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사를 공부할 때 꼭 나오는 인물이므로 역사를 조금만 공부하면 곧 익숙해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철학 쪽에 발을 들였다면 또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 나라의 황제로서 업적을 남기기도 쉽지 않을 텐데 동시에 학문의 정점에 서다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제목만 들어봤던 <명상록>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한 철학서를 읽다 보면 빼놓지 않고 나오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명상록>은 어떤 책인가? 사실 <명상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이 깨달은 철학적 결과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적은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을 갈고 닦기 위해 적어놓은 자신만의(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노트를 묶어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기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공부와 인성을 위해 정리한 사적인 노트인 것이다. 그것을 누군가 발견하고 잘 묶어서 필기하고 다시 누군가의 필사를 통해 그렇게 전해진 책이니, 어쩌면 그 어떤 책보다 그 책의 가치가 뛰어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만약 나의 처지와 나의 가치관과 잘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저그런 자기계발서로 그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명상록>을 읽을 때에는 더 나은 나를 위해 열린 마음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명상록> 본문을 읽어나가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무척이나 단단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는 공부와 자기 성찰, 다른 이에게서 배울 점 등을 꼼꼼이 적고 스스로 닮으려고 노력한 점이 이 책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 기회를 통해 성장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진대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서려 한 이 황제는 그러므로 이렇게 오랜 뒤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오아시스의 <명상록>은 더 특별하다. 그레고리 헤이스의 해제가 더해졌기 때문인데 이 해제가 책의 본문 앞에 위치해 있어서 대강의 주변 배경지식과 본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저변을 깔아준 후에 본문을 읽을 수 있다.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한번 더 이 해제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점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명상록>을 통해 깨달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점과 철학에 대한 중요성이다. 나이가 들수록 내키는대로와 될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버리고 있는 듯한 나를 무척이나 반성하게 하는 책이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필사하는 것도, 아무데나 펴서 한, 두 장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어렵지 않고 그저 쭉~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어서 더 좋았다.
죽음을 끝이 아닌 또 다른 단계로 바라보며, 삶과 존재의 의미를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휴먼 판타지다.
열아홉 살 서은은 가난, 가족의 죽음, 학교 폭력, 빚 속에서 삶을 지속할 이유를 잃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시도 속에서도 죽을 수 없다는 초현실적 조건에 묶이며, 그녀는 ‘왜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살아보고 싶은 이유’를 다시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죽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경숙의 카페는 판타지적 공간이지만, 커피 향과 대화가 스며 있는 일상의 장소로 그려지며 현실적인 치유를 만들어낸다. 서은의 변화는 극적이지 않고 서툴고 더디지만, 그 느린 과정을 통해 삶을 다시 배우는 서사의 진정성이 깊게 전해진다. 죽음을 미화하지 않고, 삶을 억지로 찬양하지 않는다. 비극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의 회복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잔잔하지만 오래 남는다.
읽는 동안 가장 마음에 남았던 건, 삶을 “버티는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은이 다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얻게 되는 이유는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라 타인과의 작은 온기 속에서 스스로 발견해 가는 것이었다. 많은 힐링물이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외치는 반면, 이 책은 그런 말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곁에 서서 천천히 다시 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특히 서은의 변화가 빠르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더 위로가 됐다. 삶은 결국 그렇게 느리게,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떠올리게 해준다.
무엇보다 희망은 기적이 아니라 아주 작은 온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믿게 해 준 책이었다.
그리고… 로맨스 판타지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로맨스 비중, 실종 사건은 무엇입니까? 😂 로맨스를 찾아보려는 마음은 있었지만, 결국 내가 찾은 건 인간의 회복이었고, 그게 또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 함정.
✔️ 짧은 리뷰
죽음을 택했던 소녀가 다시 살아보고 싶은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려낸 작품. 기적을 내세우지 않고, 타인의 온기 속에서 천천히 되살아나는 마음을 담아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50821
“그들은 모두 한 권의 책이었다”
📖 책 소개 발췌
이 책은 세상이 ‘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일하는 자부심으로 당당하게 살아온 고령 여성들의 삶을 일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담은 인터뷰집이다.
집안 일과 바깥일을 오가며 평생을 ’N잡러‘로 살았던 여성들.
이름보다 누구의 아내나 엄마나 불린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고자 시작되었다.
인생 자체가 명함인 6070 큰언니들 인터뷰집
『희자 씨는 직업을 물었을 때 “집에서 놀아요”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고 했다.
딸이 “엄마는 항상 주기만 하고 언제 받으실랍니까” 그래.
내가 딱 잘라서 얘기했어요.
엄마한테 받은 사랑 플러스알파 해서 네 딸한테 줘라.
그럼 허무하지 않냐고 해요.
내 자식인데 뭐가 허무해요.
저희도 열심히 했고 나도 열심히 했으니 후회는 없지.』
우리 엄마, 시엄마의 시대는 지금과 너무나 다르다.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여성에 대한 인식과 대우는 크게 변했다.
나 또한 엄마이자 아내, 며느리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무게는 예전과 같지 않다.
아이 유치원에서 ’엄마의 날‘ 기념 영상을 찍은 적이 있다.
그중 한 질문이 “엄마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였는데, 아이들 대부분이 ”우리 엄마는 집에서 일해요“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에게 ‘집에서 논다‘가 아닌 ‘일한다’라고 인식된다는 것이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 역시 10년 가까이 회사를 다녔고, 워킹맘으로도 살아봤으며, 지금은 전업주부이다.
남편이 가장으로서 짊어지는 무게가 얼마나 큰지 안다.
돈을 번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중요하고 고마운지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안일이 ’일‘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안일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그 일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의 힘듦이나 중요도를 떠나 세상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가족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면 좋겠다.
6070 엄마들에게 짧게라도 건네보면 어떨까.
“고생 많으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우리 엄마, 그리고 우리 시엄마)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엄마가 되고 나서야 더 깊이 알게 된다.
『화정 씨는 시대를 탓하지 않는다.
남의 속도를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의 호흡대로 간다.
화정 씨와 그가 가꾼 고운 집은 친구들에게 정원이 된다.
나는 살면서 그 순간에도 좋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애 키우느라 너무 힘들어, 지겨워 죽겠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특별히 뭘 잘해서가 아니라…
난 그냥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하면서 살았어요.』
너무 닮고 싶은 마인드다.
나도 못하는 건 못한다고 말하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타입이다.
그런데도 알게 모르게 죄책감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행동에 드러나 가족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속으로 ‘어쩔 수 없어, 이게 나인걸. 힘들면 그럴 수도 있지, 당연한 거야’ 하며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죄책감을 피하고 싶어 그렇게 숨은 적이 많았다.
힘들 수 있다. 화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상대방에게 분풀이하는 건 잘못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화정 씨는 어떻게 매 순간 ‘좋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정말 대단하다.
잘 못하는 것에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다.
내 속도대로,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내 안을 다스리며 살아가고 싶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가 아니라 애초에 엄마처럼 사는 일이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불안을 물려주지 않으려 나름의 방법으로 고군분투했을 나의 어른들.
옛날로 돌아가면 나를 숨 막히게 꼭 안던 엄마를 나도 함께 꼭 안아주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엄마는 본인이 가진 자갈, 바위, 돌이 섞인 미운 흙들을 온몸으로 고르고 골라 고운 흙만 저에게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장갑조차 낄 틈 없이 맨손으로 고르고 골라내느라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는데.
저는 엄마의 상처를 보려 하지 않고 내가 물려받은 흙들이 아직도 너무 거칠다고 불평만 했어요.
곱고 예쁜 흙들을 남겨주고 싶었는데 자식들에게 쥐어준 흙이 아직도 부끄럽고 미안한, 그게 일하던 엄마의 아닐까 감히 가늠해 봅니다.
저는 다시 제 발밑을 맨손으로 만져봅니다. 돌 하나 만져지지 않아요.
아직 거칠지만 제가 고르고 골라 다음 아이들에게는 더 고운 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엄마의 손에 났던 상처보다 제 손에는 상처가 덜하겠지요. 저 대신 상처를 독차지한 엄마를 더 사랑해 줘야겠어요. 』
식당을 운영하는 순자 씨의 인터뷰는 지금도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우리 엄마 아빠를 떠올리게 했다.
인터뷰들을 보다 보면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 알 수 있다.
엄마 아빠에 대한 미움이나 서운함은 전혀 없으니까.
나는 언제나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꼈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우리 엄마는 정말 멋진 여성이고, 우리 아빠는 참 다정한 사람이다.
두 분 모두 자식들을 위해 상처투성이가 되면서도 우리에게는 사랑만 주셨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아이처럼 대해주고 사랑해 주는 우리 엄마, 아빠가 많이 생각난다.
『딸이 저에게 ‘엄마 인생 시즌 2’라고 하는데요.
저는 ‘시즌 2’라기보다는 이제야 제 인생이 온전해진 것 같아요.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누구를 기쁘게 하려거나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너무 좋아서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죠.
나이에 갇히고 싶지도 않아요. 이제 오십 대 중반이 넘어가는데 갑자기 육십이 됐다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못할까.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명함이)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게 저는 제가 명함이에요. 제 자신이…. 』
책의 후반부에는 여전히 일을 하고 계시는 여성분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어떤 분들은 처음부터 원해서 시작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누구보다 그 일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또 어떤 분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자격증을 따거나 기회를 만들며 꾸준히 이어왔다.
방식은 달랐지만 결국은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막연하게 불안하던 나의 미래에 큰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프리랜서로 가끔씩 일을 하면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했으니까.
하지만 현업에서 활발히 일하고 계신 분들은 그 길을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해 온 사람들이었다!
괜한 걱정은 내려놓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지내야겠다.
그때의 나는 또 어떤 모습일까. 그 시간이 기대된다.
이 책은 서울역 주변 노숙인·노숙 경험자들이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에서 1년 동안 써 내려간 시, 산문, 그리고 인터뷰를 한데 모은 20주년 기념 문집이다. 글은 그들의 생애 한켠에서 길어 올린 진짜 숨결을 품고 있으며, 한 줄 한 줄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몸부림처럼 다가온다.
1부 〈가오리 별곡〉
무너진 현실 속에서도 다시 떠올리는 사랑받았던 시간들.
가난했지만 분명 존재했던 따뜻함과 그리움의 기록이 잔잔하게 스며 있다.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받았던 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바로 그런 기억들을 붙잡는다. 어깨를 내어주던 가족과 친구, 말하지 못했던 고마움들, 삶이 무너지고 난 뒤에야 다시 보이는 소중한 흔적들이 조용히 마음을 흔든다. 회복의 첫 단계가 ‘받았던 사랑을 다시 기억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2부 〈누구 없소〉
일그러진 관계, 상실, 자책과 분노. 가장 마주하기 힘든 내면의 방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용기, 그리고 감추고 싶던 상처를 글로 꺼내는 과정의 묵직함이 선명하다. 깊은 어둠을 회피하지 않고 글로 직면하는 순간, 이미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상처를 마주하는 일은 가장 고독하고 두렵지만, 바로 그곳에서 마음의 토대가 다시 세워진다는 사실을 이 글들은 말하고 있다.
3부 〈청소의 힘〉
사소한 일상 속에서 자신을 다독이고 감정을 말려내는 담백한 기록들. 빨래를 하고, 방을 정리하고, 묵은 감정을 털어 햇볕에 말리는 일이 단순한 행위들은 생각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특별한 사건보다 작은 일상의 반복이 마음의 근력을 회복시키고, 무너졌던 자신을 다시 다잡게 한다. 사람이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이런 소소한 움직임들임을 보여준다.
4부 〈서울역 눈사람〉
스쳐 지나가는 장소가 아닌, 삶터이자 일터이고 학당인 서울역.
“이곳에도 사람이 산다”는 조용한 선언처럼, 거리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저 ‘지나치는 곳’이지만, 이들에게는 삶이 이어지는 공간이다. 눈사람처럼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그 연약함 안에 인간다운 아름다움이 담겨 있음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서울역의 풍경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5부 〈함께 짓다〉
한 줄 한 줄을 서로 이어 쓰며 완성한 ‘함께’의 기록. 문장 사이에 놓여 있는 연대와 위로가 따뜻하게 다가온다. 글 쓰는 행위가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연대가 되고, 말 한 줄이 타인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순간들. 함께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이다. 공동체가 마음의 회복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 뚜렷하게 느껴진다.
6부 〈인물 인터뷰〉
다섯 분의 노숙인 선생님이 들려주는 솔직하고 깊은 생애 이야기.
삶이 꺾였던 순간들, 외면받았던 시간들,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붙잡아야 했던 희미한 의지들까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떤 궤적을 밟아왔고 무엇을 견뎌왔는지가 진정성 있게 전해진다.
7부 〈거리에서 움튼 글 그림으로 피어나다〉
그동안의 글들이 그림과 만나 하나의 시화 작품으로 피어나는 순간들. 거리에서 태어난 문장이 예술의 언어로 재탄생하며 새로운 숨을 얻는다. 글쓰기와 예술이 사람을 어떻게 끌어올리는지, 상처를 어떻게 다른 형태의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내는지를 증명하는 듯하다.
