿게 한다.
몇 주 전 대학원 강의 때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논하다 수업을 듣는 대학원생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강의 도중 한 학생이 동성애에 대한 부분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모두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맞다 안 맞다는 것을 나쁘다는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존중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으로 학생에게 나의 뜻을 전달했는데 좀처럼 본인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나는 수업을 듣는 전체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생각에 강의실의 모든 학생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 5분 발언권을 주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적이었다. 특히 현재 주변에 동성애 친구들을 곁에 두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의 모든 의견을 듣고 조금은 이해가 되었을까? 했던 나의 생각은 완전 오류였다. 처음 이 부분에 대해 질문했던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에 계속해서 논쟁이 이어져 "교수님 그냥 수업 계속해 주세요"라는 의견들이 쏟아지고 나서야 일단락이 지어졌지만, 강의를 마치고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학생에게서 문자가 왔다
"본인의 생각으로 수업 분위기를 흐려서 죄송합니다"
학생에게 답장을 했다. 개인의 생각들은 모두 소중하기 때문에 각자 존중 받아야 한다고.......
주말 연휴에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론은 이 책을 안 읽었으면 엄청난 후회를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책이 너무나 흥미로워 이틀 만에 완독했다.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의 귀족 계층에서는 남성들 사이의 사랑, 특히 성인 남성(에라스테스)과 미소년(에로메노스) 간의 관계인 파이데라스티아(pederastia)가 일반적인 문화였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 교육적인 의미를 가지는 경우도 많았다. 에라스테스가 에로메노스에게 지성과 덕성을 가르치고 멘토 역할을 하는 식이었다.
플라톤의 '향연'은 이러한 남성들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대화편이며, 다양한 인물들이 사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여기서 플라톤은 육체적인 사랑을 넘어선 정신적이고 이상적인 사랑, 즉 우리가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르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육체적인 욕망에 얽매이지 않고 아름다움 그 자체, 즉 미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이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고 강조한 것을 들어 그가 동성애를 고차원적인 사랑으로 여겼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문헌들을 통해 퀴어 서사를 탐색하고, 현대 독자들에게 퀴어 역사의 뿌리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고대에도 퀴어 사랑이 존재했으며, 그것이 단순히 일탈이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향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등 고전 문학 속에 숨겨져 있거나 왜곡되었던 퀴어 로맨스들을 끄집어내어 현대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이는 근대 이후 종교적, 사회적 이유로 퀴어 서사가 억압되고 삭제된 역사를 역행하며, 잃어버린 과거를 다시 찾아주는 작업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책의 저자인 숀 휴잇과 그림을 그린 루크 에드워드 홀 모두 퀴어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고전 문헌 속에서 자신들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발견했다고 고백하며,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이 책의 내용에 깊이와 진정성을 더한다. 고대의 퀴어 영웅들의 이야기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감각적인 삽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부분을 우리는 외면 시 하진 못할 것이다.
책은 사랑이 시대와 환경을 초월한 보편적인 감정임을 강조한다. 고대인들의 사랑 이야기는 현대의 우리가 겪는 사랑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독자들이 사랑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벗어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시각을 갖도록 돕는다. 신화 속 신과 인간의 사랑, 동성애, 양성애 등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접하며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고전 문헌들을 인용하고 해석하는 숀 휴잇의 글과 루크 에드워드 홀의 모던하고 경쾌한 삽화가 어우러져 책의 매력은 두 배가 된다. 책을 읽으며 이 주제에 대한 생각의 불편함에서 스스로 해방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고전이 가지고 있는 진중함과 현대 예술의 자유분방함이 만나 퀴어 로맨스에 대한 기존의 무겁거나 어두운 인식을 걷어내고 밝고 신선한 방식으로 접근한 부분을 높이 사고 싶다.
누구에게나 존중받을 권리는 있다. 그리고 모두에게는 가치관이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맞다, 아니다로 정의 내려지지는 못할 것이다. 도덕적, 윤리적 측면의 해석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나의 조심스러운 의견은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는 단순히 고전 속 퀴어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을 넘어, 퀴어 역사를 재구성하고, 사랑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긍정하며, 독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특히 고대 서사를 통해 퀴어의 존재가 결코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늘 존재해왔음을 증명하며, 퀴어 독자들에게는 소속감을, 비퀴어 독자들에게는 사랑과 인간에 대한 더 넓은 이해를 선사하는 책이다.
많은 신화와 역사 속 이야기, 그리고 저자의 탁월한 해석에 나도 모르게 이 책에 빠져들었다. 모두는 존중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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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3월 25일 목요일 밤, 부활절의 성 금요일을 하루 앞둔 밤. 단테는 잠에서 깨어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 두려움에 떨던 단테 앞에 존경하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영원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을 약속한다. 그리하여 금요일 저녁 지옥에 도착하고, 사후 세계로의 일주일간 순례가 시작된다. 단테는 지옥에서의 사흘, 참회와 회개의 공간 연옥에서 사흘, 그리고 천국에 가기 전 스승 베르길리우스와 헤어지고, 꿈에서만 그리던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아 천국을 경험한다. 이 책은 단테의 여정 중 지옥에서의 사흘간의 여정, 지옥의 9개 원을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프리태니커 인포그래픽 백과-광활한 우주>책에서는 우리는 별로 이루어졌단다. 우리 몸은 산소와 탄소 등 여러 가지 화학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원소들은 맨 처음에 어디에서 왔냐면 몇몇 원소는 폭발하는 별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또 다른 원소들은 빅뱅 순간에 생겼을 수도 있다고 한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우주로 다시 떠돌게 된다 치더라도, 만약 영혼이 존재한다면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가 우주의 모든 신비로운 현상을 알아낼 수 없듯이, 사후 세계를 추측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확률은 반반이다. 사후세계가 있거나 없거나. 없다면 다행인데, 있으면 어떡하겠는가? 죽어보니 사후세계가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스크루지 영감은 크리스마스이브날 죽은 친구 유령이 찾아와 사후 세계와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며 회개하며 자선을 베푸는 사람으로 변모하게 된다. 나는 단테의 <신곡>도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스크루지 영감처럼 사람들이 실제 겪지 못한 사후 세계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단정하건 없다고 단정하건 확률은 50%다. 그렇다면 지옥에 대한 인식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단테는 지옥을 어떻게 그려놓았는가? <아이네이스> 저자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의 9개 원을 여행한다. 지옥의 원은 죄의 성격에 따라 구분되며,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데 이를 ‘콘트라파소’라고 한다. 책을 읽을 때 죄에 걸맞은 콘트라파소를 유추해 보길 권한다. 또한 죄에 경중에 따라 형벌의 종류도 천차만별인데, 단테의 상상력은 가히 놀랍도록 상상을 초월한다. 중세 판타지 소설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다. 또한 단테가 살던 시절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로, 중세 말에서 근대로 가고 있던 시점이라 <신곡>에는 중세 가톨릭의 세계관이 곳곳에 드러나기도 한다.