누군가 자신의 글을 읽어주고, 댓글을 달아주고, 응답해주는 경험. 그 작은 상호작용이 무너진 자존감을 다시 세우고, 다시 걷게 하는 힘이 된다. 글이 사람을 일으키고, 사람의 말이 한 존재를 다시 세운다. 이 문집은 바로 그 작은 기적의 순간들을 온전히 담아낸 책이다. 문학이 삶을 어떻게 붙잡고 지탱하는지, 그리고 글쓰기가 어떻게 인간을 회복시키는지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기록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패션 매거진의 화려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의 불안과 질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완벽해 보이는 여자들'의 이면을 냉철하게 들여다본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따라가다 보면, 성공과 관계, 그리고 자아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서늘한 긴장감 속에서도 현실적인 공감이 스며 있어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겉보기엔 세련된 세계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불안과 고독이 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
P. 182
타인을 깎아내려봐야 진흙탕에 남는 건 상대가 아니라 나다.
P. 378
어린 내 마음은 미처 몰랐다. 뭔가가 산산이 깨지고 나면, 그 조각을 이어붙인 금은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시 깨지기 쉽다는 사실도.
색을 잃은 세상에서 피어난 마지막 사랑의 기록
《나와 너의 365일》로 일본과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울린 유이하 작가가또 한 번 감성의 절정을 보여주는 후속작 《네가 남긴 365일》로 돌아왔다.
전작보다 한층 성숙해진 서사와 깊어진 감정선으로,
사랑과 상실, 그리고 치유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참고로 전작을 읽지 않아도 전혀 문제없이 감정선에 몰입할 수 있다.
가을비에 금목서가 지던 어느 날 너는 떠났다.
그리고 그날, 내게 남은 365일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색을 잃은 소년과 빛을 남긴 소녀의 이야기
세상을 오직 흑백으로만 인식하던 소년 유고.
그에게 세상의 색을 언어로 들려주던 소녀 가에데.
그녀의 세세한 묘사와 웃음은 유고의 삶 속 작고 따뜻한 빛이었다. 하지만 가에데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유고는 어느 날 ‘무채병’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그리고 그때, 가에데가 남긴 건강해지면 하고 싶은 일 리스트가 그에게 전해진다.
그 순간부터 유고의 365일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버킷리스트’를 따라 걷는 365일
가에데의 리스트에는
“방과 후에 햄버거 먹기”,
“3점 슛 4번 성공하기”,
“크리스마스 파티 열기”,
“이성과 데이트하기” 같은
소소하지만 반짝이는 소망들이 적혀 있다.
유고는 하나씩 실천하며 조금씩 세상과 연결되고,
그의 기억 속에서 가에데의 목소리와 미소가 다시 살아난다.
죽은 이를 잊지 못해 멈춰 있던 시간이, 리스트를 따라가며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외톨이였던 유고의 곁에 친구들이 하나둘 모이고,
달라진 그의 모습에 뿌듯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 변화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찬란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저릿했다.
유고의 무채색 세상이 하나둘 물들어갈 때마다
나의 오래된 기억 속 그리움도 함께 색을 되찾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살아내야 하는 1년.
그 시간은 유고의 이야기이자,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그리고 사랑이 남긴 잔향으로 하루를 견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읽고 나면 마음 한켠이 포근히 아리고,
마지막 가에데의 일기를 읽을 땐
가슴이 저려서, 한참이나 책을 덮지 못했다.
허균의 편지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허준의 의술을 전수받은
의생 이재영에게 전라도 나주목으로 와 달라는 요청이 전해진 것.
재영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발생한다.
기생 애생이 살해된 것. 목격자는 임금의 스승, 남록 유희서 영감이라
하지만 그는 이미 며칠 전 도적 떼의 습격으로 죽은 상태였다.
게다가 목격자마저 죽임을 당하고, 또 다른 유력 용의자인 형방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든다.
시리즈로 이어질 듯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그래서 더 아쉽고, 그래서 더 기대된다.
다음 권이 빨리 나와주길 간절히 바란다.
게다가 MBC 드라마 제작까지 확정되었다니,
책으로 읽었던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린다.
너무 재미있어서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허균, 재영, 작은년까지… 캐릭터 하나하나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 환경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의 위대한 힘이 느껴짐과 동시에 스스로 반성! 🙂↕️
☝️ 마치 마인드셋의 끝판왕을 보는 듯한 감동이 전해진다.🥹
👉 환경을 이유로 뭔가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고민을 갖고 있다면 꼭 한 번 보시길 추천해요.👍
📚 로라 베이츠 작가(박진재 옮김)의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덴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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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이 자아를 바라보는 거울이 된다
✅️ 저자는 수용소 중에 수용소 슈퍼맥스(독방) 수감자들에게 셰익스피어 작품을 가르치며, 이를 통해 수감자들이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고 내적 변화를 경험하도록 이끌어 갑니다.🤗
✅️ 수용자들은 희곡 속 인물의 갈등과 선택에 공감하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됩니다.😌
✅️ 특히, 사형수인 래리 뉴턴이라는 인물의 변화는 참으로 극적이고 자기성찰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어요.🤩
✅️ 문학이 ‘자기 발견의 도구’임을 여실히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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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셰익스피어는 수감자에게 ‘해방된 시각’을 열어준다
✅️ 래리는 독방에서도 셰익스피어를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고,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 물리적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내면의 자유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참으로 감동적이에요.🥹
✔️ “그것은 제가 가장 자유로웠던 경험이었어요 … 달라진 것은 오직 제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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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육은 누구에게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 래리가 주변 수감자들에게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며 변화한 이야기는 단지 한 개인의 회복을 넘어, 교육의 힘과 가능성을 느낄 수 있어요.💪
✅️ 그는 이후 다른 수감자들을 위해 워크북을 쓰고, 프로그램은 언론의 주목을 받는 등 확산됩니다.😍
✅️ “셰익스피어가 나를 살렸다”는 래리의 고백은, 문학으로 인해 삶이 바뀐 실제 사례로서, 자기계발에 대한 강한 울림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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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인드셋을 위한 팁 : “자신을 보는 방식을 바꿔보기. 그 작은 전환이 삶의 자유를 열어줍니다.”
✅️ 로라 베이츠 교수의 수업에서처럼, 삶의 외적 환경이 곧바로 바뀌지 않아도, 내면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그 순간이 바로 ‘내 안의 갇힌 감옥’을 열 수 있는 출구가 됩니다.☝️
✅️ 고전 문학이든, 인문 콘텐츠든, 이를 자기 삶에 적용하면 “자기 인식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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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도련님은 집안에서 늘 문제아로 취급받는다.
어머니는 형만 사랑하고, 아버지는 “글러먹은 놈”이라며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요 할멈만은 달랐다. 과자를 쥐여주고,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 칭찬하며 도련님에게 끝없는 믿음을 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형은 집을 팔아버리고, 작은 돈만 쥐여주며 인연을 끊는다.
그 후 도련님은 시골 학교 교사가 되어 여관과 하숙집을 전전하며 학생들의 놀림을 받고, 동료 교사들과의 갈등 속에서 외로움을 겪는다. 고지식하지만 정의롭고, 불합리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태도. 때로는 답답해 보이지만, 결국 묘한 통쾌함을 남긴다.
100년이 넘은 작품임에도 지금 읽어도 유쾌하고, 여전히 생생하다. 오래된 문장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울림이 전해진다.
인간실격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을 지닌 소설.
자극적인 전개에 익숙한 내겐 조금 심심했지만, 그럼에도 가독성은 놀라울 만큼 좋았다. 100년도 더 된 책이 이렇게 매끄럽게 읽힌다는 사실 자체가 인상 깊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온전히 책 한 권을 쓰고 나면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겐 언제나 그것이 글 쓰는 일의 가장 기적 같은 부분이었다."
이 책을 쓴 작가의 글을 책을 다 읽고 나서 보게 되었다.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보며 독자인 나 또한
많은 생각을 했거늘
하물며, 작가는 더 그러했을 것이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이른 아침 식사라!
제목에서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어 더 이 소설에 끌렸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삶에서 그런 경험은 본인 내면의 깊숙한 곳에 하나 정도 가지고 있을 터.....
결혼정보회사에서 기획한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책을 읽으면서 이 모임을 주체하는 하나의 미스터리를 상상했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내가 왜 이 책에 매달려 바쁜 3일 간의 시간을 이 책에 빠져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자조 섞인 나름의 변명을 가지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계속해서 상기하게 했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글 쓰는 작업 속에 본인의 영혼을 갈아 넣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특히나 그러한 작업을 통해 나온 작품들은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안녕!"
생각해보니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이별할 때, 만났을 때
이 책에서도 작가는 이 '안녕'이란 개념을 적재적소에 어울리게 사용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전자를 생각했고
책을 읽고 나서 나는 희망적인 후자를 내 마음에 안착했다.
말로써 표현해서 본인의 감정을 사람들 속에 녹여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엔 더 많다.
윤사강.....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에 참석한 맴버다.
부모의 이혼으로 가슴에 상처를 달고 살아가는 그의 사랑 또한 쉽지가 않다.
항공사 승무원에 부인이 있는 유부남 기장과 사랑에 빠졌고,
그가 이혼하려고 했을 때 이별을 선언했다.
국어 교사였던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그에게 '이혼'이란 단어는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였고 그는 가슴 내면 본인의 감정을 희생 시켰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형을 둔 지훈은 매번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도망쳐 나오려 했지만
언제나 그의 형 곁을 맴돌고 있었다.
고객 학보를 위해 엄청난 프로젝트를 진행한 미도 또한 이 조찬모임의 결과를 통해 한층 성장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63페이지
이별 후 사랑하는 사람이 매년 6월 3일 생일날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한
책 선물은 본인의 탄생을 직접 동사무소에 신고했던
파리에 있는 아버지였다.
옛 연인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상자 안에 버리고 조찬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이 가져갔던 물건들은
새 주인의 것이 되었을까?
윤사강이 버렸던 '슬픔이여 안녕' 책들은 이지훈이 가져갔다.
이지훈이 버렸던 오래된 카메라(로머)와 필름은 윤사강이 가져갔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도쿄에서 일본의 대지진이라는 천재지변 앞에서
도킹한다.
결혼정보회사의 한 VIP 고객 현정의 과거 연인을 다시 만나게 하기 위한
프로젝트는 그곳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다.
현정과 지훈은 재결합을 하지 못했지만
"고마워'라는 말로 이별할 수 있었다.
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이 이별의 아픈 안녕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에 대한 희망적인 안녕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실연의 상처로 오랜 시간 불면증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달콤한 잠을 선사했다.
나는 꽤 괜찮은 소설을 읽고 나면 나름대로 이 소설을 모티브로 한 영화의 장면들을 떠 올린다.
이 책에는 윤사강의 직업을 배경으로 '공항'이라는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 만드는
그곳에 가면 무언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게하는
그런 설레임!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과정에서 사강은 손 바닥의 생명선을 칼로 그었다.
그가 좋아했던 연인 정수의 손등에는 자신의 새끼 손가락 길이 만큼의 상처가 있었다.
이야기의 조합은 어딘지 모를 운명이라는 암시를 가지게 하지만
그것 또한 모두의 마음 속에 있는 자신들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엄마가 죽는 날에도 아버지는 본인의 직업인 택시 기사로 손님을 태우고 택시를 몰아야했던 미도의 삶은 또 어떠한가?
성공하지 않으면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에겐 아무런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하는 곳이 냉정한 세상이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름대로 상상한다.
그들은 그 모임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과거를 지우려 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래 동안 외면해 오던 자신과의 화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삶은 성장의 연속이니깐.....
글을 쓰면서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독자 또한 그러하다.
같이 웃고 같이 울면서 한 권의 책을 통해 사유의 숲을 지나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사강이 오랜 기간 가슴에 담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화해로 이끌어지는 부분은 반전과 함께 뭉클한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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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이 책은 이과적인 용어들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 담긴 따뜻한 위로는 마음 깊이 전해진다.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가 조금은 더 따뜻해졌으면 한다.
📖
P. 50
앞으로 어두워질지, 아니면 밝아질지 모르더라도 우선은 흐르게 두어야 다음 모습을 알게 된다. 설혹 다음 장면이 어두워지더라도 그리 좌절할 것도 없다. 자연의 섭리대로 또다시 밝아질 테니 한 번 더 나아가면 된다.
P. 122
누군가의 발소리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똑같이 따라 걸을 수는 없는 법이다. 얼마간 흉내 내고 본떠 보아도 이내 내게 익숙한 걸음걸이로 돌아올 뿐이다. 비교도 모방도 없는 영역이다. 그러니 단지 내 같 길만 잘 나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P. 168
어쩌면 누군지도 모를 무리의 평가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만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면 명왕성을 기억한다.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함에도 이리저리 판단해 대고 정정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일말의 가치도 없음을, 태양계 저변의 천체는 진즉에 알고 있었을 테니까. 태양계에 편입되었던 반대로 퇴출당했던 제 뜻이 아닌 것에 연연치 않는 명왕성처럼. 늘 그 자리에 있는, 이제는 이름조차 빼앗긴 왜소행성 134340처럼. 내가 구축한 세계에서 내 할 일만 잘 해내면 될 일임을 기억한다.