인상적인 부분은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존 인물뿐만 아니라(단테는 정치활동을 하다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죽기 전까지 약 20여 년에 걸쳐 유랑 생활을 하며 집필한 책이다. 그래서인지 당대 인물뿐만 아니라 자신의 측근 인물들도 꽤 나온다.) 신화적 인물, 당대의 정치인, 교황, 지식인들까지 지옥에 배치하며 단테 자신만의 윤리적, 정치적 비판을 문학으로 풀어낸 것이다.
우리 인생길 바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1곡, 1-3행)
단테가 그린 지옥에는 어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있을까? 크게 스스로가 무절제한 자, 타인과 자신과 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자, 타인을 두고 배반한 죄를 지은 자들이 있다. 나는 단테가 그린 9고리의 지옥을 간단하게 모두 나열해 보고자 한다.
지옥의 첫 번째 고리에서 다섯 번째 고리까지는 개인의 무절제로 인해 벌은 받은 자들이 있는 곳인데 제일 첫 번째 고리에는 예수 탄생 전에 활동했던 사람들이 있다.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베르길리우스 등 수많은 학자들이 세례를 받지 않은 이유로 림보에 억류되어 있다. 두 번째 고리부터 진짜 지옥이 시작된다. 거기서부터는 사랑으로 삶을 버린 아킬레우스, 파리스와 헬레네, 트리스탄 등이 등장한다. 세 번째 고리는 거만하고 시기하며 남을 이기려는 탐욕을 지닌 자들이 영겁의 비에 고통받는다. 네 번째 고리는 세상에 공평하게 주어진 물질을 독점하거나 방탕하게 소비한 자들, 다섯 번째 고리는 스틱스 강의 늪에서 분노의 죄를 지은 자들을 그리고 있다.
천사가 지옥의 문 ‘디스’로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무거운 죄를 지은 자들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단테는 자신의 무절제는 자신만을 타락시키지만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자연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듯하다. 타인에게 의도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죄는 무겁게 보고 있다. 여섯 번째 고리는 해로운 사상을 믿고 퍼트린 이단자들이 가는 곳, 일곱 번째 고리에선 3개의 원으로 나뉜다. 제1원에는 폭군과 독재자들이 있는 곳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디오니시우스 1세 등이 있는 곳이다. 제2원은 자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한 자들이 있는 곳이다. 자살하거나 재산을 탕진하는 자들이다. 제3원에서는 하느님과 자연의 순리에 해를 끼친 자들이 모이는데 여기는 신성 모독자들, 동성애자, 이상성애자, 고리대금업자들이 있다. 자살하는 자를 포함시킨 것은 당대 기독교에서 범죄로 취급되었기에 그런 듯하다. 여덟 번째 고리는 원어로 말레볼제라 칭하며, 사람만이 범하는 죄, 배신과 기만을 다룬다. 이 고리에서는 10겹의 구덩이에서 10종류의 벌을 받고 있는 곳이다. 폭력보다 배신과 기만죄가 더 아래에 있다는 것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단테는 사회의 근본과 질서를 더 어지럽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1원은 금전을 목적으로 남을 성적 착취한 뚜쟁이들이 악마들에게 채찍질을 받는다. 제2원에서는 아첨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아첨을 이용한 자들이 똥물에 처박혀 있다. 제3원은 교황 니콜라우스 3세, 교황 보니파시오 8세(당시 현직 교황이었음),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등장한다. 그들은 종교를 이용해 금전과 권력을 취한 자들이다. 제4원은 점쟁이, 예언가가 등장한다. 미래는 하느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을 인간이 예언하는 것에 목이 뒤로 꺾이는 벌을 받고 있다. 제5원에서는 탐관오리들이 끈적끈적한 역청에서 허우적거리며 벌을 받는다. 제6원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이 납으로 된 무거운 망토를 덮고 걸어가는 벌을 받는다. 그중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유대인 제사장 가야바는 땅바닥에 못 박힌 채로 다른 죄인들에게 밟히는 벌을 받고 있다. 제8원은 모사꾼이 있는 곳인데 거기서는 불꽃에 휘감겨 있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트로이의 목마를 계획하여 악행을 뒤에서 조장했다며 벌을 받는다. 제9원은 무함마드, 알리가 있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를 분리했기에 분열을 조장했다는 죄목이다. 제10원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아버지와 죄를 저지르거나 유서 변조, 화폐 위조, 위증하는 위조자들이 질병으로 고통받는다.
마지막 9번째 고리는 지구 중심이자 지옥의 최하층이다. 코키토스는 지옥의 강들이 마지막으로 고이는 얼음 호수다. 이곳도 제1구역부터 제4구역까지로 나뉜다. 제1구역은 ‘카이나’로 가족과 친족들을 배반한 자들이 모여있다. 제2구역은 ‘안테노라’로 조국이나 단체를 배반한 자들이 모여있다. 제3구역은 ‘프톨로마에아’로 손님, 안전을 보장해 줬던 자들을 해한 자들이 모인 곳이다. 제4구역은 이우데카로 은인을 배신,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자들이 모여 있다. 이곳에는 유다가 있다.
신곡의 나오는 모든 죄를 적은 이유는 이 죄가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고, 살면서 혹시 내가 이런 죄들을 저지른 적은 없었나?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다.
단테의 <신곡>에서 죄인에게 벌을 내리는 모습을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형식을 띄고 있다. 죄에 상응하는 벌을 내린다. 미래를 예언하는 자들에게는 목이 꺾이는 벌을 주고, 탐관오리들에게는 역청을 뒤집어쓰게 만든다.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또한 현직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혹평이 많이 등장하는데, 잃을 것 없는 단테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고, 그의 대담성, 타락한 중세 교회의 모습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너는 <윤리학>이 하늘이 원하지 않는
세 가지 마음의 상태를 부절제와 악덕, 수심으로
널리 밝혀 내고 있음을 잊었느냐? (11곡, 79-81행)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단테가 죄를 나눈 기준점은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이다. 추가로 키케로의 <의무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도덕철학을 토대로 지옥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실 책을 읽으며 단테가 죄를 이렇게 나눈 기준을 어디서 참조했을까 궁금했는데, 이 구절을 읽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단테는 망명길 20여 년 동안 수많은 고전을 탐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성경,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의 저서와 철학자들, 그리스 로마 신화 인물들, 유다, 솔로몬 등 수많은 군상들이 등장한다.
인간이 영원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셨지요.
지금 제가 얼마나 기쁜지는, 살아 있는 동안
기록할 저의 말로 드러날 것입니다. (15곡, 85-87행)
…
내가 함께 있을 수 없는 무리가 저기 오고 있구나.
나의 책 <보전>을 기억해라.
아직 난 거기에 살아 있다. 다른 부탁은 없다. (15곡, 118-120행)
단테는 지옥에서 실제 자신의 스승이었던 브루네토 라티니를 만난다. 그는 단테에게 불멸하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라티니 또한 <보전>을 썼고, 자신은 불별했다고 자처한다. 단테는 7고리 꽤 깊은 지옥 밑에서 스승을 만났다. 스승이 지옥에 있는 모습을 본 단테의 심경은 애처롭기만 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단테 아닌가. 그는 스승이더라도 죄목에 대해선 단호했다. 스승은 뛰어난 업적으로 불멸했으나 남색(성적 문란)으로 철저히 심판받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무리 뛰어난 업적 앞에서도 죄의 심판은 피해 갈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제야말로 네가 나태함을 벗어 버릴 때로구나.
베개를 베고 이불 속에 누워 편안함을 즐기다가는
명성을 얻을 수 없느니라!
24곡에서 베르길리우스와 단테가 언덕을 오르며 나누는 대화는 인상적이다. ‘모든 사람이 개개인만의 언덕을 오르고 있다. 그처럼 저마다 인생의 수행과제가 있다. 내 인생의 수행과제는 무엇일까?’
나는 꽤 완전한 인간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옥의 가장 하부의 죄들을 보자. 가장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나도 누군가를 배신하라는 뜻도 아니다. 배신을 당했어도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뜻이다. 배신한 이에게 앙심을 품고 똑같은 행위를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지옥에서 일어날 법한 행동이다. 지옥이라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단계 위의 차원으로 즉, 다른 차원으로 노력해야 한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 스승과 힘겹게 언덕을 올랐던 것처럼(그것은 육체적 어려움이었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정이 있어야만 내 육체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아닌, 진정 내 영혼이 다다를 수 있는 최선의 길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20살, 대학 입학을 앞둔 겨울 동안 친구와 함께 일본어 학원에 다녔다. 일본어라니~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언어였는데 1학년 교양으로 제 2 외국어를 들어야 하고 어순이 같아 제일 쉽다는 친구의 주장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는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의외로 잘 맞아서 스스로도 놀랐던 것 같다. 그렇게 오랫동안 일본어 공부를 했다. 익숙해지려고 자막 없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중급을 살짝 넘어서면서 선생님께 추천받은 첫 소설책을 읽기도 했다. 그 책이 바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다. 고급반이 아니었기에 한 문장 한 문장 해석하는 데 급급했던지라 사실 일본 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저 내가 사전 없이 어느 정도는 읽어내려갈 수 있다는 사실에 끝까지는 읽었다, 할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줄거리는 대강 아직도 기억이 나고 우리와는 뭔가 문화가 정말 다르구나~하고 느꼈던 것 같다.
그 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을 다시 접한 건, <설국>에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한번 읽으면 그 하얀 눈이 가득한 이미지를 잊을 수 없다는 소설을 읽었을 땐, 그야말로 그 서정적인 문체에 푹 빠졌던 것 같다. 그래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작가는 내게, 언제나 이미지로 가득한 소설가다.
이번에 만난 <소년>은 좀 다르다. 물론 책 속의 모든 것들이 마찬가지로 선명하게 이미지로 떠오르긴 한다. 하지만 이 <소년>이라는 소설(소설로 분류되어 있다. 읽고 있으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지만)은 이미지는 뒤로 한 채, 도대체 50이 넘어가는 이 소설가가 어린 시절 써 놓은 일기장을, 편지를 들고 무엇을 하는가를 따라가며 그 시절 느꼈을 감정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노력한다는 건, 완전히 공감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일시적이든 아니든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는 때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보다 작가가 마치 자신의 고백인 듯, 아닌 듯... 수필인 듯, 소설인 듯 써놓은 이 <소년>이라는 작품을 통해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자신을 까발려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얼마 전 읽었던 프루스트의 <밤이 오기 전에>에도 동성애 몇 편이 등장하고 아마도 괴로웠을 작가의 심중을 대변하는 듯이 보였지만 <소년>은 그 표현과 감정이 너무나 적나라해서 오히려 읽는 이가 놀라게 된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 누군가를 온전히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번민이,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그때를 회상할 때, 자신을 보듬고 유지하고 성숙시켰던 한 시절의 애틋함은 언제나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글로 완성시켰어야 했을지도.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한 편의 글이었다.
퀴어소설을 몇 번 읽어봤지만 사실 이 책은 너무나 사실적이라고 해야할지, 너무나 tmi를 많이 알려준다고 해야할지,, 술술 읽기는 편했으나 스토리도 그렇고 아주 재미있거나 흥미롭다고 느끼지 못했고, 왜 박상영 작가의 책 중 가장 유명한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박상영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을 때나, 다른 책을 읽었을 때랑 다르게 조금 몰입이 힘들었던 책. 김고은이 나오는 영화를 봤었는데, 그 때의 남자 주인공과 책을 읽으면서 상상이 되는 남자 주인공이 너무 다르게 느껴져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화자의 이름은 정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뭔가 자꾸 작가가 연상되어 ...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저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없답니다ㅠ!!) 🤓
#삼색도#현호정
동성애 스캔들로 폐위된
세종의 두 번째 맏며느리 "순빈 봉씨"와
궁녀 소쌍과 단자는
궁궐 밖 여행을 떠난다.
왜에서 건너온 코끼리가 머물고 있는 창덕궁 후원으로. 🐘
크고 기이한 코끼리를 보러 가기 위해
경복궁 담을 넘어 창덕궁에 진입하는
이들의 무모한 여정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인 줄 알면서도
빠져들고, 뜨겁게 사랑하고
열렬히 아파하는 사랑은
무모하면서도 낭만적이다.
🌿
그동안 색안경을 끼고만 봤던
순빈 봉씨에게 또다른 이야기를 품게 된 이야기 :)
#위픽#위픽도장깨기#단편소설#순빈봉씨#2025_56
이른바 정상인과 다르다고 치부받는 소수인들의 심리 이야기이다. 자폐 스펙트럼, 반사회적 인격장애인, 동성애, 성의 금기사항,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격고있는 사람들의 특별한 마음의 형성과정과 원인 그리고 그들의 심리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있다. 그들이 왜, 어떤 이유로 정상과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것 같다.
내용은 동성애에 대한 잔인한 편견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살짝 진부하게 느껴지는데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이 아주 독특하다. 그리고 흑백 만화인데 2차원의 인물들의 표정이 3차원보다도 더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림체에서 감정이 잘절하게 느껴진다.
그 유명한 책인 '구의 증명'을 써내리신 작가님이다.
나는 주로 디스토피아 세계관이나 암울한 분위기를 띄는 책을 선호해, 타 SNS에서 추천받아 처음 접했다.