새 학기가 될 때마다 생각나는 사진이 하나 있다. 특수학교를 위해 무릎을 꿇은, 장애아동의 부모들의 모습. 그 뉴스가 나왔던 게 이미 1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새 학기즈음이 되면 과연 올해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0년이 지났음에도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 동향에 마음이 아파 『학교잖아요』를 다시 꺼내 읽어본다.
이 책은,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어른들이 더 많이 읽고, 선한 나비효과를 불러주길 바라게 되는 책이다.
『학교잖아요』는 함께하는이야기 시리즈에 포함된 책으로, 진정으로 다름을 이해하는 방법,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깊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책이다. “무릎꿇은 엄마들”등 사회의 문제나 분위기도 잘 다루고 있어 어른에게도 큰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학교잖아요』의 첫 장은 공터에서 화를 내는 사람들로 시작된다. 마트가 생긴다고 들떠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공터에 특수학교가 생긴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신도시가 형성되어 이사를 온 어른들처럼, 전학까지 온 아이들 역시 술렁인다. 해나가 “특수학교 생기는 거 다 싫어한대. 솔이네 가족이나 좋아할걸”하고 뱉은 말은, 장애를 가진 솔이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점점 격양되어 “그런 시설”로 몰아가는데, 반에서도 딱 솔이와 윤서만이 특수학교를 찬성한다. 알고보니 윤서의 동생도 장애아동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번뇌한다. 상황이 극으로 치달아 엄마들은 무릎을 꿇고 호소하기에 이르고, '나'는 “왜 권리를 무릎꿇고 빌어야 돼?”라고 생각으로 점차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 그 물음표에서 시작된 행동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전파가 되고, 결국 어른들도 변한다. 그리하여 마을에는 “특수학교 건립반대”현수막이 아닌 “특수학교 건립한대”현수막이 달리게 되었다.
현실에서는 아이들의 동영상 하나가 학교건립을 반대하는 민원을 잠재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비 효과가 되어 또 다른 움직임을 이끌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많은 어른들이 자신들의 이익이 아닌 사회 모두의 권익을 생각해야 하고, 서로를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할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새 학교, 새 교실에 가게 될 오늘. 갈 수 있는 학교가 없어 가지 못한 친구가 분명 있을 것이다. 마땅한 학교가 없어 한시간 넘게 걸리는 학교에 간 친구가 있을 것이다. 부디 그 친구들이 내년에는 집 앞의 학교, 조금 더 가까운 학교를 다닐 수 있길 바라며.
권리와 공동체를 생각하게 하는 동화, 『학교잖아요』였다.
강추합니다.
동남아에 대해 잘 몰라서, 무식해서 용감한 걸 수도 있지만, 동남아 입문서로 이만한 게 있을까 싶습니다.
일단 쉽습니다. 저자가 학자가 아닌 동남아에서 일했던(혹은 잦은 출장을 했던) 기업인 출신이라 본인의 경험, 호기심을 출발점으로 지식과 이론을 보탠 걸로 추측되는 접근이 누군가에게는 학문적 정밀성에서 아쉬울 수 있겠지만 대중서, 입문서로는 같은 눈높이에서 접근할 수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흔히 보게 되는 동남아에 대한 하대가 아닌, 첨부한 그림과 같은 시선이 제게도 전해진 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저 또한 동남아를 얼마나 몰랐고 그래서 그들을 우리보다 한단계쯤 낮은 문화권으로 대하진 않았나 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배울 것 그리고 그들을 통해 배울 것, 그리고 함께 살아가야 할 지점이 많구나 하고 깨닫게 해준 신일용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https://m.yes24.com/Goods/Detail/107473151
#고르디우스의매듭을자르면#전해진
가족이 의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또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다.
아시아를 정복하는 사람만이
끊을 수 있다는 복잡한 고르디우스 매듭을
알렉산드로대왕은 칼로 끊어버렸다.
매듭에 꽁꽁 묶인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때로는 과격하게 잘라버려야 한다.
그것이 비록 부모, 형제, 가족일지라도.
어떤 일을 겪었는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
쉽게 말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끊어버려야 할 매듭으로 고통 중인 분들이
지긋지긋한 매듭을 끊고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길.
#마지막반전소름#단편소설#위픽#2024년187번째책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역사의 변곡점에서 펼쳐진 언더독의 치열한 저항의 순간들
역사를 바꾼 언더독의 처절하고 놀라운 재발견
역사는 승자만의 역사가 아니다.
승리가 찬란한 만큼 '패배'는 강렬하고 처절했고,
거대한 힘이 세계를 지배할 망정
이에 짓눌린 사람들의 도전이 끊인 적이 없었기에
또 다른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간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은 역사로 남는다.
역사의 평가는 후대가 한다.
그러나 여러 변곡점을 지나면서 역사는
늘 재평가된다.
세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답답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소수만 자유롭고 즐거울 뿐인 세상이었으며,
변화를 꿈꾸는 자는 불의에 맞서
늘 저항하고 희생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러한 작은 저항의 교훈은
역사로 남아 후대에 길이 길이 전해진다.
이 책은 세상을 바꾸려는 작은 시도들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주었고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갔는지
역사 속 결정적 사건들을 조명하고 있다.
네덜란드를 자유로 이끈 빌럼이 그러했고
죽을 줄 알면서도 300여 년 간 절대 권력의 왕실이
보여준 약속에 보답하기 위해 신뢰에 응답했던
중국 송나라 황실의 시씨 가문이 그러했다.
그들의 저항과 용기는 당시에는 죽음으로
결말지어졌지만 , 후대에는 한 나라의 국가에
그의 업적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오늘날 네덜란드 국가의 가사는 네덜란드의 독립을 위해
국민과 함께 했던 빌럼의 고백이자
네덜란드인들의 다짐이다.
"나사우 가문의 빌럼,
나는 네덜란드인의 혈통이다.
조국에 충성을 다함을 죽을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나는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다."
거인 나폴레옹에 맞선 스페인의 게릴라 투쟁
왕은 나라를 프랑스에 팔아버렸지만
스페인 국민들은 프랑스와 정면 승부 했다.
평범한 복장의 농민, 허름한 상인,
지팡이 짚는 노인들,
빵을 굽는 여인들은 프랑스군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제복을 입은 정식 군대가 아니라 지역의 민간인들이
무장하고 익숙한 지형을 활용해 적에 맞서는
'게릴라전'의 이름은 이렇게 역사에 등장했다.
이 작은 전쟁의 전사들은 희대의 거인이자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에게 뼈아픈
타격을 입힌다.
"나를 쓰러뜨린 건 스페인의 상처였다.
훗날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되어 일생을 바친
나폴레옹이 술회한 내용이다.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레옹에게 맞섰던 이 전쟁을
'스페인 독립전쟁' 이라 부르며 영웅들을 기리고 있다.
역사 속에는 승자의 기세가 아무리 하늘을 찔러도
이에 굴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도
뒤를 잇는 등불로 남아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역사는 승자만의 역사가 아니다!
이 책에는 작은 힘으로 세상을 뒤집은
감동적인 승리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현재를 들여다 본다.
우리나라는
"이것만은 지키겠다." 라고 내밀었던 가치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성실히 지켜나가고 있을까?
우리는 얼마나 우리 정부에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
책을 읽고 나니 새삼 드는 생각이다.
한숨이 나오는 시절이다.
#부드러운독재자#세계사에균열을낸결정적사건들#믹스커피#원앤원북스#세계사#역사#책스타그램#북스타그램#독서#독서모임#책#책추천#글귀#좋은글귀#글쓰기#문장수집#서평#김형민
#나는당신의행복이좋습니다#인썸#도서제공
❝나는 이제 괜찮아졌어요. 당신도 그럴 거예요.❞
모든 문장이 시적이다.
각 꼭지가 한 편의 시로 쓰여져 있다.
시를 읽다보면
저자의 아픔이 치유되는 과정이 그려지며 에세이가 된다.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아무런 조건없이 나를 위해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이 전해진다.
누군가 공감해주고 쓰담쓰담해주길 원하는 분들께
슬며시 내밀고 싶은 책
#부크럼#럼부크#책추천#긍정#위로#에세이추천#2024년134번째책
전편에서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절도범이 된 레이토가 월향신사 관리인이자 녹나무 파수꾼으로 일하며 녹나무의 신비한 기념 의식에 관해 알게 되고 개과천선하는 과정을 다뤘다면, 《녹나무의 여신》은 레이토가 여러 사건에 휘말려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기적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이번 《녹나무의 여신》은 세계관이 더욱 확장되면서 별개로 보이던 에피소드들이 톱니바퀴처럼 치밀하게 그리고 빠르게 서로 맞아 들어가며, 단 한 장도 놓치기 힘들 만큼 숨 가쁘게 읽게 될 작품이다. 또한 전편에서 채 마무리하지 못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정돈된 일상을 지내며 어른스러워진 레이토가 기지를 발휘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고 약자를 돕기도 하지만, 여전히 잔꾀를 부리는 탓에 파수꾼의 도리를 두고 치후네와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전편을 읽었다면 곳곳에 놓인 익숙하고도 반가운 장면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우연이 수차례 얽히고설킨 어둠 속
녹나무의 신비가 깃드는 순간
지금 단 하나뿐인 염원이 전해진다
월향신사의 좁은 덤불숲을 따라 들어가면 길 끝에 거대하고 장엄한 녹나무 한 그루가 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 밤마다 나무 기둥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밀초에 불을 켜면 한 사람의 염원을 주고받을 수 있다. 녹나무에 염원을 새기면 예념이고 받으면 수념이라고 하는데, 예념자와 수념자를 이어 주는 사람이 바로 파수꾼이다. 파수꾼에게는 규칙이 몇 가지 있다. 매일 월향신사를 청소하고 관리하며 기념의 내용을 함부로 물어보거나 발설하면 안 된다는 것. 레이토는 치후네의 뒤를 이어 새로운 파수꾼이 돼 매일같이 경내를 청소하고 기념이 있는 밤마다 손님을 안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비 오는 밤에 기념하던 손님이 쓰러져 레이토는 문단속도 하지 못한 채 종무소를 급히 비우게 되는데, 다음 날 돌아와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빗물에 젖거나 쓰러져 있어야 할 밀초가 멀쩡히 다 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월향신사에 형사가 느닷없이 찾아오면서 한 집에 두 명의 절도범과 강도범이 연달아 침입한 사건에 휘말린다. 더구나 시집을 대신 팔아 달라는 여고생과 잠들면 기억을 잃는 소년까지 나타나며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추리소설의 거장이 선사하는 특별한 감동
이렇듯이 여러 사건 사고는 후에 녹나무와 레이토를 분기점으로 삼아 영향을 주고받으며 신비롭게 소용돌이치는 하나의 드라마로 완성된다. 벌어진 인과의 틈새를 매끄럽게 메워 가며 예상보다 훨씬 큰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방식은 삶의 눈부신 순간을 은유하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만남과 별것 아닌 호의로 우리가 함께 살아갈 용기를 얻을 때처럼 말이다. 또한 신비한 녹나무 이야기는 여러 에피소드가 중첩되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결말까지 힘 있게 나아간다. 눈앞에 영상이 펼쳐지듯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과 명쾌하고 스피디한 문장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뜻밖의 반전과 감동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녹나무의 여신》은 추리와 판타지는 물론이고 따뜻한 감동까지 녹아들어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표 종합 선물 세트와 같은 소설이다.
기적은 함께 있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신비롭게 물들일 착한 이야기
선하다고 해서 모두 지루하고 뻔하지만은 않다. 선을 악보다 재미있게 묘사하기란 어렵지만, 레이토가 녹나무를 이용해 복잡하게 뒤얽힌 사건을 풀어 나가는 모습은 꽤 흥미롭게 관전해 볼 만하다.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 중요한 건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이지. 동전 던지기 따위에 기대지 말고.”(69쪽)라고 이와모토 변호사가 조언하듯이, 레이토는 제 마음이 끌리는 대로 눈앞의 사람을 선뜻 돕기를 선택한다. 과연 그 일이 합리적인지 따지는 건 행동의 근거를 외부상황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동전 던지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레이토를 따라 몰입하다 보면 모든 사람은 완벽할 수 없고 조금씩 부족하고 어긋나 있지만, 서로 모서리를 비스듬히 이어 맞추며 살아갈 때 그 순간이 얼마나 눈부시고 가슴 벅찬지 보여 준다. 인간은 본래 추악할 수밖에 없다고도 하지만, 누군가 우연히 건넨 호의도 한 사람의 구성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인생 한번 살아 볼 만하지 않을까.
꽤 높은 교양을 갖추고 자존심도 무척 강한 치후네는 인지증을 앓는 탓에 때때로 조금씩 혹은 완전히 기억을 잊어버린다. 그럴 때마다 치후네는 내면 깊은 곳까지 통째로 흔들린 듯이 좌절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리 생각하면 차례차례 잊어 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닌지도 모르겠군요.”(324쪽)라며 낯선 오늘에 적응하고 새롭게 배워 나가는 기쁨을 맛본다. 잠들면 기억이 사라지는 모토야도 매일 일기를 쓰고 읽는 행위를 통해 이 세상에 자신이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증명하며 천천히 어른이 된다. 책의 끝에 다다르면 기적의 새로운 의미가 우리 마음속에 자연스레 스며든다. 기적은 어쩌면 신비한 녹나무가 아니라, 함께 있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지금 이 순간이라고. 봄바람만큼 따뜻한 감동과 반전을 일으키며 언제든 곁에 두고 읽기 좋은 소설이다. 그러다 보면 이 착한 이야기가 우리를 신비롭게 물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부서졌으나 아주 망가지지는 않겠다는 각오로, 상처 입었으나 병들어 죽지 않을 마음으로, 오래 가난하지 않을 희망으로.
;책의 첫 장을 열면 실린 글이다. 처음부터 감성을 일깨우는 문장들이 들어온다. 각오와 죽지 않을 마음, 가난하지 않을 희망이라는 글들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소회와 지금과 앞으로 살아갈 태도가 전해진다.
문맹의 시간 42쪽
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믿음으로 기억한다.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쓴다는 작가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가 대단한 작품을 쓴 직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문맹의 시간을 살아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오래전 내가 간직했던 바깥 언어를 떠올리며 나의 믿음을 적어본다.
‘쓴다’
이 말에는 과거형도 미래형도 필요하지 않다.
;자신의 경험과 공감대가 있을 때 더 들어오는 글들이 있다. 독서모임에서 현재 중국에 파견 나가 있는 분이 있다. 이 장은 그분이 공감이 많이 된다고 했다. 전에 읽었던 크리스토프의 책 이야기와 작가 자신이 이방인으로서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가 함께 덧씌워지면서, 그럼에도 쓰고자 하는 이의 마음도 다가오고, 이방인으로서의 느꼈을 고독감도 함께 전해진다. 외국에서의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은 없으나, 살면서 느끼는 삶의 이방인의 고독감이 종종 느껴진다. 지금 이 삶에서 이방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순간순간의 느낌이 전해져 올 때, 두 작가처럼 이 시간을 잘 견디고 살아낼 수 있을까 스스로 질문해 본다.
아름답게 어긋나기 47쪽
누군가 내 일을 물으면 번역이라는 말보다 글을 ‘옮긴다’라는 동사를 써서 말한다. 동사로 말하는 나는 몸으로 말을 살아내는 사람이 된다. 의자에 앉아 더 오래 엉덩이로 버티고, 납작한 활자가 아닌 피와 살과 뼈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만지는 마음으로 단어를 고른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창작일 것이다. ‘옮긴다’는 말속에는 머물던 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을 향하는 이동의 의미가 있고 그 걸음에는 새로운 시선과 발견, 길의 확장이 있으니 그것이 창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번역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창작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문장이다. 두 번역가의 에세이 제목을 빌려 작가이면서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번역에 대한 사유가 작가 자신의 삶의 여정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꿈이 진실이 될 때까지 67쪽
꿈은 이야기의 영감이다. 영감과 계시는 다르다. 계시의 주체는 ‘나’가 아닌 ‘그 누군가’이고, 삶이 그가 정해놓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그의 뜻을 미리 안다고 달라질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영감’은 다르다. 누군가 살짝 불어넣어 준 ‘숨’처럼, 그것은 형체 없이 내게 온다. 그러니까 형체를 만드는 주체가 ‘나’인 것이다. 꿈을 재료로 쓴, 영감으로 쓴 모든 문학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진실한 무언가로 바꾸어 놓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거짓은 아니라는 엄마의 말은 분명 틀리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창작자의 몫이니까. 물론 문학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이라는 커다란 창작품에 비하면 문학은 그저 작은 극이지 않은가.
;누군가 살짝 불어넣어 준 숨을 통해서 인생이란 창작품을 잘 만들고 있는 걸까?
영감과 계시에 대한 표현에서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이 쏠린다. 신의 계시는 주체가 나가 아닌 신이기에 영감이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의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듯하지만 다른 간극의 계시와 영감은 영감을 통해서 스스로 꿈을 찾아가려는 인간의, 인생이 모습이 보인다.
꿈 바깥의 삶 71~72쪽
꿈의 자리를 채웠던 것들이 다 빠져나간 뒤, 내게는 남은 게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애썼을 뿐이다. 그것은 꿈 바깥의 삶이었고, 나의 배움은 꿈이 사라지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한동안 텅 빈 사람을 살았다. 모든 게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난 후에야 내가 단 한 번도 꿈 바깥의 사람을 살뜰하게 돌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왜 아무도 우리에게 꿈 바깥의 삶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에도 무엇이 되지 않았을 때의 삶을 사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무엇을 하든 나로서 사는 일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연극을 그만두고 현실을 살기 위한 바깥의 삶이 시작되면서 보지 못했던 현실의 삶이 보이기 시작하고 의문이 든다. 꿈이란 걸 이룬 이보다는 현실에 발 딛기 위한 바깥의 삶이 더 보편적일 텐데. 꿈을 이루던 현실을 살던 ‘나로서 사는 일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 맴돈다. 성취만을 삶이라고 한다면, 성취에 이르지 못한 것들은 다 무의미한 일인 걸까. 바깥의 삶일지라도 그것 역시 나이므로 존중과 인정을 스스로 놓치지 말아야겠다.
나의 여름과 당신의 여름이 만나면 81쪽
심보르스카가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했던 것처럼, 사랑도 별들의 시간이 아닌 풀벌레의 시간을 살아야 하니까, 사람의 시간은 늘‘오늘’이어야 하니까.
;요즘에 읽는 책 속에서 많이 등장하는 시인 심보르스카다. 인용되는 시인의 시어들은 소박하지만 지금을, 오늘을 더 소중하게 살아가는 의지가 느껴진다. 이 에피소드 역시 작가의 기억 속 여름들의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지금 읽는 당신은 어떤 여름을 살고 있는지, 어떤 ‘오늘’을 살고 있는지 묻는다.
다시 한 살을 사는 마음으로 89~90쪽
돌이켜보면 누군가를 향해 썼던 모든 글이 내게로 되돌아왔던 것 같다. 기쁜 이야기는 내 마음의 기쁨의 자국으로, 슬프고 아픈 이야기는 작은 성장으로. 그러니 글쓰기란 결국 보내는 말이 아니라 맞이하는 말이 아닐는지.
다시 한 살을 사는 마음으로 자라고 싶다. 사랑하는 것들을 끌어안으면서. 끌어안으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게 있다고 믿으면서.
;돌잡이 축사의 글을 쓰면서 자신의 글이, 글쓰기가 삶 속에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아기에게 보내는 축사의 문장이 결국은 자신에게 보내고 싶은 문장이기 때문이다. 축복의 말을 보내는 행위를 통해, 자신조차도 축복을 받는다는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마지막 문장은 돌쟁이 아기를 끌어안으면서 삶에 대한 기쁨을 느끼는 이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포옹할 수 있는 관계와 삶의 모습들이.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에 대하여 94쪽
그의 말에 지난 몇 달 동안 기쁘면서 불안했던 나의 마음에 시원하게 길 하나가 뚫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천재 구두 디자이너가 아니라 구두를 고치는 장인이 되는 것이고, 타고난 것이 아닌, 시간이 완성하는 게 장인의 재능이라면 나 역시 꿈꿔볼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오직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일 테다.
;구두를 수선하면서 ‘시간의 힘’을 말하는 구두 수선 아저씨와의 대화에서 작가는 통찰을 얻는다. 재능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다 보면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본다.
다른 나라 105~106쪽
그르니에는 청춘이라면 누구든 ‘다른 곳에 가서 살리라’는 첫 번째 욕망을 품는다고 했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았고, 때로는 그 욕망을 질책하는 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들은 내게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면 실패할 것이라고, 실패의 맛을 보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는 물론 그들의 말처럼 크고 작은 실패들을 경험했고 또 절망했지만, 그것은 결코 ‘후회’는 아니었다. 내게는 아직 닿지 못하는 ‘다른 나라’가 있었으니까. 그때 다른 세계를 향한 동경이 없었더라면 내 젊은 어땠을까? 설령 그것이 현실도피였다고 해도 그르니에는 말하지 않았던가. 도피가 없다면 삶은 멈춰버린다고.
;다른 나라,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꿈은 젊음이 실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삶의 모험이자 낭만이 아닐까. 작가가 이방인으로서의 고독을 느끼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 다른 나라에서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았던 경험은 작가의 삶에서 자양분으로 뿌리내렸다고 느껴진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여정 속에서 자기를 대면하는 여행이라는 말에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여정을 꿈꿔보게 된다.
두 사람 편에 책의 첫 문장의 구절이 나온다.
이 에피소드는 작가의 사랑 이야기이다. 파리에서 만난 반려자와의 젊은 날의 가난하지만 반짝이면서 꿈을 좇던 두 사람이, 꿈을 버리고 프랑스의 시골에서 버려진 물건이 아닌 예쁜 식탁과 물이 새지 않는 욕실의 집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을 했으며,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이야기와 다시 반려인이 편지로 작가는 일어선 듯한다. 그리고 책의 포문을 연 첫 문장을 만나다. 읽다가 다시 문장을 발견하니, 생의 한 시절을 통과하는 여정에서의 이야기가 코끝을 시큰거리게 한다. 작가는 그녀는 ‘거기에 그리고 지금 여기에’ 두 사람으로 오래 함께 있음을 고즈넉하게 말한다.
두 사람 일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반려인으로서 함께인 그들에게 어떤 안온함 같은 게 느껴진다.
미움의 역사 149쪽
그러나 지금은 그저 미움을 쓰겠다. 미움을 그리워한다고 딱 거기까지만 말하겠다. 낯간지러워 다정한 말 한마디 못했던 할머니와 나에게는 그 정도가 어울리지 않겠는가. 그렇게 미워했던 사람을 간직해도 되지 않겠는가.
서로를 미워했던 우리를 오래 기억하겠다.
어쩌면 사랑보다 더 오래.
;미움의 역사라니. 다른 말로 애증의 관계라고도 부르는 그런 관계. 미움 아래에 깔려 있는 서투른 사랑의 다른 모습을 할머니를 통해서 본다.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런 관계들은 아프면 아픈 데로 애써 회복하거나 돌이키지 않고 흘러가는 게 좋다. 각각의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성장하고 변하고 죽음으로 이별하지만, 그 안의 미움의 역사는 미움이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된다.
좋은 섬유 유연제를 사는 일 167쪽
이제 나는 손에 쥘 수 없는 ‘질서’나 ‘안정을 꿈꾸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모두 내게 섬유 유연제 광고만큼이나 허상일 뿐이다. 서랍 속에 정돈된 삶이 아닌 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흔들리는 삶을 살아도 좋다. 춤을 추듯 자유롭게 흔들리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쨍한 햇빛, 시원한 바람, 맑은 공기를 누릴 수 없는 삶이 성큼성큼 다가온다는 사실을 하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잘 알고 있다. 다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야 할지를 모르겠다. 아니, 그것도 잘 알고 있다. 아직 포기하지 못한 편안한 삶을 향한 욕망이 남았을 뿐. 나는 반드시 나의 욕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냄새 또는 향이 계층을 표현하고, 낮은 계층은 열악한 주거로 인해 환기에 취약한 주거 공간에서 살아간다. 이 에피소드는 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불러왔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의 주거 환경은 세탁을 마음대로 할 수 없거나 하기 힘든 구조인 곳에서 살았다. 그런 까닭에 섬유 유연제를 사용하게 된 이유와 그 마음을 듣게 된다. 질서와 안정이라는 삶에 대한 원대한 꿈. 감성적 에세이를 읽다가 사회적 관점을 보게 된다. 빈곤과 향기. 주거공간과 계층. 사회 비판적 이야기조차 마지막 문장은 또 문학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고독을 위한 의자 172~173쪽
그 후로도 고독과 나는 오랜 시간 많은 것을 나눴다. 당연히 하루아침에 삶이 나아질 리 없었지만, 나아지지 않는 삶으로도 나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고독에게 배웠다. 고독과 내가 함께 읽고 쓰는 동안 울음이 노래로 바뀌었다면, 그것은 고독이 내게 상처도 음표와 쉼표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내 안에 보기 싫게 그려진 검은 줄도 오선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기 때문이 아닐까.
;고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고립과 고독이 개념이 혼재되어 있어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게 더 크다. 고독이 상처이기만 한 것이 아닌 음표와 쉼표로 쓸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고독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구하게 한다.