이 책의 세계관에서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졌다. 백신을 공급해도 계속되는 바이러스의 진화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정부도 무력화된 시점이다.
서술되는 관점은 총 5명으로 번갈아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내가 읽다보니 그 5명은 항상 새로운 시간대를 서술하는 것이 아닌, 중복되는 시간대를 각자 다른 시점으로 서술해 독서에 혼란이 올 수도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아가는 5명의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디스토피아라고는 설명했지만 로맨스도 섞여있어, 무작정 어둡기만 하진 않는다. 무엇보다 최진영 작가님 특유의 문체가 이 책과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
"극한의 상황에 치달은 인간성의 소멸은 과연 생존만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 사람의 본질인 것인가?"
+이 책의 로맨스는 동성애이니 주의하길 바란다.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능이 높은 사람일수록 훌륭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지만, 이 책은 그런 공식을 깨부수는 책이다. 지능이 높은 사람일수록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예를 들어 번식)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견해도 상당히 새로웠다. 이성애자보단 동성애자들이 더 많고, 보수주의자 보다는 진보주의자들이 더 많으며, 클래식 음악을 더 좋아하고 술 담배를 더 많이 한다는 내용들이 통계와 함께 기재되어 있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지능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그간에 생각들이 쉽게 깨질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한번쯤은 그런 것들에 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세상 지식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여성, 여성주의에 무지한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아직도 여성주의를 아는 것 자체로 비난받는 경우도 흔하다.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지만,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다. 두 경우 모두 지식이 특정한 사회의 가치 체계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 교양과 예의뿐 아니라 권력을 드러낸다. 왜 여자들이 취업하려고 하지? 장애인도 애를 낳을 수 있나? 왜 노인이 사랑을 해요? 동성애자도 실연당해요? 흑인도 철학자가 될 수 있나? (이주 노동자에게) 왜 한국에 왔나? 이 같은 질문은 남성, 비장애인, 젊은 사람, 이성애자, 백인, 한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혹은 용서받지 못할 욕망으로 간주된다.
여성은 ‘약자’일수록 여성으로 인식되며, 남성은 ‘강자’일수록 남성으로 간주된다.
이제까지 여성은 인식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 단지, 말해지는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 조각, 남자가 만든 판타지, 국민·시민·민중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動産)일 뿐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하지만 여성들은 안다. 장애인이나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때와는 다르게, 자기 권리를 외치는 여성을 사회가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여성은 ‘어머니’이거나 ‘창녀’일 뿐, 지식인이나 중산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과학적’ 여성운동은, 여성을 불쌍한 피해자로 재현하여 시혜자인 남성 주체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희생자화는 타자화의 가장 세련된 형태일 뿐이다).
‘정신 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상적인 모성애의 대상은 아들일 뿐이다. 이에 대한 가장 적실한 사례는 여아 낙태일 것이다. 딸은 자식의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만 명의 (여성이 아니라) 어머니들은 ‘어미의 본능’마저 거부하며 자발적으로 아이를 살해한다. 자녀는 성별에 따라 선택되는 것이다.
사실 ‘생계 부양자 남성/가사 노동자 여성’이라는 성역할 모델은 극히 일부 중산층만의 전형일 뿐,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은 생계 부양자이자 가사 노동자다. 하지만 여성은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 임금의 절반을 받고, 남성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성보다 더 많이 받는다. 잠재적 어머니로 분류되는 여성 노동자는 노동 시장 진입에서부터 임금, 승진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냐, 노동자냐’라는 정체성을 택일할 것을 강요받거나, 택일하지 못할 바에야 둘 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라는 생각 때문에 여성은 다 같다고 간주된다. 그래서 한 여성의 실수나 무능력은 언제나 전체 여성을 욕 먹이는 일이 된다.
남성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남성 명사에는 인(人)이 붙지만, 여성 명사에는 녀(女)가 붙는다. 우리말 여성형 지칭에서 유일하게 인자(人字)가 붙는 경우는 미망인(未亡人,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여자)뿐이다(이 용어는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가 뒤따라 죽는 인도의 사티 풍습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다).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만난 여성도 자신이 사적 영역에서 만난 여성의 연장으로 본다. 그들의 ‘휴식처’인 가정에서 만나는 어머니·누이와 ‘놀이터’인 술집에서 만나는 접대 여성이, 남성이 여성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과 동료나 경쟁자로 관계 맺어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것은 가부장제를 조금도 위협하지 않는 사건이지만,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그것이 강간이든 상간이든, 사회적 추방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시키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피해자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 아이를 남기고 폭력 가정을 탈출하는 여성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순결이 그러하듯이 모성애 역시 여성의 목숨과 맞바꿔야 한다는 남성 사회의 메시지다.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성이 자신의 성역할에 충실하며 집에만 머무를 때, 어머니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을 때 그녀는 나의 어머니다. 하지만 그녀가 욕망을 드러내며 집 밖으로 나올 때, 남의 어머니일 때 그녀는 아줌마다. 그녀가 집에서 내게 밥을 해줄 때는 어머니지만, 그녀 자신이 음식점에서 남이 해준 밥을 먹을 때는 아줌마다. 여성은 평생토록 서비스를 하는 주체이지 받는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서비스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여성은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여성이 공공 장소에서 자기 욕망으로 젖가슴을 드러낼 때 그녀는 필시 몸을 파는 여성이거나 ‘미친 년’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서라면 성스럽고 숭고하다.
한국 사회는 성폭력 피해 여성의 인권에 관심이 없으며, 성폭력과 성관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가장 섹시한 성관계는 성폭력이라고 믿고 있다.
하긴, 어차피 외로움이란 삶의 조건이어서, 결혼해도 외롭고 안 해도 외롭다. 시인 신현림의 표현대로, “여자에게 독신은 홀로 광야에서 우는 일이고, 결혼은 홀로 한 평짜리 감옥에서 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담당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배려, 보살핌, 사랑의 생산을 위해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별 분업인데, 남성들은 주로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가족이나 연애 관계에서 관계성을 경시 혹은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육체 노동, 감정 노동, 정신 노동에 무임승차한다. 관계에서 남성의 ‘과묵함’이나 모든 면에서 감정적이지 않으려는 심리는 이 때문이다.
남성에게 섹스는 (당연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하거나 못하는 것이지만, 여성에게 섹스는 좋거나 싫은 것이다. 여성에게는 남성과 다른 (차별적인) 규범이 적용된다. 여성이 섹스를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섹스를 잘하거나 못할 때, 그녀에게는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자, ‘걸레’라는 낙인과 추방이 기다린다.