풍경 속으로 203~205쪽
산책과 사색을 즐기고 살롱에서 낭독회를 열거나 카페에서 토론을 즐겼던 작가들의 지적인 언어, 속도나 술이나 마약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우아한 현악기 같은 소리를 내는 언어, 그런 말들은 내가 듣고 자라는 말과 달랐다. 그런 말들은 멀리 있었고, 멀리 있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 말을 손에 쥐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었던가. 그러고 보면 읽는 일은 내가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했던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독서는 저 멀리 있는 아름다움에 손을 뻗어보는 일이었고, 더 나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일이었으며, 내게 없는 말을 감히 훔쳐 오는 일이었으니까. 아, 얼마나 탐스러운 말들이 그 안에 있었던가. 게걸스럽게 삼키고 싶었던 말들. 내 것과 바꾸고 싶었던 말들. 지금 내 안에 축적되어 나를 쓰게 하는 말들.
;이처럼 절절히 책 읽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문장이라니. 멀리 있는 것의 아름다움의 사랑이 책 읽기로 확장되어 뻗어나가고 결국은 책과 관련된 이가 된 작가의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독서에 빠진 사람이라면, 특히나 문학적 독서에 빠졌던 사람이라면 이 문장 속의 열렬함에 함께 도취되지 않을까. 단순하고 간결한 행위처럼 보이는 책 읽기에 대한 찬가를 나는 이 문장 속에서 발견했고, 덩달아 기쁨에 전이된다.
내가 사는 동안 멈추지 않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지금은 태어날 이야기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듣는다. 때대로 그것은 침묵으로 자라기도 한다. 나무처럼, 내 안에 한 그루, 두 그루, 침묵의 나무가 자란다. 이 나무들이 자라 숲을 이루면 고요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때 나는 끄덕임을 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마지막 임종의 말 끄덕임을 통한 사유가 이렇게 전개된다. 사는 동안 멈추지 않는 이야기 그리고 고요를 통해 얻게 되는 끄덕임이라니.
작가의 사유와 감성, 시선들이 아팠던 힘들었던 젊음, 그리고 그 여정을 지나와 젊음을 반추하지만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귀 기울여 말하는 문장들이 여기 담겨 있다. 펼치면 그 세계 속에서 함께 유영하기도 하고 나 자신의 날들과 대비하여 문장들을 가져와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상처 없는 계절이라는 제목은 반어법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상처를 지나왔던 계절이 이제 상처 없는 계절로 치환된 계절, 삶의 이야기들로.
집안에 암 환자가 한 명 있다면 가족들은 그 분야에서 거의 전문가가 된다. 어떤 식으로 발병을 하고 어떻게 치료 과정을 밟으며 그것과 상관 없이 어떤 모습으로 내 가족이 스러지는지 낱낱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하나하나 장면으로 찍혀 오래도록 기억된다. 그래도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 뭘 잘못했는지의 후회보다 그나마 좋았던 기억이 더 자주 추억된다.
최근 "죽음"에 관한 에세이를 두 편이나 연달아서 읽고 있는 중이다.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읽다 보니 엄마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두 책 모두 암 환자들의 이야기라 '그래, 엄마도 그랬지~', '우리도 그랬는데' 하고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36살의 전도유망한 의사가 최고참 레지던트 과정을 성공리에 마쳐갈 때 즈음 폐암 선고를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 에세이다. 누구보다 병에 대해 잘 아는 의사가, 자신의 CT 결과를 보며 좌절했을 순간과 그 이후 병을 이겨내려고 하루하루 노력한 날들, 더이상 어찌할 수 없음을 인식한 후의 삶까지 작가 폴 칼라니티는 담담하게 때로는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좌절이나 슬픔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남은 이들을 위한 노력과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생활을 하기 위한 노력을 읽다 보면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작가는 폐암에서 온몸으로 전이된 순간까지도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했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고자 했다. 책을 쓰는 목적 또한,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252p)이라고 했다. 죽어가고 있지만 살기로 작정했던 이 젊은 의상의 사색과 생에 대한 통찰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시 고찰하게 한다.
분량이 짧은 소설임에도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가다듬게 하는 소설이다.
소설의 구조인 설명하기와 보여주기 중 보여주기로 쓰인 이 소설은 그래서 읽으면서 자꾸 질문을 던지게끔 했다. 해설되지 않고, 상황과 분위기, 인물들의 감정을 그저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해석하게 한다. 때론 읽는 이의 해석과 시선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질 만한 부분도 있고, 무엇을 내포한 것인지 찾아보아야 하는 곳도 있다.
설명하기의 문장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탓일까. 분량이 짧은데도, 서사의 밀도가 길고 큰 덩어리의 느낌이었다.
맡겨진 소녀의 화자는 이름 없는 어린 여자아이로, 이 소설에서 소녀가 갖는 의미를 주시하게 한다. 일견 이야기는 빨간 머리 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듯 흘러가지만, 돌봄이라는 키워드와 부모 이외의 다른 이들의 애정이 존재하는 유년 시절이 성장 후에 어떤 내면의 힘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른이 된 후 돌아볼 유년 시절의 따뜻한 대상이나 경험, 기억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을 주지 않을까.
부모에 의해 먼 친척뻘인 킨셀라 부부에게 여름방학 무렵에 맡겨져 학기가 시작될 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무척 단순하다. 1980년대 아일랜드라는 공간이 흘러가듯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나고, 소녀의 아빠가 도박으로 농사꾼으로서는 중요한 소를 넘기게 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몰리고 엄마는 다섯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임신한 탓에 돌봄과 식비를 덜기 위해서 한시적이지만 소녀를 맡기는 것이다.
아빠라는 인물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남성으로 묘사된다. 도박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킨셀라 부부에 대한 무례함, 아이에 대한 무관심이 소설에서 드러난다.
엄마는 아이에 대한 애정과 킨셀라 부부에 대한 고마움을 알지만, 현실을 변화시킬 만큼의 주체적 인물은 아니다.
킨셀라 부부는 소녀를 데려와 대안가족으로서 애정과 경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소녀가 침대 매트리스에 실수를 한 것을, 자신들의 잘못인 양하면서 소녀를 배려하는 행동은 뭉클하기도 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의 모습을 새삼 보게 했다.
소녀를 재웠던 방이, 실은 부부의 죽은 아들의 방이었다는 걸 방을 설명하는 문장 속에 암시되어 있는 걸 아들에 대한 문장에서 알게 되었다. 문장 중간중간에 복선이 있었던 셈인데, 흐르듯이 읽다가 눈치채고 다시 그 문장을 찾아 읽는 추리 소설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2장 벽지에 색색의 기차가 달리고 있다. 기찻길은 없지만 군데군데 작은 남자애가 멀찍이 떨어져 서서 손을 흔들고 있다. 행복해 보이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 벽지에 그려진 남자애의 모습들이 하나같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1장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소녀가 맡겨지면서 느낀 심리 상태를 표현한 이 문장에서, 어린아이지만 이른바 눈치와 분위기를 파악하게 되는 순간을 만난다. 불안하면서도 불안하지 않은 척, 의연한 척해야 하는 이중의 상태.
아빠가 아이를 맡기고 떠나는 상황에 대한 문장에서도 무례와 무심, 삶에 지친 이의 무연함, 뻔뻔함 같은 모습이 보인다. 독서모임에서 이 아빠에 대한 지탄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시대, 그 시대적 감수성으로 볼 때 우리 세대의 아빠들 역시 비슷하거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경제적, 사회적 계층에서 비롯되는 격차가 삶을 꾸리는 태도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이 소환되기도 했다.
아빠는 왜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떠났을까?
“세상에, 아빠가 네 짐도 안 내려주고 가 버렸구나!”
1장은 아빠가 소녀를 킨셀라 부부에게 맡기고 떠나는 이야기로 끝난다.
2장에서는 킨셀라 부부와 함께 지내기 시작하는 소녀의 일상이 시작된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이 장면은 목욕 후 집과 이곳에서의 다른 경험에 대한, 좀 더 아늑하고 세심한 돌봄을 받는 상황에 대한 인식 후의 마음을 표현한 문장이다.
아늑한 목욕의 느낌을 처음 느낀 소녀의 마음을 이런 문장으로 전하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그런 유의 경험을 했던 기억을 떠오르게 하면서 감정 상태를 동시에 생각해 보게 한다.
이제 태양이 기울어서 일렁이는 물결에 우리가 어떻게 비치는지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진다.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장에서 가장 의미 있게 읽힌 문장이다. 낯선 집에서의 일상에 소녀가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에 동화되어 버린다.
3장의 첫 문장은 소녀의 심리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서사가 진행되면서 이중의 묘사라는 걸 알았다. 실제로 소녀가 밤 실수를 한 것과 심리상태가 오버랩 된 것이다. 이런 문장인 까닭에 음미해야 맛을 인식하는 것과 같이, 읽게 된다.
3장에서 뉴스에 나왔는데 단식 투쟁이라는 문장으로 당대의 사회를 짐작게 하는 배경 설명이 읽힌다.
4장은 편안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의 만족감과 동시에 불안감을 함께 느끼는 소녀의 마음이 드러난다.
킨셀라 부부가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과 카드놀이를 하면서 보내는 저녁 풍경, 학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방문한 이들을 환대를 하고 함께 저녁을 보내는 것은 소녀가 자신의 집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5장은 이 소설의 구조 중 절정 단계라고 생각된다.
미사에 가기 위해 킨셀라 아주머니와 함께 옷을 사러 가게 된다. 옷을 사러 가기 위해서 나누는 대화와 문장들을 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전해진다.
거리로 나오자 강렬한 햇빛이 다시 느껴진다. 눈이 멀 것 같다.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 햇빛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구름이 껴서 제대로 좀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아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빤히 보면서 누구냐고 묻는다. 그중 한 사람은 유아차에 갓난아기를 태우고 있다. 킨셀라 아주머니가 몸을 숙이고 다정하게 속삭이지만 아기는 침을 흘리더니 울기 시작한다.
“낯을 가려서요.” 애 엄마가 말한다.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는 눈이 송곳 같은 여자도 만난다. 그녀는 내가 누구 아이냐고, 어느 집 아이냐고 묻는다. 대답을 듣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 그래도 말동무가 되잖아요.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는 거예요.”
소녀가 집으로 돌아온 뒤 마을 사람의 죽음으로 매장의 도움을 요청받은 킨셀라 부부는 소녀를 데리고 초상집엘 간다. 그곳에서 소녀를 잠시 맡아주겠다던 마을의 한 사람인 이웃 여자는 소녀와 단둘이 되었을 때, 무례한 질문들을 거침없이 한다. 이 질문에서 소녀의 방이 킨셀라 부부 아들의 방이었다는 거, 부부가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의 삶을 사는 걸 보여준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개마저도 선뜻 죽이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이웃 여자의 말을 통해서는 부부의 성정을 알 수 있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소녀와 킨셀라 아저씨의 바닷가 밤 산책에서 나눈 대화 역시 소녀를 배려하는 어른다움이 전해진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말처럼 들렸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6장에서는 이제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약간 후루룩거리며 먹는다는 문장에서는 소녀가 느끼는 친밀함의 무게감이 전해진다.
엄마로부터 온 편지에, 남동생의 출산과 개학으로 주말에 소녀를 데려다 달라는 내용을 듣게 된다.
소녀는 울음을 참으며 스웨터 도안을 선택하고,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소녀에게 정성을 다하는 킨셀라 부부의 마음이 보인다.
7장에서 소녀가 킨셀라 아주머니에게 차 끓일 물을 우물에서 긷다가 빠지게 된다.
8장은 소녀가 우물에서의 사건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정이 미루어지다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데려다주는 차 속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소녀의 아빠가 도박으로 소를 잃게 되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된 상황을 킨셀라 부부가 알게 된다.
소녀의 기침으로 소녀의 아빠가 킨셀라 부부에게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며 안하무인격으로 질책한다. 무안해진 킨셀라 부부와 미안한 소녀의 엄마는 배웅을 서두른다.
이 장에서는 소녀를 대하는 두 어른들의 태도나 말들을 통해서 누가 더 소녀에게 좋은 보호자로서 기억이 될까 생각해 보게 된다.
독서 모임에서는 소녀가 엄마에게 우물 사건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속상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각각의 입장에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우물 사건은 소녀의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할 일이라고 느낀다. 엄마 입장에서 서운할 수 있지만, 소녀에게 있어서 우물 사건으로 킨셀라 부부와의 관계와 태도의 변화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저씨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그 앞에 도착하자 대문이 활짝 열리고 아저씨의 품에 부딪친다. 아저씨가 팔로 나를 안아 든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나를 꼭 끌어안는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이 느껴지고 숨이 헐떡거리더니 심장과 호흡이 제각각 다르게 차분해진다. 어느 순간, 시간이 한참 지난 것만 같은데, 나무 사이로 느닷없는 돌풍이 불어 우리에게 크고 뚱뚱한 빗방울 떨어뜨린다. 눈을 감으니 아저씨가 느껴진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중적인 의미로 읽힌다. 소녀에게 진짜 아빠는 누구였을지는 이 문장에서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출간 이후 작가들에게 입소문이 나서, 작가들이 추천하는 책으로 알게 된 책이다.
등단하지 않았고, 첫 책임에도 불구하고 글과 문장의 밀도에 많은 칭송의 말들이 들린다. 읽으면서 시선과 감성의 격이 시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탄사가 나오는 감성이 녹아든 문장과 표현들, 사색을 옮겨놓은 말들의 장들이 불쑥 들어온다.
낭독하기 좋고, 에피소드와 연관된 인용 시들의 단문들이 감성 문장들로 빛을 발한다.
작가의 도서관 북토크 영상을 보면서 하워드의 다중지능이론 중 감성지능이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습작을 하지 않았다고, 느낀 경험에 대한 감정을 글로 썼다는 말에서는 타고난 문학성이라고 해야 하나 선망의 시선이 갔다.
담백한듯하지만 또 담대한 글들은 아직은 높은(늙은) 연배가 아님에도 그 감성과 사유의 깊이에서는 나이라는 게 큰 의미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이 책의 작가의 글에서 마주친다.
행복을 믿으세요?편의 마음의 격이라는 어휘가 참 시인다운 언어의 향을 주는구나 싶다.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는 긍정에 대한 한 보 더 깊은 헤아림이 느껴졌다. 나는 저런 긍정의 사유를 해 본 적이 있었던가. 담백한데 또 담대한 문장과 사람의 격이 전해지다고 할까.
과일이 둥근 것은 편에서는 외지인들끼리 혼자만 느낀 정서적 친밀감의 느낌을 엿본 느낌인데, 그 시선과 생각들이 따듯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일반적으로 타지에서 이성이고, 연배가 더 많다면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이나 경계심의 추가 더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작가의 시선은 익명성의 거리감에서 오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구석의 목소리라는 문장이 시인의 문장으로 들어온다.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편은 늙음과 젊음에 대한 대비된 에피소드인듯하지만, ‘노인에게는 멈추는 힘이, 나에게는 나아가는 힘이 필요하다.’ 라는 문장에서는 아직은 중반쯤을 살아가고 있는 이의 다짐과 응시가 전해진다. 다소 슬픈 정서가 느껴지지만, 노년과 중년 사이에 삶의 가치관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곰곰이 되새겨 보게 하는 문장이다. 나는 작가가 말한 그 중년의 삶을 살고 있는데 작가의 말처럼 일흔, 여든의 나이를 통과한 노인의 삶에 대한 경외감 앞에서는 잊고 있던 삶의 지속성과 종결성을 가늠해 보게 된다.
영원 속의 하루 편은 영화 <영원과 하루>를 보고 느낀 감상들인데, 영화의 밀도와 작가의 사유의 밀도가 묵직하다. ‘사람은 매일 오늘을 잃고, 영원은 얻지 못한다.’ ‘내가 혼자라고 해도, 나의 시간에 동반하는 당신의 시간이 있다. 우리는 같은 영원 속에 산다.’ 이 두 문장이 영화와 작가의 사유를 한데 엮어서 풀어내어 나와 당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환기가 들어온다.
잘 걷고 잘 넘어져요 편은 독서 모임에서 많은 공감을 받은 에피소드였다. 걷다가 다쳐서 병원엘 다니게 되고 치료를 하는 동안의 불안감과 의사와의 처방은 일반적인 의사들의 시선으로 대하는 일화였다. 그런데 다른 곳, 한의원에서는 한의사의 처방과 대화가 같은 상황에서의 다른 시선과 환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위로가 느껴지고, 제대로 걷기와 일상생활에 안착하기까지의 2여 년의 시간에 대한 소회를 길지 않은 문장 속에서도 어떤 마음이었을지 전해지는 까닭에, 각자의 경험에 기댄 공감과 의료인들과의 만남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구나 하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국경을 넘는 일 편은 마임배우 마르소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작가의 사유가 어떻게 번져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어떻게 해도 끝과 죽음을 먼저 고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늘 속에 몸을 둔 채로 볕을 보는 사람, 내 몫의 볕이 있음을 아는 사람, 볕을 벗어나서도 온기를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르소의 삶의 비극과 그 비극 속에서도 연약한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선함을 끝까지 실행하는 참된 인간의 정점을 본다. 그리고 이런 문장으로 발화된 작가의 문장은 계속 읊조리게 한다.
마지막 편인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부치지 않은 편지)는 성소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의미에 대한 사유가 실렸다.
하지만 후회를 간직하고도 나아가야 한다는 걸 지금은 근근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잃고 나서도, 실패하고 나서도, 다시 꿈을 꾸어야 살 수 있다는 걸요. 성소란 운명처럼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운명을 지키려는 인간의 능동적인 의지이기도 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요.
종교적 입장의 이야기이지만, 특정 종교를 넘어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또다시 꿈을, 다른 꿈을 꾸는 모습과 의지를 표현한 문장이 깊게 들어온다.
젊은 여자 소로우의 에세이라고 나름 정의해 본다. 시를 인용하고, 경험을 통해서 빗어낸 사유의 문장들이 소곤소곤 말하지만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는 에세이다.
웃고 또 웃었다. 우리는 지나며 이 사람 저 사람 험담도 실컷 하고 빵빵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자동차도 맘껏 욕했다. 연예인 흉도 많이 봤다. 무용한 말장난이 봄꽃처럼 첫눈처럼 하루를 덮었다. 무게도 없고 진지할 것도 없고 긴장할 것도 없는 말이라면 뭐든 다 좋았다. 순간순간 도망가 버릴까 두려울 만큼 끝도 없이 좋았다. (P.130)
무른 손가락으로 또박또박 짚어 마음에 심어준 글자. 이어보니 전부 다 같은 말이었다. 살라는 말이었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아프고 다시 헤어지고 또다시 사랑하라는 말 뿐이었다. 지울 길도 물리칠 길도 없었다. 배신할 수 없는 말이었다. (P.301)
벌써 10년쯤 지난 일이다. 내 작은 생명을 품고 있던 시절, 수십 년 전 나를 그렇게 품었을 나의 엄마는 큰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하러 가는 전날까지 임신한 딸의 냉장고를 가득히 채워준 내 엄마는, 마취약에 취해 엉엉 울며 “우리 엄마 보고 싶어”라고 말을 했다. 그날이었다. 엄마가 한 여자로도 보이기 시작한 게. 이모의 성화에 병원에서 쫓겨나 집으로 가며, 나는 태어나 가장 긴 시간을 울었던 것 같다. 그날 내게 전해진 엄마의 슬픔은 아무래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상실감이 아닐까 싶다. 수오서재의 새 책, 『엄마의 마른 등을 만질 때』를 가만히 손에 들었을 때, 꽤 오래 잊고 살던 그 날의 감정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책을 펼치기도 전에 좀 많이 울었다.
『엄마의 마른 등을 만질 때』는 엄마의 투병 생활에 기록된 이야기들이다. 시작부터 울었고, 읽으면서도 분명 울게 되리라 예상은 했지만, 나는 『엄마의 마른 등을 만질 때』를 읽는 내내 울었다. 이제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어른”이 되어가는 나이임을 실감했고, 순간순간 느끼는 내 부모의 왜소해짐이 서러웠고, 그럼에도 살짝 모자란 딸로 사는 게 당신들에게 힘을 준다는 게 슬펐다. 섬세한 언어와 절절한 감정이 만들어내는 문장은, 타인의 엄마에게서 나의 엄마를 보게 했다. 또 나를 만나게 되기도 했다. 투병으로 엄마의 몸에 난 상처를 절제된 감정으로 기록한 문장에서, 삶에 삶을 잇대었다는 말에서, 엄마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절망에서- 작가와 독자가 아닌, 그저 누군가의 자식들이 되어 공감하고 슬퍼했다.
마흔이 되어도 자라지 못한 어리석은 나는 『엄마의 마른 등을 만질 때』의 페이지가 몇 장 남지 않았을 무렵 마음이 초조했다. 차마 이 책의 “결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책의 끄트머리를 한참이나 미루어두었다가 읽었다. “사랑하는 이를 결국 떠나보낸 사람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게 있다. 우리는 무지하고 사랑할 시간은 많지 않다는 것. 더 귀한 것과 덜 의미 있는 걸 언제나 헷갈렸다고. 한정 없이 사랑하는 이의 등을 쓰다듬을 시간은, 눈을 들여다보고 같이 웃고 울 시간은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더라고(P.12)”라고 말하던 그의 문장에서 애써 부정했던 일을 선명하게 느끼며 나는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지금 더 많이 사랑하자고, 더 귀한 것을 헷갈리지 말자고, 사랑하는 이의 등을 더 많이 쓰다듬고 눈을 들여다보고, 더 많이 같이 웃자고.
감히 타인의 가늠할 수 없는 상실을 앞에 두고 나의 시간들을 가늠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가 자신의 “늦은 시간”들을 이렇게 꺼내놓은 것은 '당신들이라도 늦지 말라고'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엄마의 마른 등을 만질 때』는 감정이 묻어날 것 같은 섬세한 문장으로, 오늘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얼마나 소중한 나날들인지를 절절히 깨닫게 만든다. 오늘부터라도 엄마에게 '늦는 사람'이 되지 말자고 결심하게 만든다.
다이소 박정부 회장은 물가 상승에도 최대 5000원의 균일가를 고수하고, 가격 이상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365일 쉬지 않고 발품 팔아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끊임없이 제조업체를 탐색하고 대형 물류센터와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전국 1500개 매장중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틈틈이 매장 상황을 직접 점검했다.
읽다보면 그가 보통 꼰대가 아니겠다는 느낌이 오긴 하지만,
그의 일에 대한 프로페셔널한 태도와 작은 것에도 무심해지지 않으며 꾸준히 노력하는 성실함의 가치가 잘 전해진 책이었다.
유치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어른을 위한 전래동화같았다.
일상적이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넘긴 감정들이나 행복을 깨닫지 못했던 그 순간들을 다시 한번 깨워준 책같다.
무섭게만 전해진 도깨비들이 우리의 수호신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쉽게 읽히고 가벼운 책이지만 지친 현대인들에게는 잠깐이나마 따뜻한 쉼터가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번역가로서의 자기 인식이 확실하고 출판계의 부조리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는 태도나 말들이 잘 들어온다.
번역가를 ‘언어 하인’으로 대하는 세간이 태도에 대해서도 굴하지 않고 독자의 입장에서 시작되는 번역가의 본질에 대해서 위트 있는 말들과 자신의 경험에서 느낀 점과 위치성에 대한 글이 잘 읽혔다.
3부로 나누어진 구성으로 1부는 한국문학 번역가에 대해서 2부는 번역가에 대한 궁금증과 직업적 위상에 관해서 3부는 번역가로 강연을 했던 강연 글이 실렸다.
1부 나는 한국문학 번역가다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한영문학번역가가 전 세계적으로 통틀어 다섯 사람이 안 된다는 내용에서는 한국문학과 한국어가 세계 출판에서는 여전히 변방임을 그리고 노벨문학상 시상 때가 되면 매스컴에서 한국 문학이 수상하길 바라는 보도들이 나오는 게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 싶다. 문학성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너무 변방이고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는데 수여하는 측이 읽어 본 적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내용 곳곳에 백인주의와 유럽어, 남성 중심이 여전히 우세적인 문학, 출판계에서 한국 문학이 얼마나 읽힐지 생각해 보면 확률이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든다.
영미권 독자는 번역문학을 읽지 않는다라는 인식이 만연한 상황이라는 부분에서는 문화에도 권력과 우위의 인식이 있음이 새삼 확인한다.
‘불타는 쓰레기 수거통’편을 읽다 보면 번역에 대한 한국 출판계의 인식과 태도들을 엿볼 수 있는데, 한국문학번역원이라는 곳이 한국 학생에게는 어떤 지원도 없고, 외국인 학생에게만 지원이 있다는 부분에서 사대주의적 시스템이라고 느껴졌다. 외국인이 한국문학을 번역한다는 점에서만 우대해 주고 정작, 자국민에게는 알아서 하라는 분위기라는 게 당사자들에게 차별과 문화 착취라고 인식된다.
대학교수들이 생각하는 번역에 대한 일화를 들여다보면 너무나 그들만의 사고관에 갇힌 그들이 심사위원으로서 번역가를 선정하는 시스템에서는 지나친 직업 차별, 우리 사회에 교수에 대한 묻지 마 우대 의식이 보인다.
문학번역은 두 언어의 피상적 이해를 뛰어넘어 출발어의 문학 전통과 도착어의 문학 전통을 잘 파악한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무슨 배짱으로 중에서
‘죽음의 계곡’편은 어느 직업군이나 힘든 시절이 있을 터인데, 번역가로서의 어려운 시기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첫 문학번역 단행본을 펴내는 데 9년이나 걸렸다는 점, 문학번역원의 ‘번역 대회’에서 입상하거나 대학원을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한국 출판계의 현실도 알게 된다.