여성은 남성의 벗은 몸을 보고 공포를 느끼지만, 남성에게 여성의 벗은 몸은 쾌락의 대상이다. 남성은 돈을 지불하면서 여성의 몸을 즐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무게는 절제와 인내력 등 자기 관리의 지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인격과 정체성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물론 뚱뚱한 남성도 환영받지 못하지만, 몸무게가 일상적으로 남성의 삶을 통제하거나 규율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체중은 곧바로 취업·결혼·대인 관계·자존감으로 연결되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다. 여성의 거식증은 연속체로 존재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먹는 양을 조절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다.
성범죄의 원인은 일상의 성차별, 성역할 구조인데, 이를 수용하게 되면 모든 남성은 피곤해진다. 남성은 잠재적 피고인이 되지 않기 위해 기존의 여성관, 세계관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소수 ‘변태’의 문제로 축소하면 성범죄는 남성 문화의 결과가 아니라 특수화, 엽기화된다.
그래서 여성운동은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여성들이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맞아 죽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미국의 시각이 걸러지지 않은 보도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최근 어느 시사 잡지는 소말리아 내전에 자원한 여성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녀는 전쟁 상태가 훨씬 살 만하다고 말한다. 군인으로 음식을 배급받고 남편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이 평화로운 공간이라는 언어는 누구의 경험인가? 여성에게 무엇이 일상이고 무엇이 전쟁인가? 성별을 독자적인 사회적 모순, 정치 제도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다가 죽이는 것은 ‘과실치사’지만, 아내가 정당방위로 남편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때리는 남편이 가정파괴범이 아니라, 폭력에서 탈출하는 피해 여성이나 이들을 돕는 여성운동가가 가정파괴범이다.
무엇이 사회이며, 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가정과 사회는 다른가? 남편에게 당하는 고문과 국가로부터 당하는 고문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국가 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는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결국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남녀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성역할 규범이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폭력 상황에서도 가해 남편의 권력(=‘버릇’)을 고치고 가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전쟁, 조직폭력, 학교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인간은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 때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아내가 되면, 맞지 않을 인간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여성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가정폭력 방지법으로 고소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한다.
가정폭력은 피해가 명백히 가시화되어야만 ‘진실’이 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은 피해 이후에 논의된다. 여성운동가들이 가정폭력이 사회적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해 심각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가 끔찍하고 심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몸을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권리’인가, 아니면, ‘남성으로서의 권력’인가?
남성들은 ‘양성 평등’을 위해 여성과 같아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가사 노동, 자녀 양육 등 주로 여성이 해 왔던 재생산 노동은 경시되고 비하된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적인 노동’을 하는 것은 수치와 무능력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인권 개념에도, 보살핌과 돌봄, 배려의 가치 같은 ‘여성적 경험’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 개인을 여성이라는 전체 집단의 속성에 귀속시키지만, 사실 남성 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개념은 대단히 협소하다. 정숙하고 젊고 예쁜 여성만이 여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 흡연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있지만 모든 여성에 대해 그런 것은 아니다. ‘술집 여자’나 할머니 혹은 여성 지식인의 흡연은 자연스럽다. 한국 사회는 젊은 미혼 여성의 흡연만 처벌한다. 이는 젊은 여성만이 진정한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흡연은 여성성을 위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집 여자’와 할머니는 남성 사회가 규정한 여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흡연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성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것은, 그녀가 가난해서라기보다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가난하지 않은 여성도 인신매매에 의해 성판매 여성이 된다. 가난한 남성이라 할지라도 여성에게 성을 팔지는 않는다. 성매매는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성차별의 문제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이 파는 것은 몸이지 성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성으로 간주되며, 여성의 성은 팔거나, 팔리는 상품이 된다. 남성 노동자가 파는 것은 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 팔리는 노예가 아니다.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규범적인 여성성을 대표하는 중산층 여성은 군대에서 허드렛일을 할 이유가 없다. 때문에 남자들 틈에서 살기로 작정한, ‘고귀함을 잃어버린’ 가난한 여성들은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으며, 이들에 대한 성적 비하는 남성 군인들의 성 정체성 확립과 남성 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남성성은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를 전제로 구성되기 때문에, 후방에서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할 여성이 남성과 참호에 같이 있는 것은 남성의 자아를 짓밟는다.(“내가 기집애랑 이러려고 군대에 왔나.”) 여성이 전투직에 종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남성 정체성을 위협하는 성역할 파괴를 의미한다.
군대가 젠더의 산물이며, 폭력과 섹스가 결합한 제도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기지촌은 이미 그 자체로 성별화된 공간이다. 군대 내 성매매를 ‘위안’이나 ‘휴식’ 등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 권력 행위로서의 성폭력 문제를 ‘신체의 요구’라는 생물학적 주제로 이동시켜, 가해 남성의 책임을 비가시화하고 여성의 고통을 주변화한다.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회운동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파악해 그것을 ‘제거’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로 사회에서 소외당한 자
그것은 구체적 개인에 대한 판단과 무관하게 속성에 대한 분류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당사자가 느끼는 소외는 구체적 개인이 맞닥뜨리는 실재적 감정이다.
유태인 주인공 나도 인종차별법이 시행된 이탈리아에서 같은 소외와 막막함을 느끼면서 동성애자 파디가티 선생님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문화적, 인종적 요인에 기인하는 유태인 혐오
자연적, 생물학적 요인에 기인하는 동성애 혐오
원시공동체 사회는 종족보존이 최고의 가치였으므로 동성애를 혐오할 뿐만 아니라 독신자, 더 나아가 아이를 갖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까지도 혐오의 감정을 품었을 거 같다.
그런 혐오가 종족보존에는 더 유리했을 것이라고 보면,
어쩌면 자연선택에 의해 혐오의 감정이 되물림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20p)고 한다.
이 혐오의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게 되고, 왜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게 되면, 비로소 혐오의 감정을 극복하고. 내버려 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4p.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39p. 성윤리나 번식윤리가 논쟁 거리로 떠오를 때마다, 몇몇 종교 집단의 대표자들이 영향력 있는 위원회나 라디오(텔레비전) 토론회에 주요 패널로 참석한다. 나는 그런 인사들의 견해를 검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왜 우리 사회는 그들이 마치 철학자나 변호사나 의사에 필적하는 전문지식을 지닌 것처럼 그런 논쟁거리가 생길 때마다 그들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것일까?
42p. 동성애자를 차별하기 위한 법적 소송은 이른바 종교적 차별에 반대하는 소송으로서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법은 그것을 존중하는 듯하다. “나더러 동성애자를 모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 편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는 말로는 무사히 넘어갈 수가 없다. 하지만 “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라는 말로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어쨌든 여기서도 종교가 모든 것을 이긴다.
45p. 모든 종교의 신자들이 자신의 종교가 진리와 광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듯이, 모든 이슬람 신자들도 그렇게 가정한다. 사람들이 자기 가족보다 7세기의 설교자를 더 사랑하든 말든, 그것은 그들이 결정할 문제지만, 다른 누구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
83p.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찻주전자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는 단서를 신중하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장이 반증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까지 내가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로 여겨져야 옳다. 하지만 그런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옛 서적에 명확히 나와 있고, 일요일마다 그를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치며, 학교에서도 그를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시킨다면, 그 존재를 선뜻 믿지 못하는 것은 괴짜라는 표시가 될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자는 계몽시대의 정신과의사나 그 이전의 종교 재판관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91p. 문법적으로 옳은 질문이라고 해서, 그 문장이 의미 있다거나 우리의 진지한 관심을 끌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설령 그 질문이 진정한 것이라고 해도 과학이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종교가 답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걱정 중독(실패 혐오의 시대)
만약에 ~ 이면, 어떻게 될까?
인과관계가 원치 않는 결과를 보여주는 순간,
위험이 생겨난다.
위험에는 불확실성이 깃들어 있고,
우리는 삶에 내재된 위험을 기계처럼 정확하게 예상할 수 없다.
생각의 흐름은 과연 실존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누구이고 미래에 어떤 위협이 닥칠지 늘 골몰하진 않는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내면의 비판자와 끝없는 자기 의심은 최근에 생긴 현상으로
위협적 재앙이 임박해 온다고 믿는 집착도 마찬가지다.
건강 염려증이 심한 사람은
"두통이 뇌막염 때문에 생긴 거라면 어떡하지?"
대인 공포증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침묵하는 이유가 나를 싫어해서 라면, 어떡하지?"
일상에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어쩌면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수년에 걸쳐 질병의 종류는 다양해지지만,
사실은 같은 주제의 변형이다.
전체 유럽인의 3분의 1 이 살면서 "만약에 ~ 이면, 어떡하지?" 하는 질문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원치 않는 생각이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압박하고 그 순간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그 생각에 지배 된다.
그 생각을 무효화하려 하면 오히려 의미를 갖고 점점 더 커지면서 우리의 일상을 방해한다.
외출을 할 때 나 또한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아차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온 것 같은데" 하면서 다시 집 대문을 열고 꺼진 가스 불을 재차 확인한다.
인간의 정신은 방황하고 방황하는 정신은 불행한 정신이다.
일어나지 않는 일을 깊이 생각하는 능력은 감정적 대가를 치른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정신 세계를 연구가 많은 학자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결말을 맞이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본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비극은 우리가 모든 인간 발달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현재가 아니라, 미래와 미래에 올 황금시대라는 키메라적 약속 안에서 더 많이 살고 있다."
수학과 철학의 역사에서 독보적인 인물인 쿠르트 괴델은 항상 독살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았다.
그의 아내 아델레는 인간 독극물 탐지기가 되어 그가 먹는 모든 음식을 먼저 먹어 봐야 했다.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아내의 설득으로 병원에 들어간 그는 몸무게 29.5kg으로 태아처럼 웅크린 채 사망했다. 사망 진단서에는 '인격장애로 인한 영양실조 및 탈진' 이라고 적혀 있었다.
철학자 하인리히는 광장공포증을 앓아서 언제나 동행자가 있어야 했다.
정신의학자 칼 야스퍼스는 얼굴에 틱 장애가 있었다.
예술사학자 칼 노이만은 심한 우을증을 앓았고 반복된 자살 시도로 매번 정신병원에 갇혔다.
미국의 성공한 정신분석가 호러스 프링크는 프로이트를 만나고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프로이트는 프링크를 보자마자 그에게 잠재된 동성애를 발견했고,
프링크에게 즉시 아내와 이혼하고 본인의 환자 안젤리카와 결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프로이트의 처방인 너무나 심각했기에 두 사람은 각자 이혼 후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프링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첫 번째 아내와 두 아이를 떠난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전처가 사망하자 프링크는 심한 우을증에 빠졌고, 여러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프로이트의 사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자기 확신이다.
반면에 환자의 불안은 저항, 즉 억제된 진실의 방어다.
오늘날 프로이트는 많은 비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그가 남긴 업적은 후대 학자들의
학문적 기초가 된다.
지금 시대는 불안이 증폭되어 전염병처럼 만연하다.
이 책은 마음의 원리를 문명사적으로 해부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우리는 걱정할 때 외부의 위험과 내면의 위험을 서로 연결한다.
불안은 위험의 발견이면서 동시에 불안이 초래한 내면의 긴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내면에는 무한한 책임감이 있지만 외부에는 거의 완전히 무관심하고,
반사실적인 사고 세계에서는 과대망상이 있지만 사실적 행동 세계에서는 수동적이다.
만약에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중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나쁜 일에 대한 불안이 좋은 일에 대한 갈망으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불안으로 인한 걱정의 연속
그리고 어느새 하나의 질병으로 자리 잡은 강박적 생각
우리는 걱정이나 마음의 평화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책이 기반으로 삼을 원칙을 선택해야 한다.
행동하는 것 자체가 재앙이 일어날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 위험을 감수하든 회피하든 재앙이 일어날 위험은 언제나 그대로다.
위험은 항상 인류의 삶과 함께 했다.
지금은 걱정과 더불어 살아가는 현명한 지혜가 필요한 때다.
불확실한 삶을 견딜 능력이 우리의 정신 건강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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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에도 트렌드가 있듯, 소설에도 트렌드가 있나 보다. 이번에 읽은 '젊은 작가 단편집 2 - 림'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요즘 나온 소설들 대부분의 소재가 페미니즘, 동성애, 휴머니즘 등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 책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
단편소설이라도 '결'이 비슷하면 내용이 달라도 이어지는 맛이 있어서 재미난데, 이 단편집은 작가의 성격도, 성별도, 나이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일까? 중구난방이 따로 없다. 그래도 한 권으로 엮인 단편집인데, 통일성이라고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각 소설들이 제각기 논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게 굉장히 번잡스러운 느낌이 들면서도 굉장히 신선하다. 마치, 소중한 물건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휘저은 느낌이랄까? 집안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물건을 찾은 기쁨이 더 소중한 그 기분 말이다.
2024 현대문학 수상 소설집 대상을 탄 미래의 조각은 엄마의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여 의식은 깨어나지만 그로인해 말을 할 수 없게되고 엄마는 소설을 쓰는데 자신이 바라던 삶에대해 글을 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주어지고 살아가야한다. 현재 어쩔수 없는 삶을 살아야하는 현대인에게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엄마의 바램이 보인다. 나머지도 생각지 못한 주제로 글을 적은 젊은 작가(동성애와 젊은이의 빚, 장례식의 세일 등) 자못 독특하고 힘이 넘친다.