번역가들은 육체가 어디에 거주하든 항상 자신이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 번역가에게 언어란 항상 돌아갈 수 있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느 고장과도 같다. 죽음의 계곡에서 우리는 이 고장의 지리를 익히며 과연 내가 오랜 시간 이곳에서 살고 싶은지,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즉 달리 은유하면 죽음의 계곡은 일종의 ‘영혼의 어두운 밤’이기도 하다. 이 어두운 밤이 지나면 언어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진리를 발견한다.
문학번역가 지망생의 ‘죽음의 계곡’ 중에서
번역가 케이트 브릭스의 ‘이 작은 예술’이라는 에세이에서 에어로빅댄스를 번역에 대한 행위, 의미를 푼 이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원작자를 따라 하지만 투박한 나의 몸짓으로 전달하는 행위에서 동일성을 발견한다는 해석이 연결하지 못했던 해석을 듣고 동의하게 된다.
원작자가 아니지만 죽어도 안 뻗어지는 언어로 열심히 원작자를 따라가려 애쓰며 번역을 한다. 원작자를 따라 번역하는 느낌 그리고 그런 춤과 그런 번역이 주는 즐거움. 독자들에게 내 투박한 글만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원작자의 아름다운 안무가 나의 투박함을 통해 전해지기 바라는 마음…
몸으로 하는 일 중에서
안톤 허의 자기 고집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 자기 삶을 스스로 이끌고 가는 이의 모습으로 읽혔다. 부모의 관심과 애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지혜로운 부모의 태도와 자녀의 독립을 지켜봐 줄 수 있는 인식과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되새김질하게 해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부모 입장과 자녀의 두 입장을 오가는 마음. 그저 저자 자신의 입장에서 하는 말일 텐데, 듣는 나는 이중의 입장으로 들려 생각도 두 가지의 물결로 흐른다.
부모임 말은 절대 들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기 인생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실수를 해도 자신의 실수를 하는 것이 낫다. 인생을 망쳐도 내 손으로 망쳐야 한다.
문학소년, 전공을 살리다 중에서
2부 이 순간을 어떻게 옮겨야 할까?
작가님과는 자주 소통 하세요에서 작가와 번역가의 관계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이야기는 어떤 일이든 함께 일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와 예의, 자신의 일에 대한 실력에 대한 자긍심이 밑바탕이 될 때 행해질 수 있고, 일을 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역시 무례함을 기본으로 하는 이와 일을 함께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갑과 을의 위치에 끌려다니지 않는 위치도 중요하고, 상식이 상식일 수 있는 직업의 장도 필요하고.
내가 사랑한 한국문학편에서 한국이 유독 시집이 많이 출간되는 문화권이고, 소비된다는 게 신기하게 인식되었다. 영미권이 더 시집을 읽는 독서 문화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한국의 출판 시장이 시집에 있어서는 더 많이 출간되고 있다는 말에서 등장한 시인들의 이름과 시집들을 또 한 번 찾아보게 된다.
문학번역가의 멸종편에서 한국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저자의 따끔한 일침이 들어온다.
-한국 언론들은 종종 한국에서 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느냐며 번역가를 성토하곤 하는데 이런 풍토에서 제대로 된 문학번역가를 기대한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토록 문학을 멸시하는 나라에서 끊임없이 문학작품이 생산되는 것만도 신기한 일인데 노벨 문학상까지 바라다니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괴이한 욕심이다.
대학원에서 배운 것편에서 법대 출신인 리걸 마인드가 발동해서 시험 답안지에 대한 시험감독관의 지적에 대해서 응수하는 일화에서는 재치와 저자의 기질이 느껴져 웃음이 일었다. 그리고 그 일화를 통해서 역시 공적 문서나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를 장착한다.
자신이 본질적인 독서에 이르지 못하는 걸 한국의 대학원을 다니면서 지도 교수로부터 진단받듯 인식했고, 그 이후 더 발전하게 되는 계기였다는 술회가 한국 교육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논하는 이야기라서 현장성이 느껴졌다.
-나는 ‘글을 잘 쓰지만 글을 못 읽는, 정말로 드문 학생’이었다(그 반대는 오히려 흔하다). 나의 경우 탁월한 영어 실력 덕분에 문장이 너무나도 쉽게 나오는 나머지 글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혹시 책을 읽는 순간에는 모두 이해하지만 읽고 나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지 물었다.
죽음이 계곡을 지나서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차에 떠났던 영국의 노위치에서 인생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완벽한 번역가 생태계를 접할 수 있었던 이야기 역시 침체기에서 다시 상승기를 만드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가는 모습이 정체되지 않고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이, 환경의 변화가 주는 좋은 경험치를 본다.
부커상의 더블 롱리스팅이 된 과정의 이야기는 읽으면서 아주아주 어렵고 대단한 일이라는 걸 새삼 본다. 수상 조건이 소설이어야 하고,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으로, 영국에서 출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권이 다 이 조건에 부합되어서 선정되었다니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수상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선정작이 되어 그간의 번역에 대한 인정을 더없이 기쁘게 누리는 마음의 유연성이 전해진다.
3부 목소리에서 활자로
지식의 저주-옥스퍼드대학교편에서 성서의 이브를 ‘첫 번역자’라는 생각을 풀어가는 이야기들이 몹시 흥미로웠다. 기독교적인 개념의 의미가 있는 단어들을_루시퍼, 에덴, 바벨탑, 아담_기독교인이 아닌 입장에서 풀어내는 관점들이 유연하고 다층적인 해석이어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기독교 문화의 기원을 둔 단어들에 대한 신선하고, 인간 중심의 해석이라서 좋았다.
-지식의 저주란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지식이 그 사물이나 대상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예측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작가 대 번역가-미들베리칼리지 브레드 로프 번역가 대회 강연편에서 번역가의 이름이 책에 기재되지 않아서 투쟁을 한다는 영미권의 상황은 무척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번역을 낮게 생각한다는 게, 생각보다도 더 낮은 사회적 인식과 차별이라는 게 번역가 안톤 허를 더 소리 내어서 인식의 전환과 현장에서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서 말하게끔 하는 바탕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출판계에서도 아직 번역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창작자와 같은 분류의 일이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번역자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의 현실 분투기가 안타깝게 전해진다.
번역에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질문에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수상자 데이지 록웰이 말이 일침을 주는 답변이란 생각이다.
답변의 맥락은 번역가에 대한 번역에 대해서 낮은 인식과 그저 그대로 옳긴다는 인식에서 오는 차별이다.
-“왜 자꾸 번역에서 잃어버린 무언가에 집착하지? 번역에서 찾은 걸 생각해 보라고! 이 두꺼운 책 전체가 번역에서 찾은 거잖아!”
-우리는 번역서를 읽을 때 그 책의 문학성을 음미하기 위해 읽습니다. 그리고 문학성을 음미한다는 것은 그 책을 쓴 작가와 번역가의 노고에 집중한다는 얘기입니다.
번역 일에 대한 사랑, 자의식, 연대의식이 읽히는 문장들이었다. 안톤 허라는 사람은 번역에 진심인 사람이고, 굉장히 능동적이면서 주체적이 사람이라는 느낌이 짙게 느껴진 강연 글이었다.
주제 파악하기를 사양합니다: 프린스턴대학교 강연 중에서
-고로 번역은 단어에서가 아니라 단어 사이의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의미는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그 방향으로 손짓할 수밖에 없는 무엇입니다. 이런 절박한 손짓이 바로 번역입니다.
-저의 가장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정체성은 독자로서의 정체성이고,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거기서 비롯됩니다. 제가 이런 번역가인 것, 이런 작가인 이유는 바로 독자로서의 자부심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의 정체성이 독자로서의 정체성과 묶여 있기 때문에 번역 일을 합니다.
은유_시에 도착한 사람들
[아름다움이 없으면 삶은 쓸쓸해진다_최승자]
번역가와 소수성
8쪽_ 시 독해와 번역은 정답이 없다. 이러한 혼돈과 불확실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번역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그들은 하나의 진리만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공기와 언어에 짓눌리지 않았다.
순수와 노동
11쪽_시는 낮은 곳을 살피는 언어이고, 르포는 가리어진 존재를 드러내고 인간의 고통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내겐 뿌리가 같은 일이다.
7명의 시 번역가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한 은유 작가의 사유와 그들과 나눈 대화가 들어 있는 인터뷰 수록집으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삶에서 의미와 끌림이 있는 일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들여다 보였다. 아름답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서 더 확연히 기억될 인터뷰 에세이.
호영_즐거운 오해_서점 리스본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는, 규칙을 깨도 돼!_메리 올리버]
즐거운 오해라는 소제목이 등장하면서 무슨 오해일까 궁금했다. 번역가 호영은 웹툰과 시를 동시에 번역하는 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여성이 아닌 상태로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트랜지션을 위하 약물 치료 중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즐거운 오해라는 키워드가 처음에 등장한 것일까.
자신의 소수자성에 대해서 드러내면서 인터뷰가 흘러간다. 그리고 호영이 번역가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나온다. 문화적 두께라는 소제목의 장에서 어려워서 재미있고 해볼만한 게 재미있다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이. 그래서 번역하고 싶은 글을 만났을 때, 피가 돌고 약간 상기되는 기분을 느낀다니.
번역의 일을 클래식 음악을 연주자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주하듯이 번역 역시 그런 분야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자신의 해석을 가지고 해 내는 일에 대한 자긍심이 전해졌다. 그리고 읽다 보니 고개가 끄덕거리게 된다. 쇼팽의 같은 곡을 피아니스트가 다른 버전의 음반을 모아둔 내 cd장이 보인다. 같은 맥락이라는 걸 이 대목에서 환기가 된다. 이른바 고전을 읽을 때도 읽는 내가 더 잘 집중되는 번역판본을 찾아 읽는 것과 같은 일임을.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 그것이 그를 번역하게 한다(46쪽)는 말처럼 문학은 다른 이가 되어 보고 싶은 욕망의 발현인가 보다. 글 쓰는 이들의 많은 말들 중 공통적으로 말하는 저 말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에 대한 해석은 여러 버전과 의미가 있을 테지만,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되고 싶은 욕망은 쓰지 못한다면 읽게 되는 욕망으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아 찾기 서사는 늘 나를 빠져들게 하고 나를 자유롭게 한다. 흔히 ‘진정한 나 자신을 찾는다’라고 말할 때 정신이나 직업 같은 것을 상상하는데 어떤 사람에겐 그게 몸일 수도 있는 것이다.
34쪽
호영은 올라운더다. 가장 독자가 많은 장르와 최소한의 독자를 가진 장르의 작품을 번역할 수 있는 실력과 감각을 가진 드문 존재다. 웹툰 번역을 하고 시 번역을 하는, 시 번역도 하고 웹툰 번역도 하는......
36쪽
“시는 이해에서 자유로워서 좋은 장르 같아요. 다 이해 못해도 나중에 또 와서 읽으면 뭐가 보이겠지. 약간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편이에요. 그냥 어떤 느낌을 가져가면 되는 것 같아요.”
37쪽
입말과 글말의 언어유희를 탐닉하는 호영에게는 “언어의 깊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쌍둥이 장르다. 무게중심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그의 삶에서 시와 웹툰은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없다는 점에서 공속적인 관계 같았다. 밤과 낮처럼, 순간과 영원처럼, 나와 너처럼.
43쪽∼44쪽
“너무 갈망하는 건데 실제로 해봤더니 아니네 그러면 또 다른 것도 해보면 되고. 그런데 그게 되게 별일이 되니까,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에게는 그 정체성밖에 없는 것처럼 되는 거예요. 저도 제가 호르몬 치료를 하면 생각도 엄청 바뀌고 몸도 많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중략)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닌가 보다, 그런 깨달음도 있고. 또 제가 좋아하는 루인 선생님이 한 강연에서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여성으로 성별이 지정되어서 소녀가 되고 젊은 여자가 되고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이런 서사가 너무 이상하다’라고 했어요. 단계별로 다 다를 수 있는데 이 서사만 있는 게 이상하다.”
안톤 허_하지만 저는 해요_위트앤 시니컬에서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_이성복]
그나마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던 번역가이다.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번역했고 그 작품으로 부커상 번역 후보에 올랐던 이로써 알고 있었다.
인터뷰의 글을 보면 그는 유쾌함이 스며든 사람 같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 대한 명확한 위치성과 확신도 느껴진다.
번역가 모임을 만들고 필드를 더 확장하면서도 ‘문학 권력’이 되려 하지 않고 각각의 모임들을 만들어서 다양한 장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는 모습도 권력에 도취되지 않는 멋지고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은유 작가가 안톤 허의 성 정체성에 대한 태도를 전하면서 안톤처럼 내가 나임을 드러내면서 자기답게 살 수 있는 관계의 안전망이 구축되기도 한다는 문장이 다가온다. 우리 사회가 소수성에 대한 흐름의 바뀌고 있고 발화자들의 목소리도 많아지고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는 걸.
가장 그다은 말로 꼽은 “그 책을 보자마자 너무나도 번역을 하고 싶었어요.”라는 말에, 아주 신나하면서 번역에 대해서 말하는 모습을 본 은유 작가와 안톤 허의 인터뷰 장면이 그럼처럼 연상된다. 번역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들여다본 그림에서 경이로움이나 아름다움을 느낄 때의 그 기운처럼 전해진다.