재희의 왈가닥 대학 생활을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선으로 편집해 들려주기도 했다. p49
그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그라는 사람이 궁금했고, 그보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그보다 그가 도대체 어떤방식으로 내 감정을 휘저어놓는지 알고 싶어졌다. p88
그의 앞에서는 스물다섯해 동안 내가 습득해온 사회적 기술이 다 무력해지는 느낌이어서,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려대며 전투적으로 광어와 우럭 살점을 집어 먹을 수밖엔 없었다. p104
어떤 것은 풀 맛이 났고 어떤 것은 단맛이 났고 어떤 것은 쓴맛이 났고 어떤 건...... 결국에는 무슨 술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아졌고, 우리는 탈 것같이 붉어진 서로의 얼굴을 보며, 뜨거운 이마를 짚으며, 잔 테두리의 향신료를 거듭 핥아 먹었다.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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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앞서 읽은 #원미동사람들 이 너무 재미있어서 또 다른 연작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한 연작 소설이란, (원미동 사람들처럼) 각 소설마다 주인공이 바뀌어 시점이 달라지는 것이었는데 이건 나의 무지였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각각 다른 곳에 출품한 단편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기만 한다면 연작 소설이 되는가 보다. 그래서 (나의 무지에 따른 기대였지만) 주인공이 바뀌지 않는 하나의 시점으로만 그려지는 이 소설은 조금 아쉬웠다.
두 번째는 작가를 만날뻔 했던 일이 있었어서 관심이 갔다. 작년에 내가 기획한 사가 올레길 투어는 사실 1. 작가와 함께하는 사가 문학 여행 2. 등산 인플루언서와 함께 걷는 사가 올레길 투어 중 선택이었는데, 그때 1번의 후보로 박상영 작가가 있었어서 한 번 읽어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읽어본 요즘 소설은 역시 기대만큼 (맘에 드는 문장을 위에 네 개나 적은 것 처럼) 그 표현력이 세련되고 좋았다. 문학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 발전해 간다고 생각하기에 부커상 후보에도 오른 이 작품은 쉽게 읽히면서도 눈에 띄는 표현들이 많아 좋았다. 토지의 일제강점기 - 원미동 사람들의 80년대를 거쳐 지금의 시대로 와서 그랬을까? 이 책은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다.
흠...ㅋㅋㅋㅋ 처음부터 알고 보긴 했지만 이 소설은 퀴어물, 그중에서도 남성 동성애자의 이야기인데 200% 이성애자인 내가 읽어내기엔 성적 묘사가 적나라하여 쉽지만은 않았다. (연작 소설이라, 위에 언급한 것처럼 다른 시점, 그러니까 이 소설의 재희처럼 이성애자의 시선도 있을 줄 알았다.) 더군다나 책 전체가 다 연애 이야기인데, (그러고 보니 제목이 대도시의 사랑법이잖아!) 그래서 온통 그와 그의 이야기는...ㅋㅋㅋ 뭐, 호기심에 트젠바에도 가본것 처럼 내겐 한 번쯤 읽어 볼 만한 이야기였다. 다음 박상영 작가의 책을 읽을 기회가 생긴다면 연애 이야기가 아닌 다른 주제였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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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책에서 우리가 천국에서 성관계를 하면 지금보다 훨씬 큰 만족과 기쁨이 있을거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물론 천국에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성관계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관점이 생기고 이에 대해 알아가고 탐구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박혔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여전히 내가 사회적으로 여성은 성에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자세로 있어야 한다는 관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책에서는 전반적으로 성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어른이 되자고 얘기하고 있는데 나도 그런 어른 중 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책의 내용은 동성애와 낙태, 성교육, 데이트 중 스킨쉽 등 전반적인 성적 이슈들에 대해 다룬다. 책을 읽으며 기존에 생각하고 있었던 문제들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관점이 조금 바뀌기도 하였다. 간성이 그렇게 많는 줄 몰랐는데 1% 남짓이라고 하니 생각보다 많는 사람들이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거나 헷갈려할 수 있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그렇다면 이성이 어느 쪽인지 당연히 헷갈리거나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어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에서도 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소극적인데 점차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교회가 소극적이라면 교회 안의 사람들도 성에 대한 얘기는 교회 밖에서 밖에 하지 못할 것이고 이는 결국 우리 삶 전체 중 일부는 비성경적으로 해석되고 살아갈 여지를 주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리더의 일원으로서 나도 점차 바뀌어야 할 부분이다.
4/11 ~ 5/3 (중간에 오래 쉬었다 읽음)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핑거스미스)을 쓴 작가 세라 워터스가 20세기를 배경으로 쓴 소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런던, 1947년을 시작으로 6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여섯 인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 ’아가씨‘에 싫어하는 배우들이 나와서 안 본터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동성애 이야기라고 들었는데… 이 책 내용도 마찬가지.
이런 쪽 소설만 쓰는 작가인걸까? 작가 정보도 찾아보지 않아 모르겠음….
이 책에 대한 정보도 없이, 내용 전혀 모르고 덜컥 구입한 터라…. 그냥 책값 아까워서 끝까지 읽음.
이 책은 맨부커상과 오렌지상 최종후보에 올랐으며, 람다 문학상(레즈비언 소설 부문) 을 받았다 함.
660 페이지 짜리라 최근 읽은 책 중에서는 두꺼운 소설에 속했는데… 시간 들여 읽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26세의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정치범 발렌틴과 37세의 미성년자와 관계를 가지다가 구속된 동성애자 몰리나가 감방에서 같은 방을 쓰며 서로 나누는 이야기들이 담긴 고전소설이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특이하게 두사람의 대화로 전개가 이어진다. 특이한 전개방식에 내가 대화에 뛰어든 것 마냥 이야기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이게 몰리나가 말하는 것인지 발렌틴이 말하는것인지 헷갈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5편의 영화와 들려주지않은 1편의 이야기가 있는데 모두 주인공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결말들이라 몰리나와 발렌틴의 비극을 예상했고 그 중 3편은 실제 원작이 있는 영화를 조금 변형한 것이고 3편은 적가님이 쓴 글이라고한다.
지금보다 더 정치나 성적으로 억압적이고 보수적이었을텐데 1976년에 이런 사회를 고발하고 동성애를 다룬 이야기를 썼다는게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고전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않고 저칫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란 거부감아 들 수 있지않을까싶었는데 나중에는 동성애라는건 잊고 몰리나와 발렌틴의 사랑이야기에 빠져들게되었다.
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알겠는 고전소설이였다!
페미니즘이 발견한 그림 속 진실
부제를 읽으면서 드러내고자 하는 책의 주제를 읽는다.
실린 도판과 참고도서 목록들을 보면, 문화적으로 주입시킨 여성성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아이와 미술 전시회를 가거나 혹은 미술 관련 서적에서 누드화가 나오면 불편할 때가 있었다. 성별이 다른 아이와 불편한 지점이 다르긴 했지만, 누드화에서의 관점이 이렇게 다르다는 걸 새삼 저자의 설명으로 깨닫는다.
들어가며, 익숙함에서 벗어나 달리 본다는 것에서 편에서 캐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의 대한 인식이 그랬다. 자식을 잃은 슬픔 앞에서 어머니의 여성 작가의 관점과 아버지인 남성 작가의 관점이 예술이라는 것을 표현할 때의 다른 관점이 그동안은 인식하지 못했는데, 저자의 제시를 통해서 깨닫는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 어느 어머니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 두 작품의 설명을 통해서 작가의 '자기 확장성'이 무엇인지를 보았다.
1장 아름다움과 추함의 이분법
다섯 개의 이야기들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젠더적 차별을 말한다. 아름다움에 대해서 여성과 남성에게 적응할 때 시선과 의미 적용의 차이를 그림들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남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사회에서 바라보는, 기대하는 다른 잣대와 평가들에서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여성성으로 전제한다는 생각이 든다. 앨리슨 래퍼의 일화가 그런 관점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성 장애인의 몸을 성적 대상화의 의미로 해석되는 몸이 앨리슨 래퍼와 같은 _ 즉, 우리가 토르소라고 미술시간에 배웠던_ 몸이었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여러 가지의 의미들이 겹쳐져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2장 누가 아름다움을 정의하는가
누드화에 대한 이야기인데, 남성과 여성에 대한 누드화에 대한 다른 인식과 사회적 관점을 말한다. 가령 여성의 성기는 부끄럽거나 가려야 하는 수치스러운 의미로 표현되는데 남성의 누드화에서는 그런 장치나 표현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남성의 동성애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한 이유를 고대 역사 속 일화를 가져와 설명하면서 남성 간의 사랑이 국가 공동체의 통치권과 그들의 유대를 만들어 가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여성이 거울을 보는 행위는 허영으로 해석되는 반면 남성은 자화상이라는 매개로 자아성찰, 자기 몰두로 해석되어 뒷모습마저도 철학적 담론을 담고 있다고 해석된다고 한다.
3장 그녀는 왜 '악녀'가 되었나
판도라와 프로메테우스는 똑같이 금기를 어겼는데, 한 쪽은 어리석은 호기심으로 한 쪽은 주체적 자존감의 표출로 인식되어 있다.
이 장에서는 다루는 그녀들은 릴리트, 메두사, 고대의 여신들이다.
문명사의 흐름에서 그녀들_어머니 대지의 여신들_이 어떻게 이미지가 탈바꿈되어 악녀로 인식되었는지를 전한다.
이른바 문명사회로 접어들면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이라 사회체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여성성은 부정되거나 남성성에 비해 하등한다는 인식을 성립해야 했기에 과학적이라는 근거를 만들어서 억압과 차별의 관점을 안착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승자만의 해석이라고 해야 할까. 지배계급의 정당성을 위해서 피지배계급은 모든 의미에서 무지몽매하며 이끌어줘야 한다는 제국주의 같은 개념이라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팜므파탈의 부분에서는 파멸로 이끄는 존재라는 한켠의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은 여성성에 대한 이중적인 의식을 읽는다. 두려움과 경의로움 그리고 시기와 억압.
193쪽
이것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판을 되돌리려는 시도로서 의미를 갖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위험성을 안고 있는데, 자칫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구원자로 보는 남성들의 환상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악마도 아니지만 구원자도 아니다. 남자를 죄로 이끈 것이 여자가 아니듯 그들을 구원하는 것도 여자는 아닐 것이다. 여성을 악마화하는 것이 부당하듯, 모든 것을 받아주는 '영원한 어머니'같은 구원자로 보는 것도 우습다. 일견 위대한 어머니 여신의 발견과 계승이 여권 신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여성성 혐오와 억압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왜곡된 시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여성성을 최고선으로 두고 이상화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악마나 구원자 둘 다 남성들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당신들이 지은 죄는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면 될 일. 그러니 제발, 구원은 셀프!
4장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폴론과 다프네의 그리스 신화는 아폴론의 지극한 사랑으로 회자되는 이야기이지만, 다시 이야기를 천천히 살펴보면 그것은 남성에 의한 일방적인 폭력이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존재를 죽은 후에까지 자신의 월계관으로 만들어 영원히 기억한다는 것이 다프네의 입장에서 그것이 사랑인가? 죽음 이후에도 폭력을 행하는 이와 함께 해야 한다니. 집착과 광기 그 자체다. 얼마 전 지하철 공사 직원의 죽음이 떠오른다. 이것이 어찌 사랑인가.
페르세포네와 하데스의 신화를 조각상으로 만든 조각가 베르니니의 일화와 더불어 그 조각상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해석에서 그동안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을 말하고 있어서 깨닫게 되었다. 이 조각상의 페르세포네의 입장을. 그저 조각상의 생동감만을 바라보았을 뿐 그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걸.
저자는 우리가 흔히 사랑의 신화로 알고 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사랑인가?
여성성을 연기하는 여자 편에서 다룬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는 금발, 백치미, 섹시 심벌로 그녀의 본모습이 어떻게 영화계에서 성적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소비되었는지를 전한다. 먼로에 관한 최근에 본 영화에서 그녀는 철저히 소비되었다고 생각된다.
5장 여성, 섹스의 발견
이 장은 금기시되는 여성의 성적 욕망과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담고 있다.
여성의 몸을 옥죄는 코르셋을 통해 여성의 몸을 통제하던 분위기가 탈코르셋으로 변화되고 있는 흐름을 전한다. 터기에서의 일화가 인상적이었다.
검은 천을 쓰고 다니던 이슬람 여자들이 공중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베일과 치마를 걷어붙이고 세면기에서 찬물을 뒤집어 섰다는 일화였다. 30도가 넘는 날씨에 여자에게만 이런 옷을 입게 하고 식당에서도 식사를 베일에서 입 부분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먹는 그들을 보면서 왜 그들의 삶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삶을 살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몸을 드러내면 이른바 매춘부로 인식하기 때문에 몸을 감싸는 것이 그들과는 다르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자부심의 사회라는 것이다. 그 사회의 맥락은 알겠으나, 역시 여성 인권의 억압의 증거라고 생각된다.
275쪽
천편일률적인 탈코르셋은 오히려 그것 자체로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76쪽
만약 탈코르셋의 결과가 누구나 똑같은 차림과 머리라면 ....... 지루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재미도 없을 것 같지 않은가.
행위예술가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3개의 장은 미술 장르에서도 가장 낯선 분야인데, 저자의 해석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실제 행위를 볼 때는 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가장 이해도가 낮기는 하지만, 의도를 전하는 데 있어서는 의도를 알게 되면 메시지의 전달성이 가장 강하리라고 생각된다.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이라는 책의 제목은 반어적 의미의 맥락으로 읽었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수용되어질 때가 가장 아름답지 않은가. 사회가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이 보다 평등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