64쪽
“문학 번역을 그만두었을 때, 번역만 안 했지 책은 계속 봤죠. 그럼요, 죽을 때까지 저는 문학 소년은 아니고 문학 중년, 문학 노인, 문학인입니다.”
77쪽
“시를 많이 봐야죠, 한자가 중요한 것 같고요, 책을 많이 읽고요, 모든 걸 완벽하게 읽고 써야 된다는 강박을 안 가지려고 해요.”
81쪽
“저는 제 무의식의 비서예요. 무의식이 번역을 하죠. 창작도 그렇더라고요. 제가 실행해 본 결과 똑같아요. 둘 다 무의식에서 오는 창조 행위죠.”
소제_초과선언_종이잡지클럽에서
[나는 가능 속에 살아요_에밀리 디킨슨]
번역가 소제의 인터뷰는 정답이 아니라 자신만의 것, 견해를 가지고 사유하고, 번역하고자 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소제라는 개인의 정체성과 젊은 세대들의 문이 트인 사고, 사유의 폭들이 보인다. 아이들이 자라면 저런 의식의 한 자락도 가지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 본다. 소수자성에 대한 생각들을 듣다 보면, 문학은 언제나 소수자, 마이너한 감정들이 더 크게 작동하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 소수자성을 표현하고 발화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인 글쓰기는 인문과 문학의 장르로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작가 버지니아 울프조차도 자신의 글에 대한 의심과 불안의 폭을 가졌다는 작가의 의식은 누구나 재능과 열망의 갈피 속에서 헤매는구나 하는, 그럼에도 그런 분투 속에서 끝내는 썼기 때문에 지금의 독자들이 작가의 글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더불어 든다.
98쪽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인종차별, 여성 차별, 성소수자 차별, 장애인 차별이 다 섞여 있으니까 스스로도 못 믿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소수자일 수 있나? 내가 지어내는 거 아닌가? 그럭저럭 살고 싶은 게 너무 큰 특권으로 느껴졌어요.”
109쪽
‘초과’는 원본을 손상하지 않는 한 다른 관점을 허용해요. 시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게 시의 목적이잖아요? 각 언어의 다층적 의미를 허용해요. 그렇지만 제 기준을 없앨 수는 없고, 같은 감정이라도 다르게 표현을 하죠. 이 번역은 ‘이런 단어 선택에서 과감하다’고 한다면 그 이유나 증거를 대줘요. 이 단어 선택을 다른 사람들의 단어 선택과 비교하고, 누가 제일 잘했다는 느낌을 없애려고 해요.
118쪽
소제가 생각하는 좋은 번역은 작가의 스타일을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번역을 통해 자신을 과도하게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창작을 따로 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번역한 작가들 목록이나 쌓이니까 고민이 생겼다.
승미_동화가 잘 되는 편_고요서사에서
[우리는 잃고, 잃는 속에서 얻습니다_엘렌 식수]
이 책에 소개된 인터뷰이 중 유일하게 기혼자이며 육아를 하는 소개가 기억에 남는다.
번역가 승미의 궤적을 들어보면, 당찬 듯하면서도 타인의 말에 잘 동화된다 자신의 말처럼 순응적으로 흘러온 듯하다. 3.11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변화된 것 같다는 글이 보인다.
참사 이후 사람들은 생각이 변한다.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든 없든 참사는 사회적 영향과 가치가 있다. 번역가 승미는 당시 현장에서 몸소 겪었던 체험자로서의 경험이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가치관의 변곡점인 것 같다.
139쪽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의 무력함’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낸다.
“‘이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상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못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예술이나 사상에 ‘권력’이 있다고. ‘힘이 있다’고 여긴 게 된다”고. 그런데 문학만이 아니리 과학도 지식도 애초에 모든 것이 무력하다. 책을 쓴다고 쓰나미로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문학은 무력하지만 그렇다고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파울첼린이 그랬던 것처럼) 가혹한 하루하루 속에서 무언가를 것은 가능하다며, 그는 이렇게 못 박는다. “무력하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습니다”
_은유 작가가 번역가 승미의 상황에 대해서 일본 작가의 문장을 가져와 해석하는 이 문장이 3인의 사유와 서사가 혼합되어 문학이 현실에서 갖는 의미, 문학이 주는 또는 힘이 되는 지표를 보여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서사들의 연결, 문장들은 읽어야 찾아낼 수 있는 보물 찾기 같은 것이다.
147쪽
그에게는 ‘나는 번역가’라는 자의식이 없다. 그냥 ‘자연의 나’로 산다. 좋은 작품을 읽고 남들과 공유하는 일은 하는 나. 번역을 하느라 깊게 읽는 시간이 주어지고 좋아하는 이를 하며 돈을 벌 수 있으니 흡족한 나. 번역의 행복을 말하는 승미에게 그거 말고 번역의 기쁨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단번에 말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_번역가로서의 자의식이 없다지만, 다른 언어로 내가 읽는 문장의 맛과 힘, 아름다움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의 밀도는 힘든 만큼의 쾌감이 큰 분야가 아닐까.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 다른 자아가 될 수 있는 경험에 대한 기쁨으로 전해진다. 타인과 나의 분리와 독립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발현될 수 있는 분야라는 게 매력이 아닐까!
152쪽
질병은 개인 탓이 아닌데도 수치심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고, 에이드리언 리치의 말대로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한 완고한 통념을 사뿐히 지르밟고 승미는 말했다.
나는 그가 ADHD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용기에 놀랐고, 질병과 함께 차질 없이 일하며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누구를 참조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와 노력에 감탄했다.
_선의의 관계에서 나누었던 사적 친밀함의 말이나 일들이, 관계가 틀어질 때 약점이나 비판의 지점으로 이용되어 상처가 되는 경험들로, 이른바 자신의 내밀한 약점이나 사실들에 대해서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사회다. 그런데 그런 통념에서 벗어나 누구를 참조해야 하는 아는 지혜와 노력이라는 태도를 읽어내는 은유 작가와 그런 지점에 이른 번역가 승미의 말들이 되새겨진다.
160쪽
승미의 역사는 타인의 역사다.
그렇게 그가 포착한 타인의 반짝이는 순간들은 별자리가 되어 그의 삶을 인도했다. 하나씩 하나씩 늦더라도 작은 열망을 현실로 피워냈다. 아름다운 퀼트 조각보처럼.
_번역가 승미편에서 은유 작가의 마지막 문장들이 곱씹어 읽힌다. 인터뷰의 문장들이, 타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들이 스며들어 온다.
알차나_반짝반짝 한국어_어쩌다 산책에서
[나는 사랑하므로 나 자신이 된다._김혜순]
한국어를 사랑해서 10년 넘게 혼자 공부하고 2019년부터 한국문학을 번역하는 알차나는 이과에서 문과로, 인도계 미국인이면서 한국어를, 과학에서 문학으로 여러 개의 정체성을 바꾼 어 온 이다.
알차나의 말과 은유 작가의 해석은 알차나가 세속적으로 안정과 성공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자신의 끌림과 깨달음으로 한국문학을 번역하는 모습을 그려준다. 보통의 개인이 이런 세속의 가치들을 놓고 갈 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생각을 해본다. 알차나가 6개 국어를 할 줄 알면서도 유독 한국어에 끌린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가 말하는 전생설 때문이었을까!
여러 나라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의 멋짐이라고 해야 하나, 원하는 뉘앙스의 단어를 선택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알차나의 말에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노력해서 될 수 있는 부분인가 싶기도 하고, 생각들이 다채롭게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어서 표현하고 싶은 언어로 말을 발화할 수 있는 능력과 감응력이 더없이 빛을 낸다.
169쪽
“다른 길을 걸어가야 된다는 걸 깨닫고, 다른 길을 걸어도 살 수 있다는 걸 믿었어요. 저는 처음으로 저를 믿었어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저를 믿었어요.”
173쪽
결과가 아닌 과정 중심의 공부. 시험이나 경쟁의 수단이 아니라 앎 자체를 느긋하게 즐기는 공부. 알차나가 한국어를 익힌 방식은 목적도 방법도 따로 없다는 게 핵심이었다. 큰 목표가 없으니 큰 좌절도 없고 좌절이 없으니까 포기도 없는 것이다.
178쪽
“세상이 작아지는 느낌이에요. 많은 언어를 알면 여러 문화나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알 수 있죠. 한 나라의 사람보다 세계의 의사소통하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데, 무엇보다 제가 저를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는데, 많은 언어를 알면 내가 원하는 뉘앙스의 단어를 선택할 수 있어요.
많은 언어를 할 줄 알면 뭔가 자유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저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
186쪽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을 이해해 주고 싶어요.‘
191쪽
원래 ‘나’가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이 글을 쓰고, 변방과 경계야말로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다.
새벽_엄마 이상 스피릿_진부책방에서
[결국 이야기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_가즈오 이시구로]
205∼206쪽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번역을 배워라. 번역을 하면 시의 구성을 배울 수가 있다.”
새벽은 속으로 쾌재를 불렸다. ‘난 한국어가 된다!’ 그리고 그에겐 엄마가 있었다. 문학을 사랑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209쪽
새벽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로 구축하기 위한 여정을 이어갔다. 서울에서 미주리주 버틀러로,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으로, 매사추세츠 보스턴으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
_목동 키즈에서 미국으로 엄마와 이민 후 성장한 새벽이 시에 매료되고, 매료될 바탕이 있었던 엄마에 관한 이야기들이 흘러간다.
221쪽
언어를 장난감으로 생각하기. 언어를 가지고 소리로도 놀아보고 의미로도 놀아보고. 글쓰기는 어느 시점에서 문장구조를 훈련받잖아요. 이렇게 해야 좋은 문장이다. 나의 생각과 주장을 펼치는 법을 논술로 배우는데, 그 전에 말과 소리를 가지고 낄낄거리는 놀이를 유지하면 번역에 도움이 돼요.
224쪽
“혹시 나는 미국 사람인가 한국 사람인가 하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언제나 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고민했는데 이젠 그냥 내가 두 아이덴티티 사이에서 계속 불안과 사랑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러한들 어떠하고 저러한들 어떠하라 식으로요. 양극적인 것들이 가끔 가다 느껴질 때 그것을 같이 감싸 안는 편이에요. 오히려 요즘은 양극을 가졌다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_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의 정체성은 어떨까 궁금했다. 번역가 정새벽은 그런 이중언어를 구사하면서 시를 쓰고, 번역하고,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두 언어의 시를 읽고 번역하고, 두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무척이나 경이로운 일로 느껴진다. 스스로가 양극을 가졌다는 건 축복이라고 말하는 그의 글을 보면 시는 그에게 삶의 기둥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227쪽
“작가로 살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계속 읽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감수성을 유지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싶고, 그렇게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_새벽의 인터뷰 글 마지막 문장이다.
번역가의 말이었을까 아니면 번역가의 어머니의 말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품고 문학을 사랑한다는 전제를 가지게끔 해 준 어머니의 영향으로 번역가는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시를 쓰고, 번역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 동력은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박술_아름다움 교섭하기__부비프에서
[사실 철학은 시로만 쓰여야 한다_비트겐슈타인]
246쪽
“외국어로 소통하면 배려하는 공간이 넓어요. 특히 동아시아 언어는 조사 같은 게 민감해서 속마음이 다 드러나잖아요. 그게 없으니까 좋죠. 친구 사귈 때 제3언어로 하는 게 제일 편안해요. 중립국에서 만나는 것 같아요. 평화지대. 그리고 그 언어가 옛날 말이면 더 좋아요. 예를 들어서 동아시아 친구들을 만나면 한자나 고전 문장에 대해서도 말할 수도 있잖아요. 되게 편안해요. 우리가 거기서 하나가 되는 것 같아요. 내 말이 아닌 공통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 관계에서 편안하죠.”
256쪽
“내가 어떤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아무것도 모르겠고 너무 신비롭고 비밀스러워서 매일매일 외워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잖아요. 아름다운 그 느낌이 그대로 있으면 좋겠어요.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알 수 없으면 알 수 없는 대로, 표현 불가능한 거는 표현 불가능하게 번역해야 하는데 보통 풀어버리거든요. 내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걸 최소화하기. 그게 번역에서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_마지막 번역가로 실린 박술은 깊이와 생각이 폭이 다채롭고 이곳저곳 튀어 오르는 공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생적으로 문화배경이 좋다고, 이른바 유서 깊은 학문을 하는 집안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독일에서 공부하는 걸 받아들이는 성장사로 이어진다. 독일에서의 공부도, 언어에 대한 다층적인 세계관은 그가 번역하는 책들의 목록들을 보아도 범상치 않다는 느낌. 그냥 시도 어려운데, 철학을 번역한다니. 핑퐁핑퐁 튀어 오르면서도 자기의 세계와 깊이를 확실하게 만들어 가는 번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번역하고 있는 혹은 번역했다는 책들의 목록만 보아도 아찔하다